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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로몬의 잠언
잠 1:1-6
1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2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3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4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5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6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잠 1:1-6 / [이 책에서 무엇을 배울까] 다윗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임금인 솔로몬이 지은 이 잠언집은 우리에게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치고 있다. 2-3) 이 책에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가르침은 사람이 어떻게 해야 올바르게 살아가며 어떻게 해야 바른길을 걸어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또한 인생 경험이 풍부한 어른들이 하신 이 말씀들은 지혜라는 보화가 이런 것이로구나 하는 깨달음도 얻게 해줄 것이다. 4) 세상일을 다 겪지 못한 젊은이가 이 말씀을 들으면 생각이 깊어지고 슬기로워질 것이며 5) 인생을 많이 살아온 이라 하더라도 이 말씀을 들으면 앞으로 남은 인생을 어떻게 잘 마무리 지을까 하는 점을 배울 것이다. 6) 이 잠언집을 읽는 사람은 생각이 깊은 스승이 격언과 상징과 비유와 훈계로 하시는 말씀을 익히 깨달을 수 있으리라.
잠언은 솔로몬을 비롯한 지혜로운 자들이 지혜를 추구할 것을 권면하며 지혜로운 삶을 살기 위한 실제적인 교훈을 주는 성경입니다. 잠언은 크게 세 부분(1-9장, 10-29장, 30-31장)으로 구분하는데 그 중 전반부(1-9장)은 소위 ‘젊은이를 위한 잠언’이라 불리고 있습니다.
솔로몬의 잠언(1) 솔로몬은 다윗의 아들이며, 이스라엘의 세 번째 왕입니다. 솔로몬은 잠언서에 기록된 내용보다 더 많은 삼천 잠언을 말하였고, 그가 지은 노래는 일천 다섯이었습니다(왕상 4:31-32). ‘잠언’은 ‘우월함’이란 의미로 격언, 속담, 비유를 말합니다. 솔로몬의 지혜는 동양 모든 사람의 지혜와 애굽의 모든 지혜보다 뛰어나 천하 모든 왕 중에서 최고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지혜를 들으러 많은 왕이 찾아왔습니다. 이 모든 지혜는 하나님께서 지혜와 총명을 주신 결과였습니다(왕상 4:29-34). 지혜와 총명의 복은 솔로몬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누구든지 지혜가 필요하면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였습니다(약 1:5).
잠언을 쓴 목적(2-4) 먼저 솔로몬은 잠언의 목적을 밝히고 있습니다. 잠언은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고,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정의와 공평과 정직을 지혜롭게 실천하도록 교훈을 받게 하며, 어리석은 사람을 슬기롭게 하여 주며, 젊은이들에게 지식과 분별력을 갖게 하여 주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잠언서에서 말하고자 하는 ‘지혜’에는 삶의 전반에 걸쳐 적용되는 실제적이고 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종교적인 측면까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는 단순한 지식이 아닌 신앙적이며 영적이며 실천적인 통찰력입니다.
잠언의 유익(5-6) 잠언은 지혜 있는 자가 들을 때 학식이 더하며, 명철한 자는 지략이 더하는 시너지를 내게 할 것이며, 지혜로운 사람의 말씀과 이해하기 어려운 말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될 것이라 했습니다. 잠언은 어리석은 자의 계략이나 유혹에 쉽게 넘어가지 않고 피할 수 있는 능력을 줄 것이며, 성숙하지 못하거나 경험 부족으로 경솔하게 행동할 수 있는 자에게 전인적이며 체험적인 지식을 제공합니다.
적용: 잠언을 읽을 때 지혜를 얻게 하고, 구하는 자에게 꾸짖지 않고 후하게 주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합니다(약 1:5). 오늘부터 아니 지금부터 시작합시다.
누군가 당신에게 어떤 일을 해낼 수 있느냐고 물어 올 때마다 확실하게 해낼 수 있다고 말하라. 그 다음 어떻게 그 일을 해낼 수 있을지 부지런히 고민하라.- 시어도어 루즈밸트.
기회는 준비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찾아온 기회를 놓치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기회 앞에서 망설여서는 안 됩니다. 당신에게 기회가 찾아왔다는 것 자체가 충분히 준비되어 있고 그것을 능히 해낼 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마땅히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쌓아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분별하며 죄를 분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부족하여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악한지 분별하지 못하는 지혜 없는 자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 설 교 >
진짜 잘 사는 웰빙의 길
잠언 1:1-6 / 찬송 202장 / 서울산정현교회
사람은 누구나 한 번뿐인 인생을 잘 살고 싶어 합니다. “참 잘 살았다”는 소리를 듣고 싶고 성공한 인생을 살기를 원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계발을 위한 책을 읽기도 하고 현인들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면서 나름대로 인생을 잘 살기 위한 방법을 찾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사람들의 이런 소망을 충족시켜줄 내용을 이미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말씀이 바로 잠언입니다. 잠언은 어떻게 사는 것이 진짜 잘 사는 웰빙(wellbeing) 인지 가르쳐줍니다.
우선 잠언은 ‘지혜의 책’입니다. 잠언은 히브리인들이 ‘지혜’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하는 솔로몬이 기록했습니다(1절). 하지만 솔로몬의 잠언만이 아니라 아굴과 르무엘의 잠언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훗날 이렇게 수집과 편집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솔로몬의 잠언이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은 ‘지혜’하면 항상 떠오르는 인물인 솔로몬의 지혜를 배울 수 있는 책입니다. 물론 그 지혜는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잠언을 읽으며 솔로몬의 지혜,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진짜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단지 인간의 처세술이나 세상에서 성공하는 법이 아니라 정말 하나님의 뜻을 따라 행복하게 사는 길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따라서 잠언을 읽으면 인간의 영과 육에 궁극적으로 유익이 되고 생명을 얻게 하는 진리와 깨우침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 서론이 오늘 본문 2-6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 2-6절은 잠언의 주제와 기록 목적을 알려줍니다. 한 마디로 잘 사는 길을 알려주기 위해 기록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언급되어있는 ‘지혜’, ‘훈계’, ‘명철’, ‘의’, ‘공평’, ‘정직’, ‘슬기’, ‘지식’, ‘근신’, ‘학식’, ‘지략’ 이런 것들은 잠언에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단어들입니다. 이 단어들은 참으로 균형 잡힌 인격이 무엇인지를 배워가도록 암시해줍니다. 우리가 잠언을 읽으며 이처럼 균형 잡힌 인격을 가진 사람들로 한 걸음 나아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읽은 본문은 잠언의 서론 격인데 우선 2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만이 인생에 대한 바른 통찰력과 방향을 제시해 준다고 가르쳐줍니다. (2절)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여기서 ‘지혜’는 히브리어로 ‘호크마’입니다. 호크마, 즉 지혜는 잠언서의 핵심 주제입니다. 지혜는 일반적인 의미로는 삶 전반에 걸쳐 적용되는 포괄적인 삶의 지침 내지는 통찰 같은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호크마(지혜)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호크마(지혜)는 ‘하나님께 이르는 바른길’, ‘옳고 그름에 대한 분명한 통찰력’ 이런 내용을 강하게 담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잠언을 읽고 배워야 하는 이유입니다. 세상의 어떤 지식과 지혜와 비교할 수 없는 잠언만의 유익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잠언은 세상 수많은 격언과 다른 독특성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이 지혜를 얻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올바른 방향을 알 수 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른 삶을 살 수 있습니다.
