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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독자가 되어주셨는데 연대기는 보기 어려워하셔서, 글만 봐도 부연설명 없이 전체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서술 방법을 좀 고쳤습니다. 스크롤 압박을 견뎌주세요. 복 받으실 거예요.
푸아티에 가문의 아홉번째 이야기입니다.
☆
여러분, 안녕하세요. 오라드예요. 인사하는 건 처음이네요.
성년이 되어 관심사를 고를 수 있게 됐어요.
비록 역사는 짧지만 역대 아키텐 국왕들이 했던 대로 첫 관심사는 신학으로 골랐어요.
"할아버지도 삼촌도 떠나셨던 길이야. 내가 못 갈 이유가 없어."
처음으로 떠나는 해외여행이에요.
나중에는 이런 거창한 여행은 못 가겠죠.
"히포로 가겠어. 그렇게 채비해줘."
유럽을 떠나 아프리카 대륙으로 갈 계획을 세웠어요.
그러던 와중에 대장군 마르탱이 훌륭한 군사적 재능을 지닌 남자…… 뭐라고?
무력만은 좀 쓸만하네요. 그런데…, 나보다 약한 남자를 내 장군으로 쓰기에는 좀…….
(강인한 병사, 무력 15, 전투기술 13. 오라드 전투기술 16)
그래도 기왕 왔으니 잠시 데리고 있다가 다른 궁정의 귀족 여성과 결혼시켜서 보내줘야겠어요.
여기 장군들이 뛰어난 게 저 사람 잘못은 아니니까. 다른 주군을 만나면 잘 써줄 거예요.
"파커, 착하게 잘 있어야 해. 아버지, 어머니. 다녀올게요!"
이제 막 앞니가 자라는 어린 동생과 새어머니, 아버지를 두고 아프리카를 향해 출발합니다.
"어…? 아르신드 경이 섭정이라고?"
티보드를 장가보내려고 찾아보던 중에 (*지휘관 임명시 전투기술이 자동으로 10 상승)
뜬금없이 왕국 첩보관 아르투아 백작 아르신드가 섭정이 된 걸 알았네요.
아무리 제가 따로 지정하지 않고 떠났다지만 상왕이자 왕국 재무관인 아버지를 두고…….
그래도 그냥 집 지키는 역할이니 별 문제가 없겠죠.
아버지도 이 참에 좀 쉬셔야 할 테고…….
그런데…….
왕위 계승서열 2위인 줄리아나 이모가 다시 돌싱이 됐네요?
"줄리아나 이모. 보고 싶어요. 우리 다시 보르도에서 함께 살아요."
산도적을 만났어요. 지켜주긴 무슨. 지켜주겠다고 말하는 사람이 가장 위험한 법이지.
내가 병약하지만 나약하지는 않다!
전투를 시도합니다.
아버지와 동향 사람이라는 에릭 재상이 일을 하네요.
다 좋은데… 오트브르타뉴 공작령의 명분을 가져왔으면 했는데 백작령 하나만 가져왔어요.
저거라도 좋다고 덥석 물자니 재정이 빡빡합니다. 지금 금이 314원밖에 없어요.
아쉽지만 거절합니다.
삼촌이 요절하시지만 않았어도 이 고생을 안 했을 텐데….
산도적과의 전투 경험으로 좀 더 강해진 제게 폭우가 닥쳤네요.
이불 밖은 위험하지만….
신부의 호의는 감사히 받고……. 출발합니다…….
아키텐의 국왕은 고작 폭우 따위에 굴하지 않습니다.
제가 없어도 삼촌 기일은 다들 알아서 챙겼으리라 믿어요…. (*12월 21일)
아프리카에서 맞이하는 새해가 다가옵니다.
"폐하, 사실 살레르노에서 민망한 소문이……."
…….
히포에 도착했어요.
그런데 중요한 건 그게 아닌 거 같아요.
새해도 되었고 우리 신랑 잘 크고 있나 봤더니………. (*사생아, 영재, 예민함, 동성애자)
…….
제게는 아이를 만들어줄 남편이 필요해요.
저는 수년째 암 투병 중이고, 이모들은 다 나이 서른이 넘었어요.
계승서열 1위인 필리파 이모는 디라히온 공작의 정부가 되어서 친정에 올 생각을 안 하고….
파혼하겠습니다. 파혼합니다. 서로 불행할 결혼은 안 하는 게 낫겠죠.
세상의 절반이 남자인데 설마 새 신랑감이 하나 없으려고….
……제가 결혼할 수 있는 유일한 천재입니다.
나이는 저보다 스무 살 쯤 위고……. 남작 아들…….
무력 재능이 있고 옷 잘 입고 피해망상에 만족할 줄 알고 자비로운 사람이네요…….
또 다른 천재는 없고, 나이가 비슷하며 선천적으로 강인한 소년이 하나 있…….
겁이 많네요.
남작 아들이네요…….
그 외에 특별한 건 없네요…….
"……파혼을 취소하겠다. 저번에 보낸 파혼 통보는 실수였다고 전해."
세상에 남자는 많지만 저와 결혼해 아키텐의 왕이 될 남자는 전 약혼자 하나 뿐이네요.
이젠 '전 약혼자'도 아니지 참…….
아버지도 제 혼처를 찾으실 때 흑사병으로 유럽 전역의 왕자와 공자들이 줄어서 힘드셨다던데…….
불과 3~4년 사이에 그 때 없던 혼처가 다시 생기진 않았겠죠.
그런 거지요…….
천재를 궁벽한 시골에서 썩히긴 아까우니 보르도로 초빙하겠습니다.
아버지와 비슷한 나이이니 줄리아나 이모와 잘 어울리겠죠.
