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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13.연중 제19주 목요일 강론>
<마태18,21-22>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내가 너에게 말한다.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부제품을 받기 전에 30일 동안 침묵하며 성서말씀을 한 번에 8시간 묵상 하고 8시간 노트에 정리하는 피정이 있었습니다.
이냐시오 묵상이라 성서 말씀을 10번 정도 읽고 눈을 감으면 그 구절들이 영화처럼 지나가며 내가 마치 그 속에서 주님과 함께 지내는 것 같아 행복했습니다.
40일 광야 생활에서는 “유혹이 없었느냐?”는 지도신부님의 물음에 “주님과 함께 있는데 유혹이 뭐가 있겠습니까?”라고 자신 만만해했습니다.
나중에 알고보니 같은 질문에 100키로가 넘는 친구는 배고프다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러면 집에 가라해서 돌아왔다고 묵상 내용을 말해 “다시 묵상 해와!”라며 혼이 났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0일이 지나자 제게 변화가 왔습니다. 알 수 없는 분노가 올라와 하루종일 한 글자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지도신부님께서는 “다시 묵상 해와!”라고 하셔서 저 역시 혼이 났습니다.
“아! 이래서 바로 전 선배님들이 4분이나 신학교를 나가셨구나!”라는 생각이 스치자, “나도 강론이 안 되면 평생 가짜로 강론 쓸 수는 없는 일! 나갈 땐 나가더라도 이 분노가 뭔지 알아보자!”라고 다짐하며, 성체 앞에 몇 시간이 흐르는 지도 모르게 앉아 있었습니다.
꿈을 꾸면 현실과 구분이 안 되듯이 기도중에도 현실과 구분이 안 되는 일이 생깁니다.
아직도 화가 나는 내 몸 안에서 검은 존재가 나와서 씩씩 거리며 앉아 있었습니다. 그는 정의의 사도로서 검은색 양복과 검은색 중절모를 쓴 만화영화의 주인공 요괴인간인 ‘뱀’이었습니다(1960년대 ‘요괴인간’이라는 일본 만화영화의 주인공 뱀,베라,베로가 정의를 위해 싸운다). 그러자 한 사람이 와서 제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나중에는 15명이 모두 나와 무릎을 꿇는데, 그제서야 제가 왜 화가나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5년전 주일학교 교사들이었습니다.
그때는 서울교구 성소국에서 신학생 모두 집주소가 있는 관할본당으로 본당을 다 옮기라 했고 옮기지 않은 부제님들은 부제품 때 책임추궁을 당했던 일이 있었기에, 당시에 신학교 1학년이던 저는 겨울방학 때 길음동 본당으로 옮겨서 사람들을 잘 모를 때인데 마침 길음동 본당 신학교 선배님들과 동료는 피정과 군입대 등으로 없고 저혼자 성탄준비를 해야 했는데, 사 놓은 크리스마스 트리와 구유 재료를 제게 한마디 말도 없이 다 써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라 뭐라 말하지도 못하고 당황해하는 저에게 “이런건 성당에서 다 준비해 주어야 하는것 아닌가요?” 라고 5년전에 따지듯 말했던 초등부 여자 교감 선생님이 제일 먼저 걸어와서 무릎을 꿇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주일학교 교사라서 아이들에 대한 애정 때문에 성당에서는 ‘왜 집에 안 가냐!’고 야단맞고, 집에서는 ‘또 성당 가느냐’고 말을 듣던 경험이 있어, 춥고 배고픈게 주일학교 교사생활이란 것을 잘 알기에 그당시는 원수 같았지만 사랑으로 “수고한다”면서 이유를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제 사비로 튀김과 양념 통닭 2통과 2종류와 사이다 콜라 1.8리터짜리 2병을 사서 전해주고, “주님! 저 잘했죠! 잘했죠!”하며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5년이 지난 지금 얼굴도 잘 모르는 그들에게 선을 베푼 일인데도, 그 일로 내가 이렇게 화가 나 있다니, 정말 충격이었습니다.
신학생으로서 그들과는 다른 수준이어야 한다며 내 분노의 감정을 누르고 선을 베풀었던 내 위선이 문제였습니다.
