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떠나간 것은 어제였어. 물론 내 잘못은 인정하겠어. 사람을 쉽게 믿은 것. 그리고 그가 남긴 불신의 벽.
그는 사랑한다고 말해 놓고는 나의 주머니만을 훑고 지나갔어. 나쁜 새끼. 지를 찾지 못할 것을 알고 하는 비열한 방법.
나같은 이방인들은 자신이 노출될 것을 두려워해서 어떤 일에도 신고란 것을 꺼려해. 물론 나같은 게 가지고 있어야 얼마나 되겠냐마는 그래도 그 속에 나에겐 큰 돈인 10여만원과 사진. 그와 찍은 두 장의 사진과 전화번호. 그간 나를 스쳐간 사람들, 내게 즐거웠다 얘기했던 사람들... 별반 다를게 없는 존재들이야. 그래 잘 가져갔다. 다 가져가라. 기억까지도.
그 찝찝한 기억이라도 잊어버리게 헌혈차에 올라서야지.
언제나 내게 변화가 있을 때면 오르게 되는 차. 실은 나의 생활을 믿지 못하고 나를 거쳐간 사람들을 믿지 못한 까닭에서야. 나에게 때때로 엄습하는 공포들.
1. 오늘 몸의 상태가 좋습니까?
-그다지 좋지는 않아. 마음따라 몸도 나빠지나봐. 머리도 어지럽고 가슴도 조금은 빨리 뛰는 것 같고. 하지만 모든 것을 잊자. 잊으러 왔으니.
2. 최근 2개월 내에 헌혈한 적이 있습니까? (성분헌혈은 2주)
-3개월 전쯤 헌혈했나? 보통 일 년에 두 번 정도 헌혈을 하지. 에이즈 걱정 때문이야. 그걸 따로 검사하기는 어색하기도 하고 헌혈하면 무료로 검사를 받을 수 있잖아. 헌혈하면서 혹시나 내가 에이즈에 걸리지는 않았을까, 이런 걱정을 하지. 늘상 다행한 일이였구. 물론 오늘도 별 문제 없을꺼야.
마치 시험을 치루는 듯 긴장감이 있어. 언제나 답은 같지만...
4. 과거 헌혈 후 받아본 검사결과에서 비정상(양성)으로 나온 적이 있습니까?
-언제나 다행이었어. 그래. 부적격 판정은 곧 죽음이니까
문제 푸는 속도가 붙었지.< 십사번, 아래에 해당되는 사항이 있습니까?> < 작은 일번, 최근 3년 사이에 말라리아(학질)에 걸린 적이 있다.> <작은 이번, 최근 3년 사이에 말라리아 유행지역에 거주한 적이 있다>......<십오번 최근 1년 사이에 아래에 해당되는 사항이 있습니까?> < 작은 일번, 약물(마약, 각성제, 스테로이드 등)을 주사했다.> < 작은 이번, 에이즈(AIDS) 검사에서 양성으로 판정 받은 경우가 있다.>
읽는 속도가 갑자기 느려졌어. 그리고 다시 읽었지. <에이즈 검사에서>... <에이즈 검사>... <양성으로 판정 받은 경우가>......- 없다. 없어. 그럼 없고 말고.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꺼고. <작은 이번, 동성이나>...<동성이나...성접촉이> 있었다. 있었다. 있었지만... <위 사항에 해당되는 사람과 성접촉이 있었다.> 있었지만...
- 아니오
- 예 됐습니다. 이 쪽으로 오십시오.
간호사는 아무 의심도 없이 나를 다른 사람과 동일하게 취급해.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에 가능한 일이야. 만약 내가 동성애자임을 알게 된다면 그녀 역시 다른 이들과 똑같이 바라볼꺼야. 어휴 더러워, 하듯. 간음한 여자에게는'죄없는 자가 돌로 치라'던 성서의 이야기는 동성애에 이르러서는 여전히 누구에게든지 돌을 던질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한다니. 이상한 일이지. 세상에서 가장 큰 죄가 뭐냐고 물어본다면 단연 "동성애다"라고 부르짖을 태세야.
-팔을 내미세요.
난 게이인데요. 그래도 좋다면.
-자 주먹을 쥐었다, 폈다, 계속 반복하세요.
갑자기 뛰어들어온 사내가 소리를 쳤어.
-주사기에 에이즈균이 묻어있어...
누워있던 사람은 나 하나였지. 상체를 반 쯤 일어섰을 때, 그 사내는 내 팔에서 주사기를 뽑아들었어. 간호사 한 명이 달려들자, 손으로 심하게 밀어치고 곧장 내게로 달려와서는 마구잡이로 뽑아들었어. 살이 찢어지듯 아파 소리를 질렀지. 하지만 사내의 목소리에 묻히더군. 심하게 충혈된 그의 눈. 그의 눈이 나와 잠시 마주쳤을 뿐 나는 내 팔에 흐르는 피를 지혈하느라, 그는 끌고 내리려는 자들 손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랴 서로 바빴지. 하지만 내 팔에 솜이 얹어진 순간부터 그의 모습을 똑바로 봤어. 그러려고 노력을 했지.