"이모. 이번에는 꼭 행복하세요."
이모부에게는 초혼을, 이모에게는 삼혼을 진행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예배당이었지만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유해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순례길에 오른 동안 여러 일이 있었으니 허탕은 아닐 거예요.
어머니 기일을 성지에서 맞이하게 됐네요. (*파트리샤 기일 1월 27일)
슬슬 일정을 마무리하고 귀국길에 오릅니다.
도착할 즈음의 보르도는 봄꽃이 만발하겠네요.
돌아가던 도중, 3월 8일에 닥스 백작 기랑드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버지는 재무관으로서 열성을 다하고 계세요.
어쩌면 아르투아 백작 아르신드 경이 섭정을 맡는 동안 아버지가 좀 더 여유를 가지셨는지도 모르겠네요.
저는 아버지 말씀을 잘 듣는 착한 딸이에요.
드디어 집에 돌아왔어요.
긴 아프리카 여행이 꿈만 같네요.
수고한 아르신드에게 명예직 백조사육사를 더해줍니다.
지금 부르고뉴 여공작과 앙주 공작은 아직 어리고 툴루즈 공작은 자문회에 자리를 갖지 못했고… 아르투아 여백작 아르신드는 명실상부 아키텐의 권력자이면서 국왕인 절 제외하고 아키텐에서 가장 힘이 센 여성 영주가 되었네요.
아키텐의 국왕은 유능하고 충성스러운 이를 우대합니다.
먹을 것이 입 안에 들어있으면 주위를 물어뜯지 않는 법이니까.
"야햐 아저씨. 이번에도 부탁해요."
건강이 악화된 저는 다시 치료를 부탁합니다.
제발 이번엔…….
암은 사라지지 않았어요.
그러나 처음 치료를 받았던 때보다 더 몸이 가뿐해졌어요.
"고마워요. 아저씨가 있어서 다행이에요."
(*5년간 건강 +3, 전 능력치 +3)
귀네즈 백작 보도윈 빡빡씨가 파벌 가입을 하려 한다고 아르신드가 알려줬어요.
보니까 뭐… 플랑드르를 갖고 싶다고??
우선 좋은 말로 달래봅니다.
그러지 마라…….
고작 바닷가 구석 귀네즈 하나 가진 백작 따위야 문제가 되지 않지만 아키텐은 아직 힘을 비축해야 해요.
깜짝이야.
얼굴에 피칠갑을 한 기라드 드 듣보…… 아니, 아르마냑 백작 기라드 다르마냑이 갑자기……
자기가 오랜 시간 동안 제게 충성을 바쳤으니 플랑드르에 소속된 겐트를 받고 싶다며……
뭘 봐서 내 영지가 광활하단 건지 모르겠고……
(*현재 오라드 소유 백작령 - 보르도, 푸아티에, 생통주, 투아르, 겐트.
보유 작위 - 아키텐 공작/푸아티에 공작/플랑드르 공작)
무엇보다 남부 가스코뉴에 붙어있으면서 왜 겐트를 달라고 해??
썩 나가라고 하고 싶지만……
피 뚝뚝 흐르는 게 무서우니 좋은 말로 달래봅니다.
그렇지. 그래야지.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닐 거예요. 저 보도윈 빡빡씨는 플랑드르를 노리고 있으니까.
플랑드르를 손에서 놓아 보낼 수는 없어요.
플랑드르 공작의 재력은 삼촌을 죽이는 데에 크게 일조했습니다.
조만간 텅 빈 지하감옥이 오랜만에 손님을 맞겠네요.
동방에 의사 3형제가 있었다고 해요.
맏이는 병이 발생하기 전에 징후를 눈치채 발병을 막아 이름이 알려지지 않고, 둘째는 사소한 병일 때 전이를 막아 마찬가지로 이름이 알려지지 않고, 셋째는 큰 병으로 번지고 나서야 치료에 나서서 천하의 명의로 알려졌다고 하죠.
중병에 걸린 절 이렇게 살려놓고 있으니 야햐 아저씨가 명의로 이름을 날리는 건 당연한지도….
"아저씨, 축하해요. 보르도에 와줘서 고마워요."
(*편작의 일화)
깜짝이야.
피칠갑 씨가 결국 피칠갑을 씻어내지 못하고 사망했어요.
새 아르마냑 백작은 어린 여자아이네요.
당분간 땅 달라고 조르는 일이 없을 테니 다행이에요.
교황성하께서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번아웃에 빠졌고요.
사람 만나기가 지겹고 소리는 깨진 도기 파편처럼 날카롭게 머리를 찔러대요.
잠시 국정에서 물러나 휴식을 취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는 쉬어야 해요.
"폐하. 진정하시고 들으셔야 합니다. 실은 상왕께서……."
"그게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소리야! 아버지께서 암에 걸리셨다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입니다.
태양은 내리쬐는데 제 앞은 그저 캄캄해요.
섭정이 되신 이후 본인 말마따나 성격에도 맞지 않게 성실히 일하셨습니다.
절 위해서요.
절 지키려고…….
누적된 피로가 결국 병이 되었을까요.
아니면 병에 걸리셨는데도 참고 견디시다 너무 늦었을까요.
"왜…. 왜 제게만 이렇게 가혹하세요……."
살려주세요….
세상에 제가 믿을 사람은 아버지 한 분 뿐이에요…….
신랑이 될 제랄드가 다 자랐습니다.
얘도 아프네요. 발진을 앓고 있습니다.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습니다.
아자리아흐라는 유대인이 보르도를 찾아왔습니다.
제랄드처럼 재산 축조에 재능이 있고 박식한 학자이며 야망 있고 자비롭고 먹을 걸 좋아하네요.
