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의 100만 장충단 연설 "독재는 가짜반공"
장신기입력 2023. 7. 1. 15:08
타임톡 58
음성으로 듣기
번역 설정
글씨크기 조절하기
인쇄하기
[다시 주목하는 김대중의 연설] 1971년 김대중 연설이 역사적인 이유
[장신기 기자]
|
▲ 1971년 7대 대선에서 연설 중인 김대중 대통령(당시 신민당 후보). |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제공 |
1971년 7대 대선은 4월 27일에 실시됐는데 선거 9일 전인 4월 18일 서울 장충단공원에선 신민당 김대중 후보의 유세가 있었다. 이날 유세와 연설은 7대 대선 과정의 백미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매우 유명하며 역사적인 의미 또한 크다.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우선 규모다. 이날 장충단공원 유세는 100만에 가까운 인파가 몰렸을 정도로 엄청난 열기 속에서 진행됐다. 이 정도 규모의 유세는 그 전에는 없었고 그 이후에도 1987년 13대 대선 때 여의도 유세 정도가 견줄 수 있을 정도로 대단했다. 장충단공원에서 나타난 환호와 열기는 7대 대선 당시 전국적으로 나타난 현상의 연장선상에 있었으며 인구가 가장 많은 서울과 수도권에서 극적으로 표출된 것이었다.
그다음은 내용이다. 김대중은 1970년 9월 대선 후보로 선출된 이후 대중경제론, 3단계통일론, 4대국안전보장론 등 정치·경제·외교안보·통일 문제 등에 관해서 담대하고 혁신적인 비전과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정책을 내놓으면서 선거판을 주도했다.
김대중은 대중연설과 정책선거를 통해서 야당에 대한 국민적인 기대를 모아 박빙 판세로까지 만드는 데 성공했다. 당시 상황을 극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장충단공원 유세 연설이기 때문에 역사적인 의미가 크다. 연설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자.
"독재는 가짜반공, 민주주의가 진짜 반공"이라고 강조하다
1971년은 한국전쟁의 포성이 멎은 지 20년도 채 안 되는 시점이었다. 또한 1960년대 후반에는 북한이 한국과 미국을 상대로 심각한 군사적 도발과 공격을 감행하기도 해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군사적 긴장상태가 가장 고조된 시기였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독재정권은 반공안보를 이유로 자유 민주주의를 억압하고 있었다.
당시 국민들이 갖는 전쟁에 대한 공포심은 실질적인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반공안보론은 국민적 동의를 얻을 수 있는 기반이 있었다. 김대중은 이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특히 김대중은 1950년 한국전쟁 당시 공산군에 의해 총살당하기 직전에 살아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이 사안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은 '독재는 가짜 반공이고 민주주의가 진짜 반공'이라는 논리로 대응했다. 반공 실현을 위해선 민주주의가 독재에 비해 비교우위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김대중은 독재정치는 반공(反共)이 아니라 양공(養共)을 한다고 주장했는데, 그의 뛰어난 정치적 표현력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기도 하다.
▲ 김대중의 일침 "말로는 반공하지만, 독재정치는 공산당 키워준다"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과연 박 정권이 반공을 하느냐? 오늘날 이 독재 정치, 이것은 무엇 때문에 우리가 공산당을 반대하는가? 그 의미를 상쇄하게 만들고 있어요. 오늘날 이 썩은 정치, 이것은 공산당을 키워 주는 온상이에요. 오늘날, 이 몇 사람을 잘살게 하는 특권 경제, 공산주의는 이런 특권 경제 속에서 자라났어요. 따라서 박 정권은 말로는 반공을 하지만, 그 하는 정치는 오히려 공산당을 키워 주고 기르는 양공을 하고 있어요."
그러면서 김대중은 정권교체를 통해서 민주정부가 들어서면 진짜 반공안보가 가능하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1년 이내에 서울 550만 시민들이 안심하고 발 뻗고 잘 수 있는 국방 태세를 완수할 것입니다. 그것은 첫째로, 완전히 국민의 지지를 받은 정부가 서니까. 공산당이 발붙일 데가 없어. 모든 정보기관들이 공산당 잡는 데 집중하니까 간첩이 얼씬을 못 해, 국군을 정치적으로 완전 중립시키니까 오직 대공 전투에만 집중하게 돼요.
국제적으로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살아나서, 신임과 존경을 받으니까 우리의 우방 국가들이 더욱 도와주고, 여기에 미군의 철수가 중지돼. 한국에서 이번 정권교체가 돼야만 민주주의가 승리하니. 우리의 이 안보 태세는 비로소 반석 위에 올라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같은 맥락에서 김대중은 향토예비군과 교련 폐지 공약을 내세웠다. 김대중은 정치적 차원의 자유화, 민주화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의 자유화, 민주화도 필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이렇듯 김대중은 민주주의를 통한 반공안보의 길을 강조했다.
지방자치제 실시와 여성인권신장을 강조하다
▲ 1971년 김대중의 구상 '지방자치' '여성지위향상' [장충단연설 음성자료]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또한 김대중은 사회분야 공약에서 지방자치제 실시와 여성인권 신장을 위한 각종 개혁 조치를 강조했다. 이는 1963년 6대 국회 등원 이후 줄기차게 강조했던 그의 민주적 개혁 구상이 반영된 공약이었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지방자치를 실시해서 민주주의의 기초를 확립하고, 대통령 직속하에 여성지위향상위원회를 두어 가지고 우리나라 1500만 여성들의 교육과 생활과 보건, 사회적 대우, 이런 문제에 대한 특별한 배려, 우리나라 여성들의 능력을 개발해서 지금까지 파묻혔던 여성들의 실력을 우리 국가 건설에 활용함으로써 새로운 민족중흥의 위대한 힘을 발휘코자, 여성 문제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할 것을 여러분에게 약속하는 것입니다."
