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점: 7년 중풍 환자 1달 간 침 맞고 회복
와사풍 환자 침 맞고 그 자리에서 완치
생맥과 사맥 구별하여 오행원리로 조절
수술환자는 명침이라도 혈맥 뚫기 어려워
예로부터 일침·이구·삼약(一針·二灸·三藥)이란 말이 있듯이, 오래 전부터 우리 선조들은 침을 질병치료
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아왔다. 이 침은 동양의 고대 의서인 <황제내경소문(黃帝內徑素問)>에 "돌침은 동방으로부
터 왔다"라는 기록을 근거로 볼 때 우리 민족이 독창적으로 개발하여 중국이나 일본에 전해 주었다는 게 일반적
인 견해이다.
침의 질병 치료원리는 동양철학이 우주의 순행원리를 조화(調和)에서 찾듯이, 인체의 기혈(氣血) 흐름을 조화
롭게 해주는 데 있다. 그 결과 인체 내의 자연치유력을 회복시켜 질병을 퇴치하는 방법이다. 충북 음성군 소이면
김안흠(金安欽, 취재 당시 95세) 옹은 이런 침술의 심오한 원리를 터득해, 지난 50년 간 많은 병자를 구료해 오
며 살아오고 있는 재야의 침술명의이다.
김 옹이 사는 마을은 소이면 갈마절. 음성 시외스터미널에서 택시를 타고 괴산쪽으로 10여 분 달리면 다다
를 수 있는 곳이다. 김 옹의 집은 택시기사에게 "침 잘 놓는 할아버지 댁에 가자"는 말 한 마디만으로도 쉽게 찾
아 갈 수 있었다. 그만큼 김 옹의 명성은 인근에 널리 퍼져 있었고, 찾아가는 사람이 많았다.
마을에 들어서니 '민박됩니다' '식사됨'이라고 써붙인 집들이 먼저 눈길을 끌었다. 이런 진풍경에 대해 마을
어귀에서 만난 김씨라고만 밝힌 한 민박집 여인은, 김 옹의 침을 맞기 위해 하루에도 1백~2백 명의 환자가 찾
아오는데, 외지에서 모여드는 사람들이 숙식을 원하는 통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자상하게 설명해 주었다. 이제
인근 10여 가구가 한 집에 5~6명씩 외지 사람들을 둔 민박집 겸 식당이 아닌 곳이 없다고 한다.
김 옹의 집 앞은 충북·경기·서울·부산 등의 번호판을 단 차량이 주차장을 방불케 할 정도로 늘어서 있었
다. 그중에는 단체로 타고 온 듯한 봉고차도 여러 대 눈에 띄었다. 그리고 지팡이나 주위 사람에 의지해 뻣뻣해
진 몸을 겨우 움직이는 7~8명의 환자가 김 옹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또 20평 남짓한 김 옹의 허름한 시골집
마당에는 휠체어를 탄 사람, 뒤틀어진 몸을 추스려 평상에 걸터 앉아 있는 사람 등 30여 명의 환자로 가득하였
다.
이렇게 밀려드는 사람들이 오는 순서대로 치료하기 위해 김 옹의 맏아들 김홍익(취재 당시 68세) 씨는 번호
표를 나누어 주고 있는데,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임에도 순번이 벌써 80번을 넘어서 있었다. 환자들이 밀려드는
바람에 아침 6시부터 오후 5시까지 점심시간 10분을 제외하곤 숨돌릴 틈도 없이 침을 놓고 있지만, 하루에 다
침을 놓아주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90 고령의 김 옹에게는 불가능한 중노동이지만 "이것도 구세의 방법
이니 하는 것"이란 말로 모든 노고를 아끼지 않는다고 맏아들 김씨는 들려준다.
김 옹을 찾아오는 사람은 대개 중풍 환자들. 몸이 비틀어지고 팔다리가 뻣뻣해지고, 혀가 굳어져 말문이 막
히고, 입이 돌아가고, 허리나 손발이 저려오는 사람 등이다. 이런 사람도 여기저기 전전하다 병원이 두 손 들어
버린 다음에야 온 경우가 많아 상태가 아주 중증이었다. 이런 환자를 김 옹은 침 하나로 치료해내고 있었다.