"있고 싶은 만큼 머물러라. 방은 많으니."
필요한 건 차기 재무관 따위가 아니라 아버지를 고쳐줄 사람이에요.
전 고쳐주지 않아도 되니까….
11월 29일. 드디어 결혼했습니다.
행복해야 할 날인데 아무것도 기쁘지 않습니다.
날 사랑하지 않을 게 당연한 사람하고…….
왜……?
…아이가 필요해서…?
……내가 죽어가니까?
"국고에 보태게 축하금이나 놓고 가라고 해. 축복은……, 필요 없으니까……."
"전 아버지밖에 믿을 사람이 없어요. 제발……, 절 위해서 오래 살아주세요……."
아버지에게 정식으로 지명 섭정 자리를 드립니다.
"난 당신을 믿어요. 한번 왕궁 일을 맡아볼래요?"
주는 김에 집사 자리는 신랑에게 줄게요.
그 동안 궁정사제가 죽어 자리가 비었으니 채우겠습니다.
역시 절 사랑하는 건 아버지 뿐이고…….
나머지는….
그래, 줄줄이 손가락 밑으로 우우 야유 보내고 있던 때보다는 낫지….
조언자는 신랑에게.
기왕 결혼했으니 잘 지내야겠죠.
겨울 연회를 열 기분은 아니지만 성년도 되었고 순례도 다녀왔고 결혼도 했으니 봉신들을 위해 겸사겸사.
아키텐 국왕은 건재합니다.
"이모, 이모부. 축하드려요. 약 18년만에 보르도에서 태어난 푸아티에의 아이네요."
사촌여동생 라이센다가 태어났어요. 이모부를 많이 닮았어요.
여기서 잠시 우리 푸아티에 가문의 가계도를 펼쳐 볼게요.
보시다시피 가계는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의 자손만으로 이어져 있어요.
작은 할아버지의 아들딸은 모두 옥사하거나 병사해 요절했고, 전 플랑드르 공작의 외동딸 브리아와 차남 필립의 아들 필립(*아빠가 아예 외지에 버리고 간…)만이 남아있는데 모두 아키텐을 떠나 있고….
이 쪽은 저, 필리파 이모, 줄리아나 이모, 갓 태어난 라이센다….
이렇게 총 여섯이네요.
작은 할머니는 아직 살아계시지만 아키텐에 정이 떨어지셨는지 멀리 떠나셨어요.
그리고 카스틸리옹 남작이 후계자 없이 사망하면서 카스틸리옹이 국왕 직할령이 되었습니다.
첫 목표였던 금 700을 모았습니다.
다음 목표를 세울 차례예요.
아이가 필요합니다…….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 없어요.
건강한 아이가 필요합니다.
……저와는 달리…….
남편도 있고 돈이 어느 정도 모였으니 이제 대관식을 올려야죠.
바티칸에 출장 요청을 합니다.
이번 출장비는 150원이에요.
많이 싸졌네?
가장 화려한 대관식을 준비합니다.
250원이 추가로 들었어요.
이러려고 돈을 모은 거니까 아직은 괜찮아요.
이번에 바티칸에서 출장 오신 교황성하께서는 74세의 노인이시고, 겸손하고 독실하며 정식하고 야망 있고 순결하신 성직자세요.
대관식이 머지 않았는데….
"폐하, 글쎄 이 자가 폐하를 직접 뵙겠다면서…."
아르노(Arnaut)라는 이름을 가진 24세 평민 기사가 대관식 소식을 듣고 보르도에 나타났어요.
(*무력계 최고 레벨인 뛰어난 전략가, 고무시키는 지휘관, 독신주의, 신뢰, 인내, 야망, 온화, 용감, 자비.
순수 무력 세계 탑 레벨 수준인 28에 전투기술 33)
"아르노, 그대를 기꺼이 환영한다."
"떠나지 마. 날 두고 가지 말아줘…."
무더운 7월의 여름날, 바다처럼 푸른 눈을 가진 젊은 기사와 전 사랑에 빠졌습니다.
(*이쯤에서 전 대환장파티가 벌어졌습니다. 이벤트 텍스트는 저렇게 떴지만 플라토닉이었겠지….
독신주의만 아니었어도 제랄드 버리고 바로 결혼해서 세기의 악녀 평 감수할 스탯인데 외모도 준수한데 아 왜 ㅇ<-< )
전 닥스 여백작 기랑드가 시복되었어요.
아키텐에서 다 물러갔다고 생각했는데 흑사병을 피하지 못했네요.
언제나 제 편이 되어줬는데. 너무나 그리워요.
"국왕폐하, 오래 통치하소서!"
1138년 8월 5일, 재위 11년하고도 약 6개월만에 드디어 기름부음을 받고 정식으로 대관식을 올렸어요.
(*오라드 승계는 1127년 1월 27일)
대관식 이후 달라진 모습을 보여드릴게요.
제랄드도 이상한 털모자가 아니라 국왕의 배우자로서 제대로 왕관을 썼네요.
여전히 계승서열 1위는 필리파 이모예요.
기운차게 미래를 맞이해야 하는데….
벌써부터 지친 거 같아요.
(*음모력 최고 레벨 환영의 그림자, 순례자, 교황에게 대관받음, 근면함, 독실함, 온화함, 암.
외교력 9 무력 11 관리력 8 음모력 16 학력 10 전투기술 21)
(*역대 푸아티에 가주 최고 전투기술: 기욤 10, 조슬랭 20, 파트리샤 3)
+)스압을 예고합니다.
