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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눈의 두께
박규숙
옥상에 쌓인 눈의 두께. 그만큼의 높이로 쌓인 야외 광장에서 눈을 치우고 있는 회사 동료들이 내려다보였다. 쇼핑몰 광장의 한가운데 원형의 데크 바닥이 절반쯤 드러났다. 눈 치우기 작업은 삼십 분 전부터 시작되었다. 대여섯 명의 직원이 부지런히 몸을 움직였다. 힘에 겨울 많은 양의 눈을 밀고 가거나 걸음이 아까울 만큼 적은 양을 넉가래로 끌며 오갔다. 주오는 옥상을 둘러보고 내려와 칠 층 난간에 기댄 채 그렇게 서 있었다.
밤사이 눈이 내렸다. 삼월이었고 칼바람이 불었다. 해뜨기 전, 무릎이 조금 못 미치는 높이로 내린 눈을 밟으며 두 시간쯤 산책을 다녀왔다. 칼바람이 불었으나 삼월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는지 눈은 물기가 많았다. 두껍게 내린 눈은 주오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힘없이 무너져 내리며 철벅, 소리를 냈다.
지난겨울에는 유난히 많은 눈이 내렸다. 겨우내 쌓였던 광장 모퉁이의 눈 더미는 나흘 전에야 모두 사라졌다. 먼지를 뒤집어쓴 채 단단하게 얼어있던 그것은 나흘 전 흠뻑 내린 봄비로 말끔히 녹았다. 그날 사라졌던 것보다 오늘 더 높이 쌓였다. 다시 모아 놓은 저 눈 더미는 어떻게 되려는지.
햇살이 날카로웠다. 눈 위에 떨어져 내린 햇살이 얼굴을 되쏘았다. 동트기 전에 나갔던 산책에서 서둘러 돌아온 것도 그 때문이었다. 오전에는 아버지를 만나러 나설 생각이었다.
이틀 전, 요양병원 직원에게서 온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 상태가 좋지 않다며 한 번 다녀가기를 바라는 눈치였다. 마지막으로 병원에 들렀던 게 오 개월 전이다. 그날은 비가 왔고 바닥에 떨어진 낙엽은 밟을 때마다 아삭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둑한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으나 햇살이 유리창을 뚫고 들어와 바닥을 환하게 비출 때까지 주오는 한곳에 서 있었다. 아버지에게 다녀오려면 서둘러야 했다. 며칠 전 류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겠다고 한 날이 오늘이었던가. 생각만 맴돌았다.
아버지는 요양병원에 입원하고 반년 후에야 주오에게 연락을 해왔다.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아니었으니 굳이 서둘러 연락할 필요는 없었으리라. 여름 장마가 시작될 즈음 아버지를 방문했다. 보육원에 갈 때처럼 지하철을 탔고 버스로 갈아탔고 얼마쯤 걸었다.
접수처에서 병실 번호를 알려주어 찾아갔다. 아버지 옆 침대는 비어 있는 채였고 구겨진 시트가 바닥으로 떨어질 것처럼 침대에 위태롭게 걸쳐있었다.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아버지와 만나는 자리가 더 어색했을 것이다. 한동안 서로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아버지는 야위어 보였지만 어느 때보다 깔끔했다.
“안경을 새로 하셨네요.”
“넘어질 때 안경테가 부러졌어. 잘 됐지. 그 안경 오래도 썼다.”
기억이 맞는다면 아버지는 한 번도 안경테를 바꾼 적이 없었다. 젊은 시절 찍은 사진 속에서도 굵고 검은 안경테였다. 아버지 얼굴의 눈이나 코처럼 안경도 익숙했다. 어쩌면 몇 번쯤 같은 모양으로 바꿨는지는 모르겠다.
아버지 병실은 사 층이었다. 창턱까지 올라온 참나무 우듬지에 지은 까치집이 보였다. 새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가까이에서 본 까치집은 놀랄 만큼 컸다. 나무 아래에서 올려다봤을 때는 그리 커 보이지 않았다.
“저 녀석들 때문에 밤에 불 켜는 것도 마음대로 못 해. 두툼한 커튼을 달아달라고 했는데 늙은이 그냥 하는 소리로 들리는 건지 대답도 없어.”
두꺼운 커튼이 밖으로 나가는 불빛을 막아줄 것 같기는 했다.
“저 녀석들 들락거리는 거 신경 쓰다 보면 하루해가 금방 가. 외출했나, 조용한 걸 보니.”
까치집만 바라보며 앉아 있던 주오에게 아버지가 건넨 말이었다. 오래도록 까치집만 바라보았다. 할 일은 그것밖에 없는 것처럼. 까치가 들어오고 나갔다. 날갯짓과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더 앉아 있었다.
