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과 술자리에서 우연히 삼천궁녀 대한 이야기가 나왔는데 모두들 역사 전공자가 아닌지라
대부분 알고 있는 지식이 위인전이나 소설 정도로 읽은 내용의 지식으로 "있었다", "없었다"로 의견이 분분하다가
술자리에서는 목소리 크고 그냥 우기는 사람이 장땡이라 급기야는 "삼천궁녀 때문에 백제가 망했다"로 불똥이 튀기에
"오늘날 정치판에서 하는 말들도 참말인지? 거짓말인지?도 구분 못하는데
어찌 1,300여년전의 내용을 가지고 있다 없다를 말할 수 있는가?
몇백명 그것도 200~300명 궁녀는 몰라도 삼천궁녀는 우리들 처럼 술 퍼마시고 취중에 나온 호사가들의
말 장난에 부풀려진 口傳에 불과하느리라....라고 한마디 하고는
머리가 나쁘면 공부를 하라 공부를..."........ㅋ.ㅋ
완전히 좌중을 제압하는 압권의 명대사로 모든 입을 닫게 만들기는 하였지만
정작 본인도 이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여 양심상 나름대로 추적을 해 본것입니다.
도대체 왜? 이런 내용이 구전되었는가?로 의심하면서 이미 역사스페셜 방송에도 나왔다고 하지만
본인은 그 방송을 보질 못해 내용을 몰라 나름대로 사료를 찾아 추적하게 된것으로
일단 백제 멸망시 궁녀들이 타사암에서 강물에 투신자살한 내용이 삼국유사 태종 춘추공편에 전하는 것을
시작으로 추적된 것입니다.
백제 고기에 이르길
"부여성 북쪽 모서리에 큰 바위가 그 아래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데,
서로 전하 여 이르기를 의자왕과 여러 후궁들이 화를 면하지 못할 것을 알고 차라리 자진을 할지 언정 남의 손에 죽지 않겠다.
하여 서로가 이끌고 와서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으므로 속칭 타사암이라 한다."
했으나, 이것은 속설이 와전된 것이다. 다만, 궁녀들은 그곳에서 떨어져 죽었으나 "의자왕이 당나라에서 죽었다."
함은 당사(唐史)에 명문으로 전한다....(삼국유사의 내용)
또한 삼국유사 남부여와 전(前)백제와 북부여 편에서는
또 사비하를 양쪽 언덕은 흡사 그림 병풍 같았으므로 백제왕이 늘 그 곳에서 잔 치를 열어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겼다.
그런 까닭에 이 곳을 지금도 대왕포라고 한다.라고 기록 되어 있습니다.......(삼국유사의 내용)
동사강목 제4상 기유
신라 진덕 여주(眞德女主) 3년, 고구려 왕 장(藏) 8년, 백제 왕 의자(義慈) 9년-을사 신라 경덕왕(景德王) 24년 107년간
경신년 신라 태종 7년, 고구려 왕 장 19년, 백제 왕 의자 20년(당 고종 현경 5, 660) 의 기록에서
추7월 ......(상략)...왕궁의 여러 희첩(姬妾)들은 대왕포(大王浦)의 암석 위로 도망가 떨어져 죽으니
뒷사람들이 그 바위를 낙화암(落花岩)지금의 부여현(扶餘縣) 이라고 불렀다.
차자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켰다.
라고 기록되어 있는바
건국대 신복룡 교수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의자왕과 3천 궁녀의 진실"이라는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고려 시대에 이색(李穡)의 아버지인 이곡(李穀·1298∼1351)이 부여를 돌아보고
‘一日金城如解瓦
하루 아침에 도성이 기왓장처럼 부서지니
千尺翠巖名落花
천 척의 푸른 바위가 이름하여 낙화암이러라
라는 시를 짓고
고려 후기의 문신이자 시인인 이존오(李存吾·1341∼1371)는
‘落花巖下波浩蕩
낙화암 밑의 물결은 호탕한데
白雲千載空悠然
흰 구름은 천 년을 속절없이 떠도누나
라는 시를 지은 것을 보면 고려 시대에도 이미 낙화암이라는 이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내가 과문한 탓이라고 생각되지만, 3000 궁녀가 낙화암에서 투신 자살했다는 글을 처음 읽은 것은 일제 시대에 나온
윤승한(尹昇漢)의 소설 "김유신"(金庾信·야담사·1941)이었다.
