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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나들길 제 14코스(강화도령 첫사랑길)
[강화 나들길 제 14코스(강화도령 첫사랑길)
오색 깃발 휘날리며 자신을 모시러 온 영의정을 보고 땅에 엎드려 사또님 살려달라고 울먹인 천애 고아 강화도령 원범이 강화도 처녀 봉이와 뛰어놀며 사랑을 나눈 사연이 굽이굽이 묻어나는 길이다. 짧은 학문과 얕은 경륜에 대한 자격지심, 세도 정치가들 때문에 왕 노릇도 제대로 못한 비운의 왕, 짧은 재위기간 내내 강화도의 산천과 정인(情人) 봉이 생각으로 가슴앓이 하다 33세라는 젊은 나이로 병사한 원범이 봉이와 나란히 거닐며 소곤소곤 정담을 나누는 소리가 들리는 듯해 발걸음이 조심스럽다. 구중궁궐에 머문들 마음이 지옥인데, 농사 짓고 나무나 하면서 무지렁이 총각 원범으로 살았다면 그렇게 단명하지 않았을 것이란 생각을 내내 떨쳐 버릴 수 없는 애틋한 사랑의 길이다.
강화 도령 원범이 5년간 살았던 용흥궁을 보고 강화도 처녀 봉이와 처음 만나 사랑을 나눈 청하동 약수터를 지나 강화산성 남쪽 정상부에 있는 남장대를 거쳐 솔숲 우거진 노적봉 입구까지 고즈넉한 숲길이 이어지는 사랑의 길이다.
남장대에 오르면 사방으로 시야가 열려 쉽게 내려가고 싶지 않은 정경이 발 아래로 펼쳐진다. 눈이나 비가 오면 남장대 오르는 길이 다소 미끄러울 수 있어 스틱 등 장비를 갖추어야 한다.]
탐방코스 : [강화여객자동차터미널~(1.4km)~용흥궁~(2.2km)~청하동 약수터~(0.7km)~강화산성 남장대~(4.0km)~찬우물 약수터~(2.4km)~강화 선원사지~(2.4km)~철종 외가~(547m)~수부촌 버스 정류장] (13.7km)
강화 나들길 제 14코스(강화도령 첫사랑길)의 명소
용흥궁(龍興宮)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관청리에 있는 조선 후기 철종(1831∼1863)이 왕위에 오르기 전 19세까지 살았던 집.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동문안길21번길 16-1 (강화읍, 용흥궁)
크기 : 1동 1,554㎡
조선시대 왕의 장자인 왕세자와 같이 정상적인 법통이 아닌 다른 방법이나 사정으로 인해 임금으로 추대된 사람이, 왕위에 오르기 전에 살던 집을 잠저(潛邸)라고 하였는데 이는 주역에서 유래된 말이다. 용흥궁(龍興宮)은 강화도령으로 불렸던 조선의 25대 왕 철종(哲宗)이 강화도에 은거하며 살았던 집을 후일 그가 왕위에 오르고 난 이후에 보수하여 단장하고 그 이름을 궁이라고 고쳐 부른 이름이다.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잠저로는 태조의 함흥 본궁과 개성 경덕궁, 인조의 저경궁과 어의궁, 영조의 창의궁 등이 있다. 대개 잠저는 왕위에 오른 뒤에 다시 짓는다. 용흥궁도 원래는 보잘 것 없는 초가였으나, 1853년 철종이 보위에 오른지 4년 만에 강화 유수 정기세(鄭基世)가 지금과 같은 집을 짓고 용흥궁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뒤 1903년(광무 7)에 청안군(淸安君) 이재순(李載純)이 중건하였다.
좁은 고샅 안에 대문을 세우고 행랑채를 둔 이 궁의 건물은 창덕궁의 연경당(演慶堂), 낙선재(樂善齋)와 같이 살림집의 유형에 따라 만들어졌다. 세월이 흘러 비바람에 헐어진 것을 1974년에 보수하였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잠저구기비각 1동, 내전 l동, 외전 1동, 별전 1동 등이며, 팔작지붕에 홑처마 주심포집이다. 내전은 앞면 7칸, 측면 5칸이며 건평은 90㎡이다. 별전은 앞면 6칸, 측면 2칸인 ‘ㄱ’자형 집으로 건평이 95㎡이다. 비각은 정사각형으로 앞면과 측면이 각각 2.5m로 넓이가 약 6㎡이다.