또한 본문 3절에서는 우리 인생을 의와 공평과 정직의 길로 인도해 준다고 알려줍니다. (3절)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하나님의 지혜는 세상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세속적인 지혜와 다릅니다. 보통 시중에 나온 책들이나 사람들의 관심을 보면, 어떻게 하면 돈을 좀 더 잘 벌고, 건강하고, 성공할까에 집중되어 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솔로몬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지혜는 그와 다릅니다. 어떻게 하면 좀 더 의롭고 정직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는가에 대해 알려주겠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서 누구나 공감하겠지만 사람들은 공의, 정의, 정직 등 이런 삶을 무척이나 갈망하면서도 정작 현실에서는 이런 것과 반대로 부와 명예와 세속적인 성공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세상을 보면 편법을 쓰거나,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현혹해서라도 성공하는 것이 똑똑하고 지혜로운 것처럼 분위기를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사람들이 지혜라고 말하며 얻기를 원하는 것을 구하기보다 하나님이 가르치는 지혜를 배우는 데 열심을 내야 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악을 버리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선을 따르는 것이 나중에는 진짜 성공이며 복을 받는 삶인 것을 배우고 깨달아야 합니다.
이런 참 지혜와 명철의 말씀을 구비한 자는 어떤 위기가 닥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5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요,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이 지혜를 가까이하고 구하는 자는 학식이 더해집니다. 또한 지략을 얻게 됩니다. 여기서 학식과 지략은 풍부하게 축적된 지식과 인생에 닥치는 문제를 풀어가는 능력을 뜻합니다. 주변을 보면 아무리 세상에서 똑똑해도 인생의 문제 앞에서 좌절하거나 무너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의사, 교수, 변호사, 사장... 겉으로 보기엔 성공한 사람 같은데 너무 어이없이 무너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 자는 단순히 지식이 아니라 인생의 수많은 시련과 난관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헤쳐나갈 힘을 발휘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주신 위로부터 난 지혜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잠언은 단순히 세상의 현인들이 말해온 금언의 한 종류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참 지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길을 가도록 우리를 인도해 갈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바른길을 보여줄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한 번뿐인 자신의 인생을 행복하게 잘 살기를 원합니다. 웰빙하고 싶어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 길을 알려주십니다. 잠언의 말씀을 읽고 깊이 묵상하며 우리가 참 지혜를 얻고 행복한 웰빙의 삶을 살아가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가정의 고통과 회복
잠 1:1-6 / 당진성결교회 / 우경식 목사
가정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최초의 기관입니다.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은 행복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가정이 불행한 이유는 가정에 고통을 주는 요소가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보다 가정의 고통을 이해하고, 고통의 요소를 제거함으로 가정의 행복을 회복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성경 잠언서는 무엇을 지적하며 권면하고 있는 지 살펴보고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1. 부부의 경우
남편의 고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아내의 좋지 못한 성격문제, 즉 다투며 성내는 것입니다(잠19:13; 21:19; 25:24). 둘째는 아내가 미련하기 때문입니다(잠14:1). 셋째는 아내가 살림하는데 있어서 게으르고, 가정경제와 관련하여 유능하지 못한 경우입니다(잠12:4; 잠31장). 성격이 안 좋은 아내와 사는 남편을 위로합니다. 아내는 부지런하고 유능한 살림꾼이 되어 남편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아내가 되기로 결단할 것을 권면합니다.
아내의 고통이 있습니다. 그 특징은 남편의 좋지 않은 성격이나 무능함에 있지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아내를 힘들게 하는 근원적인 고통이 있음을 잠언서는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남편이 나이든 아내에게 싫증난 경우입니다(잠5:18-19). 자신이 나이가 들어감으로 더 이상 남편으로부터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고통입니다. 둘째는 남편이 다른 여자와 바람이 난 경우입니다(잠6:32-35). 이런 여인이 있다면 신랑되신 예수 안에서 위로합니다. 남편에게는 아내 사랑하는 마음을 변하지 말며, 간음하지 않을 것을 권고합니다.
2. 부모와 자녀의 경우
부모의 고통이 있습니다. 잠언은 자녀가 어릴 때보다는 성장한 후에 부모의 고민이 더 많음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아버지의 훈계를 업신여기는 것입니다(잠 15:5). 둘째는 어머니를 무시하고 함부로 대하는 것입니다(잠 15:20). 셋째는 부모의 소유를 도둑질하는 것입니다(잠 28:24). 부모의 소유가 당연히 내 것인양 생각하는 것도 잘못된 재물관입니다. 넷째는 좋지 못한 인간관계를 맺는 것입니다(잠 28:7). 다섯째는 연로한 부모에게 불효하는 것입니다(잠 19:26). 장성한 자녀에게는 부모를 존중하고 공경할 것을 권면합니다.
자녀의 고통이 있습니다. (잠언서에는 무모의 고민만이 나오고 자녀의 고민은 나오지 않습니다.) 신약성경에서 자녀의 고통은 부모에게서 받은 상처로 인한 분노심의 고통입니다(엡 6:4). 이 고통을 예방하기 위해서 부모는 무엇보다 자녀를 어릴 때부터 성경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해야 합니다(엡 6:4). 끊임없이 눈물어린 기도를 올려야 합니다(눅 23:28). 예수님의 성육신의 모범을 따라 소통해야 합니다(요 1:1,14). 끊임없이 생각과 정보를 공유하시기 바랍니다.