그에 관한 "최초의 공식적인 기록"은 아마도 이홍직(李弘稙)의 "국사대사전"(지문각·1962)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홍직이 3000 궁녀의 첫 발설자라는 뜻은 아니다.
그 이전에도 3000 궁녀 얘기는 있었다.
이홍직은 참고 문헌으로 "신증동국여지승람"을 적어놓았으나 그 책에는 그런 얘기가 없다.
아마도 구전을 그렇게 정리한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라고 밝히고 있다.
라고 소개하지만
저는 오히려 중국황제들의 慌淫과 더불어 그 규모에서 유래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 부분은 결론 부분에서 다시 언급하겠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세종 15년 계축(1433, 선덕 8) 10월 28일(정축)
술에 대한 폐해와 훈계를 담은 내용의 글을 주자소에서 인쇄하여 반포하게 하다
옛날 신라가 포석정(鮑石亭)에서 패(敗)하고, 백제가 낙화암(落花巖)에서 멸망한 것이 술 때문이 아닌 것이 없다.
고려의 말기(末期)에는 상하가 서로 이끌고 술에 빠져 제멋대로 방자하게 굴다가 마침내 멸망하기에 이르렀으니,
이것도 또한 가까운 은감(殷鑑)이 되는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국조보감 제6권 세종조 2(世宗朝二) 15년(계축, 1433)
우리나라 일을 가지고 말하면, 옛날 신라(新羅)가 포석정(鮑石亭)에서 패배한 것과
백제(百濟)가 낙화암(落花巖)에서 멸망한 것도 모두 술 때문이었으며,
고려 말기에는 상하가 서로 본받아가며 술에 빠져 방탕한 생활을 하다가 결국 패망에 이르고 말았다.
이 역시 오래지 않은 거울로 삼아야 할 일인데 어찌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위의 조선시대 세종조 내용은 삼국유사에서 술잔치를 벌인 대왕포의 내용으로
의자왕의 백제 패망과 포석정에서 술잔치 벌리다가 견훤에게 죽임을 당한 신라 경애왕을
경계삼은 것으로 보여 집니다.
조선왕조실록
영조 34년 무인(1758, 건륭 23) 10월 4일(정사)
장릉을 봉심한 홍상한을 소견하고 창절 서원과 민충사를 개수토록 하다
낙화암(落花岩)이 있는데, 그때 궁인(宮人)들이 사절(死節)하였기 때문에
‘낙화암’이라고 이름 붙였으며, 토민(土民)들이 사당을 세운 것도 또한 치제(致祭)하는 것이 마땅하였다.
이 부분은 역사적인 사실을 인정한 조선왕조에서 사당을 세우고 치제(致祭)를 한 것이라 여겨 집니다.
이후 조선중기 문집에서 낙화암과 삼천궁녀에 대한 詩가 자주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
다음과 같은 이유라고 생각됩니다.
조선(朝鮮) 중기(中期) 문신(文臣)이었던 상촌(象村) 신흠(申欽 : 1566년 明宗 21~1628년 仁祖 6) 의 문집(文集) 에서
옛날에 황엄(黃儼)이 연구를 짓기를,
비가 연꽃을 씻으니 / 雨洗荷花
3천 궁녀가 모두 목욕한 것 같고 / 三千宮女皆沐浴
바람이 대 잎에 부니, / 風吹竹葉
10만 장부가 한꺼번에 떠드는 것 같다 / 十萬丈夫共喧嘩
하였는데,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라는 詩를 소개하고 있는데
바로 황엄(黃儼)이라는 자가 태종 3년 4월 처음 조선을 찾은 이래 태종 때 모두 8차례,
세종 때 1차례 등 9번에 걸쳐 파견된 명나라 사신이라는 점입니다.
