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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아티에 가문의 열 번째 이야기입니다.
+) 모바일 데이터 배려 차원으로 모든 그림 파일에 다 가위질을 했습니다.
기존에 올린 연대기도 순차적으로 바꾸겠습니다.
++) 스압을 견뎌주세요. 복 받으실 거예요.
☆
별 일도 다 있다. 아키텐 국왕을 모시는 시종들 몇은 머릿속에 같은 의문을 떠올렸다. 평소와 다를 것 없는 하루의 시작. 새벽의 찬란한 장밋빛 너울이 청명한 푸른 하늘에 녹아들어 사라지면 부지런한 국왕의 일과가 시작되었다. 아직 18세, 6개월 후 생일을 맞을 아키텐의 주인은 잠결에 쌍꺼풀이 더욱 짙어진 초록빛 눈을 끔뻑이며 가장 먼저 간밤에 새로 들어온 소식을 확인했다. 검고 긴 머리를 빗고 치장을 하는 것은 그 다음이었다. 홀로 혹은 가족과 함께 빈 속을 달랜 후 시간을 맞춰 정무에 임하는 것도 같았다. 이상한 일은 그 후에 일어났다. 태양이 바다를 향하며 붉게 물들어가던 오후에.
“모두 물러가라.”
첩보관이 군주에게 독대를 청하는 건 특이하지 않다. 그러나 아키텐 왕국의 첩보관 아르투아 여백작 아르신드 드 베튠을 아는 사람이면서 왕성에서 근무하는 이라면 오늘은 의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로 상왕 길패트릭이 발탁한 측근인 그녀가 상왕을 거치지 않고 직접 국왕인 오라드에게 독대를 청한 것. 그리고 둘째로 오라드가 가타부타 말하지 않고 아르투아 백작의 청을 가납해 일체의 호위와 시종을 거뒀다는 것. 그러나 궁금하다고 해서 왕명을 거스를 수는 없는 터. 그들은 저마다 떠오르는 물음을 억누르고 손가락 하나 들어갈 틈을 남긴 채 문을 닫았다. 그 후 그들은 국왕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위치까지 걸음을 옮겼다.
“툴루즈와 아쟁이 기어이 손을 잡았다….”
방 안은 펜대가 테이블을 구르는 소리가 울릴 만큼 조용했다. 오라드는 잔잔한 목소리로 아르신드의 보고를 되짚었다. 아쟁의 새 주교 라이몽이 파당을 지으려 한다는 정보를 접한 게 작년 늦가을. 지금이 3월이니 이르다면 이르고 늦다면 늦다. 주교령 아쟁은 수도 보르도의 바로 옆이며 툴루즈 공작의 영역과 맞닿아 있으니 사안이 가볍지 않았다.
“폐하, 어떻게 처결하시겠습니까?”
아르신드의 물음에 오라드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소환은 하지 않겠소. 국왕이 성직에 있는 주교를 압박했다는 소리가 바티칸에 들어가면 작년 대관식으로 애써 쌓아둔 우호가 무너집니다. 설령 아쟁이 툴루즈에게 기울어도 현 툴루즈 공작 오돈 드 툴루즈는 내부 문제만으로도 벅찰 테니 당분간 그대로 둬도 괜찮을 것 같소.”
툴루즈 본성 바로 옆에 생긴 신성로마제국의 영토 루에르그. 손 안에 가시 돋친 밤송이를 쥐고도 굳이 자신의 방패가 되어줄 왕을 적대하지는 않을 것이다. 오라드는 가느다랗고 하얀 손가락으로 아쟁의 주교 라이몽과 툴루즈 공작에 대한 보고문을 슬며시 옆으로 밀어두었다. 아르신드는 오라드의 손을 떠난 서류를 갈무리했다.
“부르봉 공작에게는 제가 서신을 쓰겠습니다.”
“아니오. 내가 하겠소. 그게 더 나을 테니.”
부르봉 공작 아샹보 드 부르봉은 성년이 되고서도 봉신 서약을 오지 않았다. 선선대 부르봉 공작의 후처였던 친모가 줄리아나 공주의 부마로 확정된 이복형을 암살한 덕에 어린 나이에 공작이 된 청년. 부르봉의 현 주인은 병약한 몸 탓에 오랜 기간 부르봉 밖으로 나가지도 못했다. 오라드는 작년 대관식 축제 즈음 앙굴렘 여백작이 동생 마틸드와 부르봉 공작의 혼사를 고하며 국왕의 축복을 부탁했던 걸 떠올렸다.
그래. 슬슬 수면 위로 떠올랐군.
“경을 믿지 못하는 건 아닙니다. 다만 나이가 가까운 사람이 쓰는 것이 받는 쪽도 좀 더 마음을 놓지 않겠소.”
아르투아 백작은 부르봉 공작에게 언행을 권할 수 없다. 보낸다면 국왕을 대신한 왕국 첩보관으로서 보내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서한은 내용과 언사에 상관없이 절대 개인적일 수 없다. 이미 툴루즈가 주시 대상이 된 터에 부르봉이 이반하려 든다면….
“외부의 이목을 생각해서라도 우리가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합니다. 거절한다면 그 때 다른 방책을 써도 늦지 않소.”
오라드는 침착한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사실 왕이 하교를 내리며 신하에게 일일이 설명할 이유는 없었으나 아르신드만큼은 예외였다. 오라드는 자신이 내린 답이 아르신드가 생각한 최선과 일치하기를 바랐다. 선망하는 영리한 지략가에게 인정받고 싶다는 단순한 이유만은 아니었다. 주군이 어리석어 부리는 사람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고 납득시키지도 못하면 종국에는 개떼들에게 목을 물어뜯기니까.
“오늘 독대를 청한 이유는 이것뿐입니까?”
그럴 리가 없다. 지금까지 나온 사안이라면 다른 사람은 몰라도 상왕이신 아버지를 배제할 이유가 없으니. 즉 아버지께는 말씀드릴 수 없거나 모르셔야 할 일이 남아있을 터. 그런 의미를 담고서 오라드는 아르신드를 바로 보았다. 아르신드는 그 말을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서류가 없었다.