3. 형제 및 친척의 경우
이들에게도 고통이 있습니다. 첫째는 화해하기를 거절하는 것입니다(잠 6:19). 이 말이 담고 있는 상황은 형제들이 법정에까지 서게 된 경우를 말합니다. 이런 행위는 하나님이 혐오하는 것이므로 중단할 것을 요청하고 있습니다. 둘째는 도움을 외면하는 것입니다(잠 27:10). 이것은 어려울 때에 형제를 찾아갔으나 괄시당하고 오히려 이웃에게서 도움을 받는 경우를 의미합니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형제는 비록 자신을 외면해도 도움을 주는 이웃이 있다는 사실로 위로를 받습니다.
사랑하는 애독자 여러분,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각자의 가정을 잠언의 말씀을 통하여 점검해보시기 바랍니다. 고통과 불행의 요인을 제거하시기 바랍니다. 남편은 남편답게, 아내는 아내답게, 부모는 부모답게, 자녀는 자녀답게, 형제자매는 형제자매답게 회복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땅의 형통함으로 충만한 가정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솔로몬의 잠언
잠 1:1-6 / 신윤식 목사
아가서의 주제가 사랑이라는 것은 아가서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언급될 정도로 사랑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잠언서는 어느 하나를 주제로 말하기가 모호하다는 느낌이 있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잠언이 어느 하나의 주제를 가지고 흘러간다기보다는 마치 세상의 삶에 있어서 필요하고 유익한 것을 가르치는 교훈과 교양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 때문입니다. 이 때문에 잠언은 어느 성경보다 더 심한 왜곡과 오해로 해석되고 있는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잠언이 무엇을 주제로 하는 내용인지는 잠언의 시작과 마지막 결론에서 잘 드러납니다. 7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라고 말하는 것처럼 솔로몬의 잠언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이 잠언의 주제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잠언이“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잠 31:30-31)라는 말로 마무리되는 것으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잠언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을 주제로 하여 흘러가고 있음을 생각하지 않기에 문장 하나하나를 별개의 것으로 여기면서 결국 삶에 대한 지침서처럼 왜곡하여 해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솔로몬의 잠언을 대할 때 주의해야 하는 점입니다. 잠언은 우리를 교훈하기 위한 교양서가 아니고 삶을 위한 지침서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또 한편으로는 잠언을 이해하기 힘들게 하는 이유가 됩니다. 도무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무관한 것처럼 보이는 내용이 태반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본다면 잠 15:22절에서“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무너지고 지략이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라는 내용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과 무슨 연관이 있을까요? 회사를 경영하는 사람이라면 모든 일을 독단적으로 결정하는 것보다 여러 사람과 의논하는 것이 경영에 도움 된다는 것을 우리가 모르지 않습니다. 특별히 지혜라고 할 것도 없습니다. 믿음과 관계없이 거의 모든 사람이 알고 있고 인정하는 내용입니다. 이것을 믿음의 시각에서 바라보며 세상이 알지 못하는 지혜로 해석해야 하기에 어렵다는 것입니다.
“유순한 대답은 분노를 쉬게 하여도 과격한 말은 노를 격동하느니라”(잠 15;1)고 말하는 이런 내용도 신자는 늘 유순하게 말해야 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겠지만 그것을 기독교만의 가르침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잠 24:16의“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악인은 재앙으로 말미암아 엎드러지느니라”라는 말을 칠전팔기(七顚八起)라는 사자성어를 동원하여‘하나님은 믿는 자를 칠전팔기하게 하신다’라는 뜻으로 말하기도 하지만 성경에 그런 하나님은 없습니다. 이처럼 오해하기 쉬운 내용이 어떻게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을 가르치는가를 알아가는 것이 잠언에서 얻는 즐거움이고 기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잠언은“다윗의 아들 이스라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잠언이 목적하는 것은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임을 2~4절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내용에서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잠언이 우리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시작한다는 것입니다.‘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라는 말은 지혜와 훈계를 알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지혜와 훈계를 알지 못한 자를 알게 하려고 잠언을 준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혜와 훈계에 잠언의 지혜와 훈계를 추가하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잠언의 지혜와 훈계는 하나님으로부터 온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지혜와 훈계는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것과 어울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잠언의 지혜와 훈계가 우리가 알고 있는 기존의 것을 밀어내게 됩니다. 이것이 ‘알게 하며’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그리고‘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라는 말 또한 우리가 말씀을 실천하고 행한다고 자부하는 모든 것을 행함이 아닌 것으로 부정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행함으로 여기는 어떤 것도 지혜, 공의, 정의, 정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행할 일에 대하여’라는 말에 담긴 의미입니다. 행할 일, 즉 장차 행하게 될 일이라는 말이 우리가 믿음의 행함으로 인정하고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하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교훈도 교양도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잠언이 교훈과 교양으로 주어졌다면 우리를 최선을 다해 지키고 행해야 합니다. 그리고 지키고 행하지 못한 것에 대해 훈계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게 훈계하는 목적은 지키고 행하게 하는 것이 되겠지만 하나님은 그런 훈계를 하지 않습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훈계도 모르는 자들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잠언의 내용을 완전히 행하지는 못한다 해도 최선을 다해 행하고자 한다면 어쨌든 아름다운 신자의 모습을 갖추고 나타내는 효과는 있지 않을까요? 그리고 그것을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으로 말하면 안 될까요? 이러한 오해를 미리 차단하기 위해 잠언의 결론을 먼저 보겠습니다.
잠언은“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31:30-31)라는 말로 끝납니다.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행함으로 외모로 드러나는 것이 곱고 아름답다 해도 거짓되고 헛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함이 아름다운 것으로 인정되어 천국에 들어가는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점에서 잠언의 결론은“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전 12:13)라고 말하는 전도서의 결론과 사랑하는 자에게 내게 달려오라고 호소하는 아가서의 결론에 일치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아니라 하늘로부터 온 지혜와 사랑으로부터 시작하게 한다는 점이 그러합니다. 이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입니다. 그래서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닫게 되면 시작점이 달라집니다. 이것이 솔로몬의 잠언입니다.
그리하면 복(福)을 받습니다!
잠 3:1-10 / 송수천 목사
어떤 농부가 밭을 갈다가 가냘픈 호박 넝쿨에 큰 호박이 열려 있는 것을 보고는 하나님을 향해 불평을 했습니다. "저 가냘픈 가지에 저렇게 큰 호박을 열게 하시면 어쩌자는 겁니까?" 그러고 한심하다는 듯이 혀를 찼습니다. 그리고 이 농부가 호도 나무 밑에 가서 앉아 쉬다가 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보니까 그 나무에 호도가 열렸는데 큰 나무에 비해서 어울리지 않게 너무 조그만 열매가 맺혔습니다. 그것을 보자 또 한심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불평을 했습니다. "이렇게 큰 나무에 저렇게 작은 열매를 맺게 하셔서 어쩌자는 겁니까?" 이 농부는 한심하다는 생각으로 혀를 차고는 호도 나무 밑에 누워서 낮잠을 잤습니다.
