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하되 고립되지 말라
☆ 마중물 생각
대학 후배 세 사람이 1박을 하고 갔다. 은사님 팔순을 기념하는 책에 관한 얘기를 나누기 위해서였다. 후배들이 떠나간 마당을 노란 창포꽃과 붉은 작약꽃, 흰 수국꽃이 쓸쓸하게 지키고 있다. 나는 이러한 풍경이 편하다. 고독이 숙명적인가 보다. 세 꽃에 세 후배 캐릭터의 그림자가 어려 있다. 그래서인지 내가 고립돼 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내 나이 이순(耳順)을 넘기고 나니 귀밑머리에 허연 된서리가 내리고 있다. 선가(禪家)에서는 흰 머리카락을 염라대왕의 편지라고 한다. 염라대왕이 나를 부를 때가 됐으니 욕심 줄이고 살라는 경고의 편지라는 것이다. 그래도 생각 없이 함부로 산 사람에게는 훗날 저승에서 염라대왕이 신발값을 청구한다고 하니 이승은 물론 저승에서도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 스승님의 말씀과 침묵
#
우리 인간에게는 두 개의 눈과 두 개의 귀가 있는데
혀는 하나뿐이다.
보고 들은 것의 절반만 말하라는 뜻이 아닐까.
침묵 속에서 사람은 거듭거듭 형성되어간다.
침묵의 바다에서 잠김으로써 자신의 실제를 응시할 수 있고
시든 생명의 뜰을 소생시킬 수 있다.
침묵의 바다에서 존재와 작용은 하나를 이룬다.
사람의 위대함은 그의 체력이나 지식에 있지 않고
오로지 맑은 혼에 있다.
#
현대의 우리에겐 자기 언어가 없다.
날마다 우리들 귓가에 대고 호소하고 설득하는 정치인이나
연예인들이 말을 거르지 않고 그대로 입에 담고 있다.
이 일 저 일에 팔리면서 쫓기느라고 생각할 여유가 없다.
자기 사유를 거치지 않으니 자기 언어를 지닐 수 없게 된 것이다.
#
오늘 우리들은 어디서나 과밀 속에서 과식하고 있다.
생활의 여백이 없다.
실(實)로서 가득 채우려고만 하지
허(虛)의 여유를 두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들의 정신은 너무나 많은 일에 분산되어
제정신을 차리고 살기 힘들다.
내가 내 인생을 자주적으로 산다기보다는
무엇인가에 의해 삶을 당하고 있다는 표현이 적절할 것이다.
#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 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 간다.
홀로 있을수록 함께 있으려면
먼저 자기 관리가 철저해야 한다.
자기관리를 소홀히 하면 그 누구를 물을 것 없이
그 인생은 추해지게 된다.
#
우리들이 어두운 생각에 갇혀서 살면
우리들의 삶은 어두워진다.
나쁜 음식, 나쁜 약, 나쁜 공기, 나쁜 소리, 나쁜 생활습관은
나쁜 피를 만든다.
나쁜 피는 또한 나쁜 세포와 나쁜 몸과 나쁜 생각과
나쁜 행동을 낳게 마련이다.
어떤 현상이든지 우리가 불러들이기 때문이다.
#
일을 할 바에야 유쾌하게 하자.
그래야 능률도 오르고 피로도 덜하고
살아 있는 기쁨도 누리게 될 것이다.
기쁨이 없는 곳에는 삶 또한 있을 수 없다.
사람과 일이 따로따로가 아니라,
사람이 그 일 자체가 되어 순순하게 몰입하여
지속하고 있는 동안에는 자신도 사물도 의식되지 않는다.
이게 바로 삼매의 경지다.
이때 진정한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이 꽃향기처럼 은은히 배어 나온다.
가장 아름답고 거룩한 인간의 모습이 여기에 있다.
#
사람은 살 때 빛이 나야 하듯이
죽을 때도 그 빛을 잃어서는 안 된다.
생과 사가 따로 나누어질 수 없는
겉과 속 관계라고 하니 더욱 그렇다.
#
마음을 비우려면 무엇엔가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될 수 있는 대로 쓸데없는 대화를 피해야 한다.
홀로 있으면서 발가벗은 자기 세계를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문명의 소리는 우리 마음을 자꾸 어지럽힌다.
거기에는 생명의 흐름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연의 소리는 그 자체가 완벽한 생명의 조화를 이루고 있어
듣는 마음을 정결하게 밝혀주고 편하게 가라앉혀준다.
자연의 소리는 굳이 밖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나 물소리만이 아니다.
더 원천적인 자연의 소리는 내 마음에서 울려오는 소리이다.
☆ 갈무리 생각
사랑방 현관용 글씨는 스승이신 법정스님의 친필이다. 뫼 산 자의 봉우리가 두 개인 까닭이 있다. 스님께서 쓰시다가 왼쪽이 좁아져 순간적으로 재치를 발휘하신 것이다. 재치도 아무렇게나 발휘하신 것이 아니다. 아래 절 이름이 쌍봉사이다. 두 개의 봉우리를 연상시키는 절이다. 실제로는 신라시대에 쌍봉사를 창건한 철감선사 법호가 쌍봉으로 알려져 있다. 철감선사는 당나라 유학승이었는데, 남전선사의 제자가 되어 조주선사와 사형사제 사이였다고 한다.
그런데 사랑방 현판에는 붉은 낙관이 없다. 스님께서는 현판용 글씨에 낙관을 찍는 것은 자기 글씨를 자랑하는 거와 같다고 말씀하셨다. 사람들은 낙관을 찍어야 가치가 더 생길 거라고 말하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스님의 글씨를 볼 때마다 흐트러졌던 내 질서를 바로잡기 때문이다. 작가로서 맹독 같은 허명을 경계하는 것이다. 나에게는 낙관이 없기 때문에 더욱 보배가 된 스님의 글씨다.
나를 시들게 하는 것들을 생각해 본다. 게으름, 잠, 그른 생각과 말, 잘못된 행동 등등. 새로운 순간과 시간을 가로막는 방해꾼들이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게으름도둑, 잠도둑이라며 경계했던 것이다. 내 안의 도둑을 경계하려면 눈을 뜨고 있어야 한다. < ‘법정스님 인생응원가, 스승의 글과 말씀으로 명상한 이야기(정찬주, 다연, 2020)’에서 옮겨 적음. (2020.12.17. 화룡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