내전의 오른쪽과 별전의 왼쪽에 각각 우물이 1개씩 있으나 사용할 수 없다. 별전에는 마루 앞으로 작은 정원이 있고, 별전 오른쪽에는 조금 더 큰 규모의 정원이 있었으나 잘 가꾸지 않아 화초가 전혀 없다. 별전 주변에는 큰 나무들이 있었으나, 거의 베어져 밑둥만 남아 있다.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용흥궁의 위치는 강화경찰서 왼쪽 담 옆길을 따라 70m 정도 서쪽으로 들어가면 오른쪽으로 보이는 기와집이다.
철종(哲宗)
왕은 무력하고 백성은 도탄에 빠지다
출생 1831년(순조 31)
사망 1863년(철종 14) 12월 8일
본명 이변(李昪), 이원범(李元範)
본관 전주(全州)
가족사
철종은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3남으로 1831년(순조 31년), 조선 한성부 경행방(慶幸坊) 향교동(鄕校洞) 사저에서 출생했다. 숙종의 서자인 영조의 서자인 사도세자의 서자인 은언군의 서자인 전계군의 서자이다. 즉 고조부인 영조까지 직계 조상 4대가 모두 서자 출신이다. 게다가 선왕 헌종보다 항렬이 한 단계 높아서 원래는 종법상 왕위에 오를 수도 없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적자는 커녕 남자 왕족 자체가 거의 씨가 말라 없던 때라 서자고 항렬이고 따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조선 초기라면 왕위는 고사하고 평생 대궐 구경이나 한 번 할까 말까 했을 그에게 왕위가 돌아가게 된다. 그리고 이 철종마저 또 아들을 보지 못하면서 결국 다음 왕위는 철종과 혈통상 무려 17촌이나 되는 고종이 잇게 된다.
철종 이원범은 사도세자의 몇 안 남은 직계 후손이었다. 사도세자는 적자인 정조 말고도 서자가 몇 명 있었다. 그중 한 명이 은언군으로 이원범의 할아버지다. 은언군은 여러 명의 자녀들이 있었는데 그중 서6남이 이원범의 아버지 전계대원군 이광이다.
정조 재위기인 1786년(정조 10년), 이원범의 할아버지 은언군은 권신 홍국영과 역모를 꾸몄다는 혐의를 받아 철종의 친부인 이광을 비롯해 식구들이 강화 교동도로 유배를 갔다. 거기서 은언군은 순조 때 신유박해 등을 이유로 사사당하지만, 이광은 살아남아 교동도에서 무려 40년 넘게 살다가 순조 30년인 1830년에 귀양에서 풀려나 한성부로 돌아온다. 그리고 1831년(순조 31년) 전계대원군의 3남 이원범이 태어난다. 철종은 사도세자의 후궁의 아들인 은언군과 첩(전산군부인 이씨)의 아들인 전계대원군의 서자인 것이다.
상계군 사건 이후 역적 취급을 받는 은언군을 조상으로 둔 탓에 봉군되지도 못했으나 즉위 전날 순조의 아들로 입적이 되면서 덕완군으로 봉해졌다. 이는 즉위 이전에 예법상 평민에서 바로 왕이 될 수 없으므로 봉군(封君)해서 사대부를 만든 연후 즉위한 것이다. 절차상의 문제이고 고종도 동일한 절차를 거쳤다. 아버지나 큰형은 아예 자기가 왕이 된 후 추봉하였다.
그래도 이원범은 어린 시절에는 그의 형들과 함께 몰락한 종친 신분일지언정 조선 왕가의 몇 안되는 남자 왕족으로 대우 받으며 그럭저럭 살았다. 두 형들과 달리 아버지 이광이 귀양에서 풀린 뒤, 조선 한성부 향교동 사저에서 태어났다.
이후 아버지가 10살 때 죽은 일 말고는 큰 어려움 없이 지냈지만 14살 때인 1844년(헌종 10년)에 민진용(閔晉鏞)이 큰형 이명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계획하면서 다시 기구한 운명이 된다. 이명은 처형되고, 이원범은 연좌제로 작은형 이경응과 같이 교동도로 유배되었으며 얼마 못가 강화도에 다시 유배되었다.
이후 작은형과 함께 19살 때까지 강화도에서 5년간 농사를 짓고 나무나 베던 이원범은 왕족이 아닌 일개 평범한 백성으로 살고 있었다.