시기적으로 조선 초에 사신으로 와서 이런 詩를 지은 것은 그가 낙화암의 삼천궁녀가 아니고
역대 중국황제들이 거느린 수많은 처첩과 궁녀들을 인용한 것으로써
≪예기·곡례≫하편에는
「天子有后, 有夫人, 有世婦, 有嬪, 有妻, 有妾
(천자에게는 후(后)가 있고, 부인(夫人)이 있고, 세부(世婦), 빈(嬪), 처(妻), 첩(妾)이 있다)」라는 말이 나오는데,
천자의 정실부인을 후(后)라 하고, 부인(夫人)이하 첩(妾)까지는 모두 천자를 모시는 여인들의 등급이다.
天子后立六宮, 三夫人, 九嬪, 二十七世婦, 八十一御妻
또한 천자에게는 부인이 세 사람, 빈이 아홉 사람, 세부가 27명, 어처가 81명으로
첩 또는 궁녀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란 ㄴ유래에서 조선초기에 사신으로 왔던
명나라 사신인 황엄의 詩에 나타난 것은 바로 이러한 연유로 그 수효를 삼천궁녀라는 말로 표현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따라서 중국의 詩와 문장을 최고로 알았던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이를 인용한 삼천궁녀의 유래가
낙화암과 삼천궁녀로 관련지어 詩를 짓는 바람에 이런한 내용으로 전하여 내려 오는 것으로 사료되어
비록 개인적이며 독단적인 견해일지라도 나름대로 피력한 것입니다.
만일에 조선초기 황엄의 詩이전에 우리 조상들의 문집에서 낙화암과 삼천궁녀가 명백히 관련된 내용이나
詩가 발견된다면 본 내용은 자동적으로 폐기되어야 할 것입니다.
참고로 이후 조선중기 문인들의 문집에 있는 낙화암과 삼천궁녀에 대한 詩들을 소개하오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부여의 왕기가 날로 쇠미해지니 / 扶餘王氣日衰替
달도 차면 기우는 것 애꿎은 점장이만 죽였구나 / 月滿當虧枉黷筮
은은한 고각 소리 탄현을 뒤흔들고 / 鼓角聲殷炭峴動
누선 그림자가 백마강을 덮었네 / 樓船影壓白江蔽
약석 같은 충신의 말이 처음은 입에 써서 / 藥石忠言口初苦
호강만 누리더니 끝내는 후회막급 / 宴安鴆毒臍終噬
삼천 궁녀들이 모래에 몸을 맡겨 / 三千歌舞委沙塵
꽃 지고 옥 부서지듯 물 따라 가버렸네 / 紅殘玉碎隨水逝
“우여, 우여, 어찌하리.” 항왕이 울었고 / 虞姬可奈泣項王
옥노가 언제 제 나라 임금을 저버렸던고 / 玉奴何曾負齊帝
물결에 던진 나말 아득히 어디멘고 / 凌波羅襪渺何許
지금토록 구름과 비가 바위 가에 머무르네 / 只今雲雨棲岩際
향혼이 한 번 가고 다시 안 돌아오니 / 香魂一去不復返
예 와 노니는 사람 길이 눈물 뿌리네 / 長使遊人空洒涕