그리고 깨달은 것은 감정을 풀지않고 사랑을 베푼다는 것은 용서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차라리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을 얻고 풀었으면 이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야구장에 가서 기계안에 돈을 넣고 냅다 그들이라 생각하며 공을 때렸으면 이 지경까지 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기도중에 그 교사들을 불러 주님 앞에서 고발을 하며 그들에게 따져 물어서 주님 말씀도 듣고 그들의 표정들을 기도중에 바라보았다면 내 감정을 해소할 수 있었을 것이고, 그러면 이렇게 까지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때 느낀 감정은 “나는 참 속 좁은 놈이구나!”라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사랑 실천했다며 나름 자부심 느끼고 아무에게 자랑하거나 흉보지도 않았었는데...그것이 문제가 될 줄이야!...정말 충격이었습니다.
꿈과 기도가 다른 점은 이성이 작동한다는 점입니다. 부제품을 받아야 한다고 느낀 나는 내 오른쪽 1미터 거리 앞에서 씩씩 대며 앉아있는 요괴인간 뱀에게 말했습니다. “쟤네들 용서해주자!” 그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물으니 “쟤네들이 ‘미안하다’는 말 한 마디도 안 해서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용서는 진심어린 한 마디 “미안합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시작됩니다.’
저는 부제품 받을 욕심에 ‘요괴인간인 뱀’에게 “나는 너 아니다. 나는 용서할거다!”라고 말하며 마음을 정했는데도 심장이 떨리는 것이 가라앉질 않았습니다.
그 괴물 역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주님께 용서를 청했습니다. “주님, 용서하지 못하는 이 죄인을 용서해 주소서! 용서할 힘 없는 이 죄인에게 용서할 힘을 주소서!” 라고 간절히 성소를 걸고 매달렸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수녀님이 걸어오셔서 무릎을 꿇으셨습니다. 너무나 깜짝 놀랐는데 바로 이어서, 나에게 5,000원을 주시며 그걸로 다 해결하라고 하셨던 본당신부님이 머리를 긁적이며 “에이, 미안하다” 하시며 관절염이 있는 발을 절뚝이며 걸어오셔서 무릎을 꿇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본당 신부님께서는 20년 당신이 가지고 다니시던 조립식 트리로 만들라 하셨고, 그래도 반짝이 살 돈은 필요하다고 말씀드리니 5,000원 주셔서 그걸로 방장시장을 돌아다니며 반짝이와 별을 샀고, 구유 만들려고 볏짚을 얻으러 시골을 돌아다니다 아름드리 나무껍질 한 트럭을 얻게되어 담배 한 보루 드리고 얻어온 것인데 교사들이 다 짤라서 아이들 십자가를 만들고, 반짝이와 별은 어쨌냐니까 “수녀님이 창고에서 찾아보라고 하셨어요!”라고 초등부 교감이 눈을 똥그랗게 뜨며 이야기 했었습니다)
나는 수녀님과 신부님이 무릎 꿇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서 “수녀님, 신부님! 왜 이러세요!” 하며 나도 모르게 그분들을 일으켜 세우려고 벌떡 일어나 손으로 일으키려고 하는 찰라에 꿈에서 깨듯 기도에서 깨어났습니다. 그 순간 나는 엉거주춤 일어나 일으키는 자세로 성체를 향해 서 있는채로 현실로 돌아온 것입니다. 어느새 분노는 다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일흔일곱 번” 대신에,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으로 볼 수 있는 창세4,24의 히브리말 성서에는 “일흔일곱 번”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구절의 칠십인 역에서는 둘 다 가능합니다. 아무튼 이 말씀의 뜻은 무한정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횟수를 세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무한정 용서는 불가능 한 일이지요.
다만 같은 죄인임을 알고 주님께 용서할 힘을 달라고 청해야 겠지요.
<matthew18,21-22>
21 Then Peter approaching asked him, "Lord, if my brother sins against me, how often must I forgive him? As many as seven times?"
22 Jesus answered, "I say to you, not seven times but seventy-seven times.
<책 소개>
Therapy(마음을 방해하는 제동장치 푸는 요법)01
시작은 가능한 신중하고 천천히
1.당신이 바뀌길 원하지 않는 마음이 있다.
부자는 왜 부자일까?
인기 있는 사람은 왜 항상 인기가 있을까?
행복한 사람에게는 왜 행복한 일만 일어날까?
그 비밀을 지금부터 단 한 마디로 표현한다.
부자가 왜 부자인가 하면......부자라서 그렇다.