같은 동네의 김씨라고만 밝힌 한 여인은 찾아오는 사람이 전부 나아서 가는 것은 아니지만, 옆에서 살면서
본 결과 움직이지도 못하여 업혀온 중년부인이 2~3개월 치료 끝에 걸어서 나가기도 하고, 하반신이 마비돼 휠체
어 신세를 지던 중학생이 김 옹의 침술치료를 받은 끝에 버젓이 걸어 다니고 있다고 말한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부인(취재 당시 55세)을 업고 온 노흥태(취재 당시 57세, 서울 강동구 둔촌동) 씨도 부인
이 이틀에 한 번씩 지난 한 달 간 김 옹의 침술을 받은 결과, 입이 돌아간 게 바로 잡아지고 어느 정도 말을 하
게 되었다고 들려 주었다. 그의 부인은 중풍으로 쓰러져 지난 7년 간 말도 못하고, 음식을 삼키지도 못하였다고
한다. 또 대전에서 온 최재명(취재 당시 25세 남자) 씨는 올해 63세인 부친이 자다가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졌
다고 한다. 3개월째 대전 모 양방병원에 입원하여 약물치료를 받았으나, 아무런 차도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김 옹의 침을 2주째 맞았는데, 이제는 말을 할 수 있게 되고 마비가 어느 정도 풀렸다고 한다. 또 30년 넘게 당
뇨를 앓아 눈이 어둡고 기력을 추스리지 못했다는 천안에서 온 60대 남자는 김 옹의 침을 3번 맞은 결과 조갈
증과 빈뇨증상이 덜하다고 들려주었다.
이밖에 필자가 직접적으로 만나지는 못했지만 김 옹의 구료일화 중에는 구 야당 원로인 신도환 씨의 부인이
중풍 1달만에 완치되어 갔다든지, 전 문교장관 ㅇ씨의 부인이 신경통을 나았다든지, 전 국회의원 ㅎ씨가 중풍을
고쳤다든지 등 유명인사도 꽤 포함돼 있었다.
김 옹의 방에 들어서니 두세 평 남짓한 공간에 10여 명의 환자로 가득 차 있었다. 첨단장비를 자랑하는 양
방병원에서도 못 고치는 중증의 병을 고치는 곳이라 바짝 긴장하고 옆에서 앉아서 지켜보았지만, 어디를 보아도
평범한 할아버지요, 치료기구라곤 침통에 꽂혀 있는 동침(銅針) 몇 개뿐이었다. 단지 특이한 게 있다면 아흔 살
넘은 노인답지 않게 눈과 귀가 전혀 어둡지 않고, 그 많은 환자를 꼿꼿이 앉아 대하는 모습이었다.
"3년 전에 무거운 것을 들다 허리를 삐끗해는데, 그 뒤로 허리가 저려와 죽겠어요."
"걱정 허지마. 침 맞으면 나아. 고질병이 어렵지 허리통은 병도 아녀."
김 옹은 허리 통증이 심해 제대로 서지도 앉지도 못하여 엉금엉금 기다시피 하는 여수에서 왔다는 중년 부
인의 근심을 달래며 이내 능숙하게 혈(穴)자리 여기저기에 동침으로 쿡쿡 찌르면서 훑어나갔다. 그러더니 허리를
살살 돌려보라고 하였다. 그녀는 허리를 살살 돌려보더니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이상해요. 허리 통증이 없어요."
"맥힌 혈을 뚫어 놓았으니, 이제는 아픈 게 없을 거여. "
중년 부인은 자신에게 통증이 이내 없어진 게 몹시 신기했던지 연신 허리를 움직이었다. 3년 묵은 허리통이
침 한 번에 낫다니? 옆에서 지켜보면서도 반신반의하고 있는데, 놀라운 광경은 바로 이어졌다. 구안와사풍으로
온 40대의 남자의 얼굴을 신중히 살핀 김 옹이 지창(地倉)과 승장(承漿)에 침을 하였는데, 그 남자의 비뚤어졌던
입이 그 자리에서 바로 되었던 것이다. 참으로 어안이 벙벙한 일이었다. 그 40대 남자는 서울의 제일 큰 양방병
원과 한방병원을 다 전전해도 낫지 못하고 6년 째 고생했는데, 침 단 2대에 나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고맙다고 절을 백배하다시피 하고 나가는 그를 뒤로 하고 김 옹은 서울 목동에서 온 30대
후반의 여인에게 침을 놓기 사작했다.
"병원엘 가면 다발성 전신 관절염이라고 그래요. 완치는 불가능하니 악화되는 것만이라도 방지하자고 해요."