☆
15년 만에 다시 열린 대관식 축제는 찬란한 태양과 함께했다. 오래 전 그 날처럼 풍요를 되찾은 보르도는 어딜 가나 달콤한 포도향이 햇빛과 함께 감돌았다. 줄곧 이어지는 떠들썩한 분위기만큼 찬란한 낮도 길었고 박명이 찾아와 달궈진 대기를 식혀도 흥겨운 음악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대관식에 앞서 선 닥스 여백작 기랑드의 시복식이 더해진 보르도 왕성에서는 이방의 언어가 흔히 들렸다. 2월에 선 교황 마르티누스 2세의 뒤를 이어 즉위한 신 교황 하드리아누스 5세를 위시한 바티칸의 사절단과 신성로마제국,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라곤 등 인접국에서 군주를 모시고 온 행렬 등이 제각기 다른 언어로 관심을 나타내며 축하를 전했다. 지중해에서 찾아온 제노바,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의 사절단은 웬만한 왕후귀족의 행차보다 더 화려했다.
아키텐 왕국 대장군 마르탱은 길게 기른 붉은 수염을 손으로 한 번 가다듬고 시끌벅적한 연회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목적한 사람을 만나기까지는 오랜 걸음이 필요치 않았다. 그 사람은 연회장 한 편에서 다른 사람들처럼 의자에 앉아있었다.
“고되지 않으십니까?”
희고 긴 눈썹이 성성한 노장 핀은 제 자식뻘만큼 나이 차이가 나는 마르탱의 질문에 형형한 눈을 끔뻑이는 것으로 우선 대답했다.
“대장군이 제일 편한 임무를 내게 줬는데 고되다 하면 푸념일 뿐이지 않겠소.”
요인이 많을수록 경호는 철통같아야 한다. 칠순을 훌쩍 넘긴 장군은 자애로운 웃음을 지어보였다. 마르탱은 따라서 빙그레 웃었다.
“배려해주시니 감사합니다.”
밖에서 경계를 서는 것도 고역이지만 안에서 주의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귀빈들을 접대하는 것도 고역이다. 게다가 보르도를 찾은 손님들은 지위의 고하를 막론하고 왕가에 관심이 많았다. 마르탱은 낮에 단체 접견을 진행하면서 보았던 왕좌의 풍경을 떠올렸다. 여신처럼 우아하고 눈매가 고운 소녀 국왕 오라드와 아직 마흔도 안 된 젊은 상왕 길패트릭을. 그리고 그 옆에 각각 자리한 왕 제랄드와 상왕비 프레브라나를. 흠 잡을 데 없이 위엄에 찬 모습이었으나 혹자들은 조금 다른 시선으로 본 모양이었다. 국왕이 작고 가냘픈 소녀라는 점, 그 신랑인 왕이 본가인 오트빌 가의 지원을 기대하기 어려운 서자라는 점, 아키텐의 전권을 장악한 상왕은 왕가와 동성이 아닌 스코틀랜드 출신이라는 점, 왕위계승서열 1위인 필리파 공주는 친정을 등져 국왕을 도울 동성 친척은 선천적으로 휜 발 탓에 걷는 것조차 어려운 줄리아나 공주 하나뿐이라는 점. 모든 것이 다 입에 오르내리며 이해득실의 대상이 되었다.
“게다가 오랜만에 고향 이야기를 들으니 좋기도 하고.”
화제를 분산시킬 이가 필요했다. 노르웨이의 귀족 기스킹 가의 일원이면서 노르웨이 왕비의 친부, 초대 국왕 기욤부터 시작해 4대를 모신 유일한 노장은 이보다 더한 이를 찾을 수 없을 적임자였다. 연회석에 모인 귀빈들은 그를 통해 역대 국왕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그의 생애 역정을 들었다. 두 딸을 두고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조국을 향한 그리움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평생 충성서약을 지켜온 제2의 고향 아키텐도 함께. 마르탱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순조롭게 파장을 맞이하려는 연회석 가운데 왕국 첩보관이자 백조 사육사인 아르투아 여백작 아르신드가 기민한 발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르투아 백작. 무슨 일입니까?”
같은 자문회 위원 중에서도 첩보관과 대장군은 더 접촉이 잦다. 마르탱은 평소처럼 물었으나 내심 마음의 준비를 다졌다. 그러나 아르신드의 입에서 나온 청은 맥이 빠질 만큼 단순한 것이었다.
“바쁘신 와중에 죄송합니다. 잠시 여기를 맡아주지 않으시겠습니까?”
아르신드는 고갯짓으로 젊은 귀족들과 어울려 놀고 있는 제랄드를 가리켰다. 주인이 모두 자리를 비우면 객은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떠야 하니 누군가는 객의 흥이 다할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 주인을 지키는 이도 마찬가지다. 마르탱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를 가는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아르신드는 짧게 인사하고 다가왔을 때처럼 신속히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어느새 별이 총총했다. 가슴 속까지 명징하게 가라앉히는 맑은 빛은 손을 뻗으면 잡힐 듯이 가까웠다. 아르신드는 밤하늘에 눈길도 주지 않고 계단을 올랐다. 위병과 시종들은 아르투아 백작의 방문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서슴없이 길을 냈다. 아르신드는 열린 문으로 들어가 방의 주인을 부르며 공손히 몸을 숙였다. 그는 웬일로 혼자서 침대에 몸을 기대고 앉아있었다.
“…여긴 뭐 하러 왔어.”
조금 전까지 연회장에서 얼굴을 맞대고 있던 사이에 환영은 기대하지 않았지만 타박 섞인 만류부터 나왔다. 방 안은 궁의가 다녀가고 얼마 안 지났는지 눌어붙은 약의 씁쓸한 잔향이 가득했다.
“설마 오지 않으리라 여기셨습니까.”