“앙주의 주인이 부르고뉴의 여주인에게 베일을 보냈습니다. 국왕폐하. 이대로 두신다면 머지않아 앙주와 부르고뉴가 하나로 합쳐집니다.”
오라드는 순간 몸의 피가 싸늘히 얼어버리는 것 같은 한기를 느꼈다. 아키텐 왕국의 영토는 할아버지인 초대 국왕 기욤 1세 치세 이후 한 뼘도 넓히지 못했다. 백작 넷이 각각 다스릴 뿐 통솔하는 공작이 없는 가스코뉴를 제외하고 왕가와 함께 아키텐 왕국을 구성하는 공령은 앙주, 툴루즈, 부르봉, 부르고뉴 넷. 현재 아키텐의 국왕은 아키텐 공작과 푸아티에 공작, 플랑드르 공작을 겸한다. 허나 뤼지냥 백작과 공생하는 푸아티에 공령을 제외하고 아키텐에서는 겨우 수도 보르도 하나만을, 반역자에게 회수한 플랑드르에서는 겐트 하나만을 가졌을 뿐이다. 삼촌인 선선대왕 조슬랭과 어머니 선왕 파트리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내전은 플랑드르 공작과 부르고뉴 공작이 투아르 백작의 파벌에 가담한 것이 시초였다.
“아르신드 경.”
오라드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나는 선선대왕께서 이루시지 못한 일을 하려 합니다.”
브르타뉴 국왕의 직할지이며 노르망디 반도와 이어진 오트브르타뉴. 브르타뉴와 결전을 준비하던 왕의 군대는 반란과 흑사병으로 수가 반으로 줄었다. 기재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섭정상왕은 각고의 노력으로 10년에 걸쳐 예전의 풍요를 다시 일궈냈다. 하지만 내전 당시의 장군들은 80을 바라보는 핀 기스킹과 대장군 마르탱을 제외하곤 모두 세상을 떠났다. 병사를 훈련시킬 숙련된 지휘관을 키워야 한다. 이번에는 반란 같은 어이없는 참사가 일어나선 안 된다.
“앙주 공작의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자는 누구입니까?”
부르고뉴 여공작 아델 드 부르고뉴는 반역자 외드 드 부르고뉴의 외동딸이다. 외드 또한 독자였으니 아델이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면 공위는 그녀의 할아버지인 위그 드 부르고뉴의 큰누이 가계로 넘어간다. 다른 가문에게 부르고뉴를 통째로 넘겨줘 또 다른 위협을 초래하느니 지금의 주인을 그대로 두는 것이 낫다. 그렇지만 앙주는 다르다.
“선대 앙주 공작 풀크의 아우인 고티에르입니다. 올해 32세로 적자 여섯이 있습니다.”
풀크. 그 이름을 듣자 간신히 잦아들었던 떨림이 다시 몸을 강타했다. 앙주라는 말이 나온 순간 알고 있었다. 이렇게 중요한 사안에서 상왕을 배제한 이유를. 이방인인 상왕 대신 가신들의 추대로 첫 섭정이 된 선대 앙주 공작 풀크 드 앙주. 내전에서 기꺼이 국왕의 휘하에 들어 병력을 제공하고 35세 젊은 나이로 죽음을 맞는 순간까지 왕가에게 묵묵히 충성을 다한 공신. 그리고 현 앙주 공작 페이용은 그 차남이자 유일하게 하나 살아남은 자식이다.
“아버지라면 분명 반대하셨겠지요.”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신드가 원하기에 왔을 것이다. 플랑드르 공령에 자리한 아르투아 백작으로서 국왕과 맞먹는 힘을 가진 대공의 출현은 결코 반가운 일이 아닐 테니까. 아키텐 왕국이 어떻게 프랑스로부터 독립했는지 기억한다면 더욱 그렇다. 오라드는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앙주의 주인을 바꾸겠소. 시행하시오.”
언젠가는 대공이 출현할지도 모른다. 영역 내에 동군 연합이 생겨도 큰 걱정거리가 아니게 될지도 모른다. 다만 그 때가 지금은 아니다. 운이 좋아 조만간 아키텐의 후계자를 잉태하게 된다 하더라도 이런 병약한 몸으로는…. 끔찍한 미래가 벌어진다면 어미 잃은 아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거센 풍랑 속에서 버틸 수 있을까.
“즉시 착수하겠습니다. 이만 물러가옵니다.”
스스로의 죽음을 떠올려서 그런 걸까. 오라드의 귀에는 아르신드의 차분한 목소리가 수면 속에서 울리는 양 불분명하게 웅웅거리는 소리처럼 들렸다. 오라드는 눈빛으로만 아르신드를 전송했다. 왕을 위협하는 건 죽을 죄다. 화근은 조기에 제거해야 한다. 그런데 왜 이리 몸이 가라앉고 심장만 기분 나쁘게 쿵쾅거리는가.
국왕은 창백히 질린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주살령을 받잡은 첩보관은 아무 일도 없었던 양 변함없이 단정한 모습으로 스르르 움직였다.
☆
안녕하세요, 여러분. 또 뵙네요. 오라드예요.
대관식을 마치자마자 종교계와 트러블이 생겼어요.
첩보관 아르투아 여백작 아르신드가, 보르도 바로 옆에 붙어있는 아쟁 주교 라이몽이 절 중상모략한다고 알려줬어요.
인내심 있고 자비롭고 친절하고 겸손한 사람이라는데 설마….
괜히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없을 것 같으니 이 정보는 덮어두는 걸로 했어요.
앙굴렘 여백작 시빌의 바로 밑 동생 마틸드가 부르봉 공작 아샹보와 결혼했네요.
백작 딸이 공작부인 되는 거야 이상할 것도 아니죠.
그런데 혼사를 맺은 김에 동맹까지 맺은 모양이에요. 누굴 치려고…?
"부르봉에 축사와 함께 선물을 보내라. 조만간 신랑신부를 볼 날이 있을 테니."
그 동안 아키텐의 장군들이 역병으로 죽거나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서 자리가 셋이나 비었네요.
우선 아르노와 마티아스에게 지휘관직을 제수합니다.
이모부와 아버지가 현재 무력 수준이 동급이네요.
아버지는 중병을 앓고 계시는데도….
