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17일(금)
* 시작 기도
주님...
땅에서는 네피림 용사 유명한 자들이 되고 싶어 안달입니다.
이것은 노아의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내 안에도 그런 욕구가 넘쳐납니다.
내가 바로 네피림이요 용사이며 유명한 자를 추구하는 자입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모습이며 하나님이 되고자 하는 자기 의임을 알면서도 어찌 그리 안 내려지는지요?
그래서 나에게는 우리 주님이 필요합니다.
오늘도 주의 십자가를 붙들기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느리더라도 한 걸음 한 걸음 주만 따라가기 원합니다.
이 하루도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고 거룩한 불구자가 되어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아내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삼상 23:1-15
제목 : 마음이 찔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민감한 영이 되길.
1 사울이 블레셋 사람을 쫓다가 돌아오매 어떤 사람이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더이다 하니
2 사울이 온 이스라엘에서 택한 사람 3천 명을 거느리고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갈새
3 길 가 양의 우리에 이른즉 굴이 있는지라. 사울이 뒤를 보러 들어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있더니
4 다윗의 사람들이 이르되 보소서,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원수를 네 손에 넘기리니 네 생각에 좋은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시더니 이것이 그 날이니이다 하니 다윗이 일어나서 사울의 겉옷 자락을 가만히 베니라.
5 그리 한 후에 사울의 옷자락 벰으로 말미암아 다윗의 마음이 찔려
6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 하고
7 다윗이 이 말로 자기 사람들을 금하여 사울을 해하지 못하게 하니라. 사울이 일어나 굴에서 나가 자기 길을 가니라.
8 그 후에 다윗도 일어나 굴에서 나가 사울의 뒤에서 외쳐 이르되 내 주 왕이여 하매 사울이 돌아보는지라. 다윗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9 다윗이 사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고 하는 사람들의 말을 왕은 어찌하여 들으시나이까?
10 오늘 여호와께서 굴에서 왕을 내 손에 넘기신 것을 왕이 아셨을 것이니이다. 어떤 사람이 나를 권하여 왕을 죽이라 하였으나 내가 왕을 아껴 말하기를 나는 내 손을 들어 내 주를 해하지 아니하리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이라 하였나이다.
11 내 아버지여 보소서, 내 손에 있는 왕의 옷자락을 보소서. 내가 왕을 죽이지 아니하고 겉옷 자락만 베었은즉 내 손에 악이나 죄과가 없는 줄을 오늘 아실지니이다. 왕은 내 생명을 찾아 해하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범죄한 일이 없나이다.
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13 옛 속담에 말하기를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 하였으니 내 손이 왕을 해하지 아니하리이다.
14 이스라엘 왕이 누구를 따라 나왔으며 누구의 뒤를 쫓나이까? 죽은 개나 벼룩을 쫓음이니이다.
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 나의 묵상
다윗을 잡으려고 쫓아가던 사울은 유다 땅에 블레셋이 침략했다는 소식을 듣고 다윗 쫓기를 그치고 침략한 블레셋을 물리치러 간다.
한편 블레셋을 쫓아내고 돌아온 사울에게 다윗이 엔게디 광야에 있다고 귀띔을 해준다.
이에 사울은 이스라엘 군사 3천 명을 데리고 다윗을 찾으러 들염소 바위로 간다.
마침 근처에 굴 하나가 있어서 용변을 보기 위하여 그리로 들어갔다.
사울이 굴 안으로 들어갈 때 이미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그 굴 깊은 곳에 숨어 있었다.
굴 안으로 들어온 사울을 보고 다윗의 사람들 중에 말하기를 주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원수를 없앨 좋은 기회를 주셨습니다.
오늘 지금이 바로 그 때입니다.
다윗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가서 사울의 옷자락만 살짝 베어냈다.
그런데 다윗은 사울의 옷자락을 벤 것으로 인하여 마음이 불편하였다.
하여 자기의 부하들에게 주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왕을 치는 것은 주께서 금하시는 것이다.
그는 주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라고 하면서 부하들을 만류하였다.