아르신드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덤덤한 어조로 답하며 상대를 보았다. 그는 짧은 한숨을 쉬고는 손을 내밀어 침대 옆에 놓인 두 의자 중 한 쪽을 권했다. 호화로운 겉옷을 벗은 셔츠 차림의 팔은 그 짧은 사이 더욱 야윈 것처럼 보였다.
“프레브라나하고 엇갈렸나 보군. 곧 돌아올 거야.”
그는, 아키텐 상왕 길패트릭은 빈자리의 주인을 알려주고는 아르신드 쪽으로 몸의 방향을 약간 틀었다. 독대도 한담도 익숙한 사이였지만 쉽사리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맞이한 이와 찾아온 이 둘 다. 아르신드는 저도 모르게 긴 소매에 가려진 하얀 손가락을 몇 번 꼬았다.
말렸어야 했다. 아무리 중요한 시기라지만 일정을 최대한으로 줄였어야 했다. 비록 최상의 결과를 바랄 수 없게 되더라도 차라리 그게 나았다. 젊은 사람이라서, 뛰어난 사람이라서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그가 모든 것을 떠맡고 지휘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말았다. 지난 수년간 상왕 길패트릭이 섭정으로서 홀로 감당했던 살인적인 일과와 부담은 서서히 그를 좀먹고 부수었다. 딸에게 전권을 돌려준 후 불과 1년 만에 그는 쓰러졌고 아라비아에서 온 의학자는 종양을 진단했다. 이제 부녀는 같은 병을 앓았다.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송구합니다. 제가 미처 살피지 못했습니다.”
하루가 길었다. 해가 뜬 동안 너무나 많은 일이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교황과 추기경 등을 맞이하고 시작한 예배와 오전의 정무, 접견, 그리고 오후의 연석. 그가 왕가를 위해 계획한 모든 것은 정작 그 자신을 해치는 독이 되어 몸을 무너뜨리고 정신을 끊어놓았다. 아르신드는 물기 어린 푸른 눈을 감추려 고개를 숙였다. 눈물에 젖은 목소리를 감출 수가 없었다.
“그대는 내 지시에 따랐을 뿐이야. 그러니 자책하지 말게. 난 괜찮으니까.”
긴 축제 기간 동안 보르도는 서유럽의 축소판이 되었다. 외지에서 온 빈객들은 축하보다는 푸아티에 왕조의 존속 여부에 더욱 관심을 두느라 벌건 눈으로 왕가를 보았다. 우호적인 관계는 이쪽이 여유가 있을 때나 가능한 법이다. 분명 건재한 모습을 보이느라 조금 무리하긴 했지만 그마저도 감당할 수 없다면 처음부터 안 하느니만 못했을 테니. 길패트릭은 손을 뻗어 아르신드의 하얀 손을 겹쳐 잡았다.
“날 생각해줘서 고맙네. 진심으로. 허나 날 위한다면 나보다는 오라드를 돌봐줘. 그대도 아이가 있으니 내 마음을 알 거 아닌가.”
오라드는 마음을 터놓을 친구 하나 없었다. 세계의 인구를 절반 이하로 줄인 저주스러운 흑사병 탓에 어린 여왕은 한동안 보르도 궁성에서 자라는 유일한 아이가 되었다. 후우. 길패트릭의 입에서 웃음인지 한숨인지 모를 숨소리가 새어나왔다.
“좀 더 빨리 알았으면 좋았을 걸. 우습게도 난 내가 이렇게 되기 전까진 그 아이가 얼마나 아프고 무서웠을지 짐작도 하지 못했어.”
파트리샤는 임종을 맞이하는 순간 신에게 자비를 구하는 대신 자신에게 딸을 맡겼다. 생명을 담은 부탁이었다. 변화의 파도는 너무나 갑작스럽게 찾아왔고 겨우 정신을 차렸을 때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살을 에는 삭풍이 부는 곳으로 나아가야 했다. 멈추는 순간 부레 없는 물고기처럼 무저갱으로 가라앉을 것이니.
“상왕폐하. 부디 보중하십시오. 국왕께는…, 아키텐에는 아직 폐하께서 계셔야 합니다.”
길패트릭의 입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공허한 심장에서 핏물처럼 배어나오는 말 몇 마디를 꺼내지 않으려 입을 굳게 닫았다. 아키텐에 필요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선왕이었어. 하지만 신은 인간의 사정 따위 신경 쓰지 않으시지. 그 분께는 모든 생명이 다 같을 테니까.
“…너무 걱정 말게. 아키텐의 후계자를 안아보기 전에는 못 죽어. 내 아들에게 가르쳐 줘야 할 것도 너무 많아. 내가 없으면 프레브라나가 얼마나 고단하겠어.”
길고 지난한 여정이었다. 그리고 지나온 길만큼 머나먼 길이 안개 너머로 아스라이 뻗어 있었다. 아마도 생애 마지막을 맞는 순간까지 끝나지 않을 험로가.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쬘 때까지 조금만 더 시간이, 버틸 힘이 주어진다면.
“그러니까 울지 마. 난……, 아주 오래 살 거야.”
그러니까 그대도 오래오래 함께 있어줘. 길패트릭은 그렇게 덧붙이며 아르신드의 손을 놓았다.
“……들어가 보세요, 어머니. 제가 왔었다는 말씀은 하지 마시고요. 파커도 누나 만난 건 비밀로 해야 해.”
비밀. 오라드는 한 번 더 강조하며 두 돌을 갓 넘긴 이복남동생 파커의 작은 입술을 꾸욱 눌렀다. 파커는 오라드가 손가락을 떼자 동그란 눈을 끔뻑이며 입술을 오물거렸다.