김대중은 1990년 13일간의 단식투쟁을 통해서 지방자치제 선거 실시를 관철시킨 것으로 유명하다. 그런데 김대중은 1963년 6대 국회의원 선거에 당선된 직후부터 지자체 선거 실시를 줄기차게 강조했었다. 그래서 김대중은 한국 지방자치제의 선구자로 불리운다.
또한 김대중은 여성인권신장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김대중은 1960년대부터 여성인권신장과 양성평등에 관한 확고한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었다. 당시는 여성운동이 매우 미약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여성인권 문제는 정치적으로 크게 논쟁이 되지도 않았고 정치권의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그럼에도 김대중은 이 사안을 정치적 의제로 제시했던 것이다. 이 사안에 대한 김대중의 확고한 신념을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대중경제론 : 경제민주화를 주장하다
김대중은 1960년대부터 자신만의 경제개발 구상을 발전시켰고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대중경제론'이라고 명명했다.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은 민주적 시장경제에 의한 경제발전 전략이라고 규정할 수 있으며 김대중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국민의 정부 경제철학의 기본 배경이 됐다.
"내가 정권을 잡으면 대중경제체제를 실시해 생산 면의 자유경제, 분배에 있어서의 사회정의를 실천할 것입니다. 물가를 대폭 내려서 오늘날 독과점업자들이 결탁해 가지고 물가를 올리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서 여러분의 물가를 대폭 내리고, 노동자와 사무원이 참여하는 노사공동위원회를 만들고, 또한 농촌 경제의 발전 기초 위에 상업과 공업을 발전시켜..."
▲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이 경제성장 도외시?... 연설을 들어보자 ⓒ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
보수 진영 일각에선 김대중의 대중경제론이 경제성장과 공업화를 도외시하고 농업과 분배문제만을 중시한다는 식으로 공세를 펼치곤 한다. 그런데 이는 잘못된 주장이다. 대중경제론은 경제개발을 민주적인 방식으로 민주적인 결과를 낼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지 이를 무시한 것이 아니었다.
김대중은 급격한 이촌향도 현상이 초래하는 각종 사회문제를 감안해서 농촌과 도시, 농업과 상공업의 조화로운 발전, 균형발전을 목표로 했다. 그리고 노동자의 인권과 사회적 권리 확보를 위해서 사회적 협의기구인 노사공동위원회 구성을 공약으로 제시했다. 이는 훗날 김대중이 대통령선거에 당선된 이후 노사정위원회로 구체화돼 경제위기 극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리고 김대중은 조세개혁을 통해서 빈부 격차 해소를 강조했고 최저임금제 실시도 공약했다.
대중경제론의 목표는 민주적 경제발전, 균등 발전을 통한 경제민주화의 실현이었다. 김대중은 개발독재 하에서 이뤄지는 불균등 발전은 사회경제적 불안을 초래하여 정치, 안보 위기를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김대중의 장충단공원 연설, 한국 현대사에서 가장 의미있는 연설 중의 하나
그밖에도 김대중은 1971년 대선에서 3단계 통일론과 4대국안전보장론 등을 내세우면서 정책선거를 주도했다. 그리고 장충단공원 유세 연설에서는 이와 같은 김대중의 비전과 정책이 잘 나타나 있다.
뿐만 아니라 이날 연설에서 김대중은 대중연설가로서의 그의 능력을 최대한 발휘했다. 이 연설이 역사적인 연설로 지금까지도 높이 평가받는 이유이다.
장충단공원 유세 음성 자료는 전체 55분 분량으로 상당히 길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은 이 전체를 공개함과 동시에 일반인들의 이해를 높이기 위해서 연설 내용을 10개 주제로 분류해서 총 43분 분량으로 편집한 것을 함께 공개했다.
이 자료는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유튜브 채널에서 확인 가능하다. 김대중의 뛰어난 연설을 직접 확인할 수 있다.
첫댓글 이것이 3선개헌 하고 박정희랑 붙은 게임에서 한 연설인데....이 게임에서 박정희가 겨우 이기고 나서 다음엔 직선하면 안 될것 같아서 유신으로 치닫게 되었고....김대중이 김영삼과의 신민당 경선에서 이기는 과정에서 보면 페어플라이라고 보긴 석연찮은 부분이 두 부분이 있었고 그래서 40대 기수론으로 처음 치고 나온 김영삼이 후보가 안됐지만 그래도 김영삼은 김대중의 승리를 위해서 끝까지 같이 했단말씨 . 그때 만약에 김영삼이 후보가 되고 김대중이 같이 했다면 무혈정권교체가 되고 그 다음엔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었을 거야. 역사의 큰 분기점에서 순서가 바뀌는 바람에 그 이후 역사는 비비 꼬이고 뒤틀리고 피를 보고 유혈이 낭자하고 그 난리를 치다가 20 여년 후에 김영삼이 되고 그다음에 김대중이 하고~~~그래도 둘이는 앙금이 남아서 으르렁거리니 나라는 4분 5열 되고 지금까지 감정 싸움의 연속 선상에 있으니 우리 60대 세대가 사라지고 나면 그 못난 감정의 앙금도 사라지겠지...후 세대들아~~정신 바싹 차리고 잘해야 한 데이~~너희만 믿는닥 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