인기 있는 사람이 왜 인기 있는가 하면 .....인기 있는 사람이라서 그렇다.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기 위한 감정의 브레이크를 제거하는 법, 이시아 히로유키 지음, 최윤영 옮김,에이지,2006.p.14)/
행복한 사람이 왜 늘 행복한가 하면....행복한 사람이라서 그렇다.
도통 무슨 말인지 영문도 모를 소리로 당신을 농락하려는 게 아니다. 아주 중요한 사고방식이 여기에 숨겨져 있다.
앞에서와 마찬가지로 말하면,
가난한 사람은 가난하기 때문에 가난하고,
살찐 사람은 살쪘기 때문에 그렇다.
더 자세히 설명해보겠다.
신체는 급격한 기온의 변화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능한 체온을 일정하게 유지하려고 한다. 뜨거워지면 땀을 내어 체온을 내리고, 차가워지면 신체를 떨게하여 열을 내도록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잠재의식도 급격한 환경의 변화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가능한 현재 상태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부자인 사람의 잠재의식은 가능한 부자로 있으려 한다. 신체가 자연스레 평열을 유지하려는 것과 똑같이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기 위한 감정의 브레이크를 제거하는 법, 이시아 히로유키 지음, 최윤영 옮김,에이지,2006.p.15)/
현재의 풍요로운 수준을 유지하려고 잠재의식이 작동한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동할까? 예를 들면 ‘별 생각 없이’ 선택한 일이 큰 돈벌이의 기회로 이어지기도 한다. 재산을 잃어버릴만한 큰 위기가 닥쳐도 ‘무심히 그것을 피해 지나가 버린다. 이런 식으로 잠재의식이 ‘이끌어주는’ 것이다.
(자기 주도적인 삶을 살기 위한 감정의 브레이크를 제거하는 법, 이시아 히로유키 지음, 최윤영 옮김,에이지,2006.p.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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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묵상글>
잠재의식은 놀랍습니다.
제가 붙잡은 것은 용서가 아닌 정의였습니다.
내 몸 안에서 나간 요괴인간인 뱀은 같은 요괴인간인 베라나 베로보다 힘이 센 놈이었습니다. 악당들을 가차없이 물리치고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정의라는 이름의 괴물이었습니다.
인간행동에 무의식이 90%, 표면의식이 10% 라고 합니다.
내가 화가난 상태를 무의식으로 돌리게 된 것은 고작 10%에 되지 않는 나의 선행 때문이었습니다.
내 자신의 화가 난 마음을 표현했으면 분노가 무의식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부제품을 앞두고 저를 불쌍히 보신 주님께서 도와주신 것이지요.
성모님도 바로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루카1,38)하고 신성으로 바로 가지 않으시고,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루카1,34)라고 동물성 인간성 차원에서 먼저 물으셨듯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살려면 바로 신성차원으로 가기전에 동물성 인간성 차원에서 먼저 소통이 필요한 것입니다.
여기서 판단이나 평가가 아닌 나의 느낌(감정)표현이 중요합니다,
제가 여차저차해서 이러한 물품을 준비했고, 바로 구유와 크리스마스 트리를 마련했던 거라고 말했으면, 그 교사들이 “미안하다”라는 말을 당연히 했을 것이고, 제게는 성소를 위협하는 지경까지 분노가 무의식으로 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러한 소통없이 바로 신성차원의 대답인 사랑으로 먼저 갔기에, 동물성 인간성 차원의 분노라는 감정은 그대로 무의식으로 묻게된 것이었습니다. 분노의 힘이 깊이 숨어 괴물이 된 것이지요.
이러한 분노가 숨어있는 사람은 경직되어 있고, 심각해서 기쁘게 살 수 없게되겠지요. 이와 비슷한 일이 발생되면 언제 폭탄처럼 터질지 모르게 되지요. 걸어다니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나이가 먹게되면 누르는 힘이 없어져 나중에는 분노조절장애자가 될 수도 있었던 것입니다. 감정의 힘은 그냥 없어지지 않으니까요.
잠재의식은 당신이 바뀌길 원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동물성 인간성 차원의 소통을 무시한채, 즉 사람들과의 소통을 무시한채, 신성차원의 소통 즉, 하느님하고만 소통하려는 마음은 내 안에 자아가 있는이상 큰 상처로 남게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상처는 무의식으로 들어가게되고, 내 삶의 90%를 차지하게 되며, 결국 고통속에 분노를 숨기고 있는 상태와 같습니다.
겉으로는 선을 택했지만, 내면은 악을 키우는 것이지요.