강물은 이엄이엄 밤낮으로 흐르고 / 江水袞袞日夜流
바위는 우뚝우뚝 백 길이나 뾰죽하건만 / 岩石兀兀千尺銳
이 한은 강과 바위와 함께 그칠 때가 없으니 / 此恨與之無盡期
천년토록 길이 후세를 징계하리 / 留與千年監後世
제발 강물이 띠처럼 줄고 바위가 숫돌처럼 닳지 말게 하소 / 莫遣江水如帶石若礪
속동문선 제5권
칠언고시(七言古詩)
부여 회고 차 가정 운(扶餘懷古次稼亭韻)
조위(曺偉)
부소산 북쪽 사비하로 / 扶蘇之陽泗泚河
어느 해에 남쪽으로 옮아와 나라를 세웠던고 / 何年南徙來爲家
성지를 믿고 인국과 말썽을 부리고 / 謾憑城池構釁怨
군병을 옹하여 민생의 창이를 돌보지 않았네 / 挐兵不念瘡痍多
군신이 주연에 빠져 원략을 몰라 / 君臣酣宴昧遠略
당ㆍ나의 만기가 국경에 들이닥치니 / 萬騎壓境來唐羅
양을 끌고 구슬을 입에 물어도 일은 이미 급하여 / 牽羊銜璧事已急
가련할쏜 창황하는 장려화의 신세 / 可憐倉皇張麗華
삼천 궁녀가 바위 밑으로 떨어지니 / 香鈿翠翹墮嵒底
흩어지는 놀란 혼이 바람 앞의 꽃처럼 / 驚魂飄散隨風花
충언을 듣지 않고 마침내 후회막급 / 不用忠言悔噬臍
지금도 궁궐 폐허에 동타가 설워하네 / 至今荊棘悲銅駝
지하의 충신이 눈을 감지 못하고 / 地下纍臣目不瞑
처량한 맥수가가 구슬피 들렸구나 / 凄涼麥秀聞哀歌
흥망도 다 지난 일, 하늘조차 늙었는데 / 袞袞興亡天亦老
청산은 말없이 섰고 강은 물결치누나 / 靑山脈脈江生波
[주D-001]장려화(張麗華) : 남조(南朝) 진 후주(陳後主)의 비(妃). 임금의 총애를 입어
임금의 무릎에 늘 안겨 정사를 결단했으며, 국정(國政)을 문란하게 하였다.
수군(隋軍)이 입성(入城)하자 후주(後主)와 함께 숨었다가 수군에게 참살되었다.
[주D-002]맥수가(麥秀歌) : 주(周) 나라가 반란 뒤 기자(箕子)가 고향에 들렀다가,
그 폐허를 노래한 망국애가(亡國哀歌)이다. 《史記》
동문선은 삼국시대의 후반기로부터 통일신라(統一新羅) 및 고려를 거쳐
근세조선의 중종(中宗) 초경에 이르기까지의 우리 시인ㆍ문사들의 수 많은 우수한 작품들을 뽑아
편집한 것으로 정(正)ㆍ속(續) 두 편에 나누어서 있다.
정편은 성종(成宗) 9년(1478년) 12월에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 서거정(徐居正) 및
홍문관(弘文館) 대제학 양성지(梁誠之) 등이 명을 받들어 찬집(撰集)한 것인데,
총 권수는 목록 세 권을 합하여 133권으로 되어 있고,
속편은 중종(中宗) 13년 7월(1518년)에 찬집청 당상(撰集廳堂上) 신용개(申用漑) 등이 정편이 성립된 후
40여 년간에 저술된 시문들을 추가 선발 한 것으로 목록 두 권을 합하여 총 23권으로 되어 있다.