한편 사울은 용변을 다 보고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에 다윗도 밖으로 나가서 사울을 향하여 ‘왕이시여’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사울이 뒤돌아보자 다윗은 엎드려 절을 하고 말을 이어나갔다.
누가 다윗이 왕을 해하려 한다는 말을 했으며 왕은 어찌하여 그런 거짓말을 들으시냐고 하면서 자기가 벤 그의 옷자락을 들어보였다.
그러면서 왕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음에도 왕은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이기 때문에 왕을 해하지 않았음을 이야기하였다.
그와 함께 자기의 무죄함을 증명해 보였다.
왕은 나를 찾아 죽이려 하시나 나는 왕에게 결코 범죄한 일이 없다고 결백을 주장한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실 것이다.
나는 내 손으로 왕을 해하지 않을 것이나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실 것이다.
속담에도 악은 악인에게서 난다고 한 것처럼 내 손은 왕을 해하지 않을 것이다.
이스라엘의 왕이 지금 누구를 쫓고 있는가?
나는 죽은 개나 벼룩 같은 볼품없는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여 주 하나님께서 재판장이 되셔서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시고 나의 억울한 사정을 살펴서 풀어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져 주실 것을 원한다고 하였다.
사울의 추격을 피하여 도망자의 신세가 된 다윗은 엔게디 광야의 동굴에 그의 부하들과 함께 숨어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사울은 그 광야로 왔다가 용변이 마려워서 근처 동굴에 들어갔는데 그 굴이 하필 다윗 일행이 숨어 있는 곳이다.
다윗에게는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였고, 사울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이었다.
다윗의 부하들은 이 기회를 놓칠세라 다윗에게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고 하면서 사울을 죽일 것을 권하였다.
그러나 다윗은 가만히 가서 사울의 옷자락만 베었다.
그리고 그 옷자락 벤 것으로 인하여 마음이 찔렸다.
많은 사람들은 심지어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조차 이런 기회는 분명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생각하여 자기들의 그 기회를 잡고자 행한다.
하지만 다윗은 그렇지 않았다.
그는 좀 더 큰 그림을 보았다.
비록 사울이 자기를 죽이려 하는 원수 같은 존재이지만, 그는 분명 하나님으로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왕임이 분명하다.
무엇보다 자기는 사울을 이어서 왕이 될 자였다.
사무엘을 통하여 왕이 될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에게 주어진 호기(好期)를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지 않고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해하였다.
분명 악한 자는 자기의 손을 빌지 않더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때에 처리하실 것을 믿은 것이다.
하여 그는 동굴 안에서 그를 죽이는 대신에 그가 입고 있던 옷자락을 조금 베어냈다.
그리고 그것으로 사울에게 자기는 왕을 죽일 마음이 조금도 없음과 좋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죽이지 않고 그저 옷자락만 조금 베어냈다고 자신의 무죄함을 증명해 보였다.
중요한 것은 사울의 옷자락을 조금 베어낸 것으로 인하여 그의 마음이 찔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도덕 윤리적 차원에서의 마음찔림이 아니다.
그를 판단하실 분은 하나님이시다.
다윗 역시 계속해서 그 부분에 대해서 언급한다.
(12) 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
(15) 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신 자를 자기의 무죄를 주장하기 위하여 그의 옷자락을 조금 베었다는 것만으로도 그의 마음은 찔렸다.
이는 하나님께서 주신 양심의 찔림이라 아니할 수 없다.
회개의 주도권은 나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 아버지께 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돌이키고자 하실 때 세상을 향하고 있던 그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온전히 돌아서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회개라 한다.
눅 15장에 보면 3개의 비유가 나온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이 비유를 말씀하실 때 비유들이라 하지 않으시고 그냥 비유라고 하셨다.
여기서 말씀하신 ‘비유’ 곧 헬라어 ‘파라볼레’는 단수명사이다.
다시 말하면 단지 비유를 말씀하신다 하시고서 3개의 비유를 연달아 하신 것은 곧 이 비유 3개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99마리 양 중에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는 이야기, 10드라크마 중에 잃어버린 한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이야기, 그리고 두 아들 중에 잃어버린 한 아들을 찾는 이야기이다.
