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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송축하라!
참고말씀: 창18:25; 출34:1,5-7,10; 시3:8; 9:8; 30:5; 32:1-6; 37:1; 51:1,2,7; 55:16; 62:1,2; 68:20; 73:2-14; 91:14; 잠8:17; 애3:22; 겔18:25,29; 호11:9; 마5:48; 6:9; 9:36; 15:32; 요1:12,13; 11:33-35; 롬4:6-8; 8:14,15; 요일1:9
읽을말씀: 시103:1-22
주제말씀: 시103:17,18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곧 그 언약을 지키고 그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첫째, 하나님의 은택을 잊으면 찬양할 수 없습니다(1,2,19-22절).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시103:1,2)
다윗은 자신을 향해 무엇을 명했습니까? 여호와를 송축할 것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절 상) /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2절 상) 즉 자기 속에 있는 모든 것을 향해 여호와를 송축하도록 명한 것입니다.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1절 하)
무엇을 잊지 말고서 그리 하라고 했습니까?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모든 은택입니다.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2절 하) 그동안 받은 은혜를 기억하면서 하나님을 송축하라고 한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은혜를 잊으면 찬양도 끊어지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동안 부어주신 은혜를 망각하면, 그분을 찬양해야 할 이유도 잊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다윗은 3절부터 하나님의 모든 은택을 구체적으로 열거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도 찬양을 회복하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다윗이 했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교회적으로, 민족적으로 부어주신 은택들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떠올리고 세어보며 기록해 볼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한 찬송가의 가사처럼 말입니다.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약한 마음 낙심하게 될 때에 내려주신 주의 복을 세어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 세상 근심 걱정 너를 누르고 십자가를 등에 지고 나갈 때 주가 네게 주신 복을 세어라 두렴 없이 항상 찬송하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받은 복을 세어보아라 주의 크신 복을 네가 알리라 / 세상 권세 너의 앞길 막을 때 주만 믿고 낙심하지 말아라 천사들이 너를 보호하리니 염려 없이 앞만 보고 나가라.’ <새찬송가 429장 ‘세상 모든 풍파 너를 흔들어’>
명심하십시오. 하나님의 은혜는 세어보지 않으면 잊어버리기 쉽고, 이 은혜를 잊어버리면 내 삶에서 찬양의 물줄기도 금세 말라버리게 된다는 점을 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잃어버린 찬양을 회복하기 위해서라도 하나님께 받은 은혜들을 세어보기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본문에서 반복되는 단어들 중 하나는 무엇입니까? 송축입니다. 몇 번이나 등장합니까? 일곱 번입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1,2절) /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20-22절)
그렇다면 ‘송축’이란 무엇입니까? ‘사랑과 감사를 동반한 찬양’으로써, 이것이 피조물인 인간이 가지게 되는 가장 큰 의무임과 동시에 인생의 행복과 축복의 문을 여는 가장 위대한 열쇠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을 찬양하되, 사랑과 감사를 동반한 송축을 올려드리고 있습니까?
둘째, 영적인 것부터 찬양해야 합니다(3-5절).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시103:3-5)
다윗은 하나님의 모든 은택을 열거하되 무엇부터 시작했습니까? 사죄의 은총입니다. 즉 모든 병 고침을 받은 것보다도 먼저 자신의 모든 죄악을 용서받은 것부터 언급한 것입니다.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3절)
어째서입니까? 사죄의 은총이 병 고침 받는 것도 훨씬 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다윗은 평소에도 줄곧 어떤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했습니까? 죄 사함을 받은 자입니다. 즉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가 복이 있다고 계속 강조했던 것입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시32:1,2) / “일한 것이 없이 하나님께 의로 여기심을 받는 사람의 복에 대하여 다윗이 말한 바 불법이 사함을 받고 죄가 가리어짐을 받는 사람들은 복이 있고 주께서 그 죄를 인정하지 아니하실 사람은 복이 있도다 함과 같으니라.”(롬4:6-8)
어째서입니까? 그는 죄 사함을 받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몸소 뼈저리게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내가 입을 열지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빠져서 여름 가뭄에 마름 같이 되었나이다 (셀라)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악을 사하셨나이다 (셀라).”(시32:3-5)
그러면서 언제 회개하라고 했습니까? 주를 만날 기회를 얻었을 때, 즉 죄를 깨달았을 때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경건한 자는 주를 만날 기회를 얻어서(죄를 깨달을 때에) 주께 기도할지라 진실로 홍수가 범람할지라도 그에게 미치지 못하리이다.”(시32:6) 명심하십시오. 죄를 깨닫는 순간이야말로 바로 주를 만날 기회라는 점을 말입니다.
