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 나이 / 이정자
그 날은 서울에서 32년만에 폭설이 내린 날이었다. 적설량 32cm.
하늘은 빌딩 꼭대기까지 내려앉았고 온통 눈에 뒤덮힌 세상은 정적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큰길가 버스 정류장에 서있는 사람들은 장승처럼 세워 놓은 듯 발이 없고 기다리는 버스는 감감하다. 퍼붓기를 작정이나 한 듯 쏟아지는 눈 속에 묵묵히 서서, 모처럼 속세를 벗어난 듯한 환상 속을 헤매고 있는데 옆에 서있던 여인이 슬쩍 말을 걸어 왔다.
“저 눈이 돈이라면 좋겠지요.” “웬 돈?” 쪼들려 뵈지는 않는데 하구 많은 것 중에 하필 돈에 비유를 해 사람 기분을 깨뜨릴까.
갑자기 맞장구칠 말이 궁해 있는 나에게 그는 “아유 곱게 늙으셨네요” 한마디 던진다. 나는 내 귀를 의심하며 그를 찬찬히 보았다. 사십 후반쯤으로 보이는 수더분한 외모였다. 말을 할 줄 모르는 건가. 어느새 그 인사를 받을 대열에 내가 서 있다니. 가슴 속에선 눰지 모를 것이 스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곱게하고요?” “늙은 얼굴에 곱게라는 말이 웃기네요.” 듣거나 말거나 중얼거리듯 입 밖으로 새어나온 말이다. 아직은 오 학년이라고 늙어 가는 것에 애써 초연하고 싶은 나였지만 망치로 얻어맞은 느낌이다. 내 말에 주름 운운하며 여러 발을 했지만 무슨 내용인지 기억에 없다. 나이를 묻는 소리가 재차 내 뒤통수를 강타했기 때문이다. 평소 유난스레 치장을 했거나 나이에 걸맞지 않은 차림을 한 여자를 만난다. 젊게 꾸민 외양을 보며 나이는 얼마쯤 되었을까 궁금하다. 그러나 대게는 어림짐작을 해보며 지나친다.
늙고 젊고를 떠나 나이 밝히기를 벗어 보이는 것쯤으로 여기며 내켜하지 않는다. 그만큼 여자의 나이는 비밀스럽게 간직되는 것 중에 하나이기 때문이다.
나이를 의식 않던 어린 시절은 외모가 아닌 오직 친구들과의 놀이가 첫째 관심사였다. 머리 속에 나이를 꼽을 수 있었던 초등학교 때엔 무조건 예쁜 옷과 머리 모양 그것도 머리핀 나부랭이에 마음을 많이 썼다. 사춘기를 맞으면서 얼굴에 신경을 쓰게 되었고 마침내 나의 진정한 여자의 나이는 시작된 것 같다. 한창 나이에 보내던 학창시절은 피어나는 젊음의 가치를 의식하지 못하고 보냈다. ‘젊음이 아름답다’고 숱하게 듣던 말의 뜻을 빛나는 젊음이 간 다음에야 헤아리게 되었다.
발랄하던 패기와 포부를 접어 사진첩 속에 꼭꼭 묻어두고 적령기라서 선택하는 길, 결혼은 여자 나이를 한동안 잊게 한다.
세상에서 단 하나 자신만의 울타리 안에 가정을 일구며 여자의 길을 간다. 아이를 낳고 기르며 엄마가 되고 철철이 닥치는 집안 일이며 가족 돌보기에 치중하며 주부가 되어 살림살이에 파묻힌다. 알뜰살뜰 통장의 액수를 불려가며 살림 느는 재미까지 합세를 해 가는 세월을 낚는다. 어디에 내 놓아도 반듯한 자식이길 바라며 보내는 세월. 아이가 유치원이면 유치원생으로 초등학교일 땐 초등학생이 되고, 고3 입시생일 땐 입시생이 되어 그 안에서 성취감과 행복을 함께 느끼며 몸이 아플 사이도 없이 바쁘다. 여자일생을 통틀어 나이에 둔감할 수 있는 절정의 시기다.
그러나 어느날인가부터 사물이 하나하나 의미를 갖고 눈에 즐어오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여자는 이제껏 잊고 지내던 자신의 나이를 새삼스레 돌아보는 시기에 접어든다. 가는 계절이 아쉽고 오는 절기에 민감해진다. 부는 바람에도 의미를 두고 뜻모를 느낌이 휑하니 가슴으로 파고들기 시작하면 이미 보낸 세월을 안타까워하며 다가오는 날들에 두려움을 갖기 시작한다.
나이를 더해간다는 것은 잃는 것의 시작이다. 활기와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둥지가 비워지면서 보람도 재미도 할 일도 줄어간다. 건강하던 마음도 몸도 차츰 사위어 간다. 눈길만 받아도 분홍빛으로 타오르던 가슴은 긴 세월 동안 소진되어 불이 당겨지지 않는 가스 라이터 모양으로 남는다. 거울 속에 나이 들어가는 낮설은 얼굴을 들여다보느라 긴 시간을 소비하는 시기도 이때쯤이다. 나이를 대변하는 부분은 많겠으나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얼굴이 아닐까.
나이뿐 아니라 인품까지도 고스란히 내보이고 있는 곳이다. 그러기에 너나 없이 유난히 공을 들여 손질을 하는지 모르겠다. 심지어는 성형수술가지도-.
한창 월남전이 치열할 때 이야기다. 폭격이 잠시 멎은 야밤. 그 틈에도 달빛아래서 야자수 열매로 피부 마사지를 하고 있는 여자를 보고 놀란 한국장병들. 그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고 했다. 프랑스의 정치가이며 문인이었던 로슈푸코가 ‘여자들에게 지옥이란 늙는 것이다’라고 했음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생사를 넘나드는 전쟁통에도 영원히 나이(늙고)들고 싶지 않은 아름답고 싶은 욕망이 그들을 막부가내로 만들었으리라.
하지만 세월이 새기는 연륜을 어찌 막을 수 있을 것인가. 어느 연령이라도 나름의 나이를 얼굴에 담고 있어 어렵잖게 읽어낼 수 있는데, 며칠 전 친척의 결혼식장에서 만난 한 할머니의 모습은 인상적이었다. 노안에 살짝 두드린 엷은 분칠, 바른 듯 만 듯한 립스틱은 훨씬 생기 있어 보여 만나는 이들을 즐겁게 했다. 노소를 막론하고 얼굴을 가꾸려는 마음에는 변화가 없으니 이것이 모름지기 여자의 나이인가 보다.
첫댓글 아~~
청춘이여
소리도없이
흔적도없이
어디로 흘러갔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