한참 잠을 자고 있는데 호도 열매 하나가 이 불평 많은 농부의 이마에 떨어졌습니다. 깜짝 놀라서 깨어난 이 농부는 호도 열매 하나가 떨어져서 자기 이마를 때렸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때 이 농부의 뇌리를 번뜩 스쳐 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호도 나무에 열린 호도 알이 작았으니 망정이지 이 호도 알이 호박만 했더라면 어쩔 뻔했나?" 그러고는 하나님을 향해서 태도를 고치고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참 잘하셨습니다. 호박 넝쿨에서 큰 호박 열리게 하시고, 호도 나무에서 작은 열매 맺도록 만들어 놓으신 것, 참 잘하신 일입니다" 하고 하나님을 인정했다고 합니다.
■ 잠언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도록 주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혜를 얻어야 된다고 가르칩니다. 그런데 그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깨닫는 지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잠언서의 중심 사상을 뽑는다면 1:7절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하나님을 바르게 믿으면 하늘의 지혜를 얻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 5-6절입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 세상에는 많은 법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는 국법이 있으며, 미국에는 미국 법이, 일본에는 일본법이, 영국에는 영국 법이 있으며, 로마에는 로마의 법이 있습니다. 회사에는 회사의 법이 있고, 어느 단체이건 그 나름대로의 법이 있습니다. 운동경기에도 경기의 법칙이 있듯이 신앙생활 안에서도 법이 있고, 공식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온통 축복의 메시지입니다. 본문은 "내 아들아" 다정하게 하나님의 자녀들을 부르심으로 시작됩니다. 부모님이 아들에게 엄하면서도 사랑이 담긴 모습으로 아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아들을 이렇게 부른 이유는 가르침을 위한 것입니다.
이 가르침 속에 나타난 문장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접속사인 조건절이 나옵니다. 그 단어가 바로 '그리하면'인데 공동번역에는 '그렇게 하면'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2절과 4절, 6절과 10절 등 네 곳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리하면, 그렇게 하면'이라는 말인데 더 쉽게 표현하면 '그렇게 믿으면, 그렇게 순종하면, 그렇게 충성하면, 그렇게 살면'으로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면' 어떤 복을 준다고 약속하십니까? 2절에서는 장수와 평강에 복을, 4절에서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랑 받고 귀하게 여김을 받는 복을, 6절에서는 하나님이 우리의 인생 길을 바르게 안전하게 인도해 주시는 복과, 8절에서는 건강의 복과, 10절에는 창고가 가득 차고 새 포도즙이 넘치는 풍성한 삶의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이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래서 오늘 저는 ◀'그리하면' 복을 받습니다!▶라는 제목으로-
1. 내 아들아 나의 법을 잊어버리지 말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1절)
'내 아들아!' 얼마나 다정합니까? 이미 하나님의 자녀 된 자, 곧 천국을 상속받게 된 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까? 시험을 봐서 되었습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을 믿는 순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요1: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할/
그러니까 오늘 본문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본문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법'이라고 하시면서 이것은 곧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선포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법은 일반적 의미의 종교적, 도덕적 교훈들이면서 특히 개인적인 적용에 특징을 두고 있습니다.
왜 하나님의 말씀을 법이라고 표현했는가? 법은 표준입니다. 하나님의 표준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표준이 무엇입니까? 성경은 믿음의 표준이요, 생활의 표준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공법으로 보기보다는 내 자신의 삶의 철학이자 인생관으로서 마음에 새기고 지켜야 할 법임을 말합니다. 그래서 '잊어버리지 말라'고 하십니다.
여기서 '잊어버림'은 기억력의 부족에서 오는 '망각'을 뜻하지 않고, 고의적인 '무시'와 '무관심'을 의미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무시하고 무관심해 버리면 하나님도 우리를 무시해 버리시고, 무관심하십니다. 그렇게 되면 누가 손해입니까? 우리가 손해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손해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법과 명령은, 하나님의 말씀은 인간의 삶을 지배하는 최고의 안내문입니다. /믿/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마음속에, 생각 속에, 삶의 범사 속에 하나님의 법과 명령인 하나님의 말씀이 주인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애쓰고 노력해야 합니다. /할/
"네 마음으로 나의 명령을 지키라" 여기에서 마음은 '감정과 사상의 원천'임을 뜻합니다. 마음은 사상과 생각을 담고 있는 틀입니다. 좋은 생각을 하면 좋은 행동이 나오고, 마음이 병들면 좌절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삶의 사상이며 가치관이 되어야 합니다.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라'고 했는데, 이것은 '순종하다', '보호하여 지키다'의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스스로의 사상으로써의 그 위치를 두고 있는데, 이는 자발적인 동기에서 지켜져야 할 '하나님의 명령'임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의 사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 세계적인 도너츠 상표를 개발한 "던킨 도너츠" 창업주인 '로젠버그'는 자신의 성공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가난과 교육부재의 환경에서 자랐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늘 제 짐을 맡아주셨습니다. 저는 성공이란 '사람의 지식'에 있지 않고, '하나님께 대한 태도'에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자세는 자원하는 마음에서 출발하여 그것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받들고 순종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이런 사람에게 ●'그리하면'의 복이 임하게 됩니다.
■ 2절 "그리하면 그것이 너로 장수하여 많은 해(택)를 누리게 하며 평강을 더하게 하리라"
장수는 동서고금과 종교와 사상을 초월하여 인간이 누리는 축복으로 봅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도 장수는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고 그 명령을 지켜 행하는 자에게 주는 축복 중의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그 사랑하는 백성들에게 평강의 복으로 누리면서 장수를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평강'은 원만한 인간 관계와 태평성대의 삶, 모든 위험과 장애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마음의 평정을 얻는 상태를 말합니다.
여러분! 오래도록 평안한 삶이 중요합니다. 그러나 매 순간 순간 평안할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 '장수'의 복은 그 심령의 '평강'을 통해서 건강한 생애를 보낼 수 있다는 뜻입니다.
'평강'이 없는 '장수'란 축복이 아닙니다. 오래 살아야 하지만 평안해야 합니다. 평안하지 않고 오래 사는 것은 축복이 아니고 저주입니다. 그러므로 장수가 온전한 축복이 되기 위해 평강을 더해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평강'은 외적인 안전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얻을 수 있는 은혜입니다. 우리의 가정이, 교회가, 나라가 외적으로 평안해야 합니다.
