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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훈계를 들으라
잠 1:7-19
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9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10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11 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12 스올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들 같이 통으로 삼키자
13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니
14 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15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16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17 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면 헛일이겠거늘
18 그들이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19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잠 1:7-19 / 사람은 모름지기 무엇보다도 먼저 하나님 무서운 줄 알아야 하는 법. 그래야 비로소 슬기롭고 올바르게 살아갈 수 있다. 하나님을 우습게 여기는 사람은 남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을 뿐더러, 다른 사람과 어울려 살아가는 법도 모른다. 8) [나쁜 길에 발을 들여놓지 말라] 아들아, 네 어미와 아비가 하는 말을 귀담아 들어라. 네 부모의 가르침을 업신여겨서는 안 된다. 9) 부모가 하는 말은 임금이 머리에 쓰는 화관처럼, 여인들이 목에 드리는 목걸이처럼 소중하고 값진 것이란다. 10) 아들아, 마음에, 늘 나쁜 생각만 품으면서 못된 짓만 골라하는 사람들이 너희를 부추긴다 해도 그 말에 솔깃해서는 안 된다. 11) `자, 함께 가세. 우리가 조용히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사람들이 지나가거든 단숨에 그들을 거꾸러뜨리세.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지나가는 사람들이 무슨 잘못이 있다고 그러는게 아닐세. 그냥 재미로 그렇게 해보는 것이지. 12) 죽음이 언제 예고하고 찾아오던가? 저승사자가 언제 데려간다고 말하고 데려가던가? 생각지도 않을 때에 사람들을 덮치세.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 모조리 털어 오세. 13) 가지고 있는 온갖 보화를 하나도 남기지 말고 빼앗아 우리 집안에 가득 채우세. 14) 그러고는 집에 가서 털어 온 것 모두를 제비 뽑아 나누세. 자, 망설이지 말고 따라 나서게.' 15) 아들아, 이런 말을 듣는다 해도 그 말에 귀기울여서는 안 된다. 큰일 날 소리인 줄로 알아라. 16) 살인과 강탈이라니!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소리냐? 17) 보잘 것없는 날짐승이라 할지라도 사람이 그물 쳐놓은 것을 알아채고서는 그리로 날아들지 않는다. 18) 이렇듯 어리석게도 남을 해치려고 그물을 치고 구덩이를 파는 자들은 스스로 제 무덤을 파는 미련한 자들과 다를 것 없다. 19) 남 등쳐 먹고 호화로운 집을 짓고 사는 자들은 다 이러하니, 결국은 그 부당한 재산때문에 목숨을 잃고 말리라.
잠언이 말하려는 지혜는 단순한 삶의 처세술이 아닌 삶의 전반에 걸친 지혜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앙을 근본으로 하고 있습니다.
잠언의 근본(7) 솔로몬이 말하는 잠언의 지혜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지식의 토대 위에서 가능하다고 교훈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함이 지식의 근본이기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탕 위에 잠언의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여호와를 두려워하며 섬기는 것이 지식의 시작인데 미련한 사람들은 지혜와 교훈을 가볍게 여긴다고 꼬집었습니다.
부모의 역할(8-9) 여기서 아버지의 훈계와 어머니의 법은 단순히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가르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을 가리킵니다. 자녀들은 부모를 통해 여호와를 경외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부모를 통하여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이 자녀들의 머리에 아름다운 관이 되고, 그들의 목에 금 사슬이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자에 대한 경계(10-15)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지혜를 얻을 뿐 아니라 악한 자의 유혹에 대한 영적 경각심을 가지라고 합니다. 악을 피하는 것 또한 중요한 지혜이기 때문입니다. 악한 자가 마치 사냥꾼이 교묘하고 은밀하게 행동하여 짐승을 사냥하듯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다른 사람을 산 채로 삼키고, 온갖 보화를 빼앗아 자기 집을 채우고, 제비를 뽑아 전대 하나만 두자고 유혹할지라도 그들과 동행하지 말고 그 길을 밟지도 말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자의 결말(16-19) 비록 악한 자가 일시적으로 많은 성과를 얻는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새가 보는 데서 그물을 치는 것과 같이 헛된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한 가만히 엎드려 상대방을 해하는 것 같으나 도리어 자기의 피를 흘리며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라고 말합니다. 결과적으로 자기의 이기적인 이익을 탐하는 자의 결말은 타인의 피를 흘리며 그들을 사지로 몰아넣는 것 같으나 도리어 자기의 생명을 잃게 된다고 교훈합니다.
적용: 부모는 자녀를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치고, 자녀는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이상적인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잘 이룰 수 있는지 나누고 실천합시다.
자기가 살고 있는 시대에 충실하라. 아무리 뛰어나고 걸출한 인물도 자기 시대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법이다.-벨타사르 그라시안이모랄레스. 마라톤에서는 뛰기 전 전체 코스를 파악하고 나름대로 계획을 짜야 쉽게 성공할 수 있습니다. 전체 코스를 읽어내지 못하고 무작정 뛰다 보면 실패할 확률이 커집니다. 바로 앞에 오르막길이 있는 줄 모르고 전까지 힘을 다해 뛰다가 주저앉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가르침의 훈계를 아버지께, 하나님 말씀의 법을 어미에게 맡기신 하나님의 부모의 역할분담은 가정과 자녀를 지키는 안정적인 구조입니다. 자녀의 마음에 고귀한 말씀을 새겨주어 마라톤보다 더 길고 긴 인생을 하나님과 사람에게 은총을 받고 귀히 여김 받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지도하는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 설 교 >
훈계를 들으며 법을 떠나지 말라
잠 1:7-19 / 석기현 목사
언젠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진정한 학교'가 여기 있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것은 미국 뉴욕에 있는 프레드릭 더글라스 중고등학교(Frederick Douglass Academy)를 삼사 년 만에 일약 명문학교로 바꾸어 놓은 로레인 먼로(Lorraine Monroe)라는 한 여자 교장 선생님에 관한 이야기였습니다.
뉴욕의 빈민가인 할렘에 위치한 그 학교는 그야말로 온갖 문제아들의 집단과 같은 것이어서 남이 보기에는 학교라기보다는 무슨 '동물 우리'를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1991년에 그 학교에 부임한 먼로 교장은 그 문제 학교를 개선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지역 사회에서 최고의 모범학교로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우고 모든 것을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각오로 임했습니다. 그녀는 학교 이사들을 설득하여 학교 운영 방침을 근본적으로 바꾸는 것을 필두로, 학생들로 하여금 교복을 입게 하고 또 '절대로 타협 불가능한 12가지의 규칙'을 정해 주고 어길 경우에는 가차 없이 정학에서 퇴학까지 처벌받도록 했으며, 교사들로 하여금 학생들을 지도할 때 '고등학교를 졸업시키는 것'이 목표가 아니라 '대학에 진학시키는 것'을 목표로 세우고 가르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그 기사가 나왔던 해에 즈음해서는 그 프레드릭 더글라스 고등학교 졸업생의 96퍼센트가 대학입학허가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지금 그 학교의 교기에는 "명문(名門)의 전통은 영원하다."는 문구가 쓰여 있다고 합니다. 뉴욕 할렘가의 동물농장 같던 학교가 문자 그대로 자타가 공인할 만한 명문학교로 바뀌어 버린 것이었습니다.
참 얼마나 멋있는 일이겠습니까?
사명감에 찬 한 명의 교장과 또 그와 뜻을 같이 한 교사들의 헌신적인 교육이 그처럼 한 학교의 면모를, 아니 수백 수천 명의 학생들의 일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말았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총회 SFC 주일'을 지키고 있습니다.
이 '학생신앙운동(Student For Christ)'은 우리 교단과 우리 교회에 있어서 그야말로 자랑스러운 '영적 명문의 교육기관'입니다.
사실 교회들마다 다 '학생회'라는 것이 있기는 하지만 특별히 우리 교단 산하의 교회들은 이 '학생신앙운동'이라는 매우 특수한, 그리고 전통 깊은 교육기관을 통하여 중고등학생들을 개혁주의 신앙인으로 키워가고 있는 것입니다.
성령께서 솔로몬을 감화감동시키셔서 온갖 금언(金言)들을 가득 기록하게 하신 잠언의 제일 첫 장은 그 중에서도 사람이 꼭 배워야 할 가장 '근본적이면서도 기초적인 지혜 세 가지'를 강조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세 가지 지혜'는 바로 우리가 이 '학생신앙운동'을 통하여 중점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교육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이 'SFC'가 왜 진정한 '신앙의 명문학교'인지를 주어진 말씀을 통하여 함께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SFC'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는 신앙교육의 명문입니다.
잠언의 본론이 시작되는 7절은 "7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세상의 그 어느 교과서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내용, 세상의 그 어떤 선생도 가르치지 않을 정의, 세상의 그 어떤 시험지에도 결코 출제되지 않을 명제를, '지혜'라는 주제에 관하여 집중적으로 가르치고 있는 잠언의 첫머리에서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선 여기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란 곧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믿는 것'(fear of God)을 뜻합니다. 일견 '두려워하다'라는 것은 무슨 지식의 내용이라기보다는 그저 하나의 자세 혹은 태도의 문제에 해당되는 것처럼만 보일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라고 하면 훨씬 더 말이 잘 맞을 것 같은데, 솔로몬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에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것이 사람의 가장 기초적인 지식이다.'라고 참으로 범상치 않은 표현을 쓰고 있는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솔로몬은 여기서 '지혜'라는 단어조차 쓰지 않고 '지식'이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지식'이란 '사물을 아는 마음의 작용' 혹은 '알고 있는 내용' 혹은 '알려진 일'을 뜻하는 반면에, '지혜'란 '사리를 밝게 다스리는 재능'이나 '사리나 말의 내용을 깨닫는 재주'를 가리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람으로서는 가장 지혜로운 일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 경외할 줄 알아야 다른 사리를 밝게 깨달을 수 있다.'라고 하면 훨씬 더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습니까?
그런데 솔로몬은 그렇게 말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람이 알아야 할 가장 기본적인 지식이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솔로몬은 여기서 두 번이나 일견 이상하게 단어를 선택한 것입니다.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이다.'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이다.'라고 했으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다.'라고 하지 않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이다.'라고 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도대체 무슨 뜻의 말씀입니까?
이 말은 사람이 '두뇌를 가지고 할 수 있는 작용'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의식'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머리가 달린 사람이라면 그 머릿속에서 바로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아는 뇌의 활동'이 일어나야 한다는 뜻입니다.
성장하는 청소년들의 두뇌 속에 다른 그 어떤 지각 작용, 감정 작용, 이성 작용보다도 이 하나님이 살아 계심을 아는 지각,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 앞에 벌벌 떨 줄 아는 감정, 하나님의 절대주권자 되심을 고백할 줄 아는 이성 작용이 제일 먼저 일어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머리가 '제대로 된 머리'고 그래야 그 두뇌가 '가장 기본적인 기능을 발휘하는 두뇌'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꾸어 말하자면, 우리 학생들의 머리에는 어떤 다른 정보가 들어가고 어떤 많은 지식이 쌓이기 전에 먼저 '하나님에 대한 바른 태도와 자세'부터 바로 잡혀 있어야 한다는 의미가 됩니다.
쉽게 비교하자면 이 세상 사회에서만 보아도, 기본적 품성이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그 머리에 다른 것들만 가득 채워지는 사람은 결국 교만방자하거나 위험하거나 괴짜가 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마찬가지로, 정말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정말 다른 동물과는 비교도 안 될 우수한 두뇌를 제대로 가진 만물의 영장다운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먼저 그 영적 품성, 즉 하나님을 경외할 줄 아는 이 기본자세부터 갖추어져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없이 그 머리에 지식만 가득 채워지는 사람은 그 자기의 똑똑함 때문에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탄의 대변인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 경외함은 없이 그 머리에 사상만 집어넣는 사람은 공산주의자들처럼 교회를 박해하고 성도를 죽이는 무신론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두려워하는 마음은 없이 그저 그 머리에 감성만 자꾸 자라는 사람은 '자기 자신의 선'이라는 우물 안에 빠지든지 아니면 감상주의자나 비관론자가 될 뿐인 것입니다.
오늘날의 청소년들이 하루하루를 지낼 때마다 그 머릿속에 무엇이 점점 더 가득 자리를 잡게 되는지를 생각해 보면 실로 '충격과 경악'이 아닐 수 없습니다.
수많은 10대 소년소녀들의 기본적인 두뇌 구조는 컴퓨터의 키보드와 직결되어 있으며 이들의 지정의(知情意)의 작용은 순전히 자기중심, 그것도 '자신의 육체에 대한 근심이나 자랑'에 집착되어 있지 않습니까?
이 'SFC'는 성장하는 우리 자녀들의 머리를 이처럼 기계적이며 세속적으로 세팅시키려 하는 사탄의 역사를 물리치고, 사람다운 사람으로서의 가장 중요하고도 기본적인 영적 품성, 곧 살아 계신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느낄 줄 알고 위대하신 주권자를 겸손히 경외할 줄 아는 법을 주입시켜 주는, 진짜 일류의 교육기관임을 깨닫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SFC'는 '성경 말씀을 순종하는 법'을 학생들에게 가르쳐 주는 신앙교육의 명문입니다.
8절과 9절에 기록하기를 "8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9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아비의 훈계와 어미의 법"이란 바로 부모가 성경을 가지고 자녀에게 신앙의 진리를 가르쳐 주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경 말씀을 표현하는 말들은 여러 가지가 있는데 본문에서는 그것들 중에서도 특히 "훈계"와 "법"이라는 단어를 선택하고 있는 것은 의미심장합니다.
먼저 '법'이란 이미 '정해져 있는 규칙'을 가리킵니다.
거기에는 그것을 배우는 쪽에서 무슨 자기 의사를 반영한다든지 자신의 연구를 가미한다든지 혹은 그 법을 고친다든지 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미 요지부동으로 확정되어져 있는 바른 길, 옳은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으로 교육하는 것'은 바로 이처럼 '일방적인 동시에 절대적인 교육'입니다.
성경 말씀이야말로 이미 확정되어 있는 무오류의 진리, 그 어떤 가감이 필요도 없고 또 용납될 수도 없는 '신앙과 행위의 유일무이한 규범', 즉 '절대적인 법'인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훈계'란 바로 그 '법'을 기준으로 해서 이루어지는 교육, 즉 '법을 지키게 하며 법에 어긋나는 행위를 고치게 만드는' 교육입니다.
아무리 완벽한 법도를 가르친다고 해도 그것을 배우는 쪽이 순종하지 않는다면 전혀 헛수고가 될 뿐이며, 그런 까닭에 "어미"는 부드러운 말로써 바른 "법"을 가르쳐 주고 "아비"는 엄한 "훈계"로써 그 법을 지키게 할 때에 비로소 완벽한 교육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나라에도 소위 '열린 교육' 혹은 '자율 학습'이라는 개념이 많이 도입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정말 '빛 좋은 개살구'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가만히 '자율적으로' 놓아두면 누가 열심히 공부하려고 하겠습니까?
이것은 '법'이라고 가르쳐 주지 않고 이것을 어기면 이런 벌을 받게 된다고 '훈계'하지 않으면 도대체 어떤 학생이 자기 혼자서 공중도덕을 지키며 어른 앞에서 공손해지려 하겠습니까?