상촌집 (신흠(申欽))
상촌선생집 제19권
시(詩)○칠언절구(七言絶句) 175수
수북정 팔경(水北亭八景) 판관(判官) 김정국(金鼎國)의 부여(扶餘)별서(別墅)임
낙화암의 아침 남기[落花朝嵐]
백제의 왕가업도 허무함 그것인데 / 濟王家業亦徒然
부생들이 백년 산다 그 누가 말했는가 / 誰把浮生擬百年
아직까지 남은 것은 낙화암 푸른빛이 / 唯有落花巖翠色
아침마다 변함없이 초당 앞에 있는 것이네 / 朝朝不改草堂前
고란사 저녁 풍경[高蘭暮磬]
강 폭 넓고 연무 길고 저 멀리는 모래톱 / 水闊煙深沙渚遙
지금까지 초동목수도 전조였음을 알고 있지 / 祗今樵牧認前朝
산에 중은 국가 흥망 상관이 없다던가 / 山僧不管興亡事
드맑은 풍경소리 구름 밖을 날아가네 / 淸磬一聲雲外飄
부교에 지는 해[浮橋斜日]
지는 해가 뉘엿뉘엿 물굽이 따라 내려가네 / 落日依依下淺灣
강물 바로 중간에는 부교가 떠 있는데 / 浮橋正在水中間
직포처럼 빽빽한 동서남북 사람들이 / 東西南北人如織
남 먼저 한가로움 차지했다고 제각기 자랑이라네 / 却詫吾生早占閒
합탄의 개인 달[蛤灘霽月]
삼청에 이슬 기를 새로 말끔히 씻었기에 / 三淸露氣洗新晴
오밤중에 평호에서 달 밝음을 보네 그려 / 午夜平湖看月明
은교를 잠시 빌어 은하수로 올라가서 / 會借銀橋上星漢
계궁 높은 곳에서 난생 소리 들었으면 / 桂宮高處聽鸞笙
평사의 갈대와 기러기[平沙蘆鴈]
눈 같은 모래벌판 비단 같은 물결인데 / 平沙如雪水如羅
가을 다한 남호에 기러기 떼 빗겼어라 / 秋盡南湖鴈陣斜
원래부터 모래섬에 주살질이 적었기에 / 曲渚向來矰弋少
갈대꽃 깊은 곳을 집으로 잘 삼는다네 / 蘆花深處好爲家
고산의 소나무와 눈[孤山松雪]
철 같은 몸통 용 같은 가지 더위잡을 수가 없네 / 鐵幹虯枝不可攀
마주나 볼 뿐 무서워 감히 가까이야 하겠는가 / 凜然相對敢相干
이상케도 매서운 눈 저리 많이 쌓였는데 / 怪來凍雪深如許
추운 겨울 견뎌내는 절개 시험 하나보네 / 應試孤標耐歲寒
백마강의 이슬비[馬江煙雨]
오백년 그 세월이 일장의 꿈이런가 / 五百年間一夢空
이끼 낀 돌 지금은 고기 낚는 영감 것이네 / 苔磯今屬釣魚翁
제멋대로 오고 가는 외로운 돛단배가 / 孤帆隨意往來穩
푸른 물결 가랑비 속을 뚫고서 들어가네 / 穿入碧波煙雨中
온대의 생황소리[溫臺歌管]
황폐한 온대 유적 사람을 슬프게 하네 / 荒臺遺跡自傷神
야생초만 더부룩한데 몇 세월을 보냈던가 / 野草離離幾度春
상전벽해 그 모두가 속절없는 일이로다 / 滄海桑田亦閑事
동풍의 생황소리도 한가한 백성들 차지로세 / 東風歌管屬閒民
[주D-001]삼청 : 신선이 살고 있다는 옥청(玉淸)ㆍ상청(上淸)ㆍ태청(太淸).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7권
충청도(忠淸道)
공주목(公州牧)
웅진의 밝은 달[熊津明月]
“웅진 강물은 맑고도 잔잔한데, 웅진에 달이 언제 오려나.
백제의 옛일은 새 날아 지나간 듯, 내 저 달에게 묻노니 달은 응당 알리라.
당 나라 군함인 한 누선(樓船)이 한 번 건너온 뒤로,
사직(社稷)이 폐허되고 도독부(都督府) 된단 말인가.
낙화암(落花巖) 앞에는 봄 시름도 깊은데,
조룡대(釣龍臺) 아래에 조수[灣水]는 돌아오네.”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8권
충청도(忠淸道)
부여현(扶餘縣)
○ 고려의 정언(正言) 이존오(李存吾)가 글을 올려 신돈(辛旽)을 탄핵하였다가 장사 감무(長沙監務)로 좌천되었다.
그 뒤에 이곳에 살면서 여울 위에 정자를 짓고 한가로이 시를 읊으면서 그 몸을 마쳤는데, 일찍이 시를 짓기를, “
백제 옛 나라 장강(長江) 굽이에,
석탄(石灘)의 풍월이 주인 없는 지 몇 해이런가.