마티아스는 모르겠지만 아르노는 활약할 날이 긴 창창한 청년이니까 지도를 받으면 더 훌륭히 성장하겠죠.
서유럽 최강의 남자는 아키텐에 있어요.
대관식을 올리고 두 달이나 지났는데도 사람들이 여전히 즐거워한다고 하네요.
마침 추수철이기도 하고 날이 좋으니까요.
"괜히 억제하려 들지 마라. 선량한 백성들이 그들의 왕을 사랑한다면 그것보다 좋은 건 없어."
계속 놀게 둘게요.
"새로운 거마 관리관을 임명하겠다. 아르노, 앞으로."
아르노에게 명예직을 하나 더해줍니다.
새해가 되자 좋은 소식이 궁성에 날아듭니다.
제가 민중들을 억제하지 않은 것이 경제적으로 좋은 성과를 가져왔다고 하네요.
잔치가 벌어지면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모이면 매매와 유통이 증가하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요.
국고에 75원이 새로 들어옵니다.
아버지는 스트레스에선 회복하셨지만 여전히 저와 같은 병을 앓고 계세요.
보르도에는 풍요가 왔지만 전 온전히 기뻐하지 못한 채 시간이 흐릅니다.
"폐하. 이대로면 곧 앙주와 부르고뉴가 하나로 합쳐집니다."
1139년 3월 10일. 앙주 공작 페이용 드 앙주와 부르고뉴 공작 아델 드 부르고뉴가 약혼했습니다.
(*글자가 깨져보입니다)
현재 우리 아키텐 왕국은 아키텐, 푸아티에, 가스코뉴, 툴루즈, 앙주, 부르봉, 부르고뉴, 플랑드르, 알바라신(백작령)으로 이루어져 있어요.
이 중 가스코뉴는 공작이 없고, 아키텐의 국왕이 아키텐 공작, 푸아티에 공작, 플랑드르 공작을 겸합니다.
그렇지만 국왕도 3개 공작령을 온전히 지배하는 건 아니에요.
아키텐에서는 보르도 하나, 푸아티에에서는 본관 푸아티에와 생통주, 투아르 셋을 갖고 플랑드르에선 겐트 뿐입니다.
그렇기에 삼촌 대에서 플랑드르 공작과 부르고뉴 공작, 투아르 백작만으로 국왕에게 최후통첩을 날리고 내전을 일으킬 수 있었던 거죠.
바꿔 말해 앙주와 부르고뉴를 갖는 대공이 출현한다면 자기 혼자만으로 왕에게 대적할 수 있고…….
할아버지도 사실상 6중공작 대공이셨기에 아키텐 왕국을 세우실 수 있던 거니까…….
물론 제가 건강해서 다른 군주들처럼 말을 달려 새 영지를 얻으면 앙주와 부르고뉴가 합쳐진다 한들 큰 위험이 안 될지도 몰라요.
하지만 전…….
그리고 후에 태어날 제 아이는…….
새신랑 부르봉 공작이 빨간 주먹을 휘두르고 있네요.
나이도 비슷한 게….
그러나 이 세상은 나이와는 상관없죠.
나이로 따지자면 저도 여섯살에 국왕이 되지 못했을 테니.
어쨌든 부르봉 공작 아샹보는 아키텐에서 손꼽히는 권력자입니다.
그리고 제 6촌여동생 브리아(*전 플랑드르 공작 위그의 외동딸)의 이부오빠이기도 하네요.
기 좀 밟아놔야겠습니다.
그래야지.
착하네요.
용서를 비는데 받아줘야죠.
증조할머니의 친정인 부르고뉴 가문은 이제 혈족이 넷 밖에 안 남았어요.
현 공작인 아델이 저와 비슷하네요. 포지션이….
아델이 사라지면 부르고뉴 가문이 갖고 있던 영지는 다른 가문으로 넘어갑니다.
지금의 아델보다 강력한 영주가 출현하게 되겠죠.
반면 앙주 가문은 열 명이나 남아서 페이용이 사라진다 해도 앙주 가문의 영지는 타 가문으로 흡수되지 않습니다.
결정을 해야 합니다.
궁정사제가 사망했으니 새로 바꾸려는데 궁의 야햐 야히드가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옵니다.
지쳐서 쓰러지고 싶지 않거든 일을 멈추라고….
"…야햐 아저씨. 전 시간이 없어요. 아저씨도 알고 계시잖아요."
조언은 감사하지만 무시할 수밖에 없습니다.
"앙주의 주인을 바꾸겠소. 시행하시오."
성년도 안 된 어린 소년이 크게 잘못하며 살진 않았을 것 같고, 앙주와 부르고뉴의 동군연합에 위기감을 느끼는 어른들이 많은 것 같네요.
아키텐 최고의 지략가인 아르투아 백작 아르신드를 앙주로 파견합니다.
(*음모력 13% 증가)
1139년 8월 1일. 전 섭정 풀크 드 앙주의 차남 앙주 공작 페이용 드 앙주는 사냥 도중 유시에 맞아 세상을 떠납니다.
앙주 공작의 자리는 죽은 소년의 숙부인 고티에르 드 앙주에게 넘어갑니다.
현 프랑스 국왕 로베르 3세입니다.
희한하게도 프랑스와 아키텐이 갈라선 이래 각자의 직계가 다 요절했습니다.
할머니 콩스탕스 왕비의 남동생은 국토와 두 눈을 잃고 술독에 빠져 여생을 보내다 상처 감염으로 39세에 세상을 떠났고…
제게 당숙이 되는 전 프랑스 국왕은 25세에 흉통으로 사망했네요. (*조슬랭과 파트리샤 남매의 외사촌)
저 소년왕이 제 6촌동생이 되는 거지요.
영역에 폐병이 번져서 그런지 문을 걸어잠그고 칩거 중입니다.
"로베르 3세도 나도 같은 증조부의 피를 받았다. 할아버지가 재상으로 일하시고 할머니가 자라신 땅이야. 내가 못 가질 이유가 없어."
제게 왕관을 씌워준 하드리아누스 5세 교황성하께 파리 공작령의 명분을 요청합니다.
"성하, 감사드립니다."
베드로의 후계자께서 아키텐 국왕에게 파리 공작령의 통치권이 있음을 인정하셨어요.