그런 '열린 교육'의 선구자 격인 미국의 공립 중고등학교들이 지금 학생들의 '학력저하와 품성악화'라는 설상가상에 빠져 있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인 것입니다.
신앙교육은 더욱 그러합니다.
'주일성수'를 반드시 지켜야 할 '법'으로 가르치지 않고 "네가 잘 생각해서 결정해 보아라."고 하든지, 첫 월급 받을 때부터 '십일조'를 반드시 바쳐야 한다고 '훈계'하지 않고 "네 형편대로 알아서 해라."라고 '자율'에 맡긴다면 우리 주일학교의 자녀들 중에 과연 몇 명이나 그 '신앙생활의 양대 기본수칙'을 지키겠습니까?
'삼위일체', '예수님의 신인성', '성경의 무오성'을 가르치면서, "너 스스로도 한번 연구해서 맞는지 안 맞는지 확인해 보고나서 믿어라."라고 가르친다면, 우리 SFC의 중고등학생들 중에 과연 몇 명이 성경이 가르치는 교리를 제대로 믿게 될 것 같습니까?
저는 '단 한 명'도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경향교회의 어린이와 학생들도, 내 아들과 내 딸들도 다 아담을 따라서 '완전타락'한 본성을 가지고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런 악한 죄의 본성이 '자율화'되도록 방임 교육을 시키면 그 결과는 두말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 이 성경 말씀을 아무 선택의 여지가 조금도 없는 '법'으로 가르쳐야 합니다.
무조건 지켜야 하며, 만약에 어기면 큰 벌을 받게 될 것이라고 '훈계'로써 가르쳐야만 하는 것입니다.
그처럼 성경 말씀을 '연구대상'이 아니라 '절대적인 법'으로 배우게 될 때, 그리고 그 말씀을 '선택사양'이 아니라 '반드시 순종해야 할 훈계'로 실천하게 될 때에, 그것은 그 자녀의 평생에 실로 "머리의 아름다운 관"과 "목의 금사슬" 같은 '미(美)와 부(富)와 명예'의 축복이 됩니다.
말씀을 순종함으로써 예수님을 점점 더 닮아가는 성화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게 되는 신앙의 청소년을 세상의 그 어떤 '성형수술 미인'이 근처에라도 따라갈 수 있겠습니까?
성경의 계명대로 엿새 동안에 열심히 공부하고 주일은 꼭 예배에 참석하면서 대입을 준비하며, 성경의 가르침대로 비록 아르바이트 해서 번 적은 월급이라도 반드시 십일조를 바치며 장학금 전액을 특별헌금으로 기쁘게 바치는 우리 학생신앙운동원이 받게 될 축복을 세상의 그 어떤 수재나 재벌2세가 누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자녀들의 사춘기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되지 않도록 '성경의 법'으로 올바르게 통제하며 이들이 가지고 있는 '십대의 자유분방함'이 방종이나 타락으로 빠져 들어가지 않도록 '말씀의 훈계'로써 엄히 바로잡는 이 경향 SFC를 더욱 귀중히 여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3. 'SFC'는 '교회를 중심으로 거룩하게 사는 법'을 가르쳐 주는 신앙교육의 명문입니다.
10절 이하 19절에 기록하기를 "10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11그들이 네게 말하기를 우리와 함께 가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12음부 같이 그들을 산 채로 삼키며 무덤에 내려가는 자 같게 통으로 삼키자 13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에 채우리니
14너는 우리와 함께 제비를 뽑고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할지라도 15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16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17무릇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이겠거늘 18그들의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 뿐이니 19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악한 일을 행치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어린아이 시절을 벗어나서 이제 말귀를 알아들을 줄 알게 되고 스스로 판단과 결정이란 것을 하기 시작할 때에 이들의 자의식을 제일 먼저 공략해 오는 것이 바로 '악의 유혹'들입니다.
그런데 그 유혹이 그 얼마나 교묘합니까?
"사람 하나 죽이자. 그러면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을 것이다."라고 꾈 것이라고 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돈 쉽게 벌고 싶으면 악한 일 한 번만 저지르면 된다.'는 말입니다.
문자 그대로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는' 대표적인 과정입니다.
또 "우리가 전대 하나만 두자."라고 꾄다고 했습니다.
그런 악한 유혹은 절대로 평생 도둑질하고 강도질하고 살인하면서 살자고 꾀지 않습니다.
항상 '그저 딱 한탕만 하고 손 씻으면 되지 않느냐?'라고 유혹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절대로 속지 않아야 할 것은, 일단 그런 악한 유혹에 한 번 빠지면 절대로, 절대로 '딱 한탕만'하고 끝나는 법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처럼 "불의한 이를 탐하는 자의 악한 길"은 반드시 "자기의 생명을 잃게 만드는" 자리에 이를 때까지 벗어나기 어렵게 됩니다.
본문에 "새가 그물 치는 것을 보면 헛일이겠거늘"이라는 말은, 새가 사냥꾼이 그물 치는 장면을 보았다면 당연히 걸려들지 않아야 할 것인데도 불구하고 그 미끼에 끌려 그물에 걸려들고 마는 것처럼, 악한 일에 빠지는 것은 결국 자기를 죽이게 될 일인 줄 알면서도 그 '전대 하나만 두자'하는 미끼에 끌려서 자신을 망치게 되는 어리석음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우리 SFC 학생들은 절대로 그런 바보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악을 행하는 것이 곧 쉽게 잘 사는 길'이라는 이 유혹이 여러분의 시절에, 여러분의 심령에 신앙이 확고부동하게 자리 잡기 전에 먼저 침투하게 되면 마치 컴퓨터의 바이러스처럼 여러분의 사고와 행동의 시스템을 아예 근본부터 망쳐 놓게 됩니다.
저녁에 술집에 가서 호스티스 잠깐 해 주면 용돈 몇십만 원 쉽게 벌 수 있다는 이 '불의한 이를 탐하는' 유혹에 얼마나 많은 여고생들이 넘어가고 있으며, 일진회에 가입해서 급우들의 돈을 빼앗고 강간하는 그 '악한 길'의 재미에 적지 않은 중학생들까지도 깊이 빠져 들어가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여러분은 스스로 예방을 해야 합니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는 이 경고를 가슴 깊이 새겨들어야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회는 청소년들에게 '악을 악이라고' 가르쳐 주지를 않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주간지들은 하이틴도 아닌 로우틴에이저들이 학교에 총기를 가지고 와서 교사들과 학생들을 쏘아 죽인 끔찍한 사건들에 대하여 평하기를 그 청소년들이 "무력감을 이기지 못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혹은 "무책임한 대중문화에 영향을 받은 탓"이라고 했습니다.
GP에서 잠자고 있는 동료들에게 총을 난사하고 수류탄을 터뜨린 군인을 두고 우리나라의 어떤 인터넷 기사에서는 "이 사회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는 정말 '말 같지도 않은 말'로 비호를 해 줍니다.
즉 악에 대한 '윤리적 판단'은 전혀 없고 그저 '심리적 진단'만 있는 사회가 되었으며, 그 결과 악행에 대한 책임은 아무에게도 없고 남는 것이라고는 그저 변명과 회피밖에 없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요즘은 사탄이 일부러 '광명한 천사의 얼굴'을 하고 돌아다닐 필요도 아예 없습니다.
이리가 '양의 탈'을 쓸 필요가 없이 이리 그대로의 얼굴을 가지고 돌아다녀도 아무 문제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사탄을 보고 악하다고 하지 않으니까, 아무도 이리를 보고도 나쁘다고 하지 않으니까, 이 시대의 인생들이 얼마나 어두워지고 미쳤는지 그것을 도무지 볼 줄 모르니까, 악은 자신을 숨길 필요조차 없이 내놓고 보란 듯이 의기양양하게 더욱 기승을 부리며 설치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나쁜 것을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만 진짜로 나쁜 사람이 되는 시대가 바로 오늘 우리 학생들이 자라나고 있는 기가 막히는 시대인 것입니다.
오직 교회만이, 아니 성경대로 바로 가르치는 교회만이 '악은 악이다.'라는 이 간단하면서도 영원불변한 윤리를 여러분들에게 교육시켜 줍니다.
세상에서 온갖 공부 다 하고 석박사 학위 주렁주렁 받는 것보다도 '악한 꾀를 좇지 않는 것' 이것 하나만 제대로 배워도 진짜로 지혜로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철저히 가르쳐 주는 곳은 정말이지 교회뿐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이 교회를 벗어나면 그 곳은 바로 '악한 자'들이 우글거리는 소굴입니다.
여러분이 이 SFC를 통해서 '교회중심'의 생활을 숙달시키지 아니하면 여러분의 생명을 '음부와 같이 산 채로 삼키는' 온갖 악의 유혹에 '열이면 열 다' 넘어가서 결국 '자기 생명을 잃게' 되고 마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소중한 자녀들의 심령과 그들 앞에 놓인 창창한 평생을 온갖 타락과 범죄로써 유혹해 오고 있는 이 죄악이 관영한 인간사회, 이미 내려갈 데까지 내려가고 이미 어두워질 대로 어두워진 장망성 세상을 대항하여 이들을 '교회중심'의 거룩함과 의로움으로 지켜 주는 이 경건의 도장 SFC를 더욱 아끼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SFC 운동원들과 성도 여러분, 신자들로 하여금 '지혜롭게 행할 일'에 대하여 가르치는 이 잠언의 말씀은, 그 서두에서 세 가지 교육, 전혀 뜻밖의 교과 내용,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그리 심오하지도 그리 중요해 보이지도 않는 이 세 가지를, 가장 중요한 지식이요 훈계요 지혜요 명철이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할 줄 아는 것, 말씀의 가르침을 잘 배우고 순종하는 것, 그리고 불신세상의 악한 꾀에 넘어 가지 않는 것 - 바로 이 세 가지가 '아이큐 200'의 천재보다도 더 지혜로워지고 하버드 대학을 졸업하는 것보다 더 귀한 지식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다운 사람이 되기 위하여, 정말 신자다운 신자가 되기 위하여서' 마땅히 행해야 할 것들을 이 세상의 어느 학교에서, 세상의 어떤 훌륭한 선생이 가르치고 있습니까?
아무 데도 없습니다.
바로 우리 교회가, 그리고 학생들에게는 바로 우리 SFC가 그런 위대한 학교이며, 여러분의 목사님들과 전도사님들과 교사님들이 바로 그런 훌륭한 스승들이신 것입니다.
뉴욕의 할렘가에 있던 한 문제 학교는 그저 '학생은 대학진학을 위해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라는 지극히 당연한 목표와 '학생이 학교에서, 청소년이 사회에서 절대로 해서는 안 될 일들이 있다.'는 '절대로 타협이 불가능한' 규칙만을 가지고서 일약 '명문 학교'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 두 가지는 학교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책임이며 교사라면 당연히 가르쳐야 할 사명에 불과했지만, 놀랍게도 대부분의 다른 학교들은 그냥 방임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의 교회들은 그 학생들의 교육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에 불과한 책임과 사명을 과연 얼마나 잘 수행하고 있겠습니까?
'기독 학생은 그 무엇보다도 살아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라는 이 지극히 당연한 '하나님 중심'의 교육, '기독 학생은 세상의 그 어떤 다른 법도나 윤리보다도 우선 성경 말씀부터 철저히 배우고 순종해야 한다.'라는 이 '성경 중심'의 교육, '기독 학생은 불신사회의 악으로부터 자신을 성별되게 지켜야 한다.'라는 이 '교회 중심'의 교육 - 우리 SFC야말로 이 간단하면서도 필수적인 '법과 훈계'를 철저히 가르치는 '영적 명문 학교'인 줄로 깨닫고, 이 SFC를 통하여 실로 '하나님 앞에서 더욱 사랑 받는 신앙인'이 되는 경향의 학생들과 '아름다운 관과 금사슬의 축복을 받는 자녀'들을 두는 경향의 부모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정말 지혜롭게 살기 위한 기본 두 가지
잠언 1:7-19 / 찬송 200장 / 이승현 목사
잠언 1장 1절은 전체의 서론 부분으로 잠언의 저자가 솔로몬이라는 점을 밝힘으로써 누구나 인정하는 지혜로운 사람의 말을 귀담아듣도록 우리를 잠언의 말씀으로 초대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2-3절은 잠언의 목적이 ‘지혜를 깨닫는 것’ 이란 점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4-6절은 잠언의 두 가지 유익이 무엇인지도 알려줍니다. 그 두 가지는 먼저 어리석고 젊은 자에게는 삶의 올바른 지침인 지혜를 일깨워주고, 두 번째로 지혜로운 자에게는 더욱 지혜롭게 하기 위한 것임을 가르쳐줍니다. 그리고 오늘 아침 읽은 7-19절까지는 실제적으로 지혜로운 삶은 어떤 삶인가를 제시합니다. 그렇다면 지혜로운 삶은 어떤 삶일까요?
첫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입니다(7-9절).
사람들은 지혜를 얻기 위해 책을 읽기도 하고, 수행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지혜가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당연합니다. 하나님은 온 우주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보다 더 위대한 존재가 없습니다. 자동차나 비행기도 대단한 발명품이지만, 하나님은 우주의 만물과 생명체를 만드신 분입니다. 특히나 사람을 만드신 분입니다. 그러니 모든 지혜의 근본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그래서 정말 지혜를 얻고 싶으면 모든 것의 근본이신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지혜를 정의하기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7절). 곧 지혜로운 삶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입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미련한 삶은 어떤 것입니까? 이 지혜를 멸시하는 삶입니다. 곧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삶입니다. 하나님을 알려고도 하지 않고 무시하는 게 미련한 삶입니다. 제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하고 똑똑한 척을 해도 하나님을 모르면 지혜가 없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지혜로운 삶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입니다. 여기서 ‘경외’라는 말은 무서워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존경하다’, ‘두려워하다’라는 뜻의 히브리말 ‘야레’에서 파생된 말입니다. 마음의 진정한 존경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두려움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주인의 채찍을 무서워하는 노예같이 벌을 받을까봐 떠는 두려움이 아니라, 아버지를 존경하고 그 권위를 마음으로부터 인정하는 것처럼 자식으로서의 마음가짐 같은 좋은 의미의 두려움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 두려움의 핵심적인 요소는 ‘사랑’ 업니다. 곧 사랑하기 때문에 그 뜻을 어기지 않고 늘 조심해서 따르려고 하는 삶이 곧 경외의 삶입니다.
성경은 여호와께 대한 이 경외의 삶이 바로 ‘지혜’라고 가르쳐줍니다. 결코 세상의 과 학적이고 이론적인 것을 많이 아는 것이 지혜가 아닙니다. 그리고 세상에 대한 영악한 처세술 또한 지혜가 아닙니다. 오직 사랑의 두려움으로써 하나님의 뜻과 그 말씀을 쫓아 행하는 삶이 지혜의 삶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깨닫고 늘 하나님을 알아가고 그 앞에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존경에서 우러나는 순종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참 지혜를 가진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제대로 알수록 부모의 권위에 순종하고 아비의 훈계를 멸시하지 않고 귀담아 듣고 어머니의 말씀도 무시하지 않고 살게 됩니다(9절). 하나님을 알면 절대로 부모에게 함부로 할 수 없고, 사랑하며 존경하며 뜻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화목한 가정을 이루고, 부모에게 기쁨을 드리며, 하나님께서도 약속하신 복을 받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에게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게 된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알고 경외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 악한 길을 따르지 않는 삶입니다(10-19절).
