<프란체스카 '난중일기' 6.25비망록>
"미국때문에 이 꼴 됐소" 맥아더에 출동 호통
"대전 사수하라, 여기서 죽겠다" 유서 남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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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체스카 여사의 6.25 비망록 '난중일기-6.25와 이승만' 책표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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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6.25한국전쟁이 발발한지 60년을 맞는다. 이 책의 원본은 이승만 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Francesca Donner Rhee) 여사가 6.25 기간 중에 쓴 영문일기이다. 영문일기는 비망록(Confidential Notes) 또는 프란체스카 일기(Mrs Rhee Diary)로 통용되고 있다. 전쟁이 발발한 날인 1950년 6월 25일부터 중공군 개입이후 유엔군이 37도선으로 철수하여 재반격을 시작하는 1951년 2월 15일 상황까지를 다루고 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국가위난의 전시(戰時)에 대통령과 경무대를 중심으로 일어난 국내외의 중요한 사건과 전쟁상황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기록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이 비망록은 ‘대통령의 경무대 일지’나 다름없으며, 이승만 대통령의 ‘전시통치사료(戰時統治史料)’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6.25전쟁이라는 특수한 전시 상황에서 프란체스카 여사는 이승만 대통령을 도와 그 능력을 더욱 발휘하게 되었다. 그녀는 마치 이승만 대통령의 입의 혀처럼 일처리를 잘해 나갔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의 기습남침으로 개시되어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성립될 때까지 만 3년 1개월 이틀 간 계속됐다. 그 동안 쌍방은 38도선을 각각 3회씩이나 넘나들면서 남으로는 낙동강, 북으로는 압록강까지 오르내리며 전 국토의 80%에 달하는 지역에서 전투를 전개했다.
우리의 입장에서 기록한 ‘우리의 전쟁’
프란체스카 여사의 6.25전쟁비망록은 6.25전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매우 소중한 자료다. 특히 6.25전쟁에서 가장 극적이고(인천상륙작전ㆍ중공군개입), 가장 어렵고(서울철수ㆍ낙동강방어), 가장 혼란한 시기(부산 피난ㆍ1.4후퇴)에 이승만 대통령을 중심으로 국제관계, 한미관계, 군사문제, 전선 상황 등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자료의 가치를 더욱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6.25전쟁이 한국에서 일어난 우리의 전쟁이라는 점에서 우리의 입장을 가장 잘 알 수 있고, 또 전쟁의 핵심에서 전쟁을 수행했던 이승만 대통령에 관한 기록이라는 점에서 이 자료는 그 가치를 더욱 신뢰받을 수 있을 것이다.
30년 전 발표되어 책으로는 첫 출간
전시 이승만 대통령의 영문 일기체 형식의 6.25전쟁 비망록은 프란체스카 여사에 의해 휴전이후 50년 뒤인 1983년 지상에 뒤늦게 공개되었다. 또한 이 시기는 이승만 대통령이 서거한지 약 18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프란체스카 여사는 1965년 이승만 대통령 사후(死後) 오스트리아 친정집에서 있다가 뒤늦게 한국으로 돌아왔다. 이후 프란체스카 여사는 1983년 6월 24일부터 중앙일보에 비망록을 바탕으로 ‘6.25와 이승만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했다. 113회에 걸쳐 연재된 글은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대처하는 이승만 대통령의 확고한 의지가 생생하게 드러나는 등 그때까지 몰랐던 6.25에 관한 새로운 사실이 소개됨으로써 독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이번에 6.25한국전쟁 60주년을 맞아 당시의 글을 다시 정리하고 내용을 보완하여 책으로 펴낸다.
책의 주요 부분을 발췌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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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텐데..."6월 25일
북한 공산군은 6월 25일 새벽 5시에 쳐들어왔다.(*국방부 전사에는 새벽 4시로 기록, 당시 언론에 보도된 내용에 의해 5시로 기록한 것으로 판단)
나는 이날 오전 9시에 어금니 치료를 받으러 치과로 갔고, 대통령은 아침식사를 끝내자 9시 30분쯤 경회루로 낚시하러 나갔다. 10시쯤 신성모(申性模) 국방부장관(국무총리 서리겸임)이 허겁지겁 경무대로 들어와 “각하께 보고드릴 긴급사항이 있습니다.”라고 했다.
두 분이 집무실에 마주앉은 게 오전 10시 30분. 이 자리에서 신 장관은 개성이 오전 9시에, 그러니까 내가 치과로 떠나던 그 시간에 이미 함락되었고 탱크를 앞세운 공산당은 춘천 근교에 도착했다고 보고했다.
대통령은 “탱크를 막을 길이 없을 텐데…” 라며 입속말을 했고, 순간 얼굴엔 어떤 위험을 느끼는 듯한 불안의 빛이 스치고 있었다. 시내에는 ‘우리 아이들’―대통령과 나는 군인들을 꼭 우리 아이들(Our boys)이라고 불렀다―을 태운 트럭이 북쪽을 향해 달리고 있었고, 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이제 38선이 깨진 모양이니 이북 땅도 되찾겠지.”라며 이들에게 격려의 박수를 보냈다.