지금 북에서는 핵을 만든다고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한번 붙어 보았으면 좋겠다"고 말합니다. 참으로 무섭고 어처구니없는 말입니다. 다시 이 땅에 전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2.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라!(3절)
▶인자란 '헤세드'인데 이는 폭넓은 주님의 사랑을 의미합니다. 즉 아가페 사랑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주님의 사랑을 잘 간직하라는 말씀이요, 그 사랑을 나타내라는 말씀입니다.
▶또 다른 의미로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충성'을 뜻하는 말로, 하나님의 말씀을 사랑하라는 말이고, 여기 진리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진실을 말하는데, 이 말씀은 <성실과 사랑을 절대 버리지 말고…>라는 뜻입니다.
▶또 '인자'는 전인격적인 순종과 헌신의 상태를 말하고, '진리'는 확실하게 준행하는 성실성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에 대하여 가지는 올바른 태도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서 어떤 채무보다 더 큰 의무로 생각하며 최대의 성실함을 보여야 합니다.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라'는 말은 '하나님을 향한 성실함과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을 변하지 말고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메 마음 판에 새기라' 한 것은 믿음 생활의 더 강력한 의지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을 '목에 맨다'는 것은 항상 생활화하라는 의미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자랑하고 나타내라는 말입니다. 진주 목걸이는 자랑삼아 매고 다닙니다. 어떤 사람은 십자가 목걸이는 달고 다니면서 예수 믿는 것을 숨기고 있습니다.
나는 성림교회 여집사입니다. 성도입니다. 성가대원입니다. 나타내십시오! 그래서 주일날 세상으로 유혹하면 '나는 교회에 가야 한다'고 단호히 말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진짜로 목에 메고 다니며 외웠습니다. 그리고 '마음 판에 새기라'는 말은 믿음의 삶이 생활화되고, 그것이 내면에 자리를 잡도록 하나님이 말씀을 소중해 여기라는 말씀입니다.
목에 걸고 다니면서 마음 판에 새기지 않는다면 위선이고 형식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마음에 중심을 보시는 분입니다.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 판에 새기며" 사는 사람들에게 ●그리하면 복이 임합니다. 어떤 복입니까?
■4절입니다. "그리하면 네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은총과 귀중히 여김을 받으리라" /할/
은총을 받는다는 말은 쉬운 말로 사랑을 받는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 사랑 받고, 사람에게 사랑 받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귀중히 여긴다'는 말은 '귀히 여기고, 칭찬하고, 값있게 여긴다'는 말입니다.
주머니에 돈 1000원을 넣을 때 편한 대로 아무 데나 넣습니다. 1원짜리는 있어도 골치가 아픕니다. 물론 1원이 있어야 천원도 되고, 만원이 되지만 지금 우리 나라에서 1원의 가치는 거의 없습니다. 그런데 100만원이 생기면 지갑 속에 소중히 넣을 것이고, 만약 1억짜리 수표가 생긴다면 주머니에 넣고 '잘 있나'하고 수시로 만져 볼 것입니다. 왜냐하면 귀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하나님 앞에도, 사람에게도 사랑 받고 칭찬 받고 귀중히 여김을 받는 삶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오래 살아도, 귀중히 여김을 받고 살아야 합니다. 대학에 가고, 잘 살아도, 높은 자리에 올라가도 귀중히 여김을 받아야 합니다. 멸시받고 비난받고 미움을 받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3.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5-6)
여러분! 세상은 변하고 우리가 믿을 만한 안전한 도피성이 되지 못합니다. 우리 주변에 일어나는 사건과 사고는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번 매민지 개민지 태풍을 보셨지요? 세상은 우리의 안전한 피난처가 되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조차도 세상에 미련을 가지고 유혹과 미혹에 빠져들어 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전 역사를 통하여 늘 하나님의 명령을 떠났고,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징계를 받았습니다. 왜 그런 현상이 일어났겠습니까? 사람들은 당장에 눈에 보이는 현실에 그 비중을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세계, 영적 세계를 직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당장에 기대해 보는 Lotto 복권이 현실적으로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로토 복권을 수학을 못하는 사람들에게 국가에서 매기는 세금이라고 합니다.
여러분! 그런 세상적인 것에 미련을 갖지 말고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분만을 인정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 '여호와를 의뢰하라'고 한 것은 하나님이 참된 지혜와 능력의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의뢰하고'는 어떤 대상에 전적으로 몸을 의지하여 기댄다는 의미로 완전한 의탁과 신뢰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이러한 자세는 모든 인생의 인도자 되시는 하나님을 확신하고 삶의 모든 영역을 하나님께 맡기는 것을 말합니다.
■ 또 '의뢰한다'는 말은 '기댄다'는 것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지게가 지팡이에게 의지하여 세워져 있듯이 우리 자신의 삶이 하나님에 의해 살아가는 삶이 겉으로 누가 보아도 그렇게 느껴지도록 의지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히11: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기초, 기반, 디딤돌)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하나님께 기대십시오! 그분은 우리의 디딤돌이 되어 주십니다. /믿/
● 여호와를 의지하는데 어떻게 의지해야 합니까?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고 했습니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이 구절은 '기독교의 근본이 되는 신앙의 기본 원리'입니다.
마음은 인간의 감정과 행동과 사상의 원천이 되는 곳으로 생명의 근원이 여기서 나옵니다.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일찍이 모세는 신6:5절에서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예수님도 구약성경을 인용하시면서 막12:30과 눅10:27절에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마음을 다하는 것'이 '기독교의 근본이 되는 신앙의 기본 원리'입니다. /믿/
■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이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신의 꾀와 지식을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을 말합니다.