1139년 9월 7일, 새 앙주 공작이 봉신 서약을 올리기 위해 찾아왔어요.
조카가 죽고 한 달하고 일주일 만이네요.
"알현을 받아들인다. 들여보내라."
새 앙주 공작은 33세의 건장한 청년이었습니다.
그가 절 도와줄까요?
「아키텐의 국왕은 그저 가냘프고 심약한 여성에 불과했다. 국왕에게서는 통치자의 강인함은 찾아볼 수 없었으며 앙상한 팔은 검을 쥐는 것조차 버거워보였다. 이미 수도의 절반은 이방인과 무지렁이가 차지했으며…….」
앙주 공 고티에르는 제가 마뜩찮았나 봐요.
제가… 알아챌 정도로 짜식은 티를 내네요.
괜찮아요.
얕보고 있는 여자가 자기 조카를 죽인 흉수라는 건 생각 못할 테니.
폐병은 프랑스 전역에 침투했어요.
그리고 필리파 이모의 아들이 1년 전에 사망했네요.
"이모. 이제 그만 돌아오세요. 제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모가 가문을 지켜야 하잖아요."
……
자기 핏줄인 아이를 아비 없는 자식으로 만든 것도 모자라 어린 나이에 죽도록 방치해 둔 그 놈이 그렇게도 좋다고요?
저는 싫고요?
제가 이모한테 뭘 어쨌는데요?
전 이모 얼굴조차 모르는데!!
(*오라드 출생은 조슬랭 시기. 필리파와 모에시아 대공의 결혼은 기욤 시기)
제가 싫으시다니 그럼 결혼이라도 하세요. 푸아티에의 아이를…….
왜 내 애인을 결혼시키려 하냐고…?
책임도 안 지는 놈이…….
그러고도 네가 인간이야?!
(*필리파의 '통치자와 결혼하고 싶다'는 시아주버니와 정식결혼하고 싶다는 뜻인가…)
줄리아나 이모가 라이센다를 낳았는데도 어쩐지 계승서열에는 저 넷밖에 뜨지 않네요.
순서대로 필리파 이모, 줄리아나 이모, 작은할아버지 차남의 아들인 필리프, 그리고 반역자의 외동딸인 브리아….
잠시 접어두고 보병훈련소를 건설할게요.
파리 공작령의 명분도 얻어냈으니 프랑스와의 전쟁을 준비해야 하니까요.
제가 살아있는 동안에…….
마르탱 대장군이 사바리스라는 남자를 데려와 지휘관으로 추천했어요.
……어떤 수라장을 견디며 살아왔을까요? (*무력 20, 전투기술 43)
"사바리스. 그대를 기꺼이 환영한다."
보병훈련소 건축으로 국고가 급격히 줄었는데 아버지가 118.4원이나 가져오셨어요.
"아버지, 감사해요. 그렇지만 무리는 하지 마세요."
아키텐 최고의 지략가를 넘어 서유럽 최고의 지략가가 된 아르신드가…. (*음모력 27)
앙주 공작이 파벌에 가담하려 한다는 정보를 가지고 왔네요.
또 쟤야?
이번엔 부르봉 공작과 달리 설득을 할 수 있으니 좋은 말로 달래볼게요.
마음에도 없는 존경 따위….
그래도 한 번 안 한다고 했으니 지키겠죠.
전에 신랑 후보에 있었던 백작령 하나짜리 나바르 국왕이 대관식을 올리겠다고 절 초청했어요.
오랜만에 가는 해외여행이네요.
근처이기도 하니 기꺼이 다녀올게요.
"아버지. 부디 건강히 계세요. 빨리 다녀올게요."
제가 없는 동안 상왕이신 아버지가 섭정을 맡으십니다.
제가 없는 동안 우리 뛰어난 자문회 위원들이 아키텐을 잘 지켜줄 거예요.
저야 어차피 외교력으로는 에릭 재상을 못 이기고 무력으로도 마르탱 대장군을 못 이기고 관리력으로는 아버지를 못 이기고 음모력으로는 아르신드를 못 이기고 학력으로도….
다들 저보다 뛰어나네요.
그래도 모두들 절 좋아해주니 다행이에요.
연설은 나바라 국왕이 하는데 왜 제 명성이 오르는지 모르겠네요.
백작령 하나짜리 왕이 연설하는 훌륭한 왕의 미덕….
나보다도 어리면서….
사바리스가 공성지휘관 특기를 배웠다는 소식이에요.
정말 잘됐네요.
지금 사바리스가 약간 현기증을 느끼고 있는 것 같은데, 큰 병이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1140년 5월 1일, 해외여행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갑니다.
돈은 충분합니다.
대장군이 도로 정비와 전초기지를 제안하는데 당연히 들어줘야죠.
푸아티에의 백성들을 지켜주세요.
거기는 왕가의 본관이에요.
또 동군연합인가 했는데, 아르마냑 여백작의 어머니가 닥스 백작과 약혼을 맺었다는 소식이에요.
나이도 비슷한데 새아버지와 의붓딸이 되겠네요.
닥스라면 시복된 기랑드의 손자인데…….
극단적인 연상 취향인가?
이러는 와중에 앙굴렘 여공작 시빌이 젊은 나이에 암살당했어요.
시빌에게 아이가 없으니 자동적으로 부르봉 공작부인인 마틸드가 앙굴렘 여백작이 되었네요.
둘 사이 아이가 부르봉과 앙굴렘을 둘 다 이어받겠죠….
아직은 괜찮습니다.
대공만 아니면 되니까….
신께서 아키텐의 국왕을 보호하십니다.
절 짓누르던 피로감이 사라졌어요.
아르신드와 제 노력 덕에 아키텐 왕국의 파벌은 뤼지냥 백작의 '분할상속제 실시' 파벌 하나밖에 안 남았습니다.
왕실에 후사가 없는 판에 정신 나간 짓을….
무시하고 겨울연회를 준비합니다.
대장군 마르탱에게 멧돼지를 잡게 시킵니다.
연회를 준비하는 동안 책을 읽습니다.
독서를 하는 동안 신앙심이 올라갑니다.
이제 추기경이 된 라이몽이 제 연회에 오지 않겠다고 합니다.