경무대 안 분위기도 사태의 심각성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자식들 장난치다 그만두겠지”라는 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신 국방까지도 대통령에게 “크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라는 말을 되풀이했다. 그러나 경찰정보는 ‘상황이 심각하고 위급’하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고재봉 비서관을 불러 정보보고를 확인했다. 고 비서관의 보고 역시 “예상 밖으로 적군의 힘이 강해 위험하다.”라는 것이었다. 대통령은 잠을 잊은 채 자정을 넘겼다. 침통한 모습에 나는 그때까지 한마디도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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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서 날아 온 맥아더 장군을 반갑게 맞는 이승만 대통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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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아더 깨워!...당장 이 나라를 구하시오"
26일 새벽 3시
대통령이 도쿄(東京)의 맥아더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전속부관이 전화를 받았다. 그는 장군을 깨울 수 없으니 나중에 걸겠다고 대답했다. 대통령은 벌컥 화를 내며 “한국에 있는 미국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갈 터이니 장군을 잘 재우시오.”라고 고함쳤다. 나는 너무나 놀라 수화기를 가로막았다.
대통령은 “마미, 우리 국민이 맨손으로 죽어 가는데 사령관을 안 깨우다니 말이나 되는 소리요!”라며 몸을 떨었다. 상대편도 미국 국민이 한 사람씩 죽을 것이라는 말에 정신이 들었는지 “각하, 잠깐 기다려 주십시오.” 하더니 맥아더 사령관을 깨우겠다고 했다.
맥아더 사령관이 전화를 바꾸자 대통령은 “오늘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은 누구의 책임이오? 당신 나라에서 좀 더 관심과 성의를 가졌다면 이런 사태까지는 이르지 않았을 것이오. 우리가 여러 차례 경고하지 않습디까. 어서 한국을 구하시오.”라며 무섭게 항의했다.
대통령은 조종사 10명을 보내 단기훈련을 받고나서 무스탕을 몰고 오게 하겠다는 대답을 듣고 전화를 끊었다. 맥아더 사령관과의 통화가 끝나자 워싱턴의 장면(張勉) 대사를 불렀다.
“장 대사! 트루먼 대통령을 즉시 만나 이렇게 전하시오. 적은 우리 문전에 와 있다고. 미 의회가 승인하고 트루먼 대통령이 결재한 2천만 달러 무기지원은 어떻게 된 것이오?” 대통령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계속 떨고 있었다. 군부지도자들은 2, 3일 안에 원조가 오면 서울을 지킬 수 있다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젠장, 비행기가 없으니 탱크를 막을 수가 있나?”대통령은 안절부절못하고 뒷짐을 진 채 방안을 맴돌았다.
첫댓글 거제도 포로 석방문제롸 미국과 맞붙은 이박사를 다루지 못한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이박사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상황에서 거침없이 포로를 석방하신 이박사 .. 그 소식을 듣고 처칠이 세면장에서 면도기에 얼굴에 상처를 내고 놀랐다는 세계의 대사건 .. 인간의 사랑의 쾌거 .. 그런 대통령을 위대한 아버지를 우리는 그를 이해 하려고도 하지 않고 거침없이 버린후 기억조차 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제 드디어 이승만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보고 계셨던 분의 증언을 통해서 우리 초대 대통령이 어떤 분임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 공개됨을 반가워 합니다.
사후라도 그분의 노고와 그분이 하신 업적을 우리가 감사하며 그분을 그리워 하는 마음이 다시 생기게 되어 다행입니다 우리 대한민국의 건국의 아버지를 쓰레기 버리듯하고 마치 역적 취급을 하였던 생각조차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역사교과서에서 배울 수 없었던 6.25 난중일기를 프란체스카여사의 일기로 알수 있게 되고, 이렇게 소개해 주신 유 흥준님께도 감사드립니다. 알려지지 않은 이 승만대통령의 행적들도 속속들이 확인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이구 기분 좋네 내가 프스팅 하지 않았다면 다른동문이 하였을 것인데 오늘 아침 메일로 온것을 보자 마자 나혼자 읽으면 안되어서 요.. 길순님처럼 좋은글 기다리는 분들을 위해서 입니다 ㅎㅎㅎ
한강폭파사건은 누가 명령한 것인가요?