다윗은 또 소원을 이루는 것보다 무엇을 먼저 언급했습니까? 속량, 즉 구원받은 은혜입니다.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4,5절)
어째서입니까? 소원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것이 바로 우리의 생명을 속량 받는 것, 곧 구원받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참고로, 여기서 ‘속량하시고’(히, 가알)는 본래 혈족 관계에 있는 사람이 친척의 소유나 사람을 위하여 배상하고 그것들을 ‘무르는’ 행위를 의미하는데, 여기서는 생명을 파멸에서 건짐 받는 것, 곧 구원 사건을 가리킵니다.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4절 상)
그러고 보니 다윗이 항상 무엇을 갈망하며 또한 찬양하기를 힘썼음을 알 수 있습니까? 구속의 은총입니다. 물론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구원’을 보다 광의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음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구원은(승리는)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시3:8) / “나는 하나님께 부르짖으리니 여호와께서 나를 구원하시리로다.”(시55:16) /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 오직 그만이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원이시요 나의 요새이시니 내가 크게 흔들리지 아니하리로다.”(시62:1,2) /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의 하나님이시라 사망에서 벗어남은 주 여호와로 말미암거니와.”(시68:20)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병 고침 받은 것도 감사하고 소원을 이루는 것도 감사해야 하지만, 그보다도 먼저 우리의 죄 사함 받은 것에 감사하며, 우리의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신 그 은혜를 송축하고 있습니까? 나아가 병 고침을 못 받아도 죄 사함 받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소원이 지지부진해도 구원받은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있습니까?
셋째, 공의의 하나님을 믿고 찬양해야 합니다(6,7절).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시103:6,7)
다윗은 또 무엇을 찬양했습니까? 여호와께서 행하신 공의로운 일들입니다.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6절 상) 즉 누구를 송축한 것입니까? 교만한 자들을 심판하시고 겸손한 자들을 신원하시는 공의의 하나님입니다. “...억압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6절 하)
어째서입니까?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믿는 데서부터 참된 경건 생활이 시작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하다가 낙심하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길과 판단이 공평하지 않다고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너희는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들을지어다 내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겔18:25) / “그런데 이스라엘 족속은 이르기를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아니하다 하는도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의 길이 어찌 공평하지 아니하냐 너희 길이 공평하지 아니한 것이 아니냐.”(겔18:29)
왜 하나님의 판단이 공평하지 않다고 느껴질 때 낙심하게 됩니까? 경건 생활은 항상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에 근거를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하사 의인을 악인과 함께 죽으심은 부당하오며 의인과 악인을 같이 하심도 부당하니이다 세상을 심판하시는 이가 정의를 행하실 것이 아니니이까.”(창18:25) /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심판을 위하여 보좌를 준비하셨도다.”(시9:8)
그러기에 그것이 조금이라도 어긋나기라도 하면 어떻게 됩니까? 의인이라도 실족하고 넘어지고 맙니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시37:1) / “나는 거의 넘어질 뻔하였고 나의 걸음이 미끄러질 뻔하였으니 이는 내가 악인의 형통함을 보고 오만한 자를 질투하여음이로다.”(시73:2,3) / “내가 내 마음을 깨끗하게 하며 내 손을 씻어 무죄하다 한 것이 실로 헛되도다 나는 종일 재난을 당하며 아침마다 징벌을 받았도다.”(시73:13,14)
하나님의 공의가 당장에 실현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죽을 때에도 고통이 없고 그 힘이 강건하며 사람들이 당하는 고난이 그들에게는 없고 사람들이 당하는 재앙도 그들에게는 없나니 그러므로 교만이 그들의 목걸이요 강포가 그들의 옷이며 살찜으로 그들의 눈이 솟아나며 그들의 소득은 마음의 소원보다 많으며 그들은 능욕하며 악하게 말하며 그들의 입은 하늘에 두고(하늘을 대적하고) 그들의 혀는 땅에 두루 다니도다 그러므로 그의 백성이 이리로 돌아와서 잔에 가득한 물을 다 마시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어찌 알랴 지존자에게 지식이 있으랴 하는도다 볼지어다 이들은 악인들이라도 항상 평안하고 재물은 더욱 불어나는도다.”(시73:4-12)
그러니 찬양을 회복하려면 무엇부터 회복해야 합니까? 공평하신 하나님에 대한 믿음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지금도 공의로운 일들을 행하고 계시며, 또한 우리에게 알리고 계시는 것을 믿고 의지해야 할 것입니다.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7절)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지금의 현실만 보고서 주의 길이 공평하지 않다고 낙심하고 원망할 것이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이 반드시 모든 것을 공평하게 이루어주실 것임을 믿고 찬양하고 있습니까?