'명철'은 분별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자기 주장만 옳다고 자기 생각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자신의 작은 머리로 이해되는 하나님만을 믿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이 이 작은 머리에 다 들어갑니까? 하나님이, 이 작은 머리에 담기는 분입니까?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이 세상엔 많습니다. 노아 때 사람들이 자기 명철만 의지하다가 다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처럼 인정하는 것이 신앙의 철칙입니다. 창조주로 인정하십시오! 구세주로 인정하십시오! 그 분은 능치 못함이 없으십니다. 막9:23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 여호와를 의뢰하고, 범사에 그를 인정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그리하면의 복이 임합니다.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할/
잠16:9절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①시37:5절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②잠16:3절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③시55:22절 "네 짐을 여호와께 맡겨 버리라 너를 붙드시고 의인의 요동함을 영영히 허락지 아니하시리로다" 참고: 마11:28절
④벧전5: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⑤롬12:19절에서 원수 갚는 것도 주께 맡기라고 하십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⑥막11:24절에서 기도의 결과도 주께 맡겨야 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죠지 물러' 목사님은 '믿음이 시작되는 곳에는 염려가 사라지고, 염려가 시작되는 곳에는 믿음이 끝난다'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4:6-7절에서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4.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7)
여러분! 인간의 지혜는 한계가 있습니다. 완전하지 못합니다.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왜? 그분이 지혜의 근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는 이 지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 이 자라가 지혜를 얻는 자리입니다. /믿/
본문 16-17절에 지혜를 얻은 자가 받을 복에 대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여러분!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지혜를 얻으시기를 바랍니다. 얻는 비결이 본문에 나와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경외는 오직 하나님께만 쓰는 말입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경배드리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배의 기본 정신 두 가지를 바르게 알아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배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그분을 높여드리는 모든 행위가 바로 예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성전에 야긴과 보아스라는 두 기둥이 있듯, 예배는 두 기둥으로 이뤄져있습니다. 그것은 섬김과 경배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고 경배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마4:10절에 예수님께서 세 번째 시험을 이기느라 동원한 말씀 속에 그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하나님을 경배하고 섬기는 게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예배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 구약이든 신약이든 '엎드리다, 절하다, 무릎을 꿇다'라는 뜻을 내포합니다.
시99:5절 "너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을 높여 그 발등상 앞에서 경배할지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주님의 발 앞에 엎드려 주님을 높여드리는 게 바로 예배입니다. 이런 행위 가운데는 하나님은 높고 위대한 분이지만 나는 낮고 천한 존재라는 걸 보여주는 것입니다.
시95:6절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 이것은 예배를 드리자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경배하는 것만 가지고 예배를 드렸다고 하면 안 됩니다. 섬김이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은 마귀에게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 다음에 "다만 그를 섬기라"라고 대답하십니다.
성경에서 예배라고 할 때, '노동, 사역, 일'이라는 개념을 포함합니다. 그래서 영어는 예배를 Service라고 합니다. 우리의 말로 해석하면 봉사입니다. 하나님께 봉사하는 게 바로 예배란 말입니다.
경배가 마음의 작용이라면 섬김은 행위의 영역입니다. 경배가 의식이라면 섬김은 의식을 살아있게 만드는 내용입니다.
경배가 뼈대라면 섬김은 살입니다. 경배가 원리라면 섬김은 실천입니다. 경배가 내적 태도라면 섬김은 외적 태도입니다. 경배가 예배시간에 하는 것이라면 섬김은 예배시간 밖에서 하는 것입니다.
예배에 있어 이 두 영역 중 한 가지만 있다면 올바른 예배라고 할 수 없습니다. 경배만 있으면 외식이고 섬김만 있으면 사랑의 실천은 돼도 예배는 아닙니다.
바른 예배자들은 악에서 떠난 자들입니다. /믿/
●7절의 말씀대로 사는 자들에게도 '그리하면'의 복이 임합니다. 그런데 8절에 보면 그리하면이 빠지고 '이것이' 나옵니다. "이것이 네 몸에 양약이 되어 네 골수로 윤택하게 하리라"
여기서 양약은 쉽게 말하면 사람들이 좋아하는 보약인줄 믿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시는 보약은 100% 보약입니다. 세상 보약은 가짜가 판을 칩니다.
여기 '골수'는 의학용어로 히브리어는 '척수'를 말하는 것인데 골수는 피의 응고를 돕는 혈소판과 산소를 날라다 주는 적혈구와 싸워 백혈구를 생산하는 곳이랍니다.
그런데 골수(척수)에 이상이 있으면 신체의 부분 부분이 마비가 되거나 문제를 일으킨다고 합니다. 중풍도 척수와 연관이 있고 소아마비 같은 것도 척수에 바이러스가 침범하여 신경을 파괴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 척수는 뇌와 신체 각 부위를 연결하는 주도로와 같아서 척수를 통하여 정보가 전달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척수가 건강하지 못하면 신체에 장애가 생긴다고 합니다. 이런 이해를 가지고 '골수가 윤택케 된다'는 말씀을 받으면 그 얼마나 복된 축복입니까?
5.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9절)
이 말씀에는 몇 가지의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는 이미 있는 재물로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 얻는 재물로 하나님을 공경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예배 시간에 헌금을 드릴 때 우리가 드리는 그 재물에는 피, 땀, 눈물이 담긴 것입니다. 정성이 담겨 있습니다. 어떤 때는 그 돈을 벌기 위해 모욕을 당하고, 돈을 벌기 위해 목숨을 걸기도 합니다. 그 속에는 우리의 모든 것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하나님께 물질을 드리는 것입니다.
처음 익은 열매를 드리라 함은 <하나님 제일주의>로,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첫 아들, 처음 탄 월급, 탐스런 첫 열매는 남 주기 정말 아까운 것들이 바로 처음의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께 드릴 수 있습니까?
구약 시대에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선하심과 축복하심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표였습니다. 그들이 첫 열매를 드리는 것은 '나는 하나님을 믿고 의뢰한다'고 하는 신앙적인 고백이었습니다.
여러분! 첫 것에 대한 마음이, 최고의 마음이 하나님을 향해야 합니다. 처음 것을 하나님께 드림으로 나머지 모든 것도 하나님께 드림이 되는 것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은 본문을 십일조로 설명합니다.
우리가 받은 모든 물질 소득의 십분의 일을 성별시켜 하나님을 경외하는 고백적 표시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물질 헌금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는 가시적 표식으로 삼으라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십일조 생활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 행위의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십일조의 여러 유형이 있습니다(석원태 목사님의 설교집에서).
▶반대 유형: ①신약시대는 은혜의 시대요 구원의 시대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율법적 규례는 없어져야 하고, 사랑이 더 중요하다는 주장입니다(롬6:14). ②재물의 소유주는 인간 자신이라는 주장입니다. ③또한 나의 수입이 너무 적다는 이유입니다. ④반대로 나의 십일조가 너무 많아서 그것을 다 드릴 수 없다는 이유입니다. ⑤자기 십일조에 대한 산출근거가 없다는 이유입니다. ⑥교회가 헌금을 잘못 사용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습니다. ⑦십일조는 구원과 전혀 무관하기 때문에 그것을 율법화 할 수는 없다는 이유입니다. 이 모든 것이 전혀 성경 교훈과 모순되는 인간 중심의 생각입니다.