"병원에 갔으면 병원에서 고쳐야지 왜 나헌티 왔어. 병을 키워 가지고 와서 고쳐 달라고 허니 문제여. 병원
에선 치료허지 못허면 허리통도 죄다 관절염이라 그러지. 침 맞으면 아픈 게 없을 거여."
그녀는 5년 전 애를 낫고 산후풍이 악화되는 바람에 다발성 전신 관절염이 생겼는데, 양방병원에선 류머티
스 관절염이라면서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하였다고 한다. 그후 병원을 다니긴 했지만, 뚜렷한 치료를 하지
못하면서 지내왔다고 한다. 그런데 김 옹에게 가끔 와서 2달 간 맞은 결과, 목·다리·엉덩이·허리의 '질질' 매
던 통증이 많이 가셨다고 한다.
오늘의 의학이 속수무책으로 손을 들어버린 중풍을 고쳐내고, 디스크·신경통·관절염 등을 쉬운 병으로 취
급하는 김 옹은 침술경지가 과연 어느 정도이기에 그러는 걸까. 유심히 김 옹이 증상별로 침을 하는 혈자리를
관찰하였다.
먼저 김 옹은 팔이 올라가지 않는 50대 여인에게 견우·곡지·수삼리에 침을 하였다. 요추통이 심한 여수에
서 온 여인에게는 척택·위중·인중·곡지·태연·태백에 침을 하였다. 구안와사풍 환자에게는 승장과 지창과
함께, 말을 못한다고 하니 혀 밑에 있는 혈인 금진과 옥액에 침을 추가로 하였다. 또 척추 아프다는 50대 남자
에게는 항문 부위의 장강, 발바닥 중앙의 용천, 오금 부위의 위중에 침을 하였다. 불면증 환자에는 백회·천주
등에 침을 하였고, 전신이 시리고 아프다는 환자에게는 양릉천·내정·태충·곤륜 등에 침을 하였다. 이밖에 오
금이 저리다는 환자에게는 족삼리에, 허리가 저리다는 환자에게는 용천혈 한 군데에만 침을 하였다. 그러면서 용
천혈은 40여 혈 통괄하고, 단전은 일신의 정액이 다 모인 곳이라고 했다. 전체적으로는 좌통우침(左痛右針) 우통
좌침(右痛左針)의 칩법에 따라 오른쪽에 병이 있으면 왼쪽에 침을 하고, 왼쪽에 병이 있으면 오른쪽에 침을 하였
다.
이렇게 침을 하는 것은 다른 데서 침을 하는 것과 다른 게 없는 듯이 보이기도 했고, 침을 하는 것을 부분
적으로 보아서는 어떤 원리에 기준하여 침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따라서 그날 환자치료가 다 끝난 후에 김 옹
에게 궁금증을 물어 보았다.
"내 침술이 묘헌 게 아니라 치료가 뻔헌 걸 치료 못혀내는 오늘날의 의학이 문제여. 내 보기엔 쉬운 걸 병
원에선 치료를 못혀내니 나는 병원이란 데를 병 치료원리를 모르는 곳이라고 봐. 단지 환자를 놓고 이렇게 저렇
게 실험이나 하는 곳일 뿐이여. 우리나라의 뛰어난 전통의술이 발전하지 못허고 막힌 걸 한탄헐 뿐이지."
김 옹은 중풍 등을 치료해내는 '비법'이 무엇이냐는 필자의 질문에, 대뜸 자신의 침술에는 특별난 게 없다고
답변하였다. 그리고 모든 비결은 전래하는 의술 속에 다 담겨져 있는데, 이것이 단절되어 모든 사람이 치료방법
을 모르고 있는 게 안타까을 뿐이라고 말하였다.
"중풍 발병의 근본원인은 공골생풍(空骨生風)이라. 뼈가 비었으니 바람이 차 올라와 병이 나는 게지. 인체의
기(氣)와 피는 혈맥(穴脈)을 타고 흐르고, 혈맥이 맥히면 자연히 마비가 오는 법이지. 그러니 맥힌 혈을 침으로
자극해 기와 피를 통허게 허면 자연히 바람찬 것이 빠지고 병은 낫게 돼 있지. 아무리 의학박사래두 병의 이런
근본을 깨닫지 못 허고 치료방법에 어두워 있으니 병을 못 고칠 수 밖에."
그래도 침 하나로 뼈 속에 차오른 바람을 빼내고 중풍을 치료할 수 있는 김 옹 나름대로의 비결이 있을 듯
하여 그 원리를 재차 물어 보았다.