악을 멀리하는 것이 지혜로운 삶의 두 번째 기본기입니다. 이것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과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악은 하나님과 반대되는 것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여호와의 말씀을 사랑하고 두려워하는 자는 그 말씀에서 벗어난 악의 길을 걷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진심으로 경외하면 누구나 그렇게 됩니다.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로써 악인의 유혹과 꾀임에 결코 빠져들지 않습니다. 그는 무엇이 옳고 그릇된 일인가를 하나님의 말씀이 척도가 되어 잘 분별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시편 1편 1-2절에도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악인들이 제아무리 “피를 흘리자”(11절), “통으로 삼키자”(12절),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14절) 이런 말로 꾀고 유혹할지라도 지혜로운 자는 결코 그 말을 따르지 않습니다. 그 길은 여호와의 말씀에서 벗어나고 어긋난 길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가 뱀(사단)의 꾀임에 빠져든 이후부터 타락의 본성을 지 니게 된 모든 인간은 선의 길보다 악의 길을 쫓는 데 더 빠르고 더 열심입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랍들은 악한 자의 꾀임에 쉽사리 빠져듭니다. 성경은 이들을 가리켜 어리석고 미련한 자라고 합니다. 이들은 선과 악을 분별하고 또한 실천할 지혜가 없기 때문에 그렇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로운 자는 그 지혜로써 악인들의 꾀임이 궁극적인 멸망이요 파멸이란 사실을 알기 때문에(17-19절) 결코 그들의 꾀임에 빠져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 1편에서 알려주시는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늘 가까이하는 것이 진정으로 지혜롭게 살기 위한 구체적이고도 실천적인 방법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지혜를 이론적으로 혹은 추상적으로 이해합니다. 또는 막연한 어떤 원리로 이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는 탁월한 처세술 정도를 지혜라고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알려주시려는 지혜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혜, 잠언에서 거듭 강조하고 있는 지혜는 우리를 구원과 생명에 이르는 데까지 알려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복을 받아 진정으로 행복하고 보람된 인생을 살도록 도와줍니다. 이 지혜를 얻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가며, 그 과정을 통해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게 되고, 그 힘으로 악한 길을 따르지 않으며 살아가는 분별력을 갖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큰 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젊은이에게 주는 교훈
잠 1:7-19 / 푸른초장선교회 대표 조무웅 목사
잠언(箴言)이 무엇일까요? 잠언(箴言)에 문자적 뜻은 무엇일까요? 잠언(箴言)이 찌르는 말 바늘 침자 침이라는 뜻이니까 찌르면 어떻게 되지요 아프지요 아프면 아야 하지요 경계하는 것이어요 고통이 없으면 어떼요 고통이 없을 때는 느낌이 없으면 무감각해지면 찔러도 알 수가 없지요
완전히 마음이 굳어진 사람들은 경계의 말을 들어도 별로 삶을 바꾸지 않아요
그런데 어떤 이야기가 내 마음속에 와서 부딪쳤는데 그렇지 내가 그렇게 살면 안 되지 그런 말은 잠언(箴言)이 되는 것이지요 찌르는 말 영어로 프로버브(Proverb) 프로(Pro)는 앞에 버브(verb)는 말하다 미리 말하는 것이어요 경계해 주는 말이지요 격언 속담 이런 말들이 관련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우리들이 알았는데 지난 번 우리가 공부할 때 점언 1장 7절이 핵심이다고 이야기를 했어요
7절 여호와를 경영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그런 말이지요 이 이야기 한 다음에 우리가 성경을 읽을 터인데 한번 살펴볼까요 여기 근본(根本)이라고 했지 않아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이 근(根)은 뿌리 근자 뿌리를 나타내지요 나무가 이렇게 있습니다. 본에도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 목(木)자가 있어요 보면 나무가 있습니다. 나무 목이 있어요 나무를 구별하자고 하자면 뿌리가 있고 줄기가 있고 그 다음에 열매가 있어요
제일 중요한 게 무엇이어요 뿌리지요 뿌리는 나무의 밑에 있어요 위에 있어요 밑에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귿는 것이야 뿌리 근본이어요 열매는 위에 있어요 밑에 있어요 이렇게 그어요 이게 무엇이어요 말이어요 본 말 본말이 전도 되었다 하고 이야기 하지요
그러니까 이게 말이야 열매여요 이게 뿌리이고 본이 중요해요 말이 중요해요 뿌리가 중요해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뿌리는 눈에 보여요 안 보여요 안 보이지요 그래서 사람들 눈데 잘 안 보여요 본이 든든한 사람은 사람들 눈에 잘 안 보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서 말에 집착합니다. 자기를 치장을 하고 마치 장신구를 하는 사람과 같지요 내가 근사한 사람이야 명함에 많은 것을 적어 놓고 다녀요 그런 분들 명함을 보면 아 이 분이 속이 허하신 분이구나 직각적으로 알 수 있어요
이렇게 쓰고 다니는 분들은 무엇인가 좀 마음이 허한 분들인 것 간아요 본에 충실한 분들은 구지 안 그래도 되거든요 본과 말이 뒤집혀 있는 것이 우리 삶의 문제지요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 모든 앎의 뿌리라는 것이여요 그래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경외는 두려워하는 것입니까? 무서워해요 그런 것만은 아니지요 그 크심 그의 아름다움심 그의 위대하심 앞에 나의 작음을 인정하고 그 앞에 엎드리는 마음이 경외심이지요
거기에서부터 발생하는 것이 무엇이지요 아름다운 삶이 시작되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앎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그 근본이 든든하게 설 때 내가 하나님 앞에서 작구나 하나님의 아름다움 앞에서 나는 때때로 추하구나 이런 것을 느끼게 될 때 내 삶이 자리를 잡게 되어요 바르게 이것이 근본적인 가르침이라고 이야기 했어요
잠언 1장 7절부터 19절까지를 공부를 해 보려고 하는데 7절은 이미 공부했지만 7절부터 읽겠습니다.
이 대목을 공부를 하는데 여러분 이게 1장 1절 다윗의 아들 이스라엘의 왕 솔로몬의 잠언이라 한 큰 맥락 거기에는 10개의 교훈이 담겨있습니다.
교훈집이 그런데 오늘 우리가 공부하는 것은 열개의 교훈집 첫 번째 교훈을 공부하게 되는 것이어요
그런데 보면 여기에 대게 누구에게 이야기 하느냐 하면 내 아들아 네 아비의 법을 이렇게 이야기 해요. 그러면 가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처럼 보입니다. 실지로는 가정 안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지혜 학교 같은 대서 이루어지는 교육을 의미하는 것으로 봅니다.
우선 성경 번역에서 유감스러운 부분이 있습니다.
무엇이냐 하면 8절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아비 어미라고 하는게 여러분 아버지 어머니를 아비 어미 그래요
개역 성경에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카톨릭하고 같이 번역을 했던 공동 번역 성경도 아비 어미 그렇게 번역했어요 그러나 새 번역은 네 아버지 어머니로 되어 있습니다. 저는 이 번역부터 바뀌어야 된다고 봐요
사실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가지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이 신약 성서에 어법도 바꾸어야 한다고 봅니다. 예수님이 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때 반말로 이야기 하거든요 그분들은 존대하고 이것이 좀 바람직하지 않다
마 15장 34절 예수님이 그렇게 사람들을 하대하고 그랬을 이가 없는데 사람들에게 반말로 이야기 하고 이것이 무엇과도 관련이 되느냐 하면 내가 목사여요 말씀을 선포하는 사람이 권력이지요 특권이고 나는 이렇게 낮추어서 이야기 하는 것이 용인이 되는 것이어요 이런 성경 때문에 그러니까 성경 번역을 할 때에도 그런 어법을 마음에 제대로 잡아야 할 것이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여기에서도 아비 어미 이 말이 별로 듣기 좋지 않아요 이것은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그런 생각이 드는데요 호칭은 가족 관계를 반영하고 있지만 실지로는 학교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 아비 어미 이렇게 말하고 있을까? 생각해 보면 여러분 예전에 우리 유교 사회에서도 군사부일체(君師父一體) 그런 말 들어본 적이 있어요 군(君)은 임금이지요 사(師)는 스승입니다. 또 부(父)는 아버지이지요 군 사 부가 하나다는 것이어요 다 거기에 우리가 효 충 이렇게 해야 되어요
그것처럼 여기 지혜의 교사는 후 세대에게 지혜를 가르치는 교사는 몸으로 낳아준 아버지는 아나라 할지라도 그들의 영혼을 낳아준 아버지이고 어머니이기 때문에 이런 가족관계의 호칭을 사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지혜학교에 관련이 되어 있다 이아기 할 수 있겠는데요 가르친 자들은는 그의 인품과 세계관을 형성하는 데 매우 중요한 타자입니다.
여러분 내가 살아오면서 보면 내가 말하는 방식 또 내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 또 내가 여러분들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은 내가 주체적으로 나는 이렇게 해야지 해서 형성된 것이라기보다는 살아오면서 내가 만났던 수많은 사람들의 영향이 누적적으로 내게 영향을 미쳤겠지요 그렇지요 이게 중요한 것이지요
내가 어떤 판단을 할 때 인생에 대한 판단을 할 때 누군가에 의지해서 그 분이라면 이렇게 생각하실 것 같아 그래서 나도 그렇게 해야지 이런 분들이 있지요 우리는 스승이다고 그래요 그 분들을 그 분이 심리학적 용어로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아주 중요한 타자 그렇게 이야기해요
중요한 타자여요 그러니까 내 인생에 아주 의미있는 타자입니다. 의미있는 타자인데요 중요한 타자 나 아닌 타자인 것이지요 나 아닌 타자인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나라고 하는 존재는 다른 사람들에 의해 형성된 된 것이야
그렇지요. 내가 만나왔던 사람들이 내게 영향을 주었던 것이지요 우선은 제일 먼저는 부모님 또 내 형제 자매들 또 자라면서 친구들 학교에 들어가면 선생님 그렇지요 이런 것들이 아주 기본적으로 나라고 하는 존재를 형성해 왔어요
예를 들어서 여러분 내가 커피를 마시는데 어떤 커피를 좋아하느냐 하면 지금 저는 그저 진한 맑은 커피를 좋아해요 에스프레스 같은 이런 것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15년 전만 해도 봉지 커피 좋아했단 말이어요 그런데 어느 날부터 봉지 커피하고 작별하고 이렇게 되어 있지 내 취향이 아니라 가만히 보면 다 바뀌었어요 그렇게 보면 우리 문화가 나를 바뀌어 간 것이야 요즈음은 커피 자판기도 거의 안 보여요
그래서 이런 것을 여러분 사회학에서는 무엇이라고 하느냐 하면 아비투스(Habitus)라고 이야기하는데 아비투스 해빗과 관련이 되어요 영어에서는 아비투스라고 하는 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어요 시대가 나를 만들어 가요
(아비투스(Habitus) 사회적 위치 교육 환경 계급 위상에 따라 후천적으로 길러진 상황을 의미함)
나라고 하는 존재가 그렇단 말이어요 중요한 타자들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냐 하는 것이 중요하지요. 지혜의 교사들은 아주 중요한 타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친밀한 그런 가족관계의 표현을 쓰고 있다 하는 이야기입니다.
여기 지하 교회에서 가르치는 대상들은 사실은 지하 교회에서 배울 수 있는 사람들은 경제적인 여건도 되고 무엇인가 여유 있는 집안 자제이겠지요
우리 시대에 지식인은 그러면 대학 나오고 더 많이 공부해서 학위도 받고 이런 사람들이 지식인이지요 그런데 우리 시대에 지식인을 이 당시에 어떤 계급이 지식인이냐 하면 서기관입니다.
그러니까 서기관 되는 공부를 하는 것이야 서기관은 고골의 외투에 나오는 주인공처럼 맨날 적는 사람이 아니라 정말 지식인이야 당대에 어떤 문헌들을 읽고 옛날에는 문맹율이 높았으니까 어떤 문헌들을 읽는 것은 정보를 습득할 수 있다는 이야기이고 정보를 습득한다고 하는 것은 많은 지혜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이고 정보가 권력이지 않아요
그러니까 이것은 귀족이 되기 위한 코스라고 볼 수 있겠어요 그런 서기관 되기위한 사람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데요 그러니까 어떤 교육을 시킬까요? 말할 때는 어떻게 말을 해야 하는지 사람들 앞에 행동할 때 어떤 행동을 하는지 그런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해요
소상하게 그런데 주로 그 지식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이 모양이야 세상 바꾸어야 돼 이런 사람들이기보다는 아까 이야기 한 대로 형편이 괜찮지 않아요 그들은 대게 무엇하려고 합니까? 현상 질서를 유지해 보려고 해요
그래서 잠언에 있는 가르침은 대단히 현상 유지적인 경우가 많아요 혁명적 가르침보다는 현상 유지적 가르침이 많다 알 수 있겠지요 무슨 이야기인지 그래서 이 지혜의 교사들의 가르침은 대게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명령 너희는 이렇게 하라 하지 마라 명령을 합니다. 그 까닭을 밝혀 주어요 그 다음에 왜 그런고 하니 이런 것이어요 이런 형태로 되어 있다 하는 것입니다.
8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참 아비 어미가 불편한데 아무튼 아버지 어머니라고 우리가 고쳐 읽고 아버지의 훈계 네 어머니의 법을 떠나지 말아라 하고 말하는 대요 고마워요 다행히 아버지만 이야기 안 하고 어머니도 이야기해요
균형이 맞았어요 사실 메소포타미아나 애굽에서는 이런 지혜의 가르침이 있을 때 아버지의 가르침 이런 말을 써요 그런데 어머니의 법 이런 말 거의 안 씁니다. 유대교의 비교적 독특한 것이라고 것이라고 볼 수 있지요
왜 그럴까요? 유대인들은요 가정을 하나님의 구원행위에 대한 전승 매체로 보아요 학교에서도 배우지만 그렇지요 주로 집에서 많이 배우지요 집에서도 배워요 부모가 일차적인 교육의 책임이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지혜학교 이기는 하지만 어머니의 법도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주로 교육을 하는 게 요즈음도 그렇지요 어머니지요 그러니까 어머니의 법 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이 때 법은 토라입니다.
토라 우리가 가지고 있는 토라 창세기부터 나오는 그 이야기를 지금 하고 있는 것이지요
자 훈계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게 훈계이지요 훈(訓)자는 타 이른다 하는 뜻이지요 말씀 언이 들어 있어요 말씀 언(言)에 내 천(川)자가 있어요
훈 훈민정음하고 할 때 타이르는 것이야 그런데 시냇물이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 처럼 말씀도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합니다. 이게 훈계이지요 그런데 여러분 강압적으로 이게 훈이 아니야 훈이라고 하는 것은 말씀 언에 내 천자가 있단 말이어요
그러니까 물이 흘러가는 것처럼 말로 자연스럽게 가야 해요 타이르는 것이지요 계(戒)라고 하는 것은 경계하는 것이어요 타이르고 경계하는 것이 훈계(訓戒)이지요 아버지의 역할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아버지의 훈계를 들으라 하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너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하고 말합니다.