제가 살려준 것도 모르고….
앙주 공작 고티에르도 참가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제가 정말 마음에 안 드나 보네요.
자기를 공작으로 만들어준 게 누군지도 모르고…….
언제든지 치워버릴 수 있지만, 고작 저 이유로 다시 살인을 하는 건 내키지 않아요.
연회는 성황리에 끝났습니다.
전 스무살이 되었고 (*한국 나이 22세)
아직 아키텐을 이어나갈 아이는 없습니다….
제발….
절 도와주세요…….
☆
세상이 하얀 옷을 입었다. 밤사이 고요히 내린 눈이 산야를 얕게 덮어 겨울 대지의 회갈색 색채를 지워버린 날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맑게 빛나던 하얀 세상에 어두운 푸른빛이 서서히 번져나갔다. 겨울은 낮의 길이가 짧은 만큼 박명도 순식간에 지나간다. 하얀 눈빛보다 시린 창백한 별빛은 하늘을 흐르는 눈구름 사이로 모습을 숨었다가 나타나기를 되풀이했다.
사락.
눈길에 소리 없이 작은 발자국이 패였다. 무척이나 가벼운 걸음이었지만 새하얀 땅은 그것만으로도 차갑게 언 검은빛 민낯을 드러냈다. 작은 궤적을 그리는 그 발자국 뒤에 또 다른 발자국이 여럿 생겼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그들은 지하 묘당으로 내려가는 문 앞에 섰다. 폐하. 문을 지키며 서 있던 수문병 둘이 가장 앞에 선 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수고가 많구나.”
국왕은 하얀 손을 들어 찬바람을 막던 후드를 머리에서 내렸다. 문 앞을 밝히던 화톳불의 주홍빛 불빛이 그들을 비췄다. 국왕은 성모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띤 채 붉은 입술을 열었다.
“시간이 되면 내 스스로 나오겠다. 누구도 따르지 마라.”
적손이 선조들의 묘당을 참배하는 건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그러나 지금 홀로 있겠다 말한 이는 이 나라의 군주였다. 왕명과 국왕을 경호해야 한다는 사명 사이에서 잠시 고민하던 이들은 이내 순순히 머리를 숙이고 국왕을 배웅했다. 선왕 파트리샤의 기일까지 일주일이 남았으니 딸이 조용히 어머니를 찾고 싶을 만도 했고, 불과 반시간 전에 모든 정돈을 마쳤으니 안에는 그녀를 위협할 쥐 한 마리 없을 것이다. 손바닥만큼 남아있던 심려는 조금 전 국왕의 해사한 얼굴에 떠오른 말간 미소에 깨끗이 쓸려 내려갔다. 그들은 국왕의 작은 그림자가 어둠에 하나로 흡수되자 마련된 휴게실로 자리를 옮겼다.
국왕은 불빛을 따라 걸었다. 안으로 들어갈수록 바깥에서 들을 수 없던 소리가 통로를 따라 크게 울렸다. 발소리, 숨소리. 국왕은 그 중에서 액체가 떨어지는 똑똑 소리를 찾아냈다. 불똥이 튀어 화재로 번질 것을 우려해 화톳불 대신 달아둔 기름등잔에서 나는 소리였다. 국왕의 걸음이 빨라졌다. 똑똑 소리는 국왕을 따라다녔다.
“……제가 왔어요.”
오라드는 늘어선 관 앞에서 깊이 숨을 쉬었다. 대답은 들리지 않고 자신의 목소리만 산산이 흩어져 사라졌다. 잠든 이의 생전 모습을 새긴 석상은 표정도 없이 그녀를 보고 있었다. 오라드는 가장 새로 들어온 두 석상 중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모습을 새긴 석상 가까이에 주저앉았다.
어머니.
왕이 진중에서 승하하고 아키텐 전역에 역병이 창궐하자 전 왕비는 친정으로 돌아갔다. 신왕이 된 시누이는 올케를 잡지도 탓하지도 않았다. 38일이라는 짧은 재위 기간 동안 내전을 종식시키고 후계자를 보호하려 궁성을 폐쇄한 여왕은 아우를 화장한 그 평원에서 재가 되었다. 관 속에 든 것은 호사스런 수의를 입은 유체가 아니라 작은 납골함과 생전에 입은 예복이었다. 누이는 죽어서도 아우를 홀로 외로이 남겨두지 않았다. 푸아티에 왕조 아키텐 왕국의 첫 번째 공주, 첫 여성 재무관, 첫 여왕. 그녀는 시시각각 옥죄어오는 죽음의 거대한 그림자 앞에서 딸을 지키려 자신의 생명을 던져버렸다.
왜.
왜 그러셨어요.
제가 아니라 당신이 사셨어야 했어요. 하고 싶으신 일이 많았잖아요. 하셔야 할 일도 많았잖아요. 왜 당신이 죽고 저를 살리셨어요. 왕이셨잖아요. 아키텐에서 가장 존귀한 분이셨잖아요. 대체 왜 그러셨어요.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이 우스운 꼴을 보세요. 당신이 지킨 보람도 없이 병마에 먹혀 죽어가는 딸을 보세요. 어리고 부족한 딸 대신 국정을 떠맡다 목숨을 사윈 당신의 남편을 보세요. 국왕 부부는 화목하지 못하고 첫 번째 왕위계승자는 모국을 등진 채 돌아오지 않는 왕실을 보세요. 충성을 바친 은인의 아들을 죄 없이 주살해버린 무자비한 여왕을 보세요. 저는 언제 여기 올까요. 내년이면 오게 될까요. 어쩌면 다음 달에 오게 될까요. 그 때도 생전처럼 따스하게 맞아주실까요. 아니, 아예 오지 말까요. 왕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무엇 하나 제대로 한 게 없으니 야산에 내다 버려 짐승 밥이나 하라 할까요.
“잘못했어요…….”