"세상의 이치는 음양(陰陽)의 조화여. 오행(五行)의 상생상극(相生相剋)에 의해 움직이고 인체도 마찬가지라.
음양의 조화가 무너지면 병은 오기 마련이니, 음(陰)이 강하면 양(陽)을 보(補)해주고, 불이 강하면 물을 보해주어
야지. 또 같은 병이라도 사람의 근본 체질에 따라 그 원인은 다른 법이니 형상과 체질을 살펴(觀形察色) 차거움
으로 온 병은 덥혀주고, 건조해서 생긴 병은 적셔주어야지."
김 옹은 자신의 침법체계는 음양오행의 원리에 입각해 있다고 들려준다. 그리고 산세가 죽고 사는 게 있듯
이, 병 든 사람에게도 사맥(死脈) 생맥(生脈)이 있다고 한다. 이것을 아는 게 침술을 할 때 중요하다고 한다.
"내가 원래 음성 일대에 유명헌 지관이었지. 오랫동안 지관 공부를 허게 되니 자연히 산을 보면 저 맥이 살
었는지 죽었는지 눈에 보여. 그러다 보니 병이 들어서 오는 환자를 관형찰색허면 어느 맥이 죽어서 병이 왔는지
도 눈에 보여. 모든 건 원리를 알면 똑 같은 일이여.
그제야 난치병을 고쳐내는 김 옹의 침술비결이 어느 정도 풀렸다. 그것은 바로 환자의 생맥과 사맥을 짚어
내는 김 옹의 혜안이며, 이것을 음양오행의 원리에 의해 기혈 흐름의 균형을 되찾아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러나 김 옹은 환자의 생맥과 사맥을 구별하는 법이나 그에 따른 구체적인 취혈법(取穴法)은, 상황에 따라 너무
다양할 뿐더러 이젠 기억력이나 기운이 달려 일일이 설명하기 어렵다고 말한다. 그리고 설령 자신이 설명했다
해도 그 근본 원리는 오랜 경험을 하여 스스로 터득해야지, 원리도 모른 채 남이 한 걸 그대로 따라 해보았자
소용이 없는 일이라고 한다.
"침을 제대로 배우지 못해서 그렇지, 제대로만 알면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어. 그렇다고 침구책을 외운다
고 되는 것은 아녀. 내 침구경험방을 주어도 요즘 사람 모를 겨. 스스로 원리부터 깨우쳐야 되고 경험이 있어야
되지. 약도 어떤 약은 무슨 성질이 있고, 그 약을 쓰면 어디에 소용이 된다는 것이 있잖여. 그렇듯이 침도 어떤
혈(穴)을 찌르면 어디로 통허고, 어디가 좋아지고, 인체의 조화가 어떻게 찾아질 것이란 걸 경험을 통해 스스로
깨우쳐야지. 그걸 깨우치지 못허면 환자에 따라 적합한 침을 놓을 수가 없어. 내가 환자에 따라 놓을 수 있는 중
풍침술만도 2백 가지가 넘어. 그걸 어떻게 일일이 따라 헐 수 있것어. 원리를 알아야 허는 게지. 침이란 원리를
모르고 함부로 하는 게 아녀. 잘못 놓으면 혈의 흐름이 역류하여 터져 죽을 수도 있어."
그리고 김 옹은 병은 명의가 고쳐주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병을 고치기 위해선 무엇보다 환자가 올바른
몸과 마음의 자세를 가지는 게 중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주색을 경계하고, 돼지고기·닭고기·밀가루음식 등 잡
다한 걸 금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한다.
김 옹이 침술을 배운 것은 50여 년 전인 40세 무렵. 일제 말기인 당시에 그는 마을회관에 나가 친구들과
바둑이나 장기를 두면서 자주 나라의 앞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나라가 일본으로부터
광복되면 선조들 마냥 동네에서 침술을 베풀어 보자고 우연히 이야기를 꺼낸 게 침술을 배우게 된 계기가 되었
다고 말한다.