여러분 들으라는 말은 순종하라는 말이겠어요 이것을 알 수 있어요 떠나지 말라는 말은 포기하지 말아라 왜냐 하면 살다 보면 어떤 때는 자꾸 포기하고 싶을 때가 있어요
꼭 이렇게 살아야 돼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그것을 포기하지 마라 끝끝네 붙들어야 된다 하는 이야기 입니다. 몇 번 말씀을 드렸습니다마는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이야기 했는데 학자 그 다음에 학습 우리가 무엇인가를 배운다고 이야기 할 때 논어에도 보면 학이 시습지(學而時習之) 불역열호야(不亦열乎)야 이렇게 시작이 되는 대 학이시습지 여기에서 나온 게 학습이야 배우고 때에 맞추어서 제대로 익히면 그것이 즐겁지 아니한가 하고 이야기 합니다.
내가 경우에 맞게 살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어요 이게 학이야 그런데 학은 배울 학자입니다. 습은 익힌다는 뜻이어요 그래서 습을 보면 우자가 있어 밑에 백자가 있는 데 백은 스스로 자자의 축약형입니다.
어떤 이야기냐 하면 날개 달린 새도 스스로 나는 연습을 해야 해 습은 몸으로 하는 것이어요 학은 학습을 다른 말로 공부 이렇게 이야기 하는 대 그런데 어느 선생님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공부라는 말이 중국어로 말하면 쿵푸야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능숙하게 잘 해 내는 것을 보면 공부 좀 했는데 공부좀 했는데 이렇게 한다는 것이지요
이 때 궁후라고 하는 것은 어떤 일을 능숙하게 잘 하게 된 것을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어떤 일을 능숙하게 잘하는 것이 제일 몸으로 잘 보여 주는 사람들이 보면 태극권 같은 것 하는 사람들 아름답게 해요 쿵후 몸으로 익히는 것이어요
공부는 몸으로 익힌 것이다는 말이지요 어떤 때 몸으로 익힐 수 있느냐 하면 네 어머니의 법을 떠나지 않을 때 몸으로 익힐 수 있어 자꾸 떠나고 싶어진다는 말이어요 그 가르침으로부터 왜 내 이익에 위배되는 것 처럼 느끼기 때문에 그런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을 떠나지 않을 때 우리가 비로소 어떻느냐 하면
9절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에 금 사슬이니라 하고 말합니다.
여기서 아름다운 관이라고 하는 데 이것은 심리적 아름다움만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회적인 존귀함을 뜻하는 단어여요
네 머리에 아름다운 관이 쓰여질 것이라고 하는 데 관은 높은 직책을 이야기 하지요
네가 그렇게 살면 너에게 사회적인 보장이 주어질 것이야 그런 이야기이지요
네 목에 금 사슬이니라라고 이야기 합니다. 여러분 금 사슬이라는 것은 제자가 장차 누릴 영예를 뜻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것을 아버지의 훈계를 듣고 때때로 아버지 훈계 싫지 않아요
아 아버지는 또 그렇지요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립습니다. 아버지 어머니 세상 다 떠나시니까요 제일 쓸쓸한 게 무엇이냐 하면 어머니 돌아 가셨을 때는 나를 위해 적폭적으로 기도해 주실 분이 이젠 떠나셨구나 하는 그 상실감이 내게 컸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니까 나를 꾸짖어 줄 사람이 떠나셨구나 그 생각이 들어요
이것 젊은 사람을 알지 못할 것이어요 이런 말들을 정말로 그래요
그런 그리움이 내게 있습니다.
10절 이렇게 이야기 하지요 내 아들아 악한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여러분 이게 아주 단순하지만 강력한 경고입니다. 악한 자는 죄인입니다. 그렇지요. 여러분 죄라고 하는 것이 어떤 것이었지요 죄는 히브리어로 핫타트라고 하는 단어인데 이것은 과녁을 빗나가다 그런 뜻이어요 들어 보셨지요 과녁을 맞추지 못하거나 길을 잃어버린 것이어요
그러니까 나라고 하는 존재는 하나님이 쏘신 화살이거든 그러면 과녁에 가서 적중해야 돼야 하지 않아요 적중(的中)해야 돼 이게 과녁을 이야기 해 적중이라는 게 과녁을 맞추어야 된다는 말이어요 중 적중을 해야 되지요. 그런데 그러지 못하고 빗나가는 것이지요 이게 죄라고 이야기 하고 있어요
저 사람 무슨 짓을 했으니까 죄인이야 이런 것도 있지만 내가 나답지 살지 못한 게 죄다는 말이어요 그렇지요 정규씨 좋아하는 이야기 오리지날로 태어나서 카피로 사는 것이야 원본으로 태어났는데 복사본으로 사는 것이야 그렇지요 남과 같아 지지 않으면 못 견디고 이것이 삶의 모습이단 말이어요
그러니까 악인은 어떤 사람이냐 하면 길에서 벗어난 자 과녁을 맞추지 못한 체 빙빙 돌고 있는 자 그런 이들이지요 그런데 그 악한자를 따르지 말라고 하는 까닭이 있습니다. 왜냐 하면 그는 꾀는 자이기 때문에 꾀다 그렇게 이야기 했어요
꾀다 파타라고 하는 동사 이 말은 미끼를 던져 유혹하다 그런 뜻입니다. 대게 어떤 것이냐 하면 나쁜 의도를 가진 남자가 젊은 여자를 유혹할 때 쓰는 단어입니다. 파타라는 단어는 그런 단어이어요 지금 꼬시는 것이어요 그렇지 내가 차마 그렇게 이야기 못하고 사실은 제데로 이야기 하면 꾀다거든 꾀는 것인데 꼬신다 이것이 정확한 말은 아닌데 와 닿기는 해요
어쩼던 여러분 우리가 알다싶이 미끼다고 하는 것은 언제나 달콤하지요 낚시에 걸려든 녀석들 보면 미끼맛에 걸려든 것이지요 그래요 그래서 그 달콤한 유혹을 이겨내기 어려워요
달콤한 것은 위험한 것이어요 내 농담 하나 해도 되어요 데인저(Danger) 무슨 뜻이지요 위험 단 거 단 것은 위험해 너무 단 것 좋아하면 안 돼 우리를 위험에 빠뜨려요 아주 썰렁한 농담이어요
여하튼 중요한 것은 무엇이냐 하면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아라고 말합니다. 따른다고 하는 것은 동의하지 말라 그 말이어요 따르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는 하려고 하지 말라 왜 여러분 미혹됨이라는 것은 마음에 약간 흔들림으로 시작이 되거든요
그렇지요 사탄이 우리를 유혹할 때 어떤 방법을 쓰냐하면 우리에게 사탄이 무섭게 와 가지고 내게 저항감이 생겨요 사탄은 아주 부드럽게 우리 마음을 살짝 흔들리게 만들어요 살짝 흔들린 마음을 예민하게 알아내요 어떻게 하느냐 하면 그 마음에 쐬기를 탁 박는 것이어요 사악해요
그 사람의 어떤 취약한 부분을 아주 잘 교모하게 파고 드는 것이어요 그래서 사탄의 전략은 가르고 지배하다 나누어 놓고 지배하는 것이어요 디바이드 엔드 루르 그러는데요 가르고 지배하는 것이 사탄의 루르여요 동의하지 말아라 그들이 너를 꾈지라도 달콤한 것에 대해서 노 할 수 있어야 해요 단호하게 그렇지요
그 악한 자들이 어떻게 꾀는 지 여기 나오네요
11절 그들이 내가 말하기기를 우리와 함께까자 우리가 가만히 엎드렸다가 사람의 피를 흘리자 죄 없는 자를 까닭없이 숨어 기다리다가 스올같이 그들을 삼키며
12절 무덤에 내러가는 자들 같이 통으로 삼키자
13절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니
14절 너는 우리와 함께 재비를 뽑고 우리와 함께 전대를 두자 할지라도
여기서 반복되는 단어 어떤 단어입니까? 우리여요 이게 중요해요 우리가 유혹에 넘어가는 까닭이 무엇이냐 하면 우리라는 말 때문이어요
인간은 스스로가 연약하기 때문에 어디인가에 속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소속의 의지가 있습니다. 거기에 내가 소속되어 있음으로 안정감을 얻고 내 힘이 커지는 것으로 느껴지기도 하지요
사람들은 자기의 작음에 알기에 어떤 집단에 속함으로 자기를 강화하거나 확대하고 싶어해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내가 누군가에게 배척되지 않고 수용되었다는 사실이 주는 든든함이 있어요
그런데 그 집단이 바람직하지 않은 대도 불구하고 나 너 좋아하는 것 알지 이러면 왠지 그렇지요 이것이 이제 인간의 버릇이어요 그래서 여러분 철부지들이 조폭들에게 이끌리는 것이지요
여러분 심리학에서 합일화라고 하는 심리학 용어가 있어요 인 커푸레이션이라고 이야기 를 하는데요 이것이 무엇이냐 하면 어떤 특정한 사람과 자기가 한 몸인 것 처럼 느끼는 마음이어요
그래서 약자들일 수록 강자와 자기를 합일화 하고자 합니다. 강자들은 너무나 잘 알아요 그런 욕구를 알지 내가 너 아끼는 것 그러면 충성 기가 막힌 것이야 그러니까 우리 우리 우리 그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어요 이 달콤한 말이어요
우리는 무슨 너하고 관계없어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게 참 어려워요 이 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 갈등을 가지고 저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도 아직 안 된 상태인 저 쪽에서 우리 같이 가는 것이야 우리끼리 하면 그러면 가는 것 같아요
우리 정치 사회에서 아주 기가 막힌 말이 하나 있지요 우리가 남이가! 이것 기가 막힌 말이어요 여러분 이게 우리 사회를 멍들게 만드는 것 아닙니까?
어쩼던 그들이 지금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면
11절 우리 엎드렸다가 통으로 삼키자 숨어 기다리다가 사람들을 산체로 집어 삼키자
폭력을 선동하는 것이어요 우리 함께 해 보자 우리 힘이 있잖아 한번 지배해 보자 인생 멋지게 사는 것이야 이렇게 한단 말이지요
그 인간 속에는 원초적 폭력의 욕구가 있어요 인간 속에는 공격성이 있어요 그것을 살살 꼬득이고 저 힘있는 사람이 나에게 힘을 줄 것처럼 느껴지만 사람은 거기에 매혹되도록 되어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원초적 폭력의 경향을 부추기는 자들이 있는데 그러니까 그 폭력은 대게 힘 있는 사람을 향합니까? 아니면 힘이 약한 사람을 향합니까? 그러니까 이게 나쁜 것이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힘을 가지고 잘못된 것에 저항할 수 있으면 좋은데 그렇지 않고 약자들을 괴롭히는 일들에 쓰이는 것이지요
악인들은 그냥 폭력을 즐기는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그 폭력을 통해 누구인가 약탈하고자 하고 이야기 하는 것처럼 자기 이익을 확보하는 사람들이어요 대게 이렇지요 대게 그들은 노동의 괴로움을 피하고 유기적인 폭력을 통하여 자기 배를 불리고자 하는 자가 대 부분입니다.
14절 제비를 뽐아서 우리가 나누자 우리가 남이가 이런 것이지요
기가 막힌 것이 우리가 함께 전대 하나만 두자 한 가족처럼 공동체 재산을 가지자 얼마나 달콤합니까? 감동 나같이 약한 자를 여러분 사람들이 악에 빠지는 게 바로 이런 것 때문에 그런 것이어요
15절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자 악인들과 함께 다니지도 말고 발을 금하여 밟지도 말아라 악인들이 어떤 달콤한 말을 하든지 충성 그러지 말아라
여러분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2절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리라 그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렇지요 제가 있는 제 교회에 교인들은 오래된 교인들은 다 아는 용어가 하나 있습니다.
제 전임자인 목사님이 수도없이 교인들에게 반복했던 말입니다. 이 말입니다.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라 옳은 게 좋은 것이다 우리 사회는 늘 무엇이라고 해요 좋은 게 좋은 것이다 이것이 세상을 엉터리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성도들은 좋은 게 좋은 게 아니다 노 그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요 옳은 게 좋은 것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실지로 우리들이 알 수 있는 것이 악인들의 빠른 발은 실은 멸망을 향한 질주일 뿐입니다. 이것이 분명합니다.
16절이 이야기 하고 있어요 대저 그 발은 악으로 달려가며 피를 흘리는 데 빠름이니라
그렇지요 악으로 달려가고 피를 흘리는 데 빠른데 그들의 행동은 마치 무엇과 같습니까?
17절 마치 새가 보는데서 그물 치는 것과 같아
그러면 새가 걸려들겠어요 우리 어렸을 때 시골에서 삼태기라고 아세요 재 같은 것 담아내는 것 있는데 삼태기에 이만한 나무로 삼태기를 탁 바쳐 이렇게 그리고 나무에다가 줄을 메요 방안에 들어가서 이렇게 하고 콩이나 씨앗 같은 것 삼태기 안에 뿌려놔 그러면 새들이 이제 그것 먹으려고 탁 들어오면 탁 잡아당겨 삼태기가 참새 잡는 것이거든 성공한 기억은 없어요.
성공한 기억은 별로 없는데 그것이 떠올라요 이 이야기를 보면서 새가 보는 대서 그물을 치면 헛일이겠거늘 그들이 가만히 엎드림은 자기의 피를 흘릴 뿐이요 숨어 기다림은 자기의 생명을 해할뿐이니 하고 말합니다.
자 그들은 강자처럼 보여요 언제나 힘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지요 그래서 남들을 압도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까? 역사를 주관하는 게 그들입니까? 하나님이 지배하신 것이지요.
보여요 그들이 몰락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것이 보여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언제나 악한 자들이 승리하는 것처럼 보여요 그렇지요 그래서 꾐에 넘어가요 사람들이 그런데 여기 지혜의 교사가 하는 이야기는 그들이 이기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지로 그들은 남을 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파멸 시키고 있다
그들의 눈에는 안 보여요 그러나 지혜의 눈으로 보면 보이는 것이지요 그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19절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 앞에 이야기한 그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있지요 이익을 탐하는 모든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여러분 안중근 의사가 그런 이야기를 했습니까? 이익을 보거든 의로움을 생각하라 견미 사의(見美思義) 그렇게 이야기 했지 않아요 이로운 것을 보면 이것이 의로운 것이냐
세상에는 두 가지 기준이 있지요 의로움을 추구하는 인생과 그 다음에 이익을 추구하는 인생입니다.
최고는 의로움을 추구하다가 이익을 얻는 것이 최고입니다. 최악은 사익을 추구하다가 의로움을 잃어버리는 최악이어요 그런데 의로움을 추구하다가 이익을 잃어버리는 것은 큰 상실이 아닙니다
이익을 탐했는데 조금 의로움을 추구에도 크게 손실이 아니어요 문제는 무엇이냐 하면 이익을 추구한다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예수님도 그런 말씀을 하였지요 너희가 하나님과 맘몬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 맘놈은 재물이지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가 없어 섬긴다고 하는 것은 대상이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겸할 수가 없어 이게 왜냐하면 재물도 섬김의 대상입니다. 왜 재물은 내 마음 속에서 누군가의 마음속에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기 전까지는 만족함이 없어요
우리 시대에는 재물을 사람들이 우상처럼 숭배하고 있는데 재물 중요하지요 돈없이 어떻게 살겠어요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내가 성경 공부 처음부터 해온 이야기입니다만 어떤 이야기를 이 정도면 되었어 하고 이야기 하면 이것이 나를 지배하는 힘이 현저히 약해져
이익추구라고 하는 것은 항상 결핍을 체우려고하는 것이지요 결핍감 때문이지요 그런데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결핍이 채워 졌는대도 더 가지고 싶어 이 때부터 우상 숭배로 가는 것이야 이익 추구의 마음에는 타자가 없습니다.