오라드는 우는 법을 잊은 사람처럼 퀭한 눈으로 한숨만 쉬었다. 깊은 숨소리에 섞여 똑똑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오라드는 그 소리에 얼굴도 본 적 없는 어린 소년이 바닥을 자신의 피로 적시는 환각을 떠올렸다. 앙주의 전 공작 페이용 드 앙주는 사냥 도중 누가 쏜 것인지 알 수 없는 유시에 가슴이 꿰뚫려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아키텐 제 2의 권력자까지 불과 한 계단을 앞뒀던 소년의 죽음으로 많은 사람이 용의선상에 떠올랐다가 이내 흐지부지되었다. 앙주와 부르고뉴의 동군 연합이 무산된 결과 국왕이 얻은 것은 나라에서 가장 강력한 정적이었다. 스스로 불러들였다. 감당할 수밖에 없는 원한의 무게를.
오라드는 후드를 머리에 덮고 그 자리에 스르르 무너졌다. 딱딱하게 다진 땅에서 차가운 냉기가 올라와 그녀의 가냘픈 몸을 식혔다. 오라드는 삼촌과 어머니의 관 사이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이상하게도 침대에 있을 때보다 더 편안했다. 긴 숨을 쉬자 마치 자신이 몸을 둔 채로 바닥에 스며드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대로 잠이 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묘당 안에 또 다른 발소리가 울렸다. 출입을 금한 터에 날 리가 없는 소리가. 누구일까. 왕명을 듣지 않는 자라는 건 분명했다. 혹시 자객일까. 어쩌면 망령일까. 희미하게 철걱거리는 금속 소리가 함께 들렸다. 오라드는 몸을 일으켜 확인하는 대신 그 자리에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었다. 발소리는 헤매지도 않고 점점 이쪽으로 다가왔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머리 위로 드리운 그늘이 느껴졌다. 오라드는 차가운 칼날이 목을 갈라주기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 기대하고 있었다.
“모시러 왔습니다. 폐하.”
폐하.
아르노는 다시 한 번 그의 주군을 부르며 무릎을 꿇었다. 일개 가신이 감히 선 채로 누운 왕을 내려다볼 수는 없었다. 그는 국왕이 언제나 그랬듯이 별처럼 영롱한 눈을 반짝이며 일어나기를 기다렸다. 일부러 인기척을 냈음에도 미동도 않는 것을 보면 둘 중 하나일 것이다. 정말로 깊이 잠들었거나, 자는 척을 하고 있거나.
“…아르노.”
국왕은 눈을 감은 채로 중얼거렸다.
“너는 왕명을 어겼어. 알아?”
누구도 따르지 마라. 문 앞에서 제지하던 수문병도 같은 말을 하며 막아섰다. 그들도 국왕이 너무 오랜 시간 나오지 않는 것을 불안해한 건 마찬가지였으면서.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다고 큰소리를 치고 나서야 겨우 들어올 수 있었다. 아마 그 밑바닥에는 국왕의 거마 관리관이자 정식으로 지휘관 반열에 편입된 젊은 가신에게 하극상의 죄를 물어 중벌을 내리진 않으리라는 낙관이 포함되었을 것이다.
“압니다.”
“…왜 내게 빌지 않아?”
국왕은 그제야 슬며시 눈을 깜빡였다. 정말로 자다가 일어났는지 초록빛 눈빛이 한층 더 그윽하고 몽롱했다. 병약한 국왕은 남들보다 부지런했으나 한편으로는 쉽게 지치고 피곤해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여기서 나오시면 벌을 받겠습니다.”
그녀는 이런 곳에 머물면 안 되는 사람이다. 가장 높고 밝은 자리에서 만인의 추앙을 받으며 있어야 할 사람이다. 저 하늘 위에 빛나는 별보다 더 고귀한 아키텐의 국왕이다.
우연히 재상을 마주치고 나서 이상하단 걸 눈치 챘다. 스코틀랜드 던바에서 상왕 길패트릭의 초청을 받아 온 재상 에릭은 난감해하며 국왕께서 어디 계신지 찾고 있었다. 연회 불참을 통보한 앙주 공작의 자리에 부르봉 공작과 툴루즈 공작 중 누구를 앉힐 것인지, 각 봉신들에게 보낼 하사품은 무엇으로 할지. 아무리 봉신간의 관계를 조율하는 임무를 맡은 재상이라 하나 독단으로 정할 수 없는 사안이었다. 그러나 잠시 산책을 나간 국왕은 한참 전에 돌아왔어야 할 시간에도 자리에 없었다. 다행히 그녀가 어디로 갔을지 추측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2년 반이 넘는 시간 동안 지근에서 모신 주군의 동선 하나 짐작하지 못해서야 서약을 바친 의미가 없다. 하지만.
“국왕폐하. 이만 돌아가셔야 합니다.”
이런 모습으로 있을 줄은 몰랐다. 캄캄한 어둠속에서도 달빛처럼 빛나는 그녀는 망자들 틈에서 생명이 빠져나간 것 마냥 눈을 감고 있었다. 피로와 고독에 짓눌린 갸름한 얼굴이 안쓰러웠다. 손을 대면 마치 금빛 모래로 변해 무너져 내릴 것처럼 어쩔 수 없는 공허함이 그녀를 안개인양 감쌌다.
“……앉아.”
오라드는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옆을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이미 다진 흙이라 그런지 먼지는 일지 않았다. 아르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넌 키가 커서 올려다보며 말하면 목이 아프단 말이야. 나도 앉을게. 그러니까 앉아.”
오라드는 어린 아이를 달래듯 채근하며 피식 웃었다. 습관처럼 웃는 그 미소가 오히려 더 허허롭기만 했다. 아르노는 오라드가 시키는대로 했다. 그러자 오라드는 그와 같은 방향을 보며 옆에 앉았다. 올려다보며 말하면 목이 아프단 건 순전히 핑계였던 걸까.
“혹시 날 찾아다녔어?”
그녀는 천진하게도 물었다.
“그렇습니다.”
“왜? 네가 필요해서 날 찾진 않았을 테고. 누가 나를 찾았어? 또 누가 연회에 못 온대? 파벌을 만들었대? 결혼이라도 해? 아님 급살을 맞고 죽어버렸나?”
묘당 안에 낭랑한 웃음소리가 까르르 울려 퍼졌다. 함께 웃어줄 사람은 없었다. 폐하. 아르노는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오라드를 불렀다. 한참을 웃던 오라드는 아르노의 부름에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옆으로 뻗었다.
“내가 죽인 내 어머니야.”
“폐하!”