그는 몸부림치면서도 몇 번을 내게 고개 돌리며 외쳤어.
-주사바늘에 에이즈균이 묻어있어. 너도 곧 죽을꺼야. 너도...
정말일까. 두려움이 엄습해오면서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지.
-별 미친 놈 다 보겠네...
바닥 어지럽혀진 물건들을 주으면서 한 간호사가 내뱉은 말이야.
-1회용 주사바늘이니까 걱정 않으셔도 되요. 팔은 괜찮으세요?
나는 인상쓰던 표정을 이내 바꾸면서
-네. 고맙습니다.
를 연발했다.
그 사내를 만나야한다. 그 사내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듯한 눈빛 아닌가. 정말 미쳤다면 저런 광기가 일지는 않았을거다. 그는 분명 강한 분노가 묻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무언가에 겁이 질려 있었다.
-저...
바닥에 내팽겨쳐진 몸. 그는 구겨진 채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고
-저기요...
고개를 들다가 내 시선을 마주치고는 갑자기 내 옷깃을 잡고 울먹인다.
-당신도... 여기서 헌혈을 했죠?
-...네
-당신도 피 검사를 받게 되죠?
-그렇겠조...
그는 다시 낙심하는 듯한 표정이 되어 울음을 터뜨린다.
-에이즈래요.
읇조리는 소리. 잘 안들려.
-네?
그는 소리를 내며 울고 있었다. 그렇게 우는 성인 남자는 찾기 어려운 법. 남자는 남자다워야한다. 남자다움은 어떤 일이 있어도 울면 안되지. 우는 건 나약한 인간들. 여자에게나 어울리는 행동이야.
이봐요 울지 마요. 당신은 남자잖아요.
-내가 에이즈에 걸렸다구요.
-네?
같은 말이지만 좀전과는 다른 의미이다. 처음 물음은 말 자체를 몰랐던 것이고, 이번엔 말 뜻을 모르는 것이다. 에이즈라니. 내가 알고 있는 그 병. 누구나 걸릴 수 있는 흔한 병일지라도 나 만큼은 피해 갈 것 같았던 그 병. 이사람 말대로라면 그 병이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선 이 사람이 제정신인지부터가 궁금해졌다.
정말 그 병에 걸린 것인지.
그리고 그의 말이 맞다면 여기 주사기로부터 옮은 것인지가 중요한 의문이야.
거기까지가 사실이라면 내가 에이즈 공포에서 벗어나기는 어려울 듯 싶어.
그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울음을 금새 그치고 안정을 되찾은 듯 그 자리를 떠나려고 해.
-아이, 저기요.
그는 쳐다보지도 않아.
-어쩌다 그런 일을...
정말 여기서 헌혈하다 걸린건가요? 대답해보세요
-얘기좀 해보세요.
그는 계속 나를 등지며 걸어갔어. 그의 소매를 붙잡았고... 그는 바로 뿌리쳤어.
-놔요. 내 말을 못들었어요? 난 에이즈 환잡니다.
그는 시내 한 복판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민망하게 그를 바라보는 나와는 달리 이제는 당당해진 모습으로 그는 걸어갔어.
-저기요. 우리 잠시 얘기 좀 해요
난 좀 더 정확한 정보가 필요해요.
나 역시 살아야하는 절대적인 의미가 있으므로
그의 걸음은 빨라졌어. 따라 잡을 듯 하면 그는 어느 새 또 한 발 앞서 있었고.
그는 정말 병에 걸린 것인가. 이렇게 날렵하게 걸어가는 것만 봐도 아닐꺼야. 그럼.
아닐꺼야. 그치? 아니라고 말해. 아니라고...
-이봐요, 그만 괴롭혀요.
그는 울고 있었다. 어느새 입을 마스크로 막은 채. '나는 환자가 맞습니다.' 모든 세상의 근심을 안고 있는 것처럼. 슬픈 얼굴. 죽음에 다가선 얼굴을 해가지고는 나에게 괴롭히지 말라니. 지금 나에게 이런 괴로움을 준 사람이 누구인데.
-여보세요.저도... 저도 두려워서 이래요...
누구도 나에게 에이즈란 병을 넘겨주지 않았다고 해도, 이 땅의 수많은 동성애자들처럼 나는 에이즈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동성애자들의 슬픔이다.
첫댓글 동성. 에이즈..
홀수에는 에이즈걸린 이성애자가 짝수에는 동성애자가 화자입니다. 보통 동성애=에이즈라는 시각이 원칙이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겠죠. 오히려 성적 소수자가 이성애자를 동정하고 위로하는 캐릭터가 맘에 듭니다.
짧은 호흡.......긴장감의 연속.....
근데.. 제가 알고 있기론.. 에이즈가 동성애 때문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데... ;;;
동성애 때문은 아니더라도 동성애자=에이즈...는 많은 사람들의 공식으로 남아있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