겉으로는 정의를 선택했지만, 내면은 분노를 키우는 것이지요.
겉으로는 완전을 선택했지만, 내면은 완전치 못한 내 자신에 대한 분노를 키우는 것이지요.
내가 내자신에게 분노하는 것은 내가 내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이며, 이는 자기 긍정력이 바닥인 상태임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 상태에서 해방되려면 어떻게 해야할까요?
내가 생각하는 완전함, 내가 생각하는 정의를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의 완전함, 하느님의 정의를 받을 수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5,29)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마태5,30)
그렇습니다. 내 몸에 완전함이나 정의를 붙잡고 있는 신체부위를 예수성심의 불꽃에 던져서 사라지게 하는 것입니다.
내 몸에 완전함과 정의라는 이름표를 붙이고 예수성심에 뛰어드는 것도 한 방법입니다. 영적인 싸움이기에 효과가 있습니다. 잠재의식은 현실과 상상을 구분하지 못합니다. 실제로 내 몸에 변화가 나타납니다.
꿈의 실현=꿈(목표)*수단*멘탈(꿈의 실현의 90%를 좌우함)*하느님의 뜻(내가 행복한지, 나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유익한지, 지속가능한 지)
멘탈=자기평가*이미지(꿈을 이룬 모델 떠올리기)
자기 평가 = 자기 긍정력 x 자기 효력감
*자기 긍정력
자신이 어떤 모습이든 인정하는 힘이다. 일이 잘 풀릴 때는 자신을 칭찬하고, 잘 안 풀릴 때는 지나치게 낙심하지 않고 그럴 수 있다며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한다.
*자기 효력감
어떤 일에 대해 할 수 있다고 느끼는 감각이다. 실제 능력과는 상관없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중요하다.
(신의 멘탈, 호시 와타루, 김정환 옮김,21세기,p.119)/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멘탈이 중요한데, 이미 꿈을 이룬 자기 평가와 그 꿈을 이룬 실제의 모델의 이미지를 매일 떠올려야 합니다. 자기 평가는 자기 긍정력과 자기 효력감으로 이루어지는데, 자기 긍정력은 자신이 성공했건 실패했건 다 받아들이는 마음의 힘입니다. 자기 효력감은 실제 능력과는 상관없이 그 꿈을 실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다시말해 무의식이 우리의 일상 활동을 컨트롤하고 있으므로, 그 무의식이 얼마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느냐에 의식을 집중해야 합니다.
무의식의 영역이 90%라고 했지만 이것도 틀린 말일지도 모릅니다. 매일 우리가 의식하는 것이 바뀌므로 정확한 데이터를 수집할 수 없기 때문이죠. 인간의 세포수도 60-89조 혹자는 100조개라고 말하는데, 세포는 매일 죽고 다시 태어나기 때문에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습니다.
항상 신진대사를 반복함으로써 우리의 몸은 건강을 유지합니다. 즉 잠재의식은 변화가 곧 안정이라는 뜻입니다. 물을 예로 들자면 그릇에 고여 있으면 썩고 말지만 계속 흐르고 있는 한 깨끗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당신이 ‘컨트롤하여 소망을 이루려는 것’은 무의식의 작용을 가로막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한 인생을 살고 싶다면 우선 무의식을 컨트롤하는 일부터 그만두세요. 그렇게 하면 행복을 향한 첫걸음을 내디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잠재의식은 ‘부정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현실과 상상을 구별’하지 못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무의식 활용법(8)
뜻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의심하는 방법
1.지금 생각대로 되지 않는 것을 떠올린다.