“그리고 네 옆에는 반역자가 죽인 내 삼촌.”
오라드는 흙바닥이 정돈된 융단이라도 되는 양 다시 벌러덩 누워 두 팔을 벌렸다. 앉아있는 게 버거워서 그런지 일부러 골려주려고 그런지 아르노는 알 수 없었다. 그는 몸을 틀어 오라드를 바라보았다. 철부지처럼 뒹굴고 있으면서 그녀는 어느 때보다 위태로워 보였다.
“……무엇이 폐하를 이렇게 괴롭혔습니까?”
강한 사람이었다. 오랜 병마에 시달리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부지런했다. 고귀한 태생에 걸맞게 기품 있고 아름다웠다. 섬세하고 온화하기도 해서 곱다는 말이 잘 어울렸다. 그녀는 뭇별처럼 수많은 사람 가운데 환한 달처럼 정상에 있었다. 그런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무너졌는지 알 길이 없었다.
“왜. 알면 죽여버리게?”
오라드의 얼굴에서 해사한 웃음이 사라졌다. 그녀의 눈은 바닥없는 늪을 보는 것처럼 공허하고 헝클어져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았지만 그녀는 울지 않았다. 우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처럼 멍하니 앞을 보기만 했다. 아르노는 그 시선 끝을 따라갔다. 아무것도 없었다.
“돌아가. 여긴 우리 집이야.”
오라드는 메마르고 기운 없는 목소리로 말을 홱 던지고 몸을 돌렸다. 아르노는 돌아보지 않는 오라드에게 무릎을 꿇고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닙니다. 폐하, 폐하께서 돌아오시기를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거기가 폐하의 집입니다.”
“그럼 날 죽여. 내가 여기 있을 수 있게.”
“국왕폐하!”
“네가 자객이기를 조금은 기대했는데.”
자객이라니. 대체 누가 아키텐의 국왕을 해치려 한단 말인가? 그리고 고작 스물밖에 안 된 국왕은 왜 죽음을 바라는 건가? 아르노는 혼란스러운 머리로 그간 국왕을 둘러싸고 있던 일들을 재빨리 떠올렸다. 현 앙주 공작 고티에르 드 앙주가 초청을 거절하거나 파당을 짓는 등 국왕께 불경을 저지르고 있다는 사실은 왕성 내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다. 얼마 전 붉은 옷을 입은 아쟁의 라이몽 추기경도 그렇다. 비협조적인 인사를 찾자면 부르봉 공작이나 뤼지냥 백작도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의사를 표명할 능력이 없어 섭정을 세운 어린 봉신들을 제외하면….
빌어먹을.
“…모시겠습니다.”
그녀는 왕이다. 이런 적막한 죽음의 공간에서 안식을 찾을 사람이 아니다. 체념과 탄식으로 멍이 든 가슴을 쓰라려하며 울지도 못해 웅크리는 건 어울리지 않는다. 만인에게 경애를 받으며 도도하게 군림하는 군주여야 한다. 아르노는 돌아누운 오라드의 등과 무릎 뒤에 손을 넣었다. 왕의 몸에 허락 없이 손을 댈 수 없다는 금기는 머리 한 쪽으로 밀어두었다. 그는 그녀를 안아들었다. 작은 그녀에게선 짐작했던 만큼의 무게가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의 공허한 얼굴에 조금씩 색채가 돌아왔다.
“……놔.”
이파리에 물이 오르듯 초록빛 눈동자가 다시 생기를 담았다. 서서히 번지는 그 감정이 분노라 해도 좋았고 당황이라 해도 좋았다. 그는 걸음을 떼었다.
“손을 치워라, 이 무례한 놈! 놔! 소리를 지를 거야, 사람을 부를 거야! 난 너도 죽일 수 있어!”
그녀가 새된 소리를 지르며 저항했다. 하얗게 질린 뺨에 핏기가 돌아와 발갛게 물을 들였다. 그는 멈춰 서서 그녀를 고쳐 안았다. 놓을 수는 없었다.
“여길 나가면 스스로 교수대에 오르겠습니다. 도끼날에 목을 들이밀라 하셔도 화살비를 맞으라 하셔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폐하, 폐하께서는 지금 여기 계시면 안 됩니다. 기꺼운 일을 고하실 때 다시 오십시오. 지금은 아닙니다. 제발.”
순간 그녀의 움직임이 멎었다. 시선을 피했지만 무언가에 겁을 먹은 눈이라는 걸 그는 알 수 있었다. 그는 얌전해진 그녀를 안은 채 지상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허리춤에 찬 검이 철걱거렸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마음을 놓은 것처럼 보였다.
지상은 컴컴했다. 품속의 그녀는 먼 하늘을 보고 있었다. 달이 지나간 길을 살피는 걸까. 그러나 국왕이 두고 온 사람들이 시간을 짐작하기도 전에 걱정스러운 얼굴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폐하. 장군. 어둠 속이었지만 그들의 안색이 삽시간에 어두워진 걸 알 수 있었다. 가십시다. 아르노는 나직하게 말하고 다시 걸었다. 어느새 별빛에 섞여 눈이 내렸다.
궁내관이 다가와 국왕의 손이 시리지 않도록 후드를 다시 여몄다. 아르노는 화려하게 빛나는 겨울의 별자리와 배가 부른 반달, 그리고 한 마디 말도 없는 그녀를 보며 계속 걸었다. 태양이 남긴 열기가 사라진 밤은 시리고 차디찼다. 그러나 어쩐지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 길이 끝없이 이어질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얼굴을 식히던 차가운 눈가루가 어느새 사라졌다. 네가 할 일은 여기까지라는 듯 두터운 돌벽이 앞에 떡하니 나타났다. 아르노는 계단을 오르려 몸을 틀었다. 그 때였다.
“오라드!”
앳된 얼굴을 한 진갈색머리 청년이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아르노는 그녀를 안은 채 고개를 숙였다. 폐하. 아키텐 국왕의 부군 제랄드 드 오트빌. 그것이 청년의 이름이었다.
“아르노 경. 이게 무슨 일인가?”
제랄드는 제법 놀란 것처럼 보였다. 그럴 만도 했다. 궁에서 국왕이 모습을 감추고 네 시간 가까이 지났으니. 그는 정말 걱정이 되어 나왔는지 흙먼지를 뒤집어쓰고 나타난 국왕을 이리저리 살폈다.