주오는 기지개를 크게 켜며 일어섰다. 편하게 기지개를 켤 때와 다른, 어딘가 더 뒤틀리는 듯한 느낌이 드는 어색한 기지개였다. 가끔 들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면회 시간이 다 된 것 같다는 말을 남기고 병실을 나왔다. 그런 식의 방문을 몇 번 더 했었다. 병원 측으로부터 방문해 주기 바란다는 전화를 받은 후에야 매번 찾았던 것 같다. 아버지의 생각이었을까 아니면 병원에서 아버지를 배려해 전화를 걸어주었던 걸까. 주오는 그것조차 묻고 싶지 않았다.
무대처럼 꾸며 놓은 나무 데크의 눈은 말끔하게 치워졌고 동료들도 보이지 않았다. 축축하게 젖은 바닥의 둥근 모양이 눈 덮인 광장에서 도드라졌다. 옥상에 쌓인 눈은 조금이나마 녹았을까. 멀리 보이는 산자락도 눈에 덮여있었다.
에스컬레이터 계단을 통해 육 층으로 내려갔다. 에스컬레이터는 정지되었고 한 달에 한 번 시 운전 중에만 움직였다. 움직이지 않는 에스컬레이터는 방향성이 없어 좋았다. 두 방향 어디로든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있었다.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음식 냄새가 뱃속을 자극했다. 어제 식사는 한식당이었니 오늘은 국숫집에서 먹을까. 뭘 먹어야 하나, 이런 망설임이 싫다. 그래서 하루에 한 끼만 먹기 시작했던 건 아니지만 하루 한 끼만 먹어도 그런 고민은 사라지지 않았다. 음식 냄새에서 멀어지려고 서둘러 걸었다. 리빙관을 벗어나 컬쳐관에 들어섰다.
컬쳐관 육 층은 아직 입주자가 없었다. 칠, 팔 층엔 멀티플렉스 영화관이 들어섰다. 영화관을 찾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육 층에서도 가깝게 들렸다. 비어 있는 공간은 작은 소리도 더 크게 끌어왔다.
영화관이 가장 먼저 파이브월드에 입주했다. 이제껏 인파가 가장 많이 몰리는 곳이기도 했다. 인파, 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만 동료들도 그렇게 말했다. 아마도 가수 담비가 출연하는 광고 때문일 것이다. 광고에서 담비는 파이브월드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고 있습니다, 하고 말을 했다. 그녀는 가슴에 선물꾸러미를 가득 안았고 얼굴은 밝고 들떠있었다. 컴퓨터 그래픽이겠지만 담비 뒤쪽 화면에 수많은 인파가 몰려들고 있었다. 그와 같은 수많은 인파는 지금껏 본 적 없었으나 광고는 계속되었다.
파이브월드에 입사하기 전이었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걸린 모니터에서 광고를 처음 봤다. 그곳에 입사 원서를 접수해 놓고 합격을 기다리던 때였다. 입주 상가보다 관리 직원이 더 많다는 건 알고 있었다. 여자 친구 집에서 나오던 중이었다. 그곳에서 몇 번 더 광고를 봤고, 입사 후에 그녀와는 헤어졌다. 지금도 그곳 모니터에서 광고가 나올까. 그녀는 광고를 볼 때 나를 떠올리기는 할까.
파이브월드는 네 개의 빌딩이 연결된 구조였다. 컬쳐관, 리빙관, 코스모스관, 패션관이 넓은 복도로 연결되어 사람들이 오갈 수 있게 되어있었다. 지하층은 직사각 모양으로 네 동 건물 전체가 뚫려 있으나 지상 일 층부터는 네 개 동으로 구분해서 지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네 사람이 서로 어깨를 감싸고 둘러있는 것처럼 보일 것 같다. 네 동의 건물이 둘러선 한가운데는 광장이고 그 중심에 무대를 만들었다. 광장에는 자작나무와 벚나무가 자라고 봄꽃이 만발하기도 했다. 원형의 데크 무대는 네 건물에서 내려다볼 수 있다. 각 층은 도넛 모양으로 연결되어 있고 한 바퀴 돌아보는데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는 않는다.
네 개 건물이 합해졌으니 포월드, 라고 해야겠지만 건물에 들어차게 될 상가와 사람을 더해 파이브월드, 라고 이름 붙였다. 인파가 몰려들어야 파이브월드가 될 텐데 2년이 돼가도록 건물은 거의 비어 있다. 처음 개장할 때는 부동산중개소만 이십여 개가 들어왔다. 하나, 둘 빠져나가고 지금은 컬쳐관 이 층에 세 개가 남았다. 살아남은 부동산중개소에도 손님은 거의 없다.