2.”내 생각대로 되어야 하는데, 그렇게 안 되는 게 ‘이상하지 않나?’”하고 현재 상태를 의심해본다.(의식: 외적으로 소리내어 표현)
3.”내 생각대로 되는 게 ‘당연하다’”(무의식: 외적으로 표현 안하지만 인식갖고 믿기)
(무의식을 지배하는 사람, 무의식에 지배당하는 사람, 구스도 후토시,김해용 옮김,동양북스,2015,p.115)/
지금 인생이 잘 풀리지 않거나 거대한 난관에 부딪힌 분들(무의식을 지배하는 사람, 무의식에 지배당하는 사람, 구스도 후토시,김해용 옮김,동양북스,2015,p.116)/
은 한 번쯤 ‘이상하지 않나? 사실은 내 생각대로 됐어야 하는데….’라고 현재 상태를 의심해보세요. 그다음 ‘사실은 생각대로 되는 게 당연하다’는 인식을 갖고 그것을 믿으세요.,
영혼의 기능은 지성, 기억(감정), 의지 입니다. 이성과 기억(감정)의 싸움은 기억(감정)이 이깁니다. 왜냐하면 과거를(기억을) 없는 것으로 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성으로는 용서하고 싶은데 감정이 동의를 하지 않으니 ‘뱀’에게 “나 너 아니다!”라고 말하며 분노로 떨리는 가슴을 멈추려했지만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내 안에 키워둔 괴물이었습니다. 어렸을 적부터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손해를 보아도 참고, 상대편이 욕을해도 욕하지 않고 착해야한다 선해야한다며 행위로는 선을 했지만 감정을 정화할 줄 모르고 억눌러왔던 것이지요.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행위로가 아닌 본성의 변화로 구원을 받습니다.
행위에 죄가 있다면, 그 행위 밑에 마음이 있고, 그 마음 밑에 영이 있어서, 고통중에 하느님 아닌 다른 것을 잡게되면 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진 것입니다. 그러면 마음으로 갈라져있고 유혹에도 쉽게 넘어져 행위로 죄를 짓게 됩니다.
그 고통중에 우리는 하느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이 때 하느님을 선택한다는 것은 일방적인 사랑으로 무조건 가는 것이 아니라, 그 고통중에 동물성 인간성 차원에서 소통하려 노력하고, 신성으로 마무리 하면 됩니다.
즉 교사와 동물성 인간성 차원에서 소통 노력을 기울이고 난 후에, 시성 차원에서 사랑으로 가면 됩니다.
“일흔일곱 번” 대신애 “일흔 번씩 일곱 번”으로 옮길 수도 있습니다. 이 말씀의 배경으로 볼 수 있는 창세4,24의 히브리말 성서에는 “일흔일곱 번”으로 되어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구절의 칠십인 역에서는 둘 다 가능합니다, 결국 이 말씀의 뜻은 무한정 용서하고 또 용서하는 횟수를 세지 말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성심께 봉헌은 무한정 용서위해 무한정 반복되어야 합니다. 습관화되면 됩니다.
성서에서 “종”은 노예만이 아니라 때로는 중요한 인물을 가리킬 수도 있습니다(1사무8,14; 2열왕5,6; 마태13,27; 25,14-30)
그리스의 화폐 단위인 한 달란트는 6000드라크마인데, 한 드라크마는 로마의 화폐단위로 셈하면 한 데나리온으로서(28절) 일꾼의 하루 품삯에 해당합니다. “만”은 고대 근동에서 계산할 때에 가장 높은 수이고 “달란트”는 가장 큰 화폐 단위입니다. 그래서 “만 달란트”는 그야말로 엄청난 액수로서 이만큼 빚을 진 종은 가망이 전혀 없고 오로지 주인의 자비에(27절)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하느님 앞에서 인간도 바로 이러한 상황에 있다는 것입니다(35절 참조).
일꾼의 하루 품삯이 한 데나리온이기에 100데나리온은 만달란트와 비교할 때 가소로운 액수입니다. 이 두 빚 사이의 불균형이 복음에서는 크게 강조되고 있습니다. 이 비유의 이러한 요소는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도 용서하였듯이 저희 잘못을 용서하시고”라는(마태6,12) ‘주님의 기도’의 다섯 번째 청원을 상기시킵니다.
하느님께 좋은 것만 드린다고 생각지 말고, 내 기도 중에 분노가 올라온다면 하느님을 초대하고 그 사람들을 고발하고 투정하면 주님은 다 받아주십니다. 주님께 하는 것은 뒷담화가 되지 않는 것이며,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처럼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첫댓글 "하느님께 좋은 것만 드린다고 생각지 말고, 내 기도 중에 분노가 올라온다면 하느님을 초대하고 그 사람들을 고발하고 투정하면 주님은 다 받아주십니다. 주님께 하는 것은 뒷담화가 되지 않는 것이며, 프란치스코 교황님 말씀처럼 성인이 될 수 있습니다"
저도 눌러놓고 쌓아만 왔지 제대로 봉헌하지 못하고 해결을 못해서 감정의 흐름에 방해를 받고 있는 것 같아요.
신부님 말씀대로 분노와 미움도 예수님을 초대해서 투정부리며 다 봉헌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