여기에는 타자가 들어 설 수 있는 여지가 없어요 그런데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어요 내 마음이 타자를 향해 열리지 않을 때 하나님으로 부터도 멀어진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향하는 문은 타자를 향해 나 있어요 타자의 문을 통하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이르는 길이 없다고요
이익을 탐하는 자들은 어떻게 된다고 이야기 했어요 자기 생명을 잃게 되느니라 목숨을 잃는다는 그런 말보다도 인간에게 주어져 있는 근원적 생명 그 생명을 잃게 되는 자리에 가는 것이지요 불행에 빠지는 것이지요 이렇게 해서 첫 번째 가르치는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라
잠 1:7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면, 끊임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해 경건한 두려움을 갖는 것을 의미합니다.
“경외한다”는 것은 단순히 공포심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공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두려움을 갖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며, 최고로 신뢰하며, 최고로 존경한다.”는 뜻입니다.
올해에는,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우리들만큼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최고로 사랑하고, 최고로 존경하며, 섬기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리의 삶의 전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전부입니다.
만약에, 하나님을 경외하고 섬기는 것이 삶의 일부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라면, 굳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사랑하거나, 존경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우리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부가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첫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가 되기 때문입니다.
잠언 1:7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아멘.
잠언 9:10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아멘.
이 말이 무슨 말입니까?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최고로 존경하며, 섬기는 것이야말로, 최상의 지혜요, 최고의 지혜라는 뜻입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면,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사람이 가장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말 필요한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은 지혜입니다.
지혜가 없으면, 살 수 없습니다.
힘이 있으면, 무엇합니까? 그것을 바르게 사용할 지혜가 없으면, 안 됩니다.
지식이 있으면, 무엇합니까? 언제 어느 때에 그 지식을 사용해야 하는지를 모른다면, 그 지식은 아무 쓸모가 없습니다.
과학 기술이 발달하면, 무엇합니까? 그 기술을 인류 발전을 위해, 어딘가에 적절하게 사용할 수 있는 지혜가 없다면, 그 기술은 유익한 것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왕이 되자마자, 일천번제를 드리며, 하나님께 지혜를 달라고 구하였습니다.
솔로몬은 그 지혜를 가지고, 나라를 잘 다스리며, 부강한 이스라엘을 건설하였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마지막 노년에 가서는, 크게 실패했습니다. 크게 망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왜 망하게 되었을까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데에서 떠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망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이 시간에,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내가 네게 무엇을 주기를 원하느냐?”고 물으신다면, 무엇을 달라고, 구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를 달라고 구하시겠습니까? 아니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손에 쥘 수 있는 지식, 언변, 기술, 재물을 달라고 구하시겠습니까?
세상의 무언가를 받으면, 분명히 남들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삶은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보다는 훨씬 더 편리한 삶은 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멀어질지도 모릅니다. 바로 그것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게 될지도 모릅니다.
성경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최고의 지혜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전부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을 사랑하고 잘 섬길 수 있는 지혜를 달라고, 하나님께 구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부가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둘째,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만족한 삶과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하는 지름길이기 때문입니다.
잠언 19:23절 말씀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사람으로 생명에 이르게 하는 것이라 경외하는 자는 족하게 지내고 재앙을 당하지 아니하느니라” 아멘.
이 말은 하나님을 경외하면, 이 세상에서는 복을 받아서, 만족스러운 삶을 살게 될 것이며, 내세에 가서는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땅히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 우리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시편 145:19-20절을 보면, “그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의 소원을 이루시며 또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사 구원하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다 보호하시고 악인들은 다 멸하시리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왕이신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를 높이고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 내가 날마다 주를 송축하며 영원히 주의 이름을 송축하리이다”(시 145:1-2)라고 하나님을 높이고, 송축했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며, 존경하며,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에게, 때를 따라, 식물을 주시며, 모든 소원을 만족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는 자의 부르짖는 기도를 들으시고 구원을 베풀어 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이 어디를 가든지, 함께 하시며, 안전하게,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우리를 상치 못하도록, 능력의 손으로 막아주십니다.
아무나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과 복을 누리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존경하며, 신뢰하는 사람만이 생명과 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우리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여러분! 때때로 악인이 번성하고, 의인이 고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항상, 소원이 이루어지고, 만족한 삶을 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도 종종 있습니다.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에도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고 말했습니다.
설령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과 고난을 만날지라도, 염려할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그때는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가야 합니다.
그리하면, 반드시 고난이 바뀌어, 영광이 될 것입니다.
지금 받는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섬기는 것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그 고난까지도, 다 합력해서, 선을 이루게 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을 만날수록 우리는 더욱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가장 두려워해야 할 분으로 알아, 최고로 존경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신 가장 큰 축복입니다.
그렇게만 한다면, 고난 속에서도, 만족과 영생을 안겨주시는 주님의 은혜를 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것이, 우리 삶의 전부가 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셋째,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이야말로, 사람이 해야 할 마땅한 본분이며, 놓칠 수 없는 큰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전도서 12:13절 말씀입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의 명령들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모든 사람의 본분이니라” 아멘.
지혜의 왕인 솔로몬은 세상에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을 모두 다 해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마지막에는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만물을 창조하실 때, 맨 마지막으로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신 후에,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냥 좋으신 정도가 아니라, 매우 기뻐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저 자신의 모습을 닮은 사람을 쳐다보는 것만 해도 너무 좋으셨습니다.
마치, 부모가 자식을 바라보기만 해도 좋은 것처럼 말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들어진 사람의 본분은 무엇입니까?
사람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다스리며,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입니다.
아담은 에덴동산에 있는 동물들의 이름을 지어주며, 낙원을 다스렸으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처음에는 따먹지 않고,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습니다.
이때 아담과 하와는 참으로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것입니다.
사람은 자기의 본분을 다할 때, 하나님이 주신 행복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본분을 다하고 싶은데, 힘이 없을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에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포기하고, 뒤로 물러나야 합니까?
그때에는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감당할 수 있는 새 힘을 반드시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내 삶의 전부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섬길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사람의 본분일 뿐 아니라, 사람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기도 합니다.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최고의 신앙고백서는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입니다.
(이것은 17세기 영국의회에서 목사 회원 121명, 의원 30명, 기타 4명이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모여, 약 6년간에 걸쳐 채택한 가장 성경에 가까운 신앙고백서입니다. 그리고 이 신앙고백서와 함께 만들어진 것이, 소요리 문답인데, 이것은 루터의 소요리 문답과 하이델베르그 소요리 문답과 함께, 가장 널리 사용되고 있는 문답식으로 된 교재입니다.)
이 소요리 문답 제 1문에 보면,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입니까?”하고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람의 제일 된 목적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소요리 문답은 말하기를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이미 하나님은 영화로우신 분이기에,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한다는 뜻입니다.
마치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듯이(시 19:1), 사람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늘과 땅이 있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크신 영광을 선포하며, 그것을 보여주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경우는 다른 피조물과 다른 차원이 있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는 가운데, 우리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움을 누릴 수가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할 뿐 아니라, 하나님을 즐겨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때문에 즐거워하고, 하나님의 역사 때문에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 사람의 마땅한 본분이요,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즐거움이기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이 우리 삶의 일부가 아니라, 우리 삶의 전부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내 삶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라는 축복의 말씀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최고로 사랑하고, 하나님을 가장 존경하고,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내 삶의 전부이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지혜이며, 영생에 이르는 지름길이며, 사람의 제일 된 본분이자, 최고의 즐거움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함께 기도하기를 원합니다.
영적 수준을 높여라
잠언 1:7-9 / 황광민 목사
가. 하나님의 지식으로 영적 수준은 높여라.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 잠언의 말씀은 성도의 영적 수준을 높이는데 목적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지혜롭게, 공의롭게, 정의롭게, 정직하게” 살도록 만드는데 목적이 있다(3절). 어리석은 사람들을 슬기롭게 만들고, 지혜로운 사람들은 더욱 지혜롭게 만드는데 목적이 있다(4-5절).
* 성도가 하나님처럼 완전해질 수 없으나 삶의 목표는 완전에 두어야 한다. 레위기(19:2)에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는 말씀과, 마태복음(5:48)에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가 온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온전하라”는 말씀은 온전함에 목표를 두라는 것이다.
* 그런데 성도가 영적 수준을 높이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필요하다. 본문에서 ‘지식’(다아트)은 ‘야다’(알다, 결합하다)에서 유래하였다. 그러므로 참다운 지식은 하나님과의 결합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치관을 공유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영적지식이 어두운 세상에서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도록 악한 세력을 이겨내게 하는 영적 면역력이 된다.
나. 영적 지식을 멸시하는 것이 문제다.
7절,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이 영적 지식을 무시하는 데 있다. 본문은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사람을 미련한 자라고 하였다. 지금 성도들 중에는 세상의 지식은 중요하게 생각하고 영적 지식을 부차적인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다. 유대인의 자녀교육에서는 자녀가 성인이 되는 13세까지 하나님의 말씀교육에 집중한다는 사실을 참조하라. 실제로 그들은 자녀들에게 많은 성경구절을 암송하게 한다.
* 유대인의 자녀교육에는 어머니의 역할이 중요하다. 8절에 보면,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고 하였다. 여기서 어머니가 가르쳐 주는 법은 ‘토라’(모세오경)이다. 유대인들은 아버지의 삶의 지혜인 훈계도 중요하지만 어머니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은 더욱 중요하게 여긴다.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자녀는 무조건 유대인이 된다는 것은 이를 반영한다.
* 우리의 자녀교육을 심사숙고하여야 한다. 기술교육에만 집중하다보니 인성교육은 바닥에 있다. 교육열은 높지만 세계적인 석학도 많지 않고, 오히려 부정부패는 하늘높이 치솟고 있다.
다. 하나님을 경외함이 영적 지식의 근본이다.
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 그러면 영적지식을 얻는 근본적인 비결은 무엇인가? 본문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을 지식의 근본이라고 한다. 여기서 ‘근본’(레쉬트)은 시작, 첫째, 머리 등을 뜻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중심이다. 신앙생활은 하나님 경외로 시작해서 하나님 경외로 끝내야 한다.
*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그를 존경하며 두려워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가 정말로 두려워할 이는 하나님이시다.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네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가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고 하였다(눅12:5). 교회는 심판과 지옥에 대하여 더 많은 교육을 하여야 한다. 웨슬리 목사는 신도회를 조직하고 다가올 진노를 피하는 방법을 집중적으로 가르쳤다.
* 그런데 ‘경외하다’는 추상적인 개념이다. 이 추상적인 개념은 삶의 영역에서 구체화시켜야 한다. 즉 하나님을 경외한다면(추상적), 하나님을 존중하고 그의 말씀에 순종해야 한다(실천적). 주님을 사랑한다면(추상적), 주님의 계명을 지키라(실천적)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요14:15).
라. 영적 지식을 따르면 존귀하게 된다.
9절,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사슬이니라.”
* 본문은 하나님의 영적 지식을 따르는 사람들이 세상에서 존귀와 영광을 얻게 된다는 말씀이다. 지혜자는 말하기를 “지혜가 제일이니 지혜를 얻으라. 네가 얻은 모든 것을 가지고 명철을 얻을지니라. 그를 높이라. 그리하면 그가 너를 높이 들리라. 만일 그를 품으면 그가 너를 영화롭게 하리라. 그가 아름다운 관을 네 머리에 두겠고 영화로운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하였다(잠4:7-9).
* 성경 창세기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그의 말씀대로 순종하였던 요셉이 많은 역경을 이기고 존귀하게 된 사건을 이야기하고 있다. 하나님은 그의 많은 역경을 선으로 바꾸어 주셨다. 그는 결국 애급에서 존귀한 총리가 되었고, 형제들 가운데 으뜸이 되었다.
* 성경 열왕기상은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지혜를 얻었을 때에는 존귀하게 되었으나, 지혜를 잃어버리고 하나님을 떠나 방탕하게 되었을 때에는 심판을 받았다는 사실을 소개하고 있다. 영적 지혜가 인생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지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
잠언 1:8-19
지난 주 토요일(8일) 애리조나 주 투산 지역의 한 소핑센터에서 일어난 총기 난사 사건에 관한 뉴스를 여러분들도 보셨을 것입니다. 저는 그 뉴스를 보면서 특히 ‘9.11. 둥이 소녀’라고 불리는 9살 난 크리스티나 그린에 관한 뉴스에 관심을 갖게되었습니다. 하루는 TV 뉴스를 보닌까 크리스티나의 부모님의 인터뷰하는 장면을 나오길래 좀 관심을 갖고 보았더니 그 아이이 아버지가 자기 딸이 2001년 9월 11일, 9.11 테러 사건 때에 태어났는데 이렇게 총맞아 죽은 사랑하는 딸을 생각하면서 눈물이 글썽 거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한 이틀 전인가 인터넷 뉴스를 통해서 그 죽은 크리스티나란 아이의 장례식 때 캔사트주의 한 침례교회가 시위를 예고하면서 소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뉴스를 보고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이 침례교회 교인들은 몇 년 전에도 전쟁에서 죽은 한 군인의 장례식 때에도 플랫 카드를 들고 ‘하나님이 저주하셨다’라는 식의 글을 써서 시위하므로 말미암아 큰 소란을 일으켰던 교회인데 이번에도 9살난 크리스티나 어린아이의 장례식 때에도 그러한 소란을 일으키려고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애리조나 주 입법부에서 그녀의 장례식에 다른 시위대들이 300피트 이내 접근 금지 할 법안을 통과시키기까지 했다는 CNN 인터넷 뉴스를 접했습니다. 참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이 뉴스를 접하면서 참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는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나 안 믿는 사람들이나 사단의 유혹에 놀아나고 있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 사단의 유혹이 많겠지만 한 두 가지로 요약한다면 저는 “혼동”(confusion)“환상”(illusion)이라 생각합니다. 특히 사단은 달콤한 환상(sweet illusion)으로 사람을 미혹하여 영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혼동 상태에 빠지게 만들어 하나님께 범죄케 만들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살아가고 있는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게 사단의 유혹에 대항하여 하나님 보시기에 바르고 합당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지난 주 수요기도회 때 잠언 1장 1-7절에서 배운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면서 (잠1:7) 경건한 삶의 기술을 배우고(1:2a, 3-4) 영적 분별력을 개발시켜(1:2b, 5-6) 악한 이 때에 지혜롭게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이 악한 시대에 하나님께 지혜를 받아서(약1:5-6)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세월을 아끼고 주님의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여 주님의 뜻대로 살아가야 합니다(엡 5:15-17).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자세나 의지, 느낌, 행실과 목적들이 하나님의 자세와 의지와 느낌과 행실과 목적으로 다 맞바꿔있는 정신 상태입니다[“The fear of the Lord is a state of mind in which one’s own attitudes, will, feelings, deeds, and goals are exchanged for God’s (MacArthur)].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외하는 자는 모든 것이 주님 중심이지 결코 자기 중심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경외하는 자는 결코 자기 뜻을 구하지 않고 오직 주님의 뜻만을 구합니다. 그는 주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의 생각, 주님의 느낌, 주님의 자세와 의지, 주님의 행실을 본받아 오직 주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삶을 삽니다. 이러한 삶을 저와 여러분들이 살아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저는 본문 잠언 1장 8-19절 중심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이란 제목 아래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는지 한 3가지 교훈을 받고자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오늘 지혜자 솔로몬 왕이 우리 젊은이들에게 주는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을 높이 들어 일으켜 사용해 주시는 은혜가 있길 바랍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
오늘 본문 잠언 1장 8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유대인 부모의 자녀 교육을 보면 부모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율법(토라)를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회 공동체의 일원이 되기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그래서 어느 한 목사님에 의하면 유대인들은 자녀가 4살이 되면 하루 3시간씩 토라(모세5경)을 암송하도록 시킨다고 합니다(인터넷). 과연 이러한 유대인의 근본적인 신본주의적 교육 철학은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그것은 바로 '쉐마(Shema)'에서 시작됩니다. 신명기6장 4-7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유대인 자녀가 세상에서 태어나서 처음으로 접하는 영적 교육이 '쉐마'란 단어라고 합니다. 유대인 자녀는 어머니 무릎 밑에서 발음을 제대 로 하지 못할 때부터 이 '쉐마'란 단어를 배운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마지막 죽어 가는 임종시에 모든 가족과 주위 사람들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유언처럼 부탁하는 말도 역시 '쉐마'라고 합니다. 또한 유대인 어머니는 자녀들이 잠들기 전 '쉐마'를 외우게 합니다. 그 이유는 혹시 잠들다 죽을 경우 '쉐마'가 마지막 유언이 되게 하기 위함이라고 합니다(인터넷).