패션관 오 층 2호 엘리베이터 앞 등받이 의자에 경비 주임 정이 앉아 있었다. 상가에 매장이 입주해 있다면 앉아 쉴 겨를도 없었을 것이다. 정은 수시로 각 층을 한 바퀴 돌거나 에스컬레이터 계단을 오르내리곤 했다. 층마다 한 개씩 살려 놓은 CCTV가 있으니 마냥 앉아서 놀 수만은 없고 적당히 몸을 움직였다.
정은 멀지 않은 곳 바닥에 쪼그리고 앉은 키티숍 주인과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목소리는 패션관을 채우고 복도를 돌아 컬쳐관과 코스모스관까지 퍼져나갈 만큼 크게 울렸다. 키티숍 주인은 칠십을 넘긴 나이인데 목소리가 우렁찼다. 시장에서 오래 장사하다 보니 목소리만 커졌다고 말했다.
“한 바퀴 돌고 오는 거야?”
오십여 미터쯤 떨어져 있던 주오에게 키티숍 주인이 큰소리로 물었다. 오 층엔 세 사람 말고 아무도 없을 것이다. 맘껏 소리쳐도 거리낄 게 없다는 걸 키티숍 주인이 더 잘 알았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위, 아래층으로 퍼져나가니까 목소리를 조금 낮추세요, 라고 말하면 뭐 어때, 아무도 없는데, 하고 더 크게 대답했다.
“아침 안 먹었지? 같이 밥 먹자. 같이 먹으려고 나도 안 먹고 나왔어. 유민아, 너도 빨리 와.”
무얼 먹을까, 고민이 사라졌다. 딸 이름 유민으로 불리는 정도 키티숍 할머니가 펼쳐 놓은 돗자리에 앉았다.
주오는 접이식 사각 상을 폈고 키티숍 할머니는 보온병에 담아 온 냉이된장국을 그릇에 나누어 담았다. 국에서는 냉이 향이 옅게 피어올랐다. 정은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꺼내와 뚜껑을 열어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아침 아니고 점심도 아닌 시각에 세 사람이 둘러앉았다.
정은 아침을 먹고 나왔는지 밥의 반을 덜어 주오의 그릇에 옮겨 담았다.
“혼자 애 키우려면 많이 먹어야 한다.”
할머니가 눈까지 흘기며 한마디 톡 쏘더니 자기 몫의 밥을 덜어 정에게 건넸다.
“적당히 먹어야 움직이기도 편하다구요. 경비원의 생명이 몸인데 할머니 때문에 점점 뚱뚱해지고 둔해진 거 안 보여요? 옛날에는 발차기도 휙휙 소리 나게 날렵하게 했는데 지금은 발도 안 올라간다구요.”
“그려도 안 쫓겨나. 니가 싸울 일도 없는데 둔해진 걸 어떻게 알어. 그리고 애 하나 낳았는디 둔해진 건 당연하지. 밥심으로 사는 거여.”
정이 주오를 바라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키티숍은 파이브월드 입주가 시작되자마자 곧 들어왔다. 시장통을 벗어나 번듯한 곳에 가게를 열고 싶어 왔는데 이건 뭐 죽도 밥도 아니다, 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상가가 활성화될 기미가 없자 입주했던 상인들은 몇 개월을 못 버티고 거의 옮겼지만 할머니는 떠날 생각을 안 했다. 매일 출근하여 팔리지도 않을 옷들을 옷걸이에 길게 늘어놓았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알록달록한 어린이옷을 바꿔 걸었다. 지난 계절에 걸었던 옷을 다시 꺼내서 걸기도 했다. 정은 여섯 살 딸아이 옷을 가끔 키티숍에서 사기도 했고 얻기도 했다.
식사를 마치자 빨리 가라며 할머니가 주오의 등을 떠밀었다. 손님이라도 닥쳐올지 모르니 준비해야지, 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시장에서부터 장사하던 몸에 밴 습관을 버리지 못하는지 오지도 않을 손님을 기다리는 일이 싫지 않은 모양이었다.
정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위층으로 올라갔고 주오는 움직이지 않은 에스컬레이터를 계단 삼아 내려왔다.