넷째, 하나님의 크신 인자하심을 깨닫고 찬양해야 합니다(8-12절).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시103:8)
다윗은 본격적으로 무엇을 찬양하기 시작합니까? 자신이 입은 모든 은택(恩澤)입니다. 이것들은 모두 무엇에서 비롯된 것임이 분명 합니까? 하나님의 많은 긍휼과 은혜, 노하기를 더디 하심, 풍부한 인자하심입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8절)
한마디로 무엇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여호와의 인자하심입니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11절) /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17절)
그런데 본문은 구약성경의 어느 곳을 연상하게 합니까? 하나님께서 친히 시내 산에서 반포하신 내용입니다. 아마도 다윗은 출애굽기 34장 5절 이하를 묵상하다가 이와 같은 사실들을 깨달은 듯합니다.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에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여호와의 이름을 선포하실새 여호와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가시며 선포하시되 여호와라 여호와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 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리라 그러나 벌을 면제하지는 아니하고 아버지의 악행을 자손 삼사 대까지 보응하리라.”(출34:5-7)
당시 상황은 어떤 상황이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의 실패로 첫 번째 돌판이 깨뜨러진 후, 하나님께서 두 번째 돌판을 주시면서 그들과 다시 언약을 세우시는 상황이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돌판 둘을 처음 것과 같이 다듬어 만들라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있던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출34:1) /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언약을 세우나니...”(출34:10 상)
왜 굳이 다윗은 그때의 상황을 묵상했던 것일까요? 백성들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다시 은혜를 베푸시는 그때야말로 하나님의 인자하심의 진면목(眞面目)이 그대로 다 드러난 상황이 또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크신 인자하심은 특히 무엇에 대하여 두드러집니까? 우리의 죄와 허물입니다. 사실 우리는 허물 많고 또 연약하여 매일 같이 실수하고 넘어지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런 우리에 대하여 어떻게 나타납니까?
① 자주 경책하지 않으심
하나님의 풍부한 인자하심은 우리를 자주 경책하거나 꾸짖지 않으심으로 나타납니다.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9절 상) 어째서입니까? 긍휼이 많으시기 때문이요 그 인자하심이 풍부하기 때문입니다.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8절)
만일 하나님이 자주(그때마다) 경책하셨더라면 우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분명 진멸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분의 경책 앞에 당당히 서 있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애3:22)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혹 하나님이 자주 경책하십니까? 혹 우리가 범죄 할 때마다 우리를 경책하십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너무 가끔(?) 경책하십니다. 누구보다도 우리의 약함을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②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심
하나님의 풍부한 인자하심은 노를 영원히 품지 않으심으로 나타납니다.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9절 하) 어째서입니까? 하나님은 노하기를 더디 하실 뿐만 아니라,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8절 중) 설령 품을 품으셨더라도 아주 잠깐이시기 때문입니다. “그의 노염은 잠깐이요 그의 은총은 평생이로다 저녁에는 울음이 깃들일지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시30:5)
만일 하나님께서 사람처럼 노를 영원히 품고 계신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요? 우리 중 누구도 살아남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나의 맹렬한 진노를 나타내지 아니하며 내가 다시는 에브라임을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이요 사람이 아님이라 네 가운데 거룩한 이니 진노함으로 네게 임하지 아니하리라.”(호11:9)
우리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혹 하나님이 우리를 향해 오랫동안 노를 품고 계시며, 우리를 향해 영원히 진노하고 계십니까? 아닙니다. 노하셨더라도 아주 잠깐뿐입니다. 어째서입니까? 그분은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③ 우리의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않으심.