우리 부모님들은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우리 부모님들이 먼저 오직 유일하신 하나님을 사랑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우리 마음 판에 깊이 새겨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줘서 그들의 마음 판에도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새겨줘야 합니다. 어느 정도로 하나님의 말씀을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각인시켜야 하는가 하면 그 말씀에서 우리 자녀들이 떠나지 못할 정도로 우리는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심어줘야 합니다. 그러나 문제는 무엇입니까? 문제 중 하나는 우리 부모님들의 마음 판에 하나님의 말씀이 깊이 새겨져 있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부모님들이 부지런히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서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그 말씀이 우리의 소유가 되야 하는데(시119:56) 그렇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 원인의 핵심은 바로 불순종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 부모님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배운다 할지라도 그 배운 말씀을 지켜 행하지 못하고 있기에 그 배운 하나님의 말씀이 내것 즉 내 소유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우리 부모님들의 소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보다 물질을 추구하는 것이 이난가 생각됩니다. 그러한 영적 상태에서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려고 하기에 우리 자녀들의 마음 판에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심겨지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 판이 아닌 그들의 머리에 심겨지고 있지 않나 염려가 됩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우리 자녀들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심어주는 최고의 방법은 모범(an example)이라 생각합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범된 신앙생활을 할 때 우리 자녀들도 우리의 본을 본받아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것입니다. 그리할 때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소유만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자녀들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시119:56).
우리 젊은 이들은 하나님을 경외하면서(잠1:7) 믿는 부모님을 통하여 듣고 배우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잠언 1장 9절을 보십시오: “이는 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요 네 목의 금 사슬이니라”. 젊은이들이 부모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것이 젊은 이들의 “아름다운 관”이요 “목의 금사슬”이기 때문입니다. 즉, 말씀 순종이 젊은 이들에게 있어서 영광이요 높여줌이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을 영화롭게 하십니다(박윤선).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였던 다니엘도 하나님께서 높이셨고 요셉도 하나님께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젊은 이들을 높이시사 당신의 귀한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젊은 이들은 부모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배워 순종하므로 말미암아 그 말씀에서 떠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은 악한 자들의 꾀임을 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장 10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과연 악한 자들(죄인들)이 어떻게 젊은 이들을 꾑니까? 바로 거짓된 행복을 약속하는 속임수로 젊은 이들을 꾑니다. 그 거짓된 행복은 무엇입니까? 13절을 보십시오: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으며 빼앗은 것으로 우리 집을 채우리니”. 악한 죄인들이 젊은이들에게 약속하는 거짓된 행복은 물질이나 무엇인가 가치있는 것들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라는 거짓말입니다. 이러한 거짓말로 젊은 이들을 미혹하여 악인들은 그 젊은 이들에게 함께 죄 없는 자를 까닭 없이 함께 해치자고 압력을 넣습니다(11절). 그것도 매우 잔인하게 해치자고 말합니다(12절). 그리고 나서 그 죄없는 자의 소유를 다 탈취해서 공동 소유로 만들자고 제안합니다(14절) (박윤선).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두 성경 이야기가 생각났습니다. 첫째로 생각난 성경 이야기는 바로 열왕기상 21장에 나오는 나봇이란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나봇이란 사람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사마리아에 살고 있었는데 그의 좋은 포도원이 악한 아합 왕의 왕궁에 인접한 곳에 있었습니다. 욕심이 많은 아합이 나봇의 포도원을 탐내어 그 포도원 대지를 자기 소유로 삼으려고 했을 때 나봇은 자기 조상이 물려준 땅이므로 그 땅을 팔 수 없다고 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근심하고 있는 아합에게 다가온 사람이 바로 그의 아내 이세벨이였습니다. 그녀는 궤계를 꾸며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했다고 위증하여 장로와 귀인들 앞에서 그를 쳐서 살해한 후 그 나봇의 포도원을 빼았았습니다. 이 얼마나 잔인한 행동입니까? 둘째로 생각난 성경 이야기는 어제 새벽기도회 때 읽은 창세기 38장에 나오는 요셉 이야기입니다. 요셉을 미워하고 시기하던 요셉의 형들이 도단이란 곳에서 양들을 치고 있었을 때 요셉이 오는 것을 멀리서 보고 그를 “죽이기를 꾀하”였다(18절)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동생이 요셉을 죽여 한 구덩이에 던지고 “악한 짐승이 그를 잡아 먹었다”라고 말하자고 서로 말을 맞췄습니다(20절). 그리고 나서 그들은 그들의 맏형인 르우벤 몰래 요셉을 이스마엘 상인들에게 팔고(28절)난 후 요셉의 옷을 취하여 수 염소를 죽여 그 곳에 피에 적시고(31절) 그 채색 옷을 아버지인 야곱에게 가져다가 보여드렸습니다(32절). 그 때 아버지 야곱은 다른 자녀들의 위로를 거부하고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슬퍼하며 음부에 내려 아들에게로 가리라”(35절). 어떻게 자기들의 아버지에게 이렇게 잔인하게 거짓말을 할 수 있습니까? 악한 마귀 사단은 거짓된 행복을 약속하는 속임수로 지금 우리 젊은 이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마치 하와과 선악과를 보고 미혹을 받았을 때처럼 사단은 지금 우리 젊은이들에게 보임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창3:5-6) 거짓된 행복으로 우리 젊은 이들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죄악된 세상은 우리 예수님을 믿는 젊은이들의 마음에 돈을 사랑하고 자기를 사랑하게 만들어 물질과 이기적인 탐심의 노예로 만들고 있습니다. 지금 사단과 그의 종들인 악한 죄인들은 예수님을 믿는 우리 젊은 이들로 하여금 영원한 행복이 아닌 이 땅에서의 순간적인 행복의 눈을 멀게하여 영원한 것을 등한히 하게 하고 순간적인 것들을 자꾸만 추구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크리스찬 젊은이들은 부모님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그리고 믿음에 견고히 서 있어서 이러한 사단과 악한 자들의 꾐에 넘어가지 않도록 깨어 근신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본을 본받아 사단과 악한 자들의 꾐이 있을 때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꾐을 물리쳐야 합니다. 우리는 결코 그 꾐에 우리 마음을 양보(yielding)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은 악한 자들과 함께 다니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잠언 1장 15절을 보십시오: “내 아들아 그들과 함께 길에 다니지 말라 네 발을 금하여 그 길을 밟지 말라”.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할 때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편 1-2절이 생각났습니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저는 이 말씀을 오늘 본문 잠언 1장 8-19절과 연관해서 생각할 때 우리 크리스찬 젊은 이들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교훈을 받습니다: (1) 첫째로, 우리는 악인의 꾀를 좇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1편 1절을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 우리가 이미 본문 잠언 1장 10절에서 묵상했듯이 우리는 악한 자들이 우리를 꾈지라도 좇지 말아야 합니다. 시편 1편 1절이나 잠언 1장 10절이나 우리에게 주는 동일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악인의 꾀를 좇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2) 그리할 때 둘째로, 우리는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할 것입니다. 시편 1편 1절을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 만일 우리가 악인의 꾀를 좇게 되면 결국에 가서 우리는 그 악인들과 함께 죄인의 길을 걷고 있는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악인의 꾐에 넘어가면 결국에 가서 우리는 그 악인들의 범죄 행위에 동참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빅윤선).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의 길에 아예 서 있지도 말아야 함. 그 악인들과 함께 있지도 말아야 합니다. (3) 그리할 때 우리는 셋째로,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할 것입니다. 시편 1편 1절을 보십시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결국 사단은 우리로 하여금 악인의 꾀를 좇게하여 죄인의 길에 서게 만들므로 말미암아 우리로 하여금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게 만듭니다. 그 결과 우리는 교만함 가운데서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께 범죄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단이 노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악한 자들과 아예 함께 다니지도 말아야 합니다. 함께 교제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젊었을 때는 충동적으로 많은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친구를 많이 사귀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습니다. 참으로 분별력이 필요한 시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악한 자들과 함께 다니지 말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악인의 발은 악으로 달려가기 때문입니다(잠1:16). 다시 말하면, 우리가 악한 자들과 함께 다니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그 악한 자들은 악을 행하기에 달음질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부득히하여 죄를 범하는 것이 아니고 악을 기뻐하며 기탄없이 악을 행하는 자들입니다. 그런 자들은 죄악으로 굳어져 있어서 그 자신이 죄악 자체와 같다고 할 정도로 타락한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자들과 사귀는 자는 그들의 악행을 제지할 수 없고 도리어 그들의 악으로 밀려들어가게 됩니다(박윤선). 그러므로 우리들은 악한 자들과 함께 교제 하지 말고 다니지도 말고 오히려 피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치 새들이 그물을 치는 것을 보고 피하는 것처럼(17절) 우리 또한 악한 자들이 유혹의 그물을 우리 앞에 칠 때에 우리는 피해야 합니다. 결코 우리는 미련한 새처럼 악한 자들의 그물에 걸려들어서는 아니될 것입니다.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하는지 3가지로 교훈을 받았습니다: (1)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은 부모님의 말씀에 순종합니다(8절), (2) 둘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은 악한 자들의 꾀임을 좇지 않습니다(10절), 그리고 (3) 마지막 셋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젊은이들은 악한 자들과 함께 다니지 않습니다(15절).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과 우리의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들을 높여주시고 영화롭게 하시는 축복을 누리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길 기원합니다.
지식의 시작
잠 1:7-9 / 이정익 목사
오늘 말씀은 잠언서의 서문입니다. 잠언서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지식을 주어서 무지를 깨우칠 목적으로 쓰인 책입니다. 잠언서는 인간에게 마땅히 알 것을 알려주려고 쓰신 책입니다. 그래서 본문을 보면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알고 사는 것이 기본입니다.
사람이 이 세상에서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큰 발견은 하나님을 발견한 일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믿고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 가장 큰 발견입니다. 인간이 가진 한계와 약점은 보이고 만져지고 느껴지는 것만 믿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이 이런 약점이 있음에도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발견했습니다. 발견한 것 뿐 아니고 인간은 그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고 그를 위해서 생명을 바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발견입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마 22:34절을 보면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소중한 일입니다. 사람이 이렇게 하나님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되면 눈이 뜨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때 사람은 몇 가지 눈을 뜨게 됩니다.
하나는 “자신을 보는 눈” 이 뜨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을 발견하고 하나님을 깊이 알 때 비로소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나의 값을 알게 되고 자신의 존재를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나의 소중함을 알고 나를 사랑하게 됩니다. 사람이 정말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면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진가를 깨달아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자기사랑은 이기적인 사랑이 아닙니다. 사람이 자신을 사랑할 줄 안다는 것은 자신에게 주어진 값을 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신을 사랑한다는 말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나 하나님의 뜻이나 자신이 할 일이 무엇인지 안다는 뜻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에게 주어진 값은 얼마입니까. 나라는 존재는 참 소중한 값을 지닌 존재입니다. 소중함을 아니까 사람이 품위를 지키고 절도의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자신을 모르기 때문에 스스로를 비하하고 멸시하고 업신여기는 것입니다. 자신이 못생겼다는 생각도 알고 보면 남들이 일방적으로 쳐놓은 조건으로 자신을 보아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마땅히 사랑해야 할 자신을 구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무지입니다. 내 몸이나 내 자신을 내가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해 주겠습니까. 나는 이 세상 6,70억 되는 인구 가운데 오직 하나뿐인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얼마나 소중한 선물입니까. 그런 나를 구박하고 업신여기고 비관하는 것은 마땅히 죄입니다. 나를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내 몸은 내가 사랑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이 주신 특별한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자신에 대해서 불만을 가지고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 데미 무어라는 여배우가 있습니다. 그 여배우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미모에 대해서 불만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전신 성형수술을 했는데 그 비용만도 5억원이나 들었다고 합니다. 그 결과 그의 모습은 아주 다른 사람처럼 놀라운 모습으로 변신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 많은 여성들이 그런 모습을 꿈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나는 누구입니까.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나의 모습, 나의 값, 나의 은사는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이것이 인간의 무지입니다.
또 살기가 어렵다고 아이들을 데리고 동반자살하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 정말 살기가 어려우면 아이들을 고아원에 잠시 맡겨 두고서라도 일터에 나가면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지 않습니까. 말은 아이들 때문이라지만 그 아이들이 높은 난간에서 떨어져 죽는 것을 생각하면 세상에 무슨 일인들 못하겠습니까. 나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은 누구도 나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내 영혼, 나의 삶, 나의 삶의 몫은 내게 부여된 엄숙한 소명이고 은사입니다. 그것을 개발하고 사랑하고 활용하는 삶이 나를 사랑하는 삶이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삶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자신을 과소평가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지 못한 독특한 은사들을 주셨습니다. 은사라는 말은 나에게만 주어진 달란트라는 말입니다. 그 은사를 사용하며 살아갈 때 내가 하는 일이 쉽고 즐겁고 재미있고 행복한 것입니다.