네 개 동 건물 플로어를 한 바퀴 돌았다. 세 평이 안 되는 공간을 사용하는 패션관 사 층의 몇 안 되는 입주자, 가죽 원단 도매를 한다는 젊은 사장은 출근 전이었다. 둘둘 말린 가죽 원단 무더기가 불 꺼진 사무실에 그득 쌓여 어지러웠다. 사무실이 워낙 좁아 그득해 보일 뿐이었다. 젊은 사장은 삼 개월 전에 입주했다. 도매 위주라 손님이 많아지는 것과는 상관없다고 말했지만 기대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패션관과 컬처관 사이 오 층 복도 타일 세 장이 일직선으로 미세하게 금이 갔다. 세 번이나 타일을 다시 붙였다. 다시 바른 타일은 주변 타일보다 다소 밝았다. 알 수 없었다. 또다시 며칠 전부터 타일 하나에 금이 생기더니 오늘은 세 장 모두 금이 번졌다. 바닥 기울기가 잘못된 것도 아니었다. 처음 바른 타일에 문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어떤 진동이나 하중이 그곳에만 닿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서남향인 그곳 복도는 종일 해가 들어 아주 밝고 따뜻했다. 잠깐 가려졌던 햇살이 구름을 뚫고 나왔는지 흰색 타일 위로 부시게 떨어져 내렸다. 부신 햇살 때문에 가는 금이 보이지 않았다.
저 햇빛을 뚫고 아버지에게 다녀와야 한다는 것이 걸렸다. 두껍게 쌓인 눈 위의 빛은 다시 주오의 눈을 날카롭게 찌를 테고.
초등학교 삼 학년 때였다. 잠들기 전, 아버지는 주오를 잠깐 어딘가에 맡겨야 한다고 말했다. 잠깐이니까 준비가 많을 필요는 없었다. 책가방과 옷가지 몇 개만 작은 캐리어에 담았다. 다음 날 아침 3호선 지하철을 탔고 종점에서 내려 버스로 옮겨 탔다. 버스가 한 시간쯤 달렸다. 늦봄의 태양이 강렬하게 내리쬐던 날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꽤 오래 걸었다. 지하철에서 버스로 갈아타기 전 자장면과 탕수육을 먹었다. 먹고 싶지 않았으나 아버지가 그릇을 자꾸 주오에게 내밀었다. 버스에서도 속이 좋지 않았다. 걸어가는 동안에도 뱃속은 더부룩했고 햇볕은 내리쪼이고 땀은 비 오듯 흘러내렸다.
아버지는 보육원에서 한 시간쯤 머물다가 떠났다. 보육원에 들어간 지 삼 일 되는 날까지 주오는 앓아누웠다. 몸에 열꽃이 피고 누런 신물이 나올 때까지 토했다. 약을 먹을 때 마셨던 물까지 토해냈다. 삼 개월 후, 아버지가 주오를 데리러 왔을 때도 몸에 핀 열꽃이 가라앉지 않았다.
처음엔 열꽃인 줄 알았다. 집으로 돌아온 후 잠깐 열꽃은 가라앉았다가 다시 나타나곤 했다. 햇볕이 많은 날 얼굴이나 목, 밖으로 드러난 팔에 집중적으로 보였다. 햇빛 알레르기라는 말을 처음 들었다. 의사가 심한 햇빛 알레르기라고 말했다.
심한 햇빛 알레르기를 앓고 있는 주오에게 파이브월드는 더없이 좋은 직장이었다. 스물네 시간 동안 밖에 나가지 않아도 답답하지 않을 만큼 넓었다. 먼 거리를 출퇴근하는 것도 번거롭게 느껴져 패션관 삼 층에 머물 곳을 마련했다. 칠 개월을 견뎌내다가 집기 대부분을 놔두고 떠난 사업장 하나를 일 년째 사용하는 중이다. 밖을 나가지 않아도 사무실까지 오갈 수 있어 햇볕을 피하기에도 좋았다.
대중 매체에서 심심찮게 거대한 흉물 파이브월드, 라는 글이나 방송이 올라왔다. 국민의 혈세를 쏟아부었고 아직도 혈세가 줄줄 새 나가고 있다고 표현했다. 그 흉물을 사용할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고도 했다. 몇 번의 용도변경을 했고 갖은 방법을 들여 입주자를 모집했으나 여전히 파이브월드는 텅 빈 채였다. 입주자에게 육 개월 분 세를 받지 않겠다는 조건은 지은 지 1년 만에 나온 방안이었다. 때로는 축구장을 만들어 사용해야 한다는 농담까지 했다. 축구장, 나쁘지 않군, 하고 주오는 생각할 뿐이다. 가끔 머릿속에 축구장을 세우고 무너뜨리곤 했다. 아무래도 축구장은 무리지, 하고 말지만. 축구장은 파이브월드 건너편 나대지가 적당했다. 그곳이면 축구장 두 개는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축구장과 공원이 들어서는 것도 좋겠다.