“묘당에 들어갔다가 실수로 굴렀어요. 발을 조금 접질린 거 같아요. 아르노, 날 방으로 데려다 줘.”
오라드는 대수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 무심한 말투로 설명하고 지시했다. 피곤이 묻어나오는 것까지 연기인 걸까. 아르노는 국왕의 명에 복종했다. 그 옆에서 제랄드가 함께 걸었으나 그는 오라드에게 아무 것도 묻지 못했다. 그녀는 바람이 불면 훅 꺼져버릴 촛불처럼 잘못 건들면 그대로 사라질 것 같았다.
주인이 없는 방이었지만 이미 난로에 군불이 지펴있었다. 아르노는 국왕을 침대에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품에서 사라진 체온이 아쉬웠지만 이 이상은 그가 있을 자리가 아니었다. 국왕의 옆에 설 사람은 따로 있었다. 그는 시녀장이 갈아입을 옷을 받쳐 들고 오자 국왕 부부에게 인사를 고하고 물러섰다.
“아르노.”
그녀가 불렀다. 돌아보니 그녀는 다시 성모처럼 자애롭게 웃고 있었다.
“…내일 봐.”
내가 널 살려준 거야. 소리가 없는 짓궂은 언어가 눈빛 속에 녹아들었다.
☆
+)쓰는 사람이 이런 말 하기도 뭐하지만, 이 집 식구들 참…… 성격 안 닮았네요. 인내심 많고 냉철한 전문가형 엄마에 다재다능한 무골호인 아빠 사이에서 책략가 타입에 속은 여린 외강내유형 딸…….
+) 근 한달만에 돌아와서 다 잊으셨겠거니 싶었는데 기다려주셨다고 해서, 좀 더 힘내봤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10편이네요. 장하다,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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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첫 글은 애초부터 쓰려고 생각했는데, '어… 좀 짧은가?' 싶다가…… 갑자기 쓰고 싶어져서 마지막 글을 덧붙였……… 그냥 절 견뎌주세요. (당당)
이 집안은 그냥 계승법을 모계 우선으로 하죠...;;
필리파에게 왕위 주기 싫었습니다…… 오라드의 아이여야 했어요…… 아니면 파트리샤와 길패트릭이 고생한 게………
오늘도 잘 보고갑니다!
언젠가 오라드가 자신의 속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길까요? 아르노앞에서도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전부 보여주지는 못하는것 같아요! 그리고 오라드가 무엇에 겁을 먹은 걸까요? 아르노마저 자신의 탓으로 인해 자신의 곁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두려움? 솔직히 선대왕 부부들이 고생해서 나라를 다시 부흥시킨 이야기도 충분히 재미있었습니다만은 지금은 오라드와 아르노 이 두 사람의 이야기의 마지막이 어떻게 될 지가 더 궁금합니다.
작가님 알려주세요!
정성스러운 댓글 감사합니다. (감동)
등록을 한 이후에는 읽는 사람 몫이지만 부연을 하자면, 선대 앙주 공작의 호의를 기억하면서 그 아들을 해친 것과 그 결과 가장 강력한 정적이 생겼다는 것으로 이중 죄책감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너도 죽일거야!" 라고 맘에도 없는 소릴 했는데 "ㅇㅇ 죽어드리겠음" 하면 누구라도 가슴이 내려앉지 않을까 합니다. (아르노는 달리 받아들였지만) 정말 아르노가 자살할까봐 일부러 내일 멀쩡한 모습으로 다시 보자 하기도 하고… 일반인도 대외적 마스크는 있는 법인데, 오라드는 왕으로 자랐잖아요. :D
지금도 사실 가장 가까운 사람이라면 아버지겠지만 착한 딸이라 그럴수록 더 아빠에겐 말할 수 없고, 아빠의 후처일 뿐인 새엄마는 국정을 논할 상대가 아니고, 이모한테도 하소연 못하고(사실 마지막 시점에서 줄리아나는 임신 중이었습니다), 유일하게 모든 진상을 파악할 아르신드는 아무리 아빠 친구라 해도 군신간이기 때문에 약한 모습을 보일 수 없고…. 기욤은 인생이 상당히 잘 풀린 편이었고 조슬랭에게는 의지할 총명한 누나가 있었지만 오라드는 많이 힘들었을 거라 생각합니다. 이렇게 살 수 밖에 없을 정도로요.
감상 감사합니다 :D
오홋! 몇달만에 카페오니 간만에 보는 크킹 연대기네요! 그것도 꽤나 고퀄로 재밌네요ㅋㅋ
앞으로 애독하겠습니당
선동과 날조로 승부하는 이야기입니다 ㅇ_<)b
플레이타임 천 시간 쯤 되는 크린이가 '와 이거 진짜 드라마틱하다 연대기 각이다' 하고 질러버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짓눌린 환장스토리…… (시선 회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좀 더 길어도 저는 좋습니다. 이 정도 글 길이로는 저에게 고통을 줄 수 없습니다.
하지만 다음 카페는 50장 제한이지요, 음하하하.
조각글 욕심을 버린다면 후다닥 올라오겠지만 조각글을 쓰고 싶어서 시작한 연대기이니 텀이 깁니다. 감사합니다 :D
20살 어린 여군주가 흑흑... 맘고생이 심하네요..
진실로 속내를 터놓을 사람이 없으니 ..
사실 이럴 때 가장 좋은 건 형제나 친구인데 동생과 사촌은 너무 어리고 페스트 때문에 같이 자란 또래 친구도 없고…… 이 때 제랄드 원망 좀 많이 했습니다… 오라드가 저렇게 예쁜데 진짜 관심 없는 거니 ㅇ<-<
글에서 바닷 비린내가 느껴지는군요.
? 무슨 뜻이신가요?
디아나님 연대기 너무너무 더 보고 싶어서 미치겠어요 제발 더 써주세요
(((대역죄인))) 감사합니다…… (__) 저도 빨리 쓰고 싶습니다 힝…
컴퓨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거실 컴으로 올려보겠습니다. 극악의 연재 속도를 보이고 있는 연대기를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