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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5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루카 9,1-6
쉽게 털고 일어설 수 있는 사람들만이 아는 법칙
언젠가 한 여자 청년이 남자친구와 헤어졌다고 말을 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남자친구가 너무 착해서 그랬다는 것입니다.
연락 없이 다른 사람을 만나도 다 이해해주고 자기가 하자는 대로 다 따라주는 것이 못마땅해서 싸우다가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여자 청년은 남자가 착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일까요?
“내 허락 없이 어떤 남자도 만나지 마라, 응? 오빠가 전화하면 재깍재깍 받고!”
“오늘은 오빠가 먹자는 거 먹고, 오빠가 보고 싶은 영화 보자.”
“내일 시간 좀 내라, 바다나 보러 가자.”
이런 남자를 소위 나쁜 남자라고 합니다.
아마도 이런 남자를 만나 결혼해서 살아보면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여자는 이상하게도 이런 나쁜 남자에게 끌리게 됩니다.
항상 저자세로 다 이해만 해 주고 상대의 편의만 봐주려고 하는 남자는 왠지 매력이 떨어지게 됩니다.
거미는 이미 자기 거미줄에 걸린 하루살이들에겐 관심이 없습니다.
어떻게 거미줄을 쳐서 더 큰 먹이를 잡을지가 관심사입니다.
착한 남자는 이미 걸려든 하루살이와 같고 나쁜 남자는 걸려들지 않는 잠자리와 같습니다.
이미 잡힌 하루살이에게는 관심이 줄어들고
잡히지 않은 것에 더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먼저 제자들에게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십니다.
그리고는 지팡이도 보따리도 돈도 여벌 옷도 가져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그냥 자신을 받아들이는 집에 들어가 신세를 지라고 하십니다.
따라서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집은 제자들에게 옷과 음식과 돈을 대주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사람들이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는 그 고을을 떠나면서 경고의 표시로 발의 먼지를 털어버리라고 하십니다.
성경에서 ‘먼지’는 가장 보잘것없는 것 중의 보잘것없는 것의 표징입니다.
이렇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먼지와 같은 당신들에게 주님께서 주신 은총을 나누어 주려고 하였지만 받으려 하지 않았기에 나는 당신들로부터 더럽혀진 나 자신을 씻어버립니다.
그러나 당신들이 먼지로 남아있게 되는 것에는 더 이상 내 책임이 없습니다.”
선교하다가도 끝까지 거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툭툭 털고 나와 버리십시오.
그들은 저자세로 계속 자신을 대해주기를 원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려는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지, 그들에게 비굴해질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만큼하고 아니면 툭툭 털고 일어나는 것을 보면 그들도 이런 자세에서 우리가 무언가 대단한 것을 지니고 있음을 짐작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내가 시도하는 데에서 집착이 사라지려면 알아야 하는 것이 ‘평균 성공의 법칙’입니다.
앨런 피즈 『결국 해내는 사람들의 원칙』에 ‘평균 성공의 법칙’이 나옵니다.
우리가 목적을 가지고 행하는 모든 활동에는 평균 성공률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가 생명보험 영업하던 시절 그는 1:56이라는 평균 성공이율이 적용됨을 발견했습니다.
그가 거리를 지나는 사람에게 “보험에 드시겠습니까?”라고 물어보면 56명당 1명은 “네”라고 대답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이 질문을 하루에 168번 하면 보험 계약을 하루에 3건씩 체결하게 되고, 그러면 보험 영업의 세계에서 상위 5퍼센트에 들게 됩니다.
앨런 피즈는 이를 아버지로부터 배웠다고 합니다. 그가 11세 때 집집이 다니며 고무 스펀지를 개당 20센트에 팔았습니다.
그때 평균 성공 비율은 10:7:4:2였습니다.
그는 학교가 끝나고 오후 4시부터 6시까지 방문판매를 하였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10곳마다 7곳이 문을 열었고,
그중 4곳이 나의 준비된 상품 소개를 들어주었으며, 그중 2곳이 고무 스펀지를 샀습니다.
다시 말해 10곳당 평균 판매액이 40센트였습니다.
그는 1시간에 평균 30곳을 돌았고, 2시간 동안
평균 12개를 팔아 평균 2달러 40센트의 판매실적을 올렸습니다.
1962년 당시 11세의 호주 소년에게 2달러 40센트는 큰돈이었다고 합니다.
그는 자신이 문을 두드리는 10집당 40센트씩 번다는 것을 알고는 문을 열지 않는 3곳과 그의 말을 듣기도 전에 관심 없다며 문을 닫는 3명과 구매를 거절하는 2명에 대한 걱정이 없어졌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것은 10곳을 두드리면 40센트를 번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이 평균의 법칙을 모르면 다음에 일어날 두려움 때문에 아무것도 못 하게 됩니다.
10대 시절 앨런은 방과 후에 무작위 전화 영업으로 냄비와 팬, 리넨과 담요를 팔았습니다.