처음 기획은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로 거창했다. 시 외곽 자연녹지지역을 상업용지로 전환해 대규모 물류타운을 건립한다는 프로젝트로 시작된 사업이었다. 누군가의 영웅 심리에서 떠오른 돈키호테식 발상이었는지 모르겠으나 처음엔 계획대로 잘되는 듯했다. 파이브월드를 짓기 시작할 즈음부터 문제가 생겼다. 파이브월드 분양 대금을 자본으로 삼아 주변 나대지에 차례로 건물을 올리기로 했다. 분양은 순조롭지 않았고 사업은 중단됐다. 파이브월드만 들어섰고 계획했던 몇 개 동의 건물 자리는 나대지 상태로 남았다. 건축이 중단된 나대지에는 바람에 날아와 싹튼 온갖 나무며 풀들이 자랐다. 파이브월드 정원수로 심은 나무가 이 층 창턱까지 자라올랐으니, 나대지의 나무며 풀들도 우거질 만큼 우거졌다. 베내지 않고 살아남은, 이십여 년은 버틴 것 같은 버드나무 서너 그루와 무성하게 어우러진 잡초가 그득했다. 파이브월드를 공사할 때 사용했던 세 개의 컨테이너와 버려진 굴삭기가 어울리는 풍경인 듯 나대지를 차지했다. 나대지를 감싸고 있는 패널 울타리 모퉁이 한곳에서 컨테이너까지 작은 오솔길이 나 있었다. 누군가 컨테이너에서 사는 것 같았다. 잘 다져진 오솔길이 멀리에서도 또렷했다.
주오는 삼 층 숙소로 내려왔다. 아버지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은 마음뿐이었다. 북향의 창으로 눈에 덮인 산자락이 보였다. 부드럽고 푹신한 목화 솜털에 감싸인 듯 완벽한 흰색이었다.
하얗게 바랜 빛, 원망의 눈으로 바라보던 태양. 하얗고 날카로웠다. 태양을 피해 눈을 감으면 까맣고 부드러운 세계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찌르는 듯한 햇빛 때문에 눈은 감았으나 드러난 팔과 목에 붉은 두드러기가 피었고 미칠 듯이 가려웠다. 긁기라도 하면 핏빛 생채기가 생겼다. 가려운 부분을 아프지 않게 손으로 때리며 다독였다. 엄마가 있었다면 해결해 주지 않았을까, 원망하기도 했다.
엄마의 얼굴은 떠오르지 않았다. 아버지 앞에서 무릎 꿇고 입을 꾹 다문 채 묵묵히 앉아 있던 사람. 어깨를 덮은 굵은 웨이브 머리 모양까지 선명한데 얼굴도 표정도 기억나지 않았다.
고등학교 다닐 때, 이모가 찾아왔다. 이모는 자신이 엄마를 많이 닮았을 거라고 말했다. 일곱 살 때 헤어졌고 기억 속 엄마는 젊었다. 나이 든 엄마를 상상하려 이모와 겹쳐보았으나 더 멀게 느껴졌다.
아버지와 헤어지고 일 년이 못 되어 엄마가 죽었다고 말했다. 아버지를 죽도록 미워한 외할아버지가 엄마의 죽음을 알리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가 품고 다녔던 의료보험 증서가 떠올랐다. 아프면 이것이 필요하겠지. 그러면 나를 찾아오게 돼 있어, 라고 아버지는 말했다. 몇 번의 갱신을 거듭했으니 그 보험증도 이미 쓸모없는 물건이 되어버렸다. 아버지의 지갑은 의료보험 증서 때문에 늘 두툼했다. 어렸을 때, 아버지 지갑에서 몰래 돈을 꺼낼 때마다 증서를 보았지만, 주오는 이미 쓸모없게 된 물건이라고 말하지 않았다.
이모 대신 엄마가 찾아왔대도 느낌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어색하고 막막하고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히 이모는 엄마처럼 굴지 않았다. 엄마라면 주오의 얼굴을 만지고 안아보고 손을 잡았을까. 이모는 등을 한 번 스치듯 쓰다듬었을 뿐 어느 곳도 만지지 않아 견딜만했다.
주오는 기숙사가 있는 학교에 다녔다. 룸메이트였던 친구는 노트북 모니터만 들여다보았고 이모는 침대에 쌓인 옷더미를 한쪽으로 밀어내고 그 자리에 앉았다. 벌을 서는 아이처럼 주오는 내내 서 있었다. 창밖은 가는 비가 흩뿌렸다. 이모는 흐르는 눈물을 감추려는 듯 자꾸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유리창에 흘러내리는 빗줄기처럼 이모 눈에서도 자꾸 눈물이 흘렀다. 너희 엄마가 너를 봤어야 하는데, 라는 말을 되뇌었다. 그러니까 그 눈물은 주오 때문인지 아니면 엄마 때문에 흘린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모가 돌아가고 그날 집으로 아버지를 찾아갔다. 엄마는 우리와 헤어지고 1년도 더 살아있지 않았다는 주오의 얘기를 듣고도 아버지는 침착했다. 마치 알고 있었던 사람처럼 그랬구나, 하고 말았다.
“미안하다.”
아버지는 주오를 바라보지 않았다.