“비밀이 뭐야?”
“말하면 안 되는 거.”
“말하면 안 돼?”
“응. 누나 못 봤다고 해.”
“왜?”
재작년 6월에 태어난 아기에게 ‘거짓말’이라는 고도의 지능 활동을 요구하는 건 무리인 모양이다. 오라드는 웃으며 동생의 통통한 볼을 두 손으로 감싸고 지그시 눌렀다. 그냥 들여보내면 ‘누나가 누나를 못 봤다고 하라 했다’ 같은 솔직한 소리를 할 텐데 어쩌면 좋을까. 다행히 도와줄 사람이 바로 앞에 있었다. 오라드는 프레브라나에게 눈빛으로 도움을 청하곤 몸을 돌려 가족 앞에서 멀어졌다.
태어나서 자란 곳의 길이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복도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 밖으로 나가는 것뿐인데 어찌 이리도 더딘지. 차마 바로 볼 낯이 서지 않아 도망치고 만 얼굴이 아른거린다. 오라드는 순간 현기증이 들어 저도 모르게 벽에 손을 짚었다. 폐하. 뒤를 따르던 시종과 위병들이 놀라 부르는 소리가 먼 산 너머 들리는 메아리처럼 멀게 느껴졌다. 오라드는 물을 잔뜩 머금은 이불처럼 무거운 몸을 억지로 움직였다.
“소리 높이지 마라. 조용히 할 수 없으면 따라오지 마.”
대답을 기다리진 않았다. 오라드는 한 기사의 이름을 나직이 부르며 옆으로 손을 내밀었다. 이름이 불린 기사는 앞으로 성큼 나와 오라드에게 꾸벅 고개를 숙이고 그 손을 잡아 부축했다. 일행은 다시 침묵하며 국왕의 뒤를 따라 정원으로 나아갔다.
밤의 정원은 사람이 적었다. 어둠이 모든 색채를 가려 세상에 존재하는 빛은 샛노란 달빛과 주홍빛 불빛, 그리고 은백색 별빛뿐이었다. 오라드는 불빛에 반사된 은은한 금빛 돌길을 따라 걸었다. 목을 축일 술과 고기를 배급받은 위병과 주취를 깨려고 잠시 바람을 쐬러 나온 귀족 몇이 아키텐 국왕을 알아보고 예를 올렸다. 그럴 때마다 오라드는 화사한 웃음과 함께 몇 마디 격려를 건넸다. 잠시 쉬고 싶어 나온 길에서조차 오라드는 국왕이어야 했다. 세상을 떠난 어머니와 삼촌이 그랬던 것처럼.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할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오라드는 하얀 꽃나무 아래에 섰다. 파릇한 초록빛 잎사귀를 절반이나 덮을 만큼 흐드러진 새하얀 꽃들은 밤바람에 산들거리며 싱그러운 향기를 풍겼다. 오라드는 아예 꽃그늘 아래에 주저앉았다. 궁내관이 당황하며 깔개로 쓸 것을 찾자 그녀는 손을 들어 제지했다.
“잠시 아르노와 할 이야기가 있다. 모두 물러가도록.”
오라드는 또렷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축한 기사의 이름을 다시 언급했다. 아르노를 제외한 일행은 잠시 망설이는가 싶더니 국왕의 발치에 등불 하나를 놓고는 둘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을 만큼 거리를 두고 멀어졌다. 오라드는 어둠보다 짙은 덩어리 속에서 섬뜩한 빛이 희미하게 반짝이는 걸 보았다. 만약 내가 소리라도 지르면 그 즉시 옆에 선 이의 목을 칠 생각인 걸까.
“편히 앉아.”
오라드는 자신의 옆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훌쩍 자란 풀은 으레 나야 할 소리를 죄다 삼켜버렸다. 아르노는 시키는 대로 오라드의 옆에 앉았다. 갓 왕궁에 온 젊은 기사는 국왕과 같은 방향을 바라보았다.
“며칠 있어보니까 어때? 여기가 내가 사는 곳이야. 네가 있게 해달라고 찾아온 곳이고.”
집. 가족. 이웃. 단순한 개념을 둘러싸고 참으로 많은 수식사가 붙었다. 오라드는 헤실 웃으면서 무릎을 세우고 얼굴을 묻었다. 밤바람에 서늘해진 드레스 자락이 이마에 닿자 금세 냉기를 잃고 미지근해졌다. 오라드는 무릎을 내리지 않은 채 고개만 빼꼼 들었다.
“……섬기고 싶었던 왕이 내가 맞아?”
폐하. 아르노는 다소 놀랐는지 목소리를 높였다. 오라드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후회되면 지금이라도 안 늦었어. 여긴 각지의 높으신 분들이 많이 모였으니까.”
모두들 강한 군주를 선호한다. 다부진 군마에 높이 올라 빛나는 보검을 치켜들 뛰어난 전사를, 보석이 박힌 찬란한 왕관을 쓰고 영역에 넘치는 부를 가져다 줄 지혜로운 통치자를. 교황의 대관식 왕림을 아키텐 전역에 통고한 후 어느 날 아르노는 홀연히 나타났다. 왕을 위해서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싸우고 싶다며 알현을 청하던 평민 기사. 막 24세 생일을 지난, 맑은 날 해수면을 닮은 아득한 푸른 눈을 가진 갈색머리 청년 기사는 궁성에서 가장 큰 화제였다.
처음으로 날 위해서 찾아온 사람.