▶마지못해서 드리는 유형: ①마지못해서 억지로, 의무감으로 내는 유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요구는 즐겨내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엡6:6-7,고후8:7). ②하나님의 응징(벌)이 두려워서 내는 유형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두려움의 신이 아니라 사랑의 아버지가 되십니다.
③자기 기분대로 내는 십일조 유형입니다. 형편 따라 적당하게 사전에 준비 없이 내는 십일조입니다. 자기가 급한 대로 우선적으로 다 쓰고, 여유가 있거나 나머지 부분을 십일조라는 이름을 붙여서 냅니다. 그러나 십일조 헌금은 최우선의 제물이 되어야 하고(마6:33),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을 공경함이 되어야 합니다(잠3:9). ④공명주의나 체면, 눈치껏 내는 십일조입니다. 자기의 교회 직분상, 또 타인과 비교해가면서 이른바 체면세우기식(?)의 십일조입니다.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십일조입니다.
▶기복적 십일조의 유형: 이는 일종의 기복적 축복관념입니다. 하나님께 어떤 뇌물(?)을 드리는 심정이나 십일조를 축복 받는 공로처럼 여기는 유형입니다. 결코 십일조는 하나님과의 상거래 행위나 기복적 공로행위가 될 수 없습니다.
▶교회를 존속시키려는 목적으로 드리는 유형: 물론 십일조 헌금이 교회 재정운영에 결정적인 힘이 됩니다. 그럼에도 교회를 존속시키고 부흥시키는 원동력은 주님 자신이고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이런 이유로 십일조를 내는 자는 자신이 교회의 주인역(主人役)이라고 착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목적으로 드리는 십일조: 십일조는 하나님 자신의 지고하신 명령에 감심으로 순종하는 행위라고 생각하는 믿음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섬기고, 기쁘시게 하는 영광의 수단으로 드린다는 사상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한다는 사상입니다(고전 10:31).
이런 의미에서 아드리안 로저스(A. Rogers)는, "십일조는 하나님이 누구신가를 보여주는 통로이다. 왜냐하면 십일조 생활을 통하여 당신 안에서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는 수단이 되기 때문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석원태 목사님의 십일조에 대한 실제적 문답을 참조합니다.
십일조가 연보의 전부인가? 아닙니다. 십일조는 모든 연보의 기본입니다. 성경에는 그 외에도 여러 류의 감사행위가 많습니다.
십일조 계산은 총수입에서 할 것인가, 아니면 순 이득에서 할 것인가? 성경은 소득의 십일조라고 하였습니다(눅18:12). 또 온전한 십일조라고 하였습니다(말3:10). 모든 경우의 소득에서 십일조를 바쳐야 합니다.
십일조의 액수가 너무 적어서 부끄러움을 느끼는 경우나, 또 너무 많아서 고액일 경우에는 어찌하는가? 양자 다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적거나 많거나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십일조를 드려야 할 창고가 교회뿐인가?
그렇습니다. 교회뿐입니다. 온전한 십일조를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라고 했습니다(말3:10). 그렇다면 '나의 집', '나의 창고'가 비단 교회만을 가리킴인가? ①신학교나 기타 자선사업단체나 선교기관, 농촌 모(母)교회에 자기 십일조를 나누어 보낼 수 있지 않은가?
②심지어 십일조 중에서 자기를 위해 기도해주는 특정한 교역자나, 자기가 벌여놓은 복음사업을 위해서, 아니면 교회 각종 기관에 월정회비나 교역자들 접대비 등으로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이런 종류는 십일조에 대한 개념이 잘못되어 있는 사람입니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공금(公金)입니다.
그러므로 소유권이나 사용권도 오로지 하나님 자신에게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의 몸된 기관인 교회에 바쳐야 하고, 교회는 공적으로 선용해야 합니다.
빚더미 속에 앉아 있을 때에도 십일조를 드림이 마땅한가?
마땅히 드려야 합니다. 모든 크리스챤들은 이 세상 사람들과 꼭 같이 여러 경우에 부채를 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빚더미 속에 앉아 있을 때에는 그 빚을 갚기 위해서라도 십일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퇴직금이나 유산을 받았을 때도 십일조를 드려야 하는가?
당연히 드려야 합니다. 종신토록 받을 퇴직금은 종신토록 주의 것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유산은 유언에 따를 것이나, 특별한 유언이 없을 때에는 그 유산을 받아 자기 소유가 되는 재산 중에서 십일조를 구별시킴은 당연한 일이 될 것입니다.
'사무엘 영'은 "우리가 드리는 모든 헌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총에 대한 보은 중심이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누군가 십일조 생활에 대하여 말하기를, "①십일조를 드림으로 자기 신앙이 더욱 확고해짐을 보고 놀랐고, ②자신의 물질적 생활이 넉넉해짐을 보고 놀랐고, ③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어찌 내가 이런 돈을 낼 수 있는가 하는 사실에 놀랐고, ④믿음의 담력이 더하여짐에 놀랐고, ⑤나머지 십의 구(10/9)도 지혜롭고 규모 있게 사용할 수 있게 됨에 놀랐고, ⑥ 이 축복을 알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고 살았던 지난날의 어리석음을 깨닫고 놀랐다"라고 하였습니다.
'록펠러'는 두 가지 가훈(家訓)을 정했다고 합니다. 첫째로 나는 자녀들에게 십일조를 가르치겠다는 것과, 둘째로 부자가 되어도 돈을 절대로 낭비하지 말라고 가르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는자"는 ●그리하면의 축복이 임합니다. ●10절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차고 넘쳐 베풀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에 가득히 차고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많이 벌어서 가득히 차고 넘칠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들! 많이 벌어서 ①하나님께 풍성히 드리고, ②이웃에게 넉넉히 베풀고, ③자신도 윤택한 삶을 사시기를 예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거꾸로 생각합니다. 자신만 윤택하게 살려 하고 종업원에게는 인색하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에는 더 인색합니다. 그러니까 자신도 어려울 정도로 안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많이 벌어서 하나님께 풍성히 드리고, 이웃에게 넉넉히 베풀고, 자신도 윤택한 삶을 살게 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지혜
잠언 1:1-6 / 노바토한인침례교회
잠언은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솔로몬왕과 아굴등의 여러 사람들이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를 적어놓은 것을 훗날 사람들이 정리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솔로몬이 왕이 되어 하나님께 가장 먼저 구한 것이 지혜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우리가 삶에서 지켜나가야할 도리와 교훈에 대해 말씀하여 주시고 그 말씀을 성경 가운데 기록하여 남겨주심으로 하나님이 솔로몬에게 주신 지혜를 더하여 주셔서 우리가 신앙생활을 해나갈때 어떻게 하여야 하는 지 알려줄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며 지켜나갈 모습을 잘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열왕기상 4:32장을 보면, 솔로몬이 잠언을 3000가지 정도 기록했다고 나와있습니다.