“네가 보육원에 있다는 얘기를 엄마가 들으면 한걸음에 뛰어올 줄 알았어.”
그 말을 하던 아버지의 뺨을 때릴 뻔했다. 손은 나가지 않았으나 아버지를 측은하게 생각했던 마음은 싹 가셨다. 두 번을 아버지는 주오를 보육원으로 보냈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 이후 한 번 더 보육원에 들어갔다. 이 학년 때였다. 그날도 지하철을 탔고 버스를 갈아탔다. 다행히 먹구름이 잔뜩 낀 날씨였다. 먹구름이 끼었지만 언제 해가 얼굴을 내밀지 몰라 불안했다. 주오의 발걸음은 빨랐고 아버지는 한없는 해찰을 하며 걸었다. 담배를 피워 물며 풀숲에 앉았고 다리가 아프다며 쉬어갔다. 아버지가 돌아가고 난 후 잠깐 햇살이 나오는 듯하더니 다시 먹구름이 끼었다.
소도시 외곽 산 아래에 있던 보육원은 햇볕이 강했다. 햇볕이 많은 날 학교에 갈 때는 야구모자를 쓰고 그 위에, 후드에 달린 모자까지 덮어썼다. 그렇게 완전무장을 하면 두드러기가 나긴 했지만 약을 바르지 않아도 되었다. 며칠 견디면 사라졌다. 그때에도 삼 개월을 보육원에서 지내다 집으로 돌아왔다.
설핏 든 잠에서 깨어났다. 벌써 여러 번 아버지에게 다녀온 것처럼 몸이 무거웠다. 차라리 빨리 다녀오는 게 나았다.
파이브월드에서 곧장 지하철로 연결된 출입구를 나설 때 호주머니에 든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류가 파이브월드에 와 있었다. 주차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영화관 커피숍에서 만나기로 했다.
“들른다고 한 날이 오늘이었어?”
“이 근처에 일이 있었어. 네 얼굴 오래 못 본 것도 같고.”
“아버지에게 가려던 길이었어.”
“아버님은 좀 어때? 60세가 되셨나?”
“아니, 내년에.”
“병원에 누워계실 나이는 아닌데.”
“지병이 있었잖아.”
여덟 개나 되는 티켓 발매 창구는 한 명의 직원이 지켰다. 커피숍 손님도 주오와 류뿐이었다. 커피숍에 앉아 영화관 로비를 바라보다 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조용해서 좋기는 하네. 입주는 어떻게 돼 가? 주차장이 텅 빈 걸 보니 아직 한가한 것 같고.”
“주차장 한가해서 좋지? 주차하기 편하다고 주말에만 영화관에 인파가 몰려들고 있잖아.”
“인파?”
“응, 인파.”
“너 설계는 안 할 거야? 도면이 눈앞에서 어른거리지 않아? 너 건물 아우트라인 잡는 솜씨 누구도 따라오지 못했는데. 쓱쓱, 도면에 손만 가면 작품이 나타나곤 했어.”
류는 주오를 자기 회사에 스카우트하지 못해 안달이었다. 만날 때마다 주오를 설득했다.
“왜 이미 지어진 건물에 들어가서 썩고 있는 거야? 새로운 땅을 만나고 머릿속에서 짓고 부수고 다시 짓다가 도면에서 드로잉으로 태어나는 작품들. 너 그 맛, 알잖아.”
“그건 네가 잘하고 있잖아. 너처럼 능력 있는 사람이 이미 지어놨으니, 관리나 잘하려고.”
“그럼 잘나가는 건물 관리를 맡든가. 흉물이라고 손가락질 받는 건물 말고.”
“네가 잘 알잖아. 파이브월드가 정말 흉물인가. 건물 하나 지을 때까지 들이는 품. 단독주택 하나 지으려고 해도 얼마나 오랜 시간 동안 땅을 고르는 일부터 흙을 퍼내고 다지고…… 건물 올리는데 들어가는 자재는 어떻고. 그런데 흉물이라 말할 수 있는 거야? 사람이 들어와 살지 않는다고 흉물이야? 너도 그런 경험 있을 거야. 지었는데 맘에 안 드는 거. 하긴 설계한 사람에게는 거의 모든 건물이 만족스럽지 않지. 더 말해 뭣 해.”
“내가 그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네가 있을 곳은 여기가 아닌 것 같다는 거야. 학교 다닐 때 네가 설계한 도면들 지금도 기억나. 네 작품은 어딘가 남다른 곳이 한군데는 꼭 있었어. 그게 부러웠는데.”