공병감 최창식 대령이 사형을 당하였고 그들은 채병덕 육군참모총장의 명령이라 하였으나 속죄양으로 사형을 당하였습니다 그리고 1964년 박정희 대통령정부 당시 그들의 누명이 14년만에 벗게 되였다는 것입니다 이승만 박사가 한강폭파된것을 보고 받고 화를 무척 내었다고 합니다 한강 인도교 폭파는 많은 희생을 내었고 그당시 정부인사들도 몰라서 다리 폭파와 더부러 수장 되엇습니다 전쟁의 비화는 우리가 그저 가슴에 안고 가야할 몫인것 같습니다 그와 관계된이들이 모두 죽었으니 진실은 감추어 버린셈이지요 한국 전쟁사를 읽으면 다 다름니다 그로 인해 사형받은 두사람이고 14년만에 혐의는 벗었으나 그등은 이미 저세상 사람들이고
공병감 최창식은 우리가 불리하여 서울을 내주어야 되는 경우가 된다면 한강 폭파책임을 맡은것은 사실이나 그날 폭파할때 그들은 거기 없었다는것은 밝혀졋습니다 그당시 그곳에 있던 군인들이 폭파에 대한 지휘계통의 지휘관 명령없이 시행된것으로 모두들 이해 하나 누가 어떻게는 모르는것으로 이해 됩니다 채병덕 소장은 그해 7월 하동 전투에서 전사한걸로 기록 되엇습니다 채병덕은 그후 북한의 간첩이라는 말도 있었습니다
야전군 지휘 경험이 없는 병기 장교 출신은 참모총장으로서는 문제가 있었다. 취임 초기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북한의 남침 정보를 접하여 1950년 5월 1일 전군 비상경계령을 내렸으나,1950년 6월 23일 해제 하였다. 치명적으로 1950년 6월 24일 전방의 지휘관들의 인사이동을 단행하여 개전 초기 지휘혼란을 야기하였다. 채병덕은 그동안 38선에서의 무력 침공 사건이 발생하거나 대남유격대가 준동할 때마다 비상 경계의 형식으로 대처하였고, 또한 그것으로 실효를 거두어 특별한 경계조치를 하지 않았다 이것은 위키백과의 글이지만 상당히 회자되었던 이야기이고 장성급 군인들도 시인하였던 이야기 입니다 위키백과가 절대적은 아니지만
잘 알았습니다.
그 급박한 시기에 이승만 대통령이 맥아더 장군 전속 부관에게 미국 시민이 한 사람씩 죽어 갈 것이라는 말을 하지 않았더라면 오늘 날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생각하니 아찔합니다. 영어를 알고 맥아더 사령관 부관과 맥아더 사령관에게 협박조로 말할 수 있는 기지를 가졌기에 나라를 구한 대통령을 가졌다는 것이 우리나라에게 축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맞아요 미국에서 교육을 받은것이 미국과의 관계에서 큰몫을 한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미국이 국민 하나하나에 대한 애정을 기억하엿다는것 .이승만 박사님 생애는 불모지 한국에 민주주의를 심기위해 태어난 사람이락 생각됩니다
유엔군이 참전한 것이 냉전의 구도 속에 일어난 일이라 할 지 모르지만 근본적으로는 그 당시 우리나라에 미국시민이 몇 백명 정도 밖에 없었을 터인데 자국민을 구해야 한다는 것이 미국으로서는 첫째 과제 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도 수교도 되지 않은 북한에게 돈을 주고 유해를 수거해가는 미국은 정말 대단한 나라이고 그런 정책 때문에 다양한 민족국가인 미국이 애국심으로 똘돌 뭉치고 세계 최강국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국군포로들을 아직도 내 몰라라 하고 있는 것은 정말 잘못 된 일입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정일에게 돈을 줄 때 교환 조건을 걸었어야 합니다.
김대중대통령도 민주당시절에 보았을때는 장면박사의 신임을 많이 받는 젊은인적이 있었는데... 3.15선거당시 민주당사에서 살다싶이 하면서 조재천 선전부장 다음 부 선전부장으로 열심히 일하던 모습에서 애국자라고 생각한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마지막에는 우리에게 실망을 주었어요. 평화통일이라는 좌파들의 생각이 정말 어디서 근허한것인가 요즈음 죽은 자는 말이 없지만 정말 묻고 싶은 말입니다 평화통일이 김정일과 가능한것이라고 생각하였는지??
아주 귀중한 자료입니다 널리 알리기 위해 펌해 갑니다
사료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감사합니다 많이들 펌하여 가시기를 고대 합니다 모르는 분들이 알아야 합니다 이번 역사 편찬위원회가 안병직 교수를 중심으로 새로운 작업을 한다 하니 감사합니다 효석님이 보내주신 대안 교과서와 이영훈님의 재인식 그리고 강만길중심의 해방전후사를 놓고 이따금 말씨름 많이 합니다 그런데 너무 역사를 모르는 사람이 그리고 잘못 알고 있는 사람이 많아서 어떤때는 이야기를 전개 할수 없더라구요 . 그 책보내주심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참 육당 최남선 손자 최학주 박사가 책을 발간 하였어요 나의 조부 욱당 최남선을 제가 보내 드릴까요? 제가 몇권을 샀기에... 주소를 저에게 보내 주시면 메일로요
주소 보냈습니다 책까지 보내주신다니 참으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