하나님의 풍부한 인자하심은 우리의 죄를 따라 처벌하지 않으심, 즉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 않으시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10절)
어째서입니까?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매우 크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11절) 그 인자하심이 매우 풍부하시기 때문입니다.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8절 하)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행한 죄악대로’ 보응(報應)하신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합니다. 오래전에 우리는 이미 진멸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떻습니까? 여전히 하나님이 ‘우리의 죄를 따라’ 처벌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고스란히 갚으신다고 생각하고 있습니까? 원컨대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크신 그 인자하심을 깨닫고 찬양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④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심
하나님의 풍부한 인자하심은 우리의 죄과를 멀리 옮기심으로 나타납니다. 즉 우리가 지은 죄의 완전한 소멸과 완전한 용서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12절)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하기만 하면, 이 같은 용서를 받을 수 있습니까? 회개입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1:9) 즉 우리가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하나님은 그 인자를 따라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죄악을 지워주십니다. 말갛게 씻어주시며 깨끗이 제거해 주시는 것입니다. 눈보다 더 희게 만들어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나의 죄악을 말갛게 씻으시며 나의 죄를 깨끗이 제하소서.”(시51:1,2) /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시51:7)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크신 인자하심이 특히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하여 매우 두드러진다는 점을 깨닫고, 하나님을 더욱 찬양하고 있습니까? 허물 많고 연약하여 매일 같이 실수하고 넘어지기 쉬운 우리라 할지라도, 자주 경책하지 않으시고, 노를 오래 품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를 따라 그대로 갚지 않으시며, 우리의 죄과를 완전히 제하시는 그 인자하심을 깨닫고, 그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고 있습니까?
다섯째, 하나님의 부성애를 깨닫고 찬양해야 합니다(13-18절).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시103:13,14)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허물 많은 우리를 용서하시는 데서 그치지 않고, 더 나아가 무엇에까지 이릅니까? 부성애(父性愛)입니다. 또한 어디에서 그 클라이맥스(climax)에 이루게 됩니까? 아버지가 자식을 대함같이 긍휼히 여기시는 그 인자하심입니다.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13절)
하나님은 어떤 자들에게 이 같은 부성애를 드러내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13절 하) /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에게...”(17절 상) 언제부터 언제까지 나타내십니까? 영원부터 영원까지입니다.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17절 중)
즉 하나님의 언약을 지키고 그분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 나타내십니다.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18절) 그분의 말씀을 성실하게 쫓고 행하며 사랑하는 자에게 언제나 그리하시는 것입니다.
어째서입니까? 하나님은 언제나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건지고, “하나님이 이르시되 그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그를 건지리니...”(시91:14 상) 당신을 사랑하는 자들을 사랑하시며,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잠8:17 상) 당신을 찾는 자들을 만나주시기 때문입니다.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하)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왜 이 같은 부성애에서 절정을 이루게 됩니까? 하나님은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는 자녀가 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친밀하고도 이상적인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그가 만일 죄를 범하면 내가 사람의 매와 인생의 채찍으로 징계하려니와.”(삼하7:14) /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8:14,15)
그러니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특권이자 권리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2,13) /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 /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6:9)
이 같은 하나님은 우리의 무엇을 친히 다 아십니까? 우리의 체질(體質)입니다.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14절 상) 즉 우리가 먼지뿐임을 기억하시고,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14절 하) 우리의 날이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는 들의 꽃과 같음을 아십니다.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15,16절)
아시기만 하십니까?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십니다. “...긍휼히 여기시나니.”(13절 하) 즉 우리의 한계와 연약함을 아시고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입니다.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9:36) /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 이르시되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마15:32) / “예수께서 그가 우는 것과 또 함게 온 유대인들이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이르시되 그를 어디 두었느냐 이르되 주여 와서 보옵소서 하니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요11:33-35)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부성애를 깨닫고 찬양하고 있습니까? 즉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우리를 긍휼히 여기시는 그 인자하심을 깨닫고 그분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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