“이미 지어졌어. 안 태어났더라면 더 좋았을 걸 생각하지만 이렇게 됐잖아. 버릴 수 없으면 지켜야 하잖아. 난 그게 마음에 안 들었어. 무언가를 파괴해야만 새로 태어나는 건물들. 풀이나 나무들을 짓이기고 때로는 말짱한 건물을 부수고. 그래 봐야 새로 짓는 건물도 언젠가 사라질 텐데. 지금 좋아.”
“그래, 네가 달랐던 게 그런 거야. 도면에서도 보였어. 천연동 건물 생각나? 건축주를 엿먹였지. 하긴 나중엔 너한테 고마워했을 거야. 건축주는 비용만 생각하고 넌 다른 걸 생각했던 거지.”
“지하 일 층 4분의 1을 쓸모없게 만들었다고 완공 후에도 건축주가 내 얼굴 안 보려 했지. 처음엔 흙벽에 돌 몇 개가 박혀있는 것처럼 보였어. 터파기 공사가 막 시작되었는데 그 그림들이 보이는 거야. 이미 많이 허물어지고 남아있는 곳이 더 적었어. 건물을 아예 안 짓고 싶었는데 내 것이 아니잖아. 조금이나마 저걸 살려야겠다고 마음먹었지. 살려 놓고 보니 생각보다 허접했지? 그래도 오래전에 누군가의 집을 감싸고 있었을 담이었잖아. 충분해, 그것으로.”
“조선시대 돌담이 지하에 들어있다? 바닥을 유리로 마감하고 로비에 드나들 때 돌담이 들여다보일 수 있게 했지. 나쁘지 않았어.”
“돌 몇 개 박힌 흙무더기. 설명이 없었다면 그렇게 생각했을 거야.”
“한 번 들여다본 사람들은 생각이 많아질 거야.”
“너 지금 설계 맡은 건물 이십 층이라며? 기대돼.”
“그래 기대해라. 그래봐야 언젠가는 사라질 텐데.”
“누가 알아? 네가 설계한 건물 벽 모퉁이를 누군가가 남겨둘지.”
마주 보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류는 직원 십여 명을 거느린 설계사무소 소장이다. 주오가 류의 사무실에 들어오면 자신에게 여유가 생길 것 같다고 했다. 일을 벌여놓으니, 그것들이 계속 꼬리를 물고 늘어져서 힘들어했다. 주오가 그의 사무실에 들어가도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류는 한 시간을 채우지 못하고 일어섰다.
버스에서 내리자, 숲 사이로 흰색 병원 건물 끝이 보였다. 오르막길을 한참 걸었다. 주오의 발자국이 동물이 지나간 흔적처럼 남았다. 파이브월드 주변보다 눈은 더 두껍게 쌓였으나 자동차 바퀴가 지나간 자리는 벌써 녹아 없어진 곳이 많았다. 일부러 두껍게 쌓인 눈을 헤치며 걸었다. 시간이 더디 가기를 바랐다. 눈덩이를 가득 짊어진 휘어진 나뭇가지가 길을 막았다. 가지를 잡아당겨 흔들어주면 거세게 몸을 흔들어 눈을 털어내고 잠잠해졌다. 눈덩이 떨어지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렸다. 무더기로 날리는 눈덩이가 눈앞을 가로막기도 했다. 습설의 무게를 못 이겨 뚝, 뚝,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까지 지루할 틈을 주지 않았다.
“네가 올라오는 걸 봤다. 멀리서도 너라는 걸 금방 알겠더라.”
병실 문을 열고 기다리고 서 있던 아버지가 반가운 사람이라도 온 듯이 말을 건넸다. 주오가 농담 섞인 대답이라도 했더라면 분위기가 묘하게 흘러갈 뻔했다. 아버지는 지난번 왔을 때와 다르지 않았다. 아버지가 좋지 않다는 전화는 뭐였을까. 전화를 받았던 건 사실일까. 머릿속에서 아버지에게 가야 한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눈 위에 떨어져 내리는 강렬한 햇빛, 그 빛 사이를 뚫고 도착했다. 아버지의 가벼운 목소리를 들으니, 전보다 건강은 더 나아 보였다. 저 목소리였다면 창밖을 내다보며 주오를 불렀더라도 들렸으리라. 대답해야 할지 말지 망설였겠지만.
창문 앞 우듬지 까치집에도 두텁게 눈이 쌓여 무거워 보였다.
“까치들 이젠 저 집에 안 사나 봐요?”
“벌써 떠났어. 종일 그것들 바라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는데.”
까치집은 바람을 맞았는지 듬성듬성 구멍이 뚫렸고 삐죽삐죽 튀어나온 나뭇가지들이 어지럽게 걸쳐있었다. 그 위로 눈이 그득했다.
“또 오겠죠.”
“오기나 하려는지. 내가 기다린다는 걸 그놈들이 알기나 하겠어.”