내 키가 작은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힘이 약한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왕의 조카로 태어나 짧았지만 왕실의 하나뿐인 공주가 되고 이내 어머니의 후계자로 국왕이 되었다. 삶에 의문을 가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날짜도 잊을 수 없는 7월 14일까지. 그 날 이후 날 둘러싼 세계는 굉음을 내며 하나씩 부서지고 변모해갔다. 생활이란 껍데기를 한 꺼풀 벗겨내니 그 밑엔 책임만이 있었다. 아키텐의 국왕으로서. 여섯 명밖에 안 남은 푸아티에 가문의 가주로서. 성년이 되어 결혼을 하고 어머니가 되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의 저변에는 날 사랑할 리가 없는 사람과의 사이에서 속히 왕국을 이어받을 후계자를 얻어야 하는 끔찍한 현실이 심연 속에 웅크린 괴물처럼 바닥이 보이지 않는 입을 쩍 벌리고 있었다.
“가도 돼. 난 괜찮아. 어차피 다들 시간 지나면 잊을 거야.”
병약한 내 모습이 싫어 거울을 보고 싶지 않았다. 얼마나 공을 들여 꾸며도 더는 예뻐 보이지 않았다. 일과를 마치고 치장을 내릴 때는 먼 기억 속을 더듬으며 누구보다 빛났던 삼촌의 모습을 찾았다. 생사의 거리보다도 더 먼 거리가 거기에 있었다. 난 네게 어울리는 왕이 아니야. 억누르려 했지만 어쩔 수 없는 한숨이 가슴을 저미며 입술 사이로 흘렀다. 잘했어. 이게 맞아. 머리에서 흐르는 의식을 갈가리 찢기고 패인 가슴이 가로막으며 튕겨냈다. 가지 마. 제발 가지 마.
“…떠나길 바라십니까.”
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내면에서 벌어진 다툼이 몸을 마비시켜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혀가, 목이 독버섯이라도 먹은 양 마비되어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새 오라드의 말간 초록빛 눈은 차오르는 눈물에 잠겨 있었다.
“……마음대로 해.”
굳은 입에서 겨우 나간 건 왕의 옥음이 아니라 토라진 소녀의 목소리였다. 자신이 그런 말투를 썼다는 게 스스로도 믿기지 않아 오라드는 무심결에 손으로 입을 막았다. 옆을 볼 수 없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는 간단한 동작인데도 성지 히포 순례 도중 도적떼와 맞닥뜨렸을 때보다 더 큰 용기가 필요했다. 사람이 입을 다물자 바람을 맞은 나뭇잎이 사락사락 스치는 소리와 풀벌레 소리가 더욱 또렷이 울렸다. 여름밤하늘 중앙에 흐르는 은하수의 유백색 별빛에 고요가 함께 섞여 흘렀다.
“마음대로 하라 하시니 마음대로 하겠습니다. 국왕폐하. 전 떠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 떠나지 않겠습니다.”
“난 아무것도 약속해줄 수 없어. 요 며칠간 봤잖아.”
“편한 자리를 찾아서 온 게 아닙니다. 폐하, 전 폐하께 창검을 겨누는 자리에 서고 싶지 않습니다.”
그 말에 눈보라라도 맞은 양 온 몸의 피가 얼어붙었다. 오라드는 감각을 놓쳐버린 손을 미미하게 떨며 옷자락을 꾹 쥐었다. 단 하루라도 좋으니 돌아가고 싶은 행복했던 시간. 인생의 궤도를 송두리째 틀어버린 내전의 참극이 기억 속에 쌓인 여러 풍경과 오싹하게 섞여 기괴한 비명을 질러댔다. 빛과 어둠만 존재하던 단조로운 풍경에 불그죽죽한 핏빛이 끼어들어 시야를 가리고 형상을 기괴하게 뒤튼다. 오라드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기를 반복했다. 다가오지 마. 괜찮아. 싫어. 아무 일도 없어.
같은 신을 섬기는 형제라도 같은 아키텐 영역이라도 미래의 우호를 장담할 수 없다. 진저리가 나도록 아는 사실이다. 끔찍한 환상은 예복을 입고 찾아온 귀빈들의 성난 얼굴을, 소중한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지는 모습을 되풀이해서 보여줬다. 새로운 얼굴이 환상에 저절로 더해졌다. 국왕폐하. 얼굴의 반이나 피로 물든 시신이 입을 뻐끔거리며 손을 뻗었다.
“처음 약속드린 대로 폐하를 지키게 해 주십시오. 가장 먼 말석이라도 좋습니다. 폐하를 모시기 위해 여기로 왔습니다. 다른 주군 따위는 필요 없습니다.”
청량히 빛나는 푸른 눈동자가 바로 앞에 있었다. 손가락 둘째마디와 셋째마디에 걸쳐 조심스레 얹은 것이 밤공기가 아니라 사람의 손이라는 걸 인식하기까지 제법 시간이 걸렸다. 오라드는 감히 자신의 손을 잡을 수 없는 아르노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지러진 세상이 그를 중심으로 점차 침전되며 본래 형태와 색채를 되찾아갔다. 그의 푸른 눈은 딱할 만큼 여실히 떨리고 있었다.
“……정말 나야?”
어쩌면 이 남자는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주인이 저버렸다는 불명예를. 왕이 아직 모르는 속사정을. 이렇게까지 말한다면 대답은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당신뿐입니다. 국왕폐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바란다는 그 말을 듣고 싶어. 네가 선택한 결과라며 내가 진 무게를 덜고 싶어. 절대로 할 수 없는 말이 입 안에서 소리가 되지 못한 채 사방으로 튀었다. 작은 손이 큰 손에게서 스르르 빠져나갔다. 오라드는 손을 거두고 아르노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살짝 돌렸다.
“내일 대장군에게 널 부탁할 거야.”