이때도 당연히 평균의 법칙을 활용했는데, 활동 30여 일 만에 발견한 평균 성공 비율은
5:3:2:1이었습니다.
전화를 받는 5명 중 3명이 그를 만나는 데 동의했고 3개의 약속 가운데 제품 소개까지 성공하는 경우는 2번이었으며 2명 가운데 1명꼴로 물건을 구매해주었습니다.
그가 이러한 법칙을 쓰는 이유는 성공에 집중하여 실패가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사람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시도 자체를 하지 못합니다.
앨런은 나중에 보험 영업사원이 되는데 이를 이용하여 가장 빠른 기간에 호주에서 가장 돈을 많이 버는 보험회사 직원이 되었습니다.
예수님도 할 만큼 하시고 유다에게 “이제는 네 할 일을 하여라.”라고 하시며 그를 놓아버리십니다.
그를 영원한 지옥으로 넘겨버리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또한 마지막으로 베푸는 하나의 경고요 초대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는 그리스도께 후회하고 돌아왔다면 그리스도는 기쁜 마음으로 유다를 맞아들이셨을 것입니다.
은총은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은총을 받고 세상에 전해주기 위해서 파견받은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주는 사람에 합당한 자세를 지닐 줄도 알아야겠습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25일 [연중 제25주간 수요일]
복음: 루카 9,1-6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오늘 우리 교회의 모습!
여름 내내 신앙학교 운영하느라 땀 흘리며 쌩고생한 형제들과 소풍을 왔습니다.
어떻게든 형제들 입에 뭐 하나라도 더 넣어주려고, 산 너머 갯바위 포인트를 다녀왔습니다.
요즘 물고기들도 약아 빠져 사람들 발길 닿는 곳에는 얼씬도 하지 않습니다.
손맛을 보려면 발품을 팔아야 합니다.
이것 저것 챙기다 보니 짐이 산더미입니다.
그걸 이고 지고, 깎아지르는 비탈길을 오르락내리락했습니다.
포인트에 겨우 도착했더니, 이번에는 장대비가 인정사정없이 내리쳤습니다.
마땅히 피할 곳도 없고, 이고 지고 온 것을 다시 챙겨 산길을 오르며, 마음속으로 크게 후회를 했습니다.
어디 다닐 때는 어떻게든 짐을 최소화해야 되는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목 실습을 떠나는 제자들을 향해 훈화 말씀을 건네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전도 여행용 짐을 꾸리는 방식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것이기에, 이를 ‘여장 규범’이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너무 지나친 요구를 하신다는 생각을 떨칠수가 없었습니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 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루카 9,3)
예수님의 훈시 말씀을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솟구쳤습니다.
‘그럼 대체 어쩌라는 말씀인가요? 빵도 돈도 안 챙기면 굶어 죽으라는 말인가요?
여벌옷도 한 벌 안 챙기면, 만나는 사람들 다 도망갑니다.’
당시 여행 중에 강도나 산짐승들을 만날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방어용 지팡이 하나는 기본이었습니다.
그런데 최후의 생존 수단인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뿐만 아닙니다.
긴 여행길에 많은 돈은 아니어도 만일을 대비한 비상금은 필수입니다.
그런데 비상금 한푼 조차 지니지 말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에게 럭셔리한 부자의 모습이 아니라 가장 가난한 자의 모습으로 떠날 것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전도 여행길에 오르는 사도들이 자신의 힘이나 세상의 힘을 믿기 보다는 주님 섭리의 손길에 맡기라고 당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 유사한 말씀이 ‘열두 사도의 가르침’ 11장 6절에 제시되고 있습니다.
“사도가 떠날 때에는 다른 곳에 유숙할 때까지 필요한 빵 외에 다른 것은 받지 말아야 합니다.
만일 사도가 돈을 요구한다면 그는 거짓 예언자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사목자들이 교우들로부터 생활비를 지원받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 자신은 스스로 천막 짜는 노동을 해서 생활비와 전도 여행 경비를 마련했습니다.
부끄러운 마음으로 오늘날 우리 교회와 수도회를 돌아봅니다.
예수님의 여장 훈시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모습의 부유한 모습입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는 청빈의 삶, 무방비의 삶, 머리 둘곳 조차 없는 떠돌이로서의 삶을 포기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히 정착하고 안주했으며, 충분한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9월25일 [제25주간 수요일]
루카 9,1-6
열두 제자를 파견하시다.
‘가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는 이미 충분히 가난하다.” 라고 생각하면서 자신의 일이 아니라 남의 일로만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이천 여 년 전의 가르침은 지금 이 시대의 상황과는 잘 안 맞는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고, “마음만 가난하면 된다.” 라고 생각하면서 ‘몸의 가난’을 실천하는 일을 외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들은 언제나 공동체를 지향하는 가르침들이고, 영적인 가르침이면서 동시에 실생활에도 적용되는 가르침들이고, 마음과 몸으로 함께 실천해야 하는 가르침들입니다.