들불이 언덕을 사르니 평탄하기 손바닥 같은데,
때때로 소가 묵은 밭을 가네.
내가 와 정자 짓고 승경(勝景)을 더듬으니,
온갖 경치 아름답게 앞으로 몰려드네.
구름과 연기는 교사(蛟蛇)의 굴에 끼었다간 사라지고,
산 아지랑이 아물거리며 먼 하늘에 떠 있다.
흰 모래 언덕 뚝 끊기매 갯물이 들어오고,
큰 암석이 연달아 물가에 비꼈구나.
조각배 저어 남으로 올효조(兀梟窕)로 돌면,
돌 난간 계수나무 기둥이 맑은 물을 굽어본다.
돌부처여, 그대는 의자왕 시대의 일을 목격하였으리라.
오직 들 두루미 와서 참선(參禪)하고 있구나.
상상해 보니 옛날 당 나라 장수가 바다를 건너왔을 때,
웅병(雄兵) 10만에 북소리 둥둥 울렸으리.
도문(都門) 밖 한 번 싸움에 나라 힘을 다했으나,
임금이 두 손 모아 결박을 당하였다.
신물(神物 용(龍))도 빛을 잃고 제자리 못 지켰나.
돌 위에 남긴 자취 아직도 완연하다.
낙화암(落花巖) 아래에는 물결만 출렁대고,
흰 구름 천년 동안 속절없이 유연(悠然)하다.” 하였다.
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 제1권 (김집(金集) 시(詩) ○ 귀봉(龜峰)의 시에 차운하다.
백마강(白馬江)
백제 왕업 어디가고 부소산만 남았는가 / 扶蘇王業一荒丘
백마강 찾은 길손 문득 시름이 이네그려 / 客到汀洲便作愁
반월성은 텅텅 비어 봄마저 적적하고 / 半月城空春寂寂
고색창연 낙화암은 아득한 꿈이어라 / 落花巖古夢悠悠
사람들은 생각 있어 옛일 두고 상심하지만 / 人生多意傷陳跡
무정한 저 강물은 몇 년 세월 보냈던가 / 江水無情閱幾秋
이 역사를 전철 삼아 다시 밟지 않는다면 / 若鑑前車懲後轍
금강 따라 중국 배가 다시 오지 않으련만 / 錦帆寧復有龍舟
한 잔 술로 담소하며 무료함을 위로하니 / 一樽談笑慰無聊
긴긴 날을 그대 아니고 뉘와 보내랴 / 永日除君孰與消
꽃은 삼천 궁녀의 뺨처럼 곱고 / 花媚三千宮女臉
버들은 십오세 기생 허리 흔드는 듯 / 柳搖十五妓兒腰
꽃술을 빠는 꿀벌은 허파가 불러오르고 / 蜜蜂啑蘂脾初重
어미 제비는 집 찾아와 새끼 제비 먹여주네 / 乳燕尋巢舌轉饒
그대 같은 훌륭한 가문에서 못난 손을 받아주니 / 如子豪門容惡客
이 생에 어느 곳인들 돌아다니지 못하랴 / 此生何處不逍遙
상촌선생집 제60권 청창연담 하(晴窓軟談下) 백낙천(白樂天)의 궁사(宮詞)에,
은총을 부어주는 황제의 몸은 오직 하나 / 雨露由來一點恩
어떻게 궁중 전체를 상대할 수 있겠는가 / 爭能遍却及千門
꽃같이 단장한 삼천 궁녀 얼굴들 / 三千宮女如花面
몇이나 될까 봄 바람 속에 눈물 흔적 없는 이는 / 幾箇春風無淚痕
(P.S) 위의 내용은 사료을 인용한 짜집기식에 불과하므로 위의 내용을 우리 회원님들 각자 개인의 취향에 알맞게
임의로 편집하여 개인의 블루그나 카페에 옮겨도 무방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