멋들어진 인사치레 하나 하지 못했다. 가신의 청을 들어준 주군의 위엄 있는 모습을 가장하려면 고맙다는 말 한 마디 할 수 없었다. 오라드는 숲의 녹음을 닮은 초록빛 눈을 지그시 내리떴다. 달빛이 녹아든 우수 어린 하얀 얼굴은 한 치의 흔들림도 허용하지 않는 양 결곡하기만 했다. 다만 여왕 자신만은 본인의 표정을 남이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도 제대로 믿어본 적 없는데.
눈은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에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들 한다. 그러나 사람은 연기로 표정을 바꿀 수 있다. 스스로를 속이면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 되는 법이니.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사람은 얼마든지 가장을 할 수 있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눈앞의 사람이 하는 말보단 그 사람을 둘러싼 관계나 근황 등을 조합하고 동기를 추적하는 버릇이 생겼다.
신분을 감추고 사람을 만나는 게 더 편했다. 밀접한 관계를 요구하는 사람일수록 신경을 쓸 것이 많으니까. 호의는 장차 갚아야 할 빚에 지나지 않았다. 차라리 베푸는 게 더 마음이 편했다. 자신을 지키려면 다른 방식 따위 있지도 않았다.
매일매일 같은 나날이 이어질 텐데.
어쩐지 처음으로 믿고 싶어졌어.
분명 도박이겠지만.
☆
친정 시작하고 고작 2년… 좀 안 되는 시간인데…… 대체 이 다이나믹함은 뭘까요……
왕손으로 태어나 하나뿐인 공주가 되어 여왕으로 즉위해 남자가 둘인데 남편은 호모고 애인은 자체적 고자고 본인은 암 환자고 유일한 보호자나 다름 없는 한참 젊은 아버지도 암 환자……. 소설을 이 따위로 쓰면 편집부 단계부터 까이겠죠. 저도 알아요. 하지만 이건 크킹이고.
게다가 호모 남동생 돌보며 호모 남편과 살다가 하나뿐인 사위까지 호모인 파트리샤의 심정을 서술하시오…. 성적 지향이 사회를 망하게 하진 않지만 이 게임은 후사가 절실한데 불꽃같은 헤테로가 필요한데 ㅇ<-<
+)별 건 아니지만 초대였던 기욤은 갈발벽안, 콩스탕스는 흑발녹안인걸 확인했습니다. 조슬랭은 갈발녹안… 파트리샤는 흑발에 눈동자색 잘 모르겠고… 길패트릭이 녹안이고 오라드가 흑발녹안이네요. 제가 해상도를 1366x768로 줄여놓고 하지만 CK3에선 이것 좀 더 잘 보이게 해줬으면 좋겠다…. 혹시 charinfo 유전자 코드로 눈동자색 표기 아시는 분은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엄마가 독자가 되어주셨는데 연대기는 보기 어려워하셔서, 글만 봐도 부연설명 없이 전체 상황을 이해할 수 있게 서술 방법을 좀 고쳤습니다. 스크롤 압박을 견뎌주세요. 복 받으실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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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다리고있었습니다. 얼마든지 길어져도 괜찮습니다. 연재만 계속해주세요ㅋㅋ 과연 오라드의 첫아이는 누구의 아이가 될런지.. 자체고자 애인인가 게이남편인가
제가 아르노 완전 삼국지 게임 가챠 돌렸는데 한 번에 조운을 뽑은 기분이었는데………… (마상을 입음) 얘가 생식력 -1000%의 독신주의만 없었어도……
제 환장스토리를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D
늘 재미있게 보고갑니다. 바뀐 서술방식도 재밌네요. 제가하면 단순한 게임플레이인데 이렇게 풀어서 스토리를 덧붙이시는거 보고 많이 놀랐습니다. (아르노와의 밀회(?)부분) 항상 재밌게 보는 연재라 올리실때마다 빼놓지 않고 보고있습니다!
선동과 날조로 승부합니다 :D (코 쓱)
조슬랭 치세까지만 해도 '게임에서 볼 수 없지만 아마 이랬을 거 같은' 장면을 하나 잡아 인트로 같은 식으로 활용했는데 파트리샤 대부터 쭉 길어지고… 주인공 라인도 아니었던 길패트릭이 주연으로 치고 나오고… 연대기 정보값을 잘 못 보는 사람을 위해 좀 더 설명하게 되고…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려………
저도 제 취향 이야기를 쓸 수 있어서 즐겁습니다. 노을금빛 연대기 서사는 제 취향이에요. 감사합니다 :D
아... 재미있네요...
플레이어의 고통과 플레이 일지의 재미는 정비례하지요(울먹)
음.....이거 조상님 묘자리 안부를 절로 묻게만드는 조합입니다 그래도 하늘에 계시는 선대왕님들이 후사를 꼭 점지해주시길.....솔직히 플레이어가 한다지만 이모는 위정자의 느낌이 아니네요
기억하는 조상으로는……
이거 구분하는 호칭이 따로 있었는데 기억 안 나니 걍 쓰겠슴다.
외증조부모 - 병사(기욤 8세/부르고뉴의 힐데가르드 -크킹에선 오라드로 출력-)
외증조부 - 감염 합병증 사망(프랑스국왕 필리프 5세)
증조부(스코틀랜드 국왕. 아버지의 외할아버지) - 병사
외조부 - 스트레스로 사망(과로사?)
외조모/친조모/외숙부/모친 - 흑사병
친조부 - 병사
조각글과 종합하면 콩스탕스와 파트리샤, 조슬랭은 시신을 화장했으니 관 속에는 옷과 유골함이 들어있겠네요. 묘자리 문제 수준이 아닌데……? ㅇ<-< 푸아티에는 행복하고 싶었습니다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