“나는 이미 충분히 가난하다.” 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자신보다 더 가난한 이들을 생각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요즘에 교회 안팎에서 가난한 사람들과 부유한 사람들 사이의 양극화 문제가 자주 거론되고 있는데, 우리는 ‘나의 가난’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가난’도 생각해야 합니다.
(내가 잘 사는 것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잘 사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고 바꿔서 말할 수도 있습니다.)
‘가난’ 자체는 극복해야 할 고난입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자주 강조하신 것은, 부유한 사람들과 가난한 사람들 사이의 양극화가 ‘죄’와 ‘악’으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는 십자가를 짐으로써 극복됩니다.
‘가난’도 가난에 관한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실천하려고 노력할 때 극복할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가르침을 이천 여 년 전의 낡은 가르침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믿음 없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곳에, 우리와 함께 ‘살아 계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마음만 가난하면 된다고 주장하면서
‘몸의 가난’을 실천하는 일을 외면하는 것은 ‘위선’입니다.
<이것은 ‘깨끗함’에 관한 가르침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겉만(몸만) 깨끗하면 깨끗한 것이라는 사고방식에 빠져 있는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신 일이 많은데,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께서, 마음이 깨끗하면 몸은 더러워도 된다고 가르치신 것은 아닙니다.
몸과 마음이 똑같이 깨끗해야 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가난을 실천하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파견하신 이야기를 보면,
권한과 임무를 주시면서 특별히 지시하신 말씀은 바로 ‘가난’입니다.
예수님도 제자들이 성공적으로 임무를 수행하기를 바라셨습니다.
세속 사람들의 사고방식으로는, 성공적인 임무 수행을 바라신다면 제자들에게 더 많은 활동비를 주시는 것이 옳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활동비를 전혀 주시지 않았고, 또 ‘빈 손’으로 가라는 지시까지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신 ‘예수님의 깊은 뜻’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 뜻을 깨닫는다면 능동적으로 실천해야 합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어떻게든 그 지시의 실천을 회피하려고 하는 것은 사실상 예수님의 지시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루카 9,1-6).”
제자들이 받은 임무는 ‘복음 선포’입니다.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은 복음 선포에 속한 일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말’로도 복음을 선포했고,
마귀를 쫓아내고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을 통해서도 복음을 선포했습니다.)
‘빈 손’으로 떠난 일은 ‘삶’으로 복음을 선포한 일입니다.
‘복음 선포’를 ‘하느님 나라의 부’를 선포하는 일로 생각할 수도 있는데, ‘하느님 나라의 부’는 ‘하느님 뜻에 합당한 삶’을 통해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
‘빈 손’은 세속 재물을 버리고 ‘하느님 뜻 실천’으로 가득 채운 손입니다.
‘빈 손’으로 떠나라는 지시는 “걱정하지 마라.” 라는 말씀에(루카 12,22-32) 연결됩니다.
만일에 활동비와 생활비 걱정을 하면서 복음을 선포한다면, 그 복음은 ‘기쁜 소식’이 아니라 ‘걱정스러운 소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빈 손’으로 떠나라는 지시는,
모든 걱정을 내려놓고 ‘빈 마음’으로 떠나라는 지시이기도 합니다.
만일에 아무런 걱정을 할 필요 없이 활동비와 생활비를 많이 가지고 간다면, 그 돈에 마음이 쏠릴 수밖에 없습니다.
<가진 돈이 많다면 돈을 도둑맞지 않으려는, 또는 잃어버리지 않으려는 마음이나 걱정이 생길 것이고, 그 마음과 걱정은 복음 선포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됩니다.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루카 12,34).”>
예수님께서 나중에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를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없이 보냈을 때,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었느냐?” 라고 물으신 일이 있는데, 그때 제자들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루카 22,35).
부족함 없이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으려면, 모든 것을 비워야 합니다.
마음으로나 몸으로나 ‘비어 있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은 “누군가가 너희에게 숙식을 제공하거든”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제자들을 먹이시는 방법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하느님께서 제자들을 도와주실 때, 직접 도와주시거나 천사들을 보내서 도와주실 수도 있고, 마음 착한 사람들을 통해서 도와주실 수도 있습니다.
(그 ‘마음 착한 사람들’이 천사입니다.
그들 자신들은 의식하지 못하더라도.)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라는 말씀은, “더 좋은 대접을 받고 싶은 욕심으로 옮겨 다니지 마라.(주는 대로 먹어라.)” 라는 뜻입니다.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라는 말씀은,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을 경고하라는 지시입니다.
사실 ‘복음 선포’는 ‘심판 선포’를 겸하고 있습니다.(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내린 이 모든 지시는, 제자들만 실천하면 되는 일이 아니라, 모든 신앙인이 실천해야 할 일들입니다.
모든 신앙인은 각자의 자리에서 한 사람의 선교사가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