이 세 개의 비유를 말씀하시면서 공히 회개를 언급하신다.
7절에 보면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서 어깨에 메고 집으로 왔는데 이를 회개로 연결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
(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99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드라크마 비유에서도 똑같다.
(10)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여기서는 잃어버린 양이나 잃어버린 드라크마가 주인에게 나 좀 찾아주세요, 라고 할 수 없다.
그저 그들은 잃어버린 자리에 있을 뿐이나 주인이 찾고 또 찾는 것이다.
그런데 이를 가리켜 회개라고 한다.
돌아온 탕자의 비유는 더 분명하다.
물론 여기에는 회개라는 단어가 직접 언급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 3개의 비유를 가리켜 비유라는 단수를 사용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을 보면 돌아온 탕자 비유 역시 회개를 말씀하심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가장 주목할 어구는 17절의 ‘스스로 돌이켜’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잃은 양의 비유나 잃은 드라크마 비유에서 회개의 주체가 양이나 드라크마가 아니었듯 여기서도 둘째 아들이 회개의 주체가 될 수 없다.
만약 그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을 청구했을 때 아버지가 아들이 집을 나가는 것을 원치 않았다면 돈을 주지 않거나 얼마든지 나기지 못하도록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 둘째를 말리지 않았다.
그가 달라는 대로 그대로 주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둘째를 향하여 암묵적으로 내보낸 것이 되는 것이다.
즉 아들 보고 네가 나가서 이 세상이 어떠한 지 한 번 직접 경험해보고 오라는 말이다.
그런데 그가 유산을 받아서 나가보니까 처음에는 그 돈으로 사는 것이 꿀맛처럼 달콤했지만 불과 얼마 못되어 그는 돼지우리 같은 세상을 맛보게 된다.
그리고 그가 그 돼지우리 같은 세상에서 얻으려고 하는 것이 곧 쥐엄열매에 지나지 않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면서 그에게 간절히 생각나는 곳이 바로 아버지 집이었다.
이 세상은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그것을 보고 깨달으라고 아버지는 그 세상을 경험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이다.
거기에는 그것을 알고 돌아오면 된다는 전제조건이 깔려 있다.
그런 아버지의 마음이 회개를 이끄시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가르치기 원하셨다.
무엇보다 예수님 당신은 그런 죄인들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마음을 만지시고 그의 양심을 찌르셨다.
사울의 옷자락을 벤 일이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그래서 다윗의 양심이 찔린 것이다.
우리 주님은 그런 형제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는데 나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도 없이 남을 판단하는 죄를 범하곤 한다.
그것이 나의 한계다.
하지만 나는 나의 한계를 알기에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다윗을 본 받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를 붙들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연약한 자로 설 뿐이다.
이런 일로 인하여 고난이 닥칠 때, 그것을 피하기 위하여 부르짖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신 회개의 기회임을 알고 그리스도를 붙드는 것이다.
그것이 내게 소망이며 생명임을 알기 때문이다.
오늘 이 하루도 주님의 은혜 안에 잠잠히 머무른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내가 무언가 할 수 있고 대단한 것을 이룰 수 있는 자로 착각하며 살았던 자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남들보다 더 높아지는 것이 승리요 이기는 것임을 알기에 더 높이 오르고 더 많이 가지며 더 크게 성장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삶이 승리의 삶인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는 그런 이 세상과는 정반대입니다.
오히려 낮아짐이 높은 것이요 죽는 것이 생명을 얻는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럼에도 내 안에 있는 육신적 기질과 옛 사람의 자아가 꿈틀대며 나를 미혹합니다.
선악과를 먹으라고 말입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한 그 선악과는 나를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 앉으라는 유혹의 손길임을 압니다.
그럼에도 나는 그것을 먹지 않고 참아낼 자신이 없습니다.
그러 하기에 내게는 우리 예수님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필요하며 그 십자가에 달려 무덤 안으로 들어가는 고난이 필요합니다.
무덤의 고난은 나를 생명으로 이끄시는 우리 주님의 이끄심임을 압니다.
오늘 이 하루도 우리 주님의 손을 꼭 잡고 생명으로 나아가길 소망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