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특강
미중 패권 경쟁 고조될수록 국익 중심 실용외교 펼쳐야 합니다
서울대총동창신문 제542호(2023.05.15)
김현철 (경영81-85)
모교 국제대학원장
미국 최근 5년 간 대중 교역 늘고
독일·프랑스도 중국에 손 내밀어
탈중국 말고 신시장 개척 나서야
참석 동문들에게 강연자 책 선물
“미국 중심의 일극(unipolar) 체제일 땐 미국이 깃발 들면 많은 나라가 따라왔습니다. 그런데 우크라이나 전쟁엔 의외로 동참하는 나라가 많지 않아요. 동참하는 나라들의 움직임도 옛날과는 다르고요. 4월 초 중국을 방문한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유럽도 전략적 자율성을 가질 때다, 우리는 미국의 속국도 졸개도 아니다’라고 말했습니다. 독일의 숄츠 총리는 시진핑 주석의 3연임 직후 중국에 가 협력을 강조했고요. 미중 패권 경쟁이 5년쯤 지나자 그 실체를 파악하고 전략을 수정한 것으로 풀이됩니다. 진영에 치우치기보단 실리를 우선하는 쪽으로요.”
김현철 모교 국제대학원장이 4월 26일 ‘대한민국 경제의 미래’를 주제로 본회 수요특강 연단에 섰다. 김 원장은 미국 대 소련, 미국 대 일본, 미국 대 중국 등 글로벌 패권 경쟁이 우리나라와 주변 여러 나라에 끼친 막대한 영향을 분석하면서 한국 경제가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말했다. 단일 국가로서 국내 경제 운영을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다른 나라 특히 현재 진행 중인 미중 간 패권 경쟁의 실체를 파악하고 신중히 대처할 것을 주문했다.
“자유무역과 민주주의를 내세워 동맹국들의 탈중국화를 독려하는 미국조차 최근 5년간 중국과의 교역 규모는 외려 늘었습니다. 양국 정부 간 패권 경쟁이 무색하게, 기업 간 협력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보다 공고해지고 있고요. 미국 자동차 제조사 ‘포드’가 자국 정부의 집요한 견제에도 불구하고 중국 전기차 배터리 제조사 ‘CATL’과 합작해 미국 공장 건립을 추진하는 게 단적인 예죠.
소련과의 냉전 땐, 베를린 장벽이 상징하듯, 양 진영 간 교류·교역이 철저히 가로막혔지만, 지금은 막을 수 없어요. 탈동조화는 사실상 불가능합니다.”
김 원장은 냉전 종식 후 30년 동안 경제적 필요에 따라 전 세계가 얽히고설켜, 진영의 논리로 편을 가를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가치나 이데올로기보다 실리와 국익을 우선하는 다극(multipolar)체제 시대가 됐다는 것.
미국과 유럽이 침략 전쟁을 벌인 러시아에 혹독한 경제 제재를 가하는 와중에도 인도는 이를 기회로 더 저렴하게 러시아산 석유를 수입했고, 사우디아라비아는 러시아와 손잡고 원유 감산을 추진한다. 브라질은 중국과 무역을 강화해 ‘달러 패권’에 반기를 들기도 했다.
“미국의 전통적 우방국들이 독자적 행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미국 편에 서서 중국을 등지기엔 경제적 손실이 너무 크거든요. 일본마저 하야시 외상을 중국에 급파했죠. 센카쿠열도 영유권 분쟁부터 중국 내 체포된 일본인 문제까지 양측의 입장은 첨예하게 갈렸지만, 굳은 표정을 짓더라도 중국과 악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바뀌어 가고 있습니다.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 기민하게 실용외교를 펼쳐야 해요. 대만 보십시오. 신냉전의 최전선에 있는 나라가 역으로 더 힘차게 중국 시장을 공략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제치고 중국 시장 점유율 1위를 차지했어요. 작은 나라도 할 수 있습니다. 해야만 하고요.”
흰수염고래부터 페루부리고래까지 크기 별로 고래의 종류를 스크린에 띄운 김 원장은 한국은 더 이상 새우에 비유되는 작은 나라가 아니라고 역설했다. 세계 10위 경제 규모, 7위 통상 국가, 수출만 따지면 5위로 올라선다. 고래로 치면 범고래 수준. 엄연히 큰 고래다. 김 원장은 여러 마리가 협동해 더 강한 개체도 사냥하는, 범고래의 특징을 적시하면서 한국의 역할을 강조했다. 비패권 국가들과 협력해 미국 및 중국에 쓴소리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
“게오르기에바 IMF 총재는 미중 갈등으로 인해 세계 경제가 분열 위기에 처했다고 꼬집었습니다. 선진국 부유층은 타격이 없겠지만 중위권 및 저개발 국가에 끼친 악영향 때문에 세계 경제 성장률이 매년 1850조원 감소할 것이라 지적했고요. 작년에 바이든 대통령이 한국 왔을 때 현대차를 위시한 우리 기업들이 50조원 투자를 약속했고, 덕분에 중간선거 잘 치르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IRA로 뒤통수를 쳤죠. 자유무역의 가치를 내세워 동맹국의 전열을 다독이면서도 자기 이익을 위해 보호무역을 꾀하는 꼴이에요. 이런 판국에 미국에 ‘몰빵’ 해서 우리 국익이 지켜질까
요?”
김 원장은 우리나라의 굴곡진 역사를 글로벌 패권 경쟁과 그 대응의 결과로 해석하기도 했다. 19세기 후반 청과 영국의 패권 경쟁은 조선을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시켰고, 해방 후 미국과 소련의 패권 경쟁은 6·25전쟁을 촉발, 남과 북을 갈라놨다. 1980년대 미국과 일본의 패권 경쟁은 ‘경제전쟁’으로 변모해, 일본의 산업과 경제에 대못을 박아 ‘잃어버린 30년’에 빠져드는 한 요인이 됐다. 일본의 침체는 한국엔 기회였다. 가난한 나라에서 개발도상국으로 일어섰다.
“1990년대까지 한국의 발전 전략은 일본을 그대로 따라갔습니다. 미일 패권 경쟁에서 일본이 밀리자 독자적 성장 전략을 펼쳤죠. 미국이 일본의 반도체 산업을 주저앉히고 자국 내 일본 차 수입 규모를 제한하면서 생긴 빈틈을 공략한 겁니다. 삼성과 현대가 기회를 잘 잡았죠. 미중 패권 경쟁 속에서도 방향을 잘 잡아야 해요. 패권 경쟁이 고조될수록 특정 국가에 의존해선 안 됩니다. 분산 경제외교를 해야죠. 유럽·남미·중동도 있지만, 저는 아세안이 가장 유망하다고 봐요. 앞으로 세계 중산층의 절반가량이 탄생할 시장입니다. 물론 미국·중국·일본 등 기존 주력 시장도 배제해선 안 되고요.”
본회는 이날 참석한 동문 전원에게 김 원장의 책 ‘저성장시대 기적의 생존 전략,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를 증정했다. 나경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