"나는 13살에서 14살 때꺼정 서당교육을 받아 한문서적은 제법 읽을 줄 알았어. 당시에 조선의 운세를 적
어 놓은 비서(秘書)들이 여럿 있었어. 그런디 그 책을 보면 조선이 경술년에 일본에 합병되고 1945년 광복된다
는 말 등, 나라의 운세가 암호처럼 풀어서 적혀 있어. 그걸 보고 친구들과 마을회관에서 자주 만나 한담처럼 이
야기를 나누었지. 그러다 우연히 나라가 광복되면 침술을 해보자는 말이 나온 게지. 일본의 통치를 받기 전인 우
리 아버지 때꺼지만 혀도 동네마다 침 잘 놓는 사람이 있어 병을 쉽게 고쳐주었다고 들었어. 일본이 의사 면허
제도를 만들어 동네에서 면허없이 침을 놓으면 모두 잡아가는 바람에 없어졌지만, 나라가 광복되면 다시 동네에
서 침술을 헐 수 있을 거라고 생각허고 침술을 배웠지."
그때부터 김 옹은 한의학 서적을 통해 전통침술을 익히고 나름대로 침술체계를 세웠는데, 당시에 주로 보았
던 책들은 허준의 <동의보감>이나 허임의 <침구경험방>,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 등이라 한다.
그런데 김 옹은 40세 이전까지는 음성 일원에 꽤 알려진 지관으로 농사를 지으며 틈틈이 이웃의 묘자리를
보아주는 일을 하였다고 한다. 이 풍수지리를 보는 눈은 그의 집에 16년 간에 걸쳐 둔 여러 지관의 영향이 컸는
데, 이렇게 김 옹이 집에 지관을 두었던 까닭은 객사한 그의 생부에게 좋은 묘자리라도 써주어야겠다는 생각때
문이었다.
김 옹의 고향은 경기도 양평으로 그는 3형제 중 둘째이었다. 그런데 가난했던 그의 생부는 그가 13살 때
집은 부유하나, 자식이 없는 먼 친척뻘 아저씨 댁에 그를 입적시켰다. 그후 그는 양부를 따라 현재의 음성에 와
서 살게 되었는데, 20살 때 그의 생부가 읍에 나갔다 객사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김 옹은 객사한 선친에게 좋은 묘자리라도 써주기 위해 여러 지관들과 10여 년을 두고 묘자리를 보러 다니
면서 자연히 산세와 땅의 혈을 보는 것에 눈을 뜨게 되었다고 한다. 결국은 나중에는 남의 묘자리를 보아주는
음성 일원의 유명한 지관이 되었다고 한다. 김 옹은 지금도 유명했던 지관답게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
의 묘가 혈이 아닌 데 써졌다고 말한다. 이런 풍수지리를 보는 눈이 결국은 침술의 원리를 쉽게 터득하게 된 밑
거름이 되었던 것이다.
"술사(術士)는 묘헌 데 입신(入身)허면 통헐 수 있고, 통허면 매양 한 가지여. 우주도 볼 수 있고, 지리도 볼
수 있고, 세상도 고칠 수 있고, 병도 고칠 수 있지. 산에 산세가 있고 혈도 있듯이, 인체에도 맥이 있고 혈이 있
지. 원리릉 통하면 모든 건 한 가지고, 침 놓는 혈도 만 가지 증상에 따라 나름대로 가감헐 수 있게 되지. 옛 의
서를 보면 병에 따라 침을 놓는 혈을 밝혀 놓은 책들이 많이 있어. 그렇다고 내 침술은 어느 방서에도 나와 있
지 않아. 여러 의서를 읽고 그 원리를 깨달아 내 나름대로 침법을 세우고 침구책을 엮은 게지."
한편 김 옹은 자신이 풍수지리를 알고 침술의 심오한 원리를 깨쳤지만 배워서 알 뿐, 결코 이인(異人)이 아
니라고 말한다. 여러 가지 비서(秘書)를 보고 앞으로 나라에 큰 혼란이 있을 거란 정도는 알고 있으나, 자신은
모르기 때문에 지껄일 뿐이라고 한다. 진정으로 천기(天機)를 알고 통(通)한 사람은 결코 함부로 지껄이지도 않을
뿐더러, 아직은 때가 아니라서 산중에 묻혀 있다고 말한다.
현재 김 옹에게 전국에서 찾아오는 중풍 등 난치병 환자 수는 하루에 1백~2백 명 정도. 이렇게 많은 환자
가 몰리는 건 최근 3년 전의 일이라고 한다. 지난 50년 동안은 농사일을 하며 동네나 인근에서 가끔 찾아오는
사람에게 침을 놔주는 동네의사 노릇을 해주었다고 한다. 그런데 '음성에 명침이 있고 급체환자나 중풍 환자들이
신통하게 나았다'는 소문이 퍼지는 바람에 환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최근과 같이 많은 환자가 찾아오는
건 예전에 없던 일로 육식을 많이 하고, 공해가 심해지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만성병 환자가 급증했기 때문이라
고 김 옹은 진단한다.