저는 주일마다 설교를 몇 번씩 합니다. 설교를 몇 번씩 하니 얼마나 피곤하냐고들 물으십니다. 물론 피곤합니다.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저는 설교하는 일이 여러분들이 무한 경쟁을 벌이며 세상에서 사업하고 장사하고 일하는 것 보다는 쉽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내가 나가서 장사해야 한다면 저는 더 피곤을 느낄 것이고 아예 못할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에게 주어진 은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설교는 내게 주어진 은사이기 때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 가운데 가장 쉬운 일입니다. 이것을 반대로 생각하면 여러분이 매주 몇 번씩 설교를 해야 한다면 여러분도 이 일을 감당해 내지 못할 것입니다. 그 일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여러분은 남들과 같이 되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각자에게 분량대로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사용할 때 기쁘고, 즐겁고, 행복함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은사대로 일하면 밤을 새워 일해도 피곤하지 않은데 하기 싫은 일을 하면 피곤해서 못합니다. 나는 나의 몫이 있고 값이 있고 은사가 있는 하나님의 특별한 인애와 사랑을 받는 대상입니다. 사람은 이점을 알아야 나를 사랑할 줄 알게 됩니다. 사람이 마땅히 하나님을 알게 되면 이렇게 나 자신을 보는 눈이 뜨이게 됩니다. 그리고 나의 뿌리도 알게 되고 미래도 알게 되고 나의 운명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지식의 시작이라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이웃을 아는 눈”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알게 되면 자신을 보는 눈만 뜨이는 것이 아니고 동시에 이웃을 보는 눈도 뜨이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모든 지식의 근본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나의 값도 알게 되지만 동시에 너의 값도 알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사랑하게 되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내가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는데 그 하나님의 뜻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모르면 내가 우선이고 내가 목적이 되어 살아가게 됩니다.
오늘이 그런 시대입니다. 오늘은 내 마음속에 네가 없는 지극히 나 위주의 이기주의적인 시대입니다. 이기주의는 나 자신을 불행하게 하는 삶이고 이웃을 불행하게 하는 삶이고 사회를 불행하게 만드는 삶이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삶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이웃간이나 세대간 그리고 부자간에도 교류하고 마음을 나누는 삶이 아주 적은 시대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오늘을 가리켜서 단절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생각이 단절되고 이식이 단절되고 문화가 단절된 채 살아가고 있습니다.
고3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는 모처럼 아들과 대화하고 싶어서 “야 너 그 옷 참 멋있다“하고 말을 건네자 아들은 ”빌려드릴 까요“ 하고 한마디 던지고는 방으로 그냥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것이 이기주의이고 나 본위의 삶입니다. 얼마나 멋이 없습니까. 상대방에 대한 배려가 전무합니다. 사람이 이렇게 살면 피차가 불행하게 살아가게 됩니다. 이것이 오늘 이 시대의 문화입니다. 오직 나만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오늘 이 시대를 386세대니 N 세대니 하고 말합니다. 386세대라는 말은 60년대에 태어나서 80년대에 대학공부를 하고 지금 나이가 30대인 사람을 386세대라고 말합니다. 이 세대의 특징은 높은 사회의식 입니다. 이번 선거에서도 이 높은 사회의식이 그대로 표현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정부의 요직에 이 386세대들이 대거 들어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X 세대입니다. X세대는 70년대에 태어나서 90년대에 대학을 공부한 세대입니다. 이 세대의 특징은 높은 소비성향과 자유분방한 가치관이 특징입니다. 그리고 다음은 N세대입니다. N세대는 80년대에 태어나서 2천 년대에 공부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인터넷과 컴퓨터에 능하고 휴대전화에 익숙한 세대입니다.
그런데 요즘에 P세대라는 용어가 새로 생겼습니다. 사회생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열정이 있고 소비문화에 익숙하고 변화를 일으키는 세대인 17세에서 39세 까지의 층을 P 세대라고 말합니다. 이 세대의 특징은 대부분 자신에 대해서는 강한데 너를 생각하는 성향이 아주 약한 것이 특징입니다. 우리사회는 앞으로 가면 갈수록 이 “너를 생각하는 성향”이 점점 더 약화될 것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약점입니다. 그러니까 노대통령이 쓰는 단어들이 기성세대들에게는 못마땅한 것입니다. 대통령 말하기를 “못해먹겠다, 깽판, 개판, 쪽수”라는 말을 거침없이 사용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해가 되십니까. 이것이 오늘 문화의 특징입니다. 오늘 문화의 특징 속에는 네가 없습니다. 너에 대한 배려가 없습니다. 있다면 오직 나 자신 뿐입니다. 내가 좋으면 그만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불행한 생각입니다.
내가 너를 생각하고 살아가는 것은 너만 행복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네가 행복해야 결국 그것이 나의 행복으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인류 문명은 모두 너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발전되어 왔고 발명되어 왔습니다. 무엇인가를 발명하고 발견하고자 인류가 몸부림 쳐 온 것은 나만 잘 살자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수고가 모두에게 도움이 되고 혜택이 되고자 연구실에 몰두해서 수고를 했던 것입니다.
오늘 각종 질병에 유효하게 사용되는 모든 약품의 개발도 알고 보면 인류문명에 기여하겠다는 생각에서 개발되고 만들어진 것 들입니다. 그 발명이 결국 인류에게 공헌되면서 나에게도 행복이 주어지고 기쁨이 주어진 것입니다. 1564년 영국 보로메일 지방에 폭풍이 몰아치면서 거목들이 넘어졌습니다. 그때 넘어진 거목의 뿌리에서 흑연이 발견되었습니다. 박물학자 콘라드 폰 게스너라는 분이 그 흑연을 보고 이것으로 유익하게 사용하는 방법이 없나를 골똘히 생각했습니다. 그러다 그 흑연을 나무에 끼워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인류 최초로 연필을 사용하게 되는 시초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줘서 사용하게 했습니다. 얼마나 큰 발견입니까.
그러다 조금 더 발전해서 처음엔 4각형으로 연필을 만들어 사용했습니다. 그러다 보니까 손이 매우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원통으로 만들어 사용했는데 손은 아프지는 않은데 책상에서 잘 굴러 떨어져서 부러졌습니다. 그래서 고민하다가 마침내 연필을 6각형으로 만들어 놓으니까 집기도 쉽고 구르지도 않아서 좋았습니다. 그래서 오늘 연필이 6각형이 된 것입니다. 그 연필을 미국의 화가 리프먼이라는 사람이 사용하다가 글씨가 틀려 지울 때 지우개를 찾아다니다 보니까 불편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연필 끝에 지우개를 달아매서 사용하니까 아주 편리했습니다. 그래서 오늘 지우개 달린 연필이 지금까지 사용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은 이렇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생각하면 하나님이 많은 생각을 주십니다. 그 생각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을 알게 되면 나 자신의 소중함을 발견하는 눈이 뜨이게 되고 또 너를 보는 눈이 뜨이게 됩니다. 얼마나 소망적인 삶입니까.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안에서 살아가는 오늘 신앙인들의 삶입니다.
지난 주간 미국에 가서 한 가지 느낀 것이 있습니다. 지금 미국에 살고 있는 교포들이 한창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교우들이 여름휴가를 선교지 방문으로 계획하고 있었습니다. 학생들도 그동안 모은 용돈으로 선교지를 찾아가는 계획을 짜고 있었습니다. 그런 계획을 자고 있는 그들의 모습이 아주 행복해 보였습니다. 사실 선교지에 가 보아야 참 피곤합니다. 불편한 잠자리와 더운 날씨로 고생만 죽도록 합니다. 그래도 그 길을 스스로 찾아가려고 준비 중이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고 나를 사랑하는 일이고 너를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 기간동안 직장도 쉬고 사업도 쉬고 가게도 문도 닫아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그 일을 아주 기쁘고 행복한 마음으로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입니까. 이 일은 너를 생각하고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가능한 일입니다.
신문을 보니까 오늘 미국인들 전 국민의 31%가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 자원봉사를 품삯으로 계산하면 1,500억 달러나 된다고 합니다. 이 금액이 얼마나 되는가 여러분은 잘 모르실 것입니다. 우리나라 일년 예산이 약 천억 달러 정도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일년 예산보다 더 많은 금액을 오늘 미국인들이 일년 동안 무료봉사로 지출하고 있습니다. 오늘 미국인들의 신앙이 많이 해이된 것은 사실이지만 오늘 미국인들은 이런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도 미국이라는 나라가 강한 힘을 발휘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을 전하는 눈” 을 뜨게 됩니다.
내가 하나님을 알게 되면 내가 만난 하나님을 어떻게 후대에 알릴 것인가 하는 눈도 뜨게 됩니다. 신 6:5절을 보면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또 강조하기를 “그 하나님을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라”고 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아는 일만으로는 다가 아닙니다. 내가 정말 하나님을 깊이 알았다면 그 하나님을 알려야 한다는 새로운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힘이고 능력입니다.
지난 주간에 미국 아주사 대학에 갔었습니다. 지금 대학건물을 크게 짓고 있었습니다. 총장이 직접 안내하며 구내를 돌아다니며 소개해 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그 분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대학교 건물의 특징은 학교건물 중앙에 있는 저 높은 탑입니다, 저 탑 맨 위에 개인 기도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그곳에서 어느 학생이 기도하면 꼭대기 종탑에 불이 켜지게 되어 있습니다, 저 꼭대기에 불이 꺼지지 않게 하는 것이 우리학교의 정신입니다“ 하고 소개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학교의 가장 큰 정신은 이 학교에 와서 공부하는 많은 학생들에게 하나님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참 오늘 소중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렇게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삶입니다. 오늘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우리가 하나님을 깊이 알면 나 자신을 보는 눈을 뜨게 됩니다. 그리고 너를 보는 눈도 뜨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알리려는 눈도 뜨이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오늘 우리의 삶입니다
악한 자의 길
1:10-19 / 양재천 목사
10절 서두에 나온 말씀을 보면 '내 아들아'라고 부르며 교훈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그리고 2장부터 7장까지는 각장 서두에 한결같이 '내 아들아'로 시작됩니다. 여기서 내 아들이라고 솔로몬이 부르는 것은 자기 아들 '르호보암'을 지칭한 말이 아니라 두 가지 견지에서 이 잠언서를 읽고 배우는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적용시킨 것입니다. 하나는 모든 성경 말씀은 성령의 영감으로 기록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셔서 우리에게 교훈 하시는 뜻으로 볼 수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솔로몬 자신이 어버이의 입장에서 이 교훈을 듣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상대로 그렇게 부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갈4:19절에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을 향하여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라'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나의 자녀들'이라고 불렀습니다.
1. 악한 자의 뜻
먼저 아들에게 경계하는 아버지의 말씀은 그 아들로 하여금 악한 자의 무리에게 물들지 말 것을 간절히 소망하는 교훈으로부터 시작됩니다. 10절 말씀을 보면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좇지 말라' 고 했습니다. 여기서 악한 자란 말은 죄인이란 말과 같은 의미로 보지만 약간 구별되는 말입니다. 죄인은 하나님을 떠난 모든 인류들을 말 합니다. 그러나 악인이란 죄로 연결되어 그 죄를 행하는 자를 의미합니다. 죄의 어원은 아시다시피 ‘하마르티아’ 화살이 표적에서 벗어났다는 뜻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표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모든 인류는 이 표적에서 빗나가므로 악한 자가 된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악한 자는 고의적으로 또는 상습적으로 그리고 계획적으로 죄를 짓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자기 자신을 죄에게 내어 주고 다른 사람들마저 죄의 길로 인도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러면 이런 악한 자들이 우리 곁에 다가와서 무슨 일을 하는가에 대하여 10절 이하의 말씀에서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악한 자가 하는 일은 다른 사람을 꾀는 일입니다. 꾄다는 말은 상대방을 자기가 계획하고 있는 악한 일에 동참시켜 함께 악한 무리가 되게 하려는 데 있는 것입니다. 사람을 꾀는 방법은 유혹입니다. 유혹의 전문가는 물론 사탄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은 사탄의 지혜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유혹하는 자들은 낚시밥이 있습니다. 그 낚시밥을 살며시 우리 앞에 던지는 것입니다. 13절 말씀을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온갖 보화를 얻는다'는 것입니다. 유혹의 손길은 언제나 재물과 연결되어 우리들에게 다가옵니다.
2. 악인의 길은 망하리라
그러면 누가 이런 악한 자의 꾐에 넘어갑니까? 19절,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며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 여기서 우리는 이를 탐하는 자의 길과 악한 자의 길은 모두 똑같은 길이란 사실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익을 탐한다는 말은 장사를 하는 사람이 정상적인 이익을 추구 하는 일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정과 악한 도모에서 나온 탐익을 말하는 것입니다. 시141편에서는 '하나님은 악인을 자기의 그물에 걸리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역사상에 존재했던 모든 악인들의 결과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자기가 쳐 놓은 그물에 걸려 잡히게도 하시고, 재앙을 만나게도 하시고, 응당한 보응을 받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시146편에는 하나님께서 '악인의 길은 굽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굽게 하신다는 말은 멸망의 함정에 빠지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때가 이르면 언제인가는 반드시 걸려 넘어지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3. 악한 자를 대하는 지혜
우리는 오늘 이 잠언의 말씀을 통해 악한 자를 대하는 지혜를 가져야 합니다. 첫째로 악한 자를 쫓지 말아야 합니다.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길은 음부로 향한 길이기 때문에 생명을 잃게 될 뿐입니다. 부정한 이익은 반드시 악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부정한 이익을 추구하는 일은 악을 행하는 일입니다. 부정한 이익을 추구하는 마음은 우리의 마음속에 탐심을 일으키며 이 탐심은 내 마음과 생각을 사로잡아 악인의 꾀에 넘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어도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감사하는 생활을 하면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 참으로 부요한 사람인 것입니다.
유혹의 손길은 누구에게 가장 쉽게 다가오는 것일까요? 악한 자를 자주 만나고 그들과 함께 자주 모이는 그 자리가 함정인 것입니다. 친구의 유혹의 손길에 이끌려 한두 번 유흥장에 가본 일이 화근이 되어 일생에 씻지 못할 불행을 낳는 가정주부들이 어디 하나둘입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간직하고 그 말씀을 따라 자기의 생각과 행실을 통제할 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배우는 잠언 말씀은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자들에게 이런 하나님의 지혜를 주며 그 지혜 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능력도 주십니다. 고기를 구워 먹으면 맛있습니다. 그러나 온 몸에 고기냄새가 묻기 마련입니다. 고기를 구워 먹으면 온 몸에 고기 냄새가 진동하듯 죄악이 우리를 덮게 그냥 두어서는 안 됩니다. 악한 자와 어울리는 일은 비록 우리가 지혜롭게 행동하고 그들에게 물들지 않는다고 할지라도 벌써 내 마음이 더럽혀지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멀리 떨어지는 일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우리의 즐거움은 악한 자의 길에 있지 아니합니다. 우리의 참 즐거움은 생명의 길을 걷는 성도들의 신앙적인 교제에 있음을 다시 한 번 깊이 기억하시는 오늘 한날이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지혜
잠 1:7-9
오늘 본문을 담고 있는 성경을 가리켜서 잠언이라고 부릅니다. 잠언의 특징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내용적으로는 지혜를 다룹니다. 그리고 형식적으로는 간결합니다. 그러니까 잠언은 함축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하나님이 뜻하신 삶의 지혜를 우리에게 가르칩니다.
여기서 지혜라는 단어는 머리로 생각하는 것뿐만 아니라, 입으로 말하는 것과 몸으로 행동하는 것을 총망라합니다. 그러니까 지혜는 한 마디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삶이 바로 지혜입니다.