이처럼 솔로몬에게 지혜를 주시고 그 지혜를 받은 솔로몬이 세대를 계승하여 어떻게 함께 하나님 앞에서 살아갈 것인지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를 담아 기록해 놓은 말씀이 잠언입니다.
솔로몬의 인생을 보면, 그가 항상 바르고 의롭고 정직하였음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닙니다.
물론 그의 초창기는 겸손한 마음으로 지혜를 구하며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부강해지고 그의 자리가 견고해지는 과정 속에서 게으름과 나태함이 그의 영적인 삶에 교만함과 자만심을 가지게 하였고 훗날, 그는 우상숭배로 인해 그의 후에 세워져나갈 이스라엘을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이 초창기에 하나님께 가졌던 겸손함과 그 누구도 구하지 않았던 지혜를 구하며 백성을 위하여 나아갔던 그 순간의 마음을 기뻐 받으셔서 우리가 잘 알듯이, 하나님께서 지혜를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지혜를 구하고 백성을 잘 다스리를 바랐던 솔로몬에게 부귀영화도 함께 주셨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부어주신 그 지혜가 그에게 임하였음 때, 그가 기록한 잠언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지혜를 그를 통해 이 땅에 쏟아 부으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짧은 시간이지만, 솔로몬을 통해 삼천가지의 잠언을 주셨고, 오늘날까지 기록된 잠언을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구하고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잠언을 읽다보면, 어떻게 세상을 살아가야할 지 알게되고 실제적인 삶의 행동과 생각, 마음을 가지는데 있어서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우리의 자녀들에게 잠언을 읽히게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갈 것인지, 어떻게 연합하고 협력하며 살아갈 수 있는지, 실제적인 삶 속에서 구해야만 실질적인 지혜와 조언을 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가운데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확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다보면 시대마다, 환경에 따라 우리의 가치관과 신념 또한 변화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흔들리는 가치 속에서 자녀들은 부모의 양육권이 허락하는 나이까지는 하나님의 말씀 속에서 훈육을 받고 자라납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그간 가지지 못했던 자율과 자유를 맛보게 됩니다. 그때 좌,우 분간을 하지 못하고 세상의 향락을 쫓아가며 세상에 빠져 살아가게 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납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가치관이 세워지지않으면,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안에 있지 않으면, 이 세상이 가져다주는 수많은 흥밋거리가 우리를 끊임없이 자극하고 우리가 가진 가치들이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는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생각을 가지고 살아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우리와 특히 우리의 자녀가 어릴 때부터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며 이것을 자연스레 인생의 가치와 신념으로 삼아 살아가는데 있어 믿음의 굳건한 바탕이 되게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하나님의 가치가 우리 안에 정립되어 있지않고 이것을 우리가 모르고 산다면,
우리는 어떠한 일이 다가왔을 때, 선택의 기로가 놓여있는 모든 때에, 기준으로 삼아 생각할 것이 무엇인지 혼돈이 올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명심해야할 것은, 이 세상의 모든 지혜와 지식은 하나님으로 부터인 것을 믿고 나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창조를 이루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시고 그 사람에게만 지혜와 명철과 지식을 주셔서, 육체적으로 가장 연약하지만 이 세상을 다스릴 수 있게 하셨습니다.
세상을 창조하시고 구조를 만드신 하나님의 지혜가 우리 속에 임하는 은혜를 누려야 할 것입니다.
솔로몬이 하나님께 구했던 기도를 돌아봅시다.
우리는 흔히 기도를 할 때, 이 땅의 부귀영화, 혹은 나의 원함, 나의 어떠함을 토로하며 구할 때가 많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 지혜를 우선으로 구한 적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우리가 살아갈 때 정말 필요한 것은 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수많은 지식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지혜, 모든 것의 근본되신 주님의 지혜입니다.
하나님의 지혜가 담겨져있는 잠언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을 하나하나 깨달을 수 있고 어느순간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이 우리와 하나가 되어 하나님이 다스리시고 통치하시는 영역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잠언은 B.C 1000년 경에 기록되고 B.C 600년 경에 집대성 되었습니다.
잠언의 목적은 잠언의 1장에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이는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며 명철의 말씀을 깨닫게 하며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행할 일에 대하여 훈계를 받게 하며,
어리석은 자를 슬기롭게 하며 젊은 자에게 지식과 근신함을 주기 위한 것이니 지혜 있는 자는 듣고 학식이 더할 것이고 명철한 자는 지략을 얻을 것이라
잠언과 비유와 지혜 있는 자의 말과 그 오묘한 말을 깨달으리라(잠1:1~6)
이처럼 하나님의 지혜와 훈계를 알게 하시기 위해 기록된 것이 잠언인 것입니다.
우리는 잠언을 읽으며 이 지혜와 훈계를 알아가고, 이것이 어떤 삶을 살게 하시는 지에 대해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을 아는 것에만 그치지 않고, 삶에 적용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에 합당하게 지혜롭고 공의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성도님들이 더욱 풍성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잠언서를 읽으며 어떻게 우리가 우리 삶의 겸비하며 살아가야 하는지 알게 하시고 깨닫게 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받아들여서 우리 삶의 근본이 바뀌어지고 우리 삶이 변화되어 우리의 삶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렇게 지혜롭다던 솔로몬은 그의 초기에 지혜를 구하며 하나님의 길로 나아갔느나, 그의 후대에는 나라를 무분별한 우상숭배에 빠지게 만들었습니다.
수많은 잠언을 기록하였던 그가 그런 길로 빠지게 된 것은 하루 아침에 일어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날마다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는지, 어떤 말씀을 가지고 살아가는 지가 우리의 삶의 변화시키고 우리 삶의 모습을 만들어갑니다.
우리 교회가 성경통독을 시작하여 어느덧 잠언을 읽는 시점에 이르렀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기위해 더욱 더 지혜를 간구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뜻 가운데 더욱 깊이 말씀을 묵상하고 주시는 지혜로 더욱 깊이 깨달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삶의 자리로 돌아서서 어떠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주님의 길을 걸어가시는 사랑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