이렇게 설명을 마친 김 옹은 만성병을 치료하는데 있어 수술은 절대 금물이라고 강조한다.
"나는 병원을 실험실 정도로 밖에 안봐. 만성병을 치료허는 방법을 모르니 물리치료 정도를 허거나 걸핏허
면 수술을 혀. 사람의 몸에는 정(精)이 있고 신(神)이 있는디, 신은 털구멍을 통해 왕래허지. 그런데 수술을 허면
털구멍이 잘라지고, 아물어도 제대로 통허지 않아. 아무리 명침이래두 수술 환자는 더 이상 치료헐 수 없게 되
지."
한편 김 옹의 침술을 받고 난치병을 고친 많은 사람들은 김 옹의 침술이 뛰어남에도 면허가 없다는 이유로
의료계에서 외면 당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들은 면허가 있고 없음을 떠나 국민건강을 위해서라도 김 옹의 침
술이 하루 빨리 학술적으로 연구 개발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김 옹의 맏아들 김홍익 씨는 뜻만 있지 김 옹의 침술을 보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라
고 안타까워 한다. 작년에 김 용으로부터 중풍 치료를 받고 반신불수 된 부인의 몸을 고친 구 야당 원로인 신도
환 씨 등 많은 사람이, 김 옹의 침술의 맥이 끊기지 않는 방안을 모색해 보았으나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한국에
선 면허없는 사람이 제도적으로 후학을 양성하거나 학술적으로 보존할 방안을 찾기란 힘들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라고 한다. 다만 최근에 모 대학 한의과 교수가 개인적으로 찾아와 김 옹의 침술법과 혈맥법을 배우고 있는
형편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 의료법을 보면 "의료인이라 함은 보건사회부 장관의 면허를 받은 의사(양의사를 말함)·치과의사·
한의사·조산사 및 간호사를 말하며, 의료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학위를 받은 다음 보건
사회부 장관이 시행하는 국가시험에 합격해야 한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그외의 사람이 의료행위를 할 경우 5
년 이하의 징역, 또는 5백 만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다.
이런 제도 아래서는 의료면허가 없을 경우 의술을 밝히는 길은 고사하고, 그 의술이 아무리 뛰어나더라도
사람을 살려주는 행위를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의술이라 함은 병을 고치고 인명을 구하는 게 목적이다. 도
예과 교수보다는 비록 무학(無學)일지라도 수십 년 간 도자기를 빚어온 도공이 명품 만들어내듯, 사람을 살리는
능력도 학식과 면허가 있고 없슴으로만 따질 수 없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옛부터 학식이 풍부하고 인격이 고매한 유학자(儒學者)들이 지역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고, 동
양철학에 근거하여 나름대로 의술을 발전시켜온 아름다운 풍속을 지녀왔다. 또 학식은 없더라도 자신이 체득한
병을 고치는 법을 이웃에게 나누어주는 아름다운 풍속이 있었다. 그리고 의술은 인술(仁術)이라 하여 돈을 버는
수단이 아니라, 당연히 아픈 이웃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어떤 사람이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베풀어야 하
는 수단으로 여겨 왔다.
그런데 일제시대 때 일제는 민족문화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의료법과 면허제도를 제정하여 서양의학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모든 의술은 소멸시키기 시작했다. 결국 민족의 독창적인 의술을 펴던 향토명의는 불법화 됐으니,
재야의 뛰어난 의료인을 없애려는 처사는 일제시대 이래 계속되고 있는 악습의 잔재라 하겠다. 그리고 그 속에
서 오늘날까지 의술은 국민의 생명을 구하는 기준보다는, 면허를 가진 의료인의 경제적 이익과 독점권을 보장하
는 기준으로 왜곡되어 왔다. 의술이 뛰어남에도, 또 어디에서도 못 고치는 난치병을 고쳐주고도 의료제도에서 밀
려나 서있는 김안흠 옹은 바로 그런 실상을 극명히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일제의 나쁜 잔재가 하루빨리 청산되
길 기대하며 김 옹의 집을 나섰다
첫댓글 이렇게 유명하신 분이 있었다니 놀랍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