생각 없이 한 대답이었는데 아버지 말에 힘이 들어있었다. 둥지를 받치고 있던 나뭇가지 하나가 바람을 타고 사라졌다. 찰나였다.
“겨울에 다른 까치가 찾아와 저 집을 수리해서 또 쓸지도 몰라.”
그러든 상관없었지만 매일 바라봐야 하는 아버지는 그런 생각이 간절할 것 같았다.
식당으로 내려가 아버지와 함께 저녁을 먹었다. 오전에 먹은 식사가 아직 소화가 덜 된 듯했다. 안 먹겠다고 할 수 없어 함께 먹었다. 비릿하고 싱겁고 차분한 맛이 났다. 어스름도 내리기 전에 먹는 이른 저녁이었다.
계단을 걸어 식당으로 갔고 기다려 밥을 먹었고 다시 병실로 올라왔다. 말없이 앉아 있는 것보다 시간은 잘 흘러갔다. 침묵하며 창밖을 바라보는 시간. 어스름이 내린 후에는 창밖을 보며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아버지가 서랍에서 뭔가를 꺼내 들었다. 손때가 타 검은색에 가까워진 갈색 장지갑이었다. 지갑을 열어 돌돌 말린 낡은 스카프를 꺼냈다. 스카프를 돌려 풀자, 보험증서가 나왔다. 나달나달해진 하늘색 보험증서. 그 보험증을 주오에게 내밀었다. 아버지의 희고 가는 손가락 끝에 보험증이 걸려있었다. 살짝 닿는 아버지의 손끝은 차가웠다. 엄마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아버지 손에서 땀으로 젖어 들었을 엄마 이름이 올라 있는 의료 보험증. 아버지에게 소중했는지 모르겠으나 주오에게는 쓸모없는 종이로만 보였다. 아버지가 그러길 바랄 것 같아 잘 갈무리해 지갑에 넣고 병실을 나왔다.
어둠이 섞이기 시작했으나 낮에 내린 눈이 환하게 길을 밝혔다. 올라갈 때 주오가 밟은 자국을 그대로 따라 내려왔다. 낮에 내리쬐던 햇볕의 흔적은 없었다. 피부에 닿았던 햇볕은 붉은 반점으로 드러나곤 했다. 스멀스멀 가려움증으로 나타날 때가 지났는데 아직 반응이 없다. 두툼해진 지갑이 이물스럽게 느껴졌다.
지하철에서 내렸을 때, 파이브월드 방향으로 가는 사람은 주오뿐이었다. 많지 않은 사람이 역에서 내렸지만 모두 주오와는 다른 방향으로 갔다. 지하철과 파이브월도로 연결되는 계단을 올라 건물 광장으로 들어섰다. 차분한 어둠에 묻혀있었다. 광장 가로등은 모두 꺼진 채였다. 필라델피아 미술관 앞에 줄지어 서 있는 것과 같은 디자인의 가로등이었다. 주변에서 흘러든 여린 빛으로 가로동의 검은 윤곽이 도드라져 보였다. 낮에 모아 놓은 눈더미가 등을 밝힌 듯 흰빛을 띠었다. 하루 봄볕에도 녹아 사라질 수 있겠지만 아직은 높게 쌓여있었다.
건물도 희미한 어둠에 묻혀있었다. 출입구 쪽으로 걸어갔다. 근무 중이던 경비원과 여느 때처럼 고개를 까닥이며 인사했다. 경비원 등 뒤의 불빛이 좁게나마 로비의 어둠을 걷어냈다. 그 빛은 다섯 걸음도 따라오지 못하고 주오를 어둠 속에 들여놓았다.
멈춘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는, 텅텅 울리는 발소리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삼 층까지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텅 빈 패션관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다. 불을 밝히지 않고도 어디든 찾아갈 수 있을 만큼 파이브월드는 이미 주오의 몸속에 들어있었다. 빛이 없어도 어디든 찾아갈 수 있었다.
어둠을 더듬어 방문을 열었다. 그곳에도 가득한 것은 어둠뿐이었다.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피곤했다. 한꺼번에 많은 일을 겪은 것처럼 몸이 가라앉았다.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영화관에 사람이 남아있을까. 어둡고 조용한 밤에는 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
사람의 목소리 뒤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채워진 어둠 사이로 작은 소리가 끊임없이 들렸다. 수도 배관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 배기관을 가득 채운 공기 소리, 전선을 지나고 있을 밝은 빛 소리. 파이브월드는 저 혼자 숨 쉬었다. 공기를 뱉어내고, 가늘게 명멸하는 유도등을 밝히고, 달빛을 끌어들이고, 따뜻하게 머금고 있던 온기로 주오를 감쌌다. 매장이 들어서 있지 않은 텅 비어 있는 공간. 파이브월드는 어둠과 작은 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