오늘 본문 8절 말씀과 같이, 부모는 자녀를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는 그 무엇보다도 자녀에게 지혜를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가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복을 누리게 되며, 또한 그로 인하여 부모 자신에게 큰 복이 되기 때문입니다.
잠언은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지혜의 길잡이입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하여,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지혜를 잠시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 시간에는 그 가운데서 가장 대표적인 것 열 가지만을 간추려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본문 잠1:7 말씀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입니다. 또한 잠9:10 말씀처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입니다. 자녀들이 하나님을 경외할 때, 그들은 올바른 지식과 지혜를 얻습니다.
우리말의 경외(敬畏)라 함은 공경할 경(敬)과 두려워할 외(畏)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성경에서 사용된 단어도 같은 뜻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씀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거룩한 두려움을 의미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하나님의 높고 위대하심을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포함한 온 천지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또한 하나님은 지금도 홀로 온 우주를 주관하시며 다스리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야 합니다.
아울러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무엇이며,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무엇인지도 가르쳐야 합니다. 그러면서 부모는 자녀에게 하나님은 각자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신다는 사실도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로 하여금 하나님께 참되게 예배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말로만 가르칠 것이 아니라, 부모 자신이 본을 보여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 앞에서 자신이 실제로 주일을 성수하며, 하나님께 바르게 헌금하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잠3:7 말씀처럼, 우리의 자녀가 하나님을 경외하면 그들은 절로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악을 떠날 것입니다. 그리하면 잠3:8 말씀처럼, 그들은 건강의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또한 잠3:9∼10 말씀처럼, 그들은 물질의 축복도 얻게 될 것입니다.
둘째로,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본문 잠1:8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봅니다. “내 아들아 네 아비의 훈계를 들으며 네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 부모는 자녀에게 부모가 그들에게 가르치는 훈계와 법을 듣고서 그대로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시51:5 말씀처럼, 모든 사람은 죄 중에서 출생합니다. 그러기에 부모가 자녀에게 순종을 가르치지 않으면, 자녀가 저절로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오히려 거역합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에게 부지런히 순종을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녀가 누구의 말을 듣겠습니까? 그러한 자녀는 교만해져서, 그저 자기가 세상에서 제일인 줄 압니다. 또한 그러한 자녀는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 되어서, 사회생활에도 적응하기가 힘들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기에 잠23:13~14 말씀과 같이, 부모는 채찍으로 때려서라도 자녀에게 순종을 가르쳐야 합니다. 물론 부모는 미움과 분노의 마음으로 채찍을 사용해서는 안 됩니다. 진정으로 그들이 잘 되기를 바라는 사랑의 마음으로 부모는 자녀를 징계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자녀가 부모를 공경하는 마음으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입니다. 엡6:3 말씀처럼, 순종하는 자녀는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합니다. 삶의 질에서도 또한 삶의 양에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축복을 풍성하게 누릴 것입니다.
셋째로, 마음을 지키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잠4:23 말씀과 같이, 부모는 자녀에게 그들의 마음을 지키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생명의 근원이 마음에서 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모든 삶이 그의 마음에서부터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마15:18에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밖에서 사람에게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에게 그들의 마음을 지킬 것을 가르쳐야 합니다.
부모는 세상의 그릇된 풍조가 자녀의 마음에 들어가지 못하도록 막아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잠2:10 말씀처럼, 부모는 그 자녀의 마음에 지혜가 들어가게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부모는 자녀의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을 새겨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오늘 본문 잠1:9 말씀처럼, 그들의 마음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은 그들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 되어 그들을 존귀하게 할 것입니다. 또한 그들의 마음에 들어간 지혜는 그들 목의 금 사슬이 되어 그들을 영화롭게 할 것입니다.
넷째로, 동무를 가려서 사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오늘 본문 바로 다음절인 잠1:10입니다. “내 아들아 악한 자가 너를 꾈지라도 따르지 말라.” 악한 자를 동무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고전15:33 말씀처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힙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자녀에게 동무를 선별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잠18:24을 보면, 재미있는 말씀이 나옵니다. “많은 친구를 얻는 자는 해를 당하게 되거니와 어떤 친구는 형제보다 친밀하니라.” 무슨 뜻입니까? 우리말 성경을 언뜻 읽어보면, 다소 그 뜻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여기에 친구라는 단어가 두 번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어로는 다른 단어입니다. 앞에 나오는 친구는 알고 지내는 모든 사람들을 광범위하게 일컫는 말입니다. 반면에 뒤에 나오는 친구는 그 가운데서 좋은 친구, 곧 선하고 진실한 동무를 일컫습니다.
나쁜 동무들을 많이 사귀면 해가 될 뿐입니다. 잠2:13~15 말씀과 같이, 그들은 정직한 길을 떠나 어두운 길로 행합니다. 그들은 행악하기를 기뻐하며, 악인의 패역을 즐거워합니다. 또한 그들의 길은 구부러지고 그들의 행위는 패역합니다.
따라서 자녀들이 나쁜 동무들을 많이 사귀는 것보다는 적더라도 좋은 동무들을 사귀도록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이 바르고 정직한 길로 행하며 하나님의 축복을 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부모는 자녀에게 좋은 동무를 사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다섯째로, 육체를 다스리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젊을 때는 육신의 정욕이 강하게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니까 잘못된 일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 그릇된 일에 자기의 육체를 쉽게 내맡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면 그 결과는 비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육체를 다스리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가 정욕을 억제함으로 파멸에 빠지는 것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잠언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주제 가운에 하나가 바로 성적 순결을 자녀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예컨대 잠5:3~5입니다. “대저 음녀의 입술은 꿀을 떨어뜨리며 그의 입은 기름보다 미끄러우나 나중은 쑥 같이 쓰고 두 날 가진 칼 같이 날카로우며 그의 발은 사지로 내려가며 그의 걸음은 스올로 가나니.” 정욕에 몸을 맡기면, 결국은 죽음에 이르고 맙니다.
잠6:26입니다. “음녀로 말미암아 사람이 한 조각 떡만 남게 됨이며 음란한 여인은 귀한 생명을 사냥함이니라.” 정욕에 몸을 맡기면, 한 조각 떡만 남게 됩니다. 빈곤이 찾아온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종국에 가서는 육적으로도 영적으로도 생명을 잃게 됩니다.
잠7:21~22 말씀입니다. “여러 가지 고운 말로 유혹하며 입술의 호리는 말로 꾀므로 젊은이가 곧 그를 따랐으니 소가 도수장으로 가는 것 같고 미련한 자가 벌을 받으려고 쇠사슬에 매이러 가는 것과 같도다.” 정욕의 비참한 결말을 비유적으로 잘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잠언은 계속해서 성적 순결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부모는 자녀에게 육체를 다스리며 정욕을 억제해서, 성적으로 순결하게 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래야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그 결과 하나님이 주시는 축복을 풍성히 누릴 것입니다.
여섯째로, 자기의 배필을 즐거워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물론 부모는 자녀에게 육체를 다스리며 정욕을 억제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금욕하는 생활을 가르치라는 것은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각자의 배필을, 곧 남편은 그의 아내를 또한 아내는 그의 남편을 즐거워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잠5:15~16 말씀입니다. “너는 네 우물에서 물을 마시며 네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라 어찌하여 네 샘물을 집 밖으로 넘치게 하며 네 도랑물을 거리로 흘러가게 하겠느냐.” 이는 자신의 배필을 즐거워하라는 사실을 비유적으로 깨우치는 말씀입니다.
고대 사회는 물이 아주 귀했습니다. 따라서 그 귀한 물을 거리에 부어버리는 것과 같이 함부로 낭비하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짓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성적으로 문란해서 자기의 배필이 아닌 사람을 즐거워하는 것도 지극히 어리석은 짓입니다.
계속해서 잠5:18~19입니다. “네 샘으로 복되게 하라 네가 젊어서 취한 아내를 즐거워하라 그는 사랑스러운 암사슴 같고 아름다운 암노루 같으니 너는 그의 품을 항상 족하게 여기며 그의 사랑을 항상 연모하라.”
배필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신 샘입니다. 따라서 목이 마를 때는 그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셔야 합니다. 이와 같이 부모는 자녀에게 그의 배필을 즐거워하며, 그의 배필을 항상 족하게 여기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이 점에서 부모가 먼저 본이 되어야 합니다.
일곱째로, 말을 조심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잠4:24 말씀입니다. “구부러진 말을 네 입에서 버리며 비뚤어진 말을 네 입술에서 멀리 하라.” 그리고 잠6:12 말씀입니다. “불량하고 악한 자는 구부러진 말을 하고 다니며.” 그러니까 구부러진 말이나 비뚤어진 말은 불량하고 악한 자들이나 하는 말입니다.
구부러진 말이나 비뚤어진 말은 모두 바르지 못한 말을 가리킵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거짓말입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거짓말을 하지 못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거짓말을 하면 따끔하게 혼을 내어서라도, 두 번 다시 거짓말을 못하게 해야 합니다.
반면에 자녀가 아무리 큰 잘못을 저질렀더라도 정직하게 말하면, 부모는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자녀는 늘 정직하게 살아가며, 또한 겉과 속이 다르지 않게 항상 진실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이번에는 잠10:19 말씀입니다.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하기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말이 많다 보면, 아무래도 말에 실수가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다 보면 말 때문에 허물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늘 말을 조심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말은 적게 할수록 좋지만, 말을 하려면 경우에 합당한 말을 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하면 잠25:11 말씀과 같이, 그들의 말은 아로새긴 은 쟁반에 금 사과처럼 값진 말이 될 것입니다.
여덟째로, 부지런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잠6:6 말씀입니다.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 가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부모는 자녀에게 게으름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 대신 부모는 말로써, 그리고 본을 보임으로써 근면을 가르쳐야 합니다. 여기에 개미를 통한 가르침이 나옵니다.
잠6:7~8 말씀을 계속해서 읽어봅니다.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감독자도 없고 통치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여기에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근면함이 두 가지로 설명되고 있습니다.
개미는 감시하는 자가 없어도 부지런합니다. 또한 개미는 부지런히 앞날을 예비합니다. 마찬가지로 부모는 자녀에게 부지런함이 몸에 배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고 부모는 자녀에게 장래를 계획하며, 앞날을 부지런히 예비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계속해서 잠6:9~11 말씀입니다.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누워 있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누워 있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 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 같이 이르리라.”
부모는 자녀가 게으르지 않도록 깨워주어야 합니다. 물론 그 때마다 자녀는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면서,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좀더 누워 있자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녀를 게으름에 그대로 방치하면, 그 자녀는 앞으로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습니다.
잠10:4 말씀처럼, 게으른 자는 가난하게 되지만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됩니다. 자녀에게 부지런함을 가르칩시다. 그리해서 잠22:29 말씀과 같이, 우리의 자녀들이 자기의 일에 능숙하여 왕 앞에 설만큼 존귀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아홉째로, 재물을 잘 관리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부지런하면 재물을 모을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는 재물을 잘 관리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재물을 잘 관리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며,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잠3:9~10 말씀입니다.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부모는 자녀에게 그가 가진 재물로 먼저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바칠 때는 인색함이나 억지로 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언제나 하나님께 온 정성을 다해서 즐겨 내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그들의 창고를 가득히 채우시고, 그들의 포도즙 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게 하실 것입니다.
또 한 가지 자녀의 바른 재물 관리를 위하여 부모가 반드시 가르쳐야 할 것이 있습니다. 잠6:1~2 말씀입니다. “아들아 네가 만일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며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였으면 네 입의 말로 네가 얽혔으며 네 입의 말로 인하여 잡히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이웃을 위한 담보나 타인을 위한 보증을 금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이 사실을 명백하게 가르쳐야 합니다. 내가 가진 재물은 하나님이 내게 맡기신 것입니다. 내가 관리해야 할 재물을 남이 맡아서 관리하는 것은 잘못된 일입니다.
이와 같이 부모는 자녀에게 그의 재물을 잘 관리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를 위해 먼저 부모는 자녀에게 그의 재물로 하나님을 공경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아울러 부모는 자녀에게 그의 재물을 그 자신이 직접 잘 관리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열째로, 이웃을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웃을 위하여 담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타인을 위하여 보증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웃이 어려울 때, 돕지도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이웃을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잠3:27~28 말씀입니다. “네 손이 선을 베풀 힘이 있거든 마땅히 받을 자에게 베풀기를 아끼지 말며 네게 있거든 이웃에게 이르기를 갔다가 다시 오라 내일 주겠노라 하지 말며.” 어려운 이웃에게는 주저하지 말고 즉시 선을 베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계속해서 잠3:29~31 말씀입니다. “네 이웃이 네 곁에서 평안히 살거든 그를 해하려고 꾀하지 말며 사람이 네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였거든 까닭 없이 더불어 다투지 말며 포학한 자를 부러워하지 말며 그의 어떤 행위도 따르지 말라.”
부모는 자녀에게 그 이웃과 화목하며 다투지 않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설사 이웃이 잘못을 행하더라도 포학한 자처럼 복수하지 않게 해야 합니다. 부모는 자녀에게 이웃을 용서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길입니다.
그리하면 잠3:32 말씀처럼, 우리의 자녀에게는 하나님의 교통하심이 있습니다. 잠3:33 말씀처럼, 그들의 집에는 복이 있습니다. 잠3:34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들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아울러 잠3:35 말씀처럼, 하나님은 그들에게 영광을 기업으로 주십니다.
이제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어린이 주일을 맞이해서, 우리는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열 가지 지혜를 차례대로 살펴보았습니다. 부모에게는 자녀를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에게 가르쳐야 할 대표적인 열 가지 지혜는 무엇입니까?
첫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그들에게 하나님을 멀리 하며, 하나님을 무시하도록 가르칠 것입니다.
둘째로, 부모에게 순종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안 그러면 마귀가 그들에게 부모의 가슴에 못질하도록 가르칠 것입니다.
셋째로, 마음을 지키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것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면, 마귀가 그들의 마음속에 온갖 지저분한 것들로 가득 채울 것입니다.
넷째로, 동무를 가려서 사귀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이 점에서 실패하면, 마귀가 그들을 자기의 종으로 삼아버릴 것입니다.
다섯째로, 육체를 다스리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아니하면 마귀가 그들에게 온갖 더러운 육체의 욕심을 이루도록 가르칠 것입니다.
여섯째로, 자기의 배필을 즐거워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게 가르치지 않으면, 마귀가 그들의 결혼 생활과 가정을 파탄시킬 것입니다.
일곱째로, 말을 조심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그들의 입을 온갖 거짓되고 지저분한 말로 가득 채워 놓을 것입니다.
여덟째로, 부지런함을 가르쳐야 합니다. 만일 이것을 가르치지 않으면, 마귀가 그들의 게으름을 이용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도록 만들 것입니다.
아홉째로, 재물을 잘 관리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마귀가 그들의 재물을 죄 짓는 일에 사용하도록 가르칠 것입니다.
열째로, 이웃을 사랑하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아니면 마귀가 그들에게 자기만을 사랑하도록 가르쳐서, 그들을 이기적인 사람으로, 쓸모없는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선물인 우리의 자녀를 하나님의 뜻대로 잘 가르치고 바르게 양육합시다. 그리해서 잠23:24 말씀과 같이, 자녀로 인한 기쁨과 즐거움과 감사가 우리 모두에게 넘쳐흐르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