이원범이 19살이던 1849년(헌종 15년)에 순조의 손자이자 24대 왕인 헌종이 23살이라는 젊은 나이로 후사 없이 갑작스레 승하했다.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대왕대비 순원왕후는 헌종의 7촌 재종숙이자 순조의 5촌 조카인 이원범을 대왕대비의 자격으로 순조의 양자로 입적시켜 차기 국왕으로 지명했다.
자신을 왕으로 옹립하기 위한 행렬이 왔을 때, 철종은 자신의 할아버지나 큰형(이원경)이 역모에 몰려 죽은 전례가 있어서 이번엔 자신을 잡으러 온 줄 알고 산속으로 도망쳤다. 이때 철종의 형 이욱은 도망가다가 넘어져 다리가 부러지기도 했다.
이후 영의정 정원용과 주민들의 설득과 이해로 결국 임금이 타는 가마에 오른다. 그리고 철종이 왕이 된 후 강화도에 있던 그의 집은 왕의 잠저로서 '용흥궁(龍興宮)'이라는 이름으로 격상되었다.
아무런 준비 없이 갑자기 왕위에 오른 강화도령
철종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다. 은언군은 사도세자가 후궁인 숙빈임씨에게서 낳은 아들이다. 부친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은 은언군의 서자다. 철종은 1831년(순조 31)에 전계대원군의 서자로 태어났다.
전계군의 일가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역모에 연루되어 유배와 사면을 반복했다. 전계군의 이복형인 상계군(常溪君)은 정조 때 홍국영의 역모에 연루되어 강화도에 유배된 후 죽었고, 아버지 은언군은 신유박해(순조 1) 당시에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상계군의 부인)와 함께 사사되었다. 전계군 본인도 큰아들 회평군(懷平君)이 역모에 연루되어 옥사하는 바람에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전계군은 세 명의 부인으로부터 각각 아들 한 명씩을 낳았으며,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셋째 아들이 철종이다. 이름은 변(昪), 초명은 원범(元範), 자는 도승(道升)이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 없이 죽자 순원왕후는 영조의 유일한 혈손인 전계군의 아들 이원범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다.
대왕대비가 하교하기를 "종사의 부탁이 시급한데 영묘조(英廟朝)의 핏줄은 금상(今上)과 강화에 사는 이원범뿐이므로 이를 종사의 부탁으로 삼으니, 곧 광(㼅)의 셋째 아들이다." - 《헌종실록》 권 16, 헌종 15년 6월 6일
당시 이원범은 학문과는 거리가 멀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런 그가 전혀 준비도 되지 않은 채 갑자기 왕위에 오르게 된 것이다. 철종은 헌종이 죽은 지 이틀 만인 6월 8일에 덕완군(德完君)에 봉해지고, 그다음 날 창덕궁에서 즉위했다. 당시 철종의 나이 19세였지만 친정을 하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아 순원왕후가 수렴청정을 했다.
순원왕후가 처음부터 철종을 왕위 계승자로 점찍은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덕흥대원군의 종손인 이하전(李夏銓)으로 후사를 이을 생각이었다. 항렬상 이하전은 헌종의 조카뻘이었다. 그러나 이하전 주위에 벽파 세력이 많은 것을 염려한 안동 김씨 세력이 순원왕후를 설득해 후계자를 바꾸었다. 이들은 자신들의 뜻대로 움직일 만한 왕을 앉혀 놓고 풍양 조씨에게 빼앗겼던 권력을 되찾으려고 했다. 철종은 학식도 덕망도 부족한 왕이었다. 덕분에 궁정은 안동 김씨의 손에 좌지우지되었다.
철종은 1851년(철종 2)에 순원왕후의 친척인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로 맞이하니, 그가 철인왕후(哲仁王后)다. 이로써 안동 김씨는 순조, 헌종, 철종 3대에 걸쳐 왕비를 배출하며 세도정치를 이어 갈 수 있었다. 철종에게는 이 밖에 7명의 후궁이 있었다. 철인왕후와 후궁들이 낳은 자식들은 모두 일찍 죽었다. 궁인 범씨 소생의 영혜옹주가 철종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아저씨가 조카를 잇는다?
철종은 헌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랐으나 항렬로만 따지면 헌종의 아저씨뻘이 되었다. 그러다 보니 왕통상 문제가 발생했다. 이 문제를 순원왕후와 안동 김씨 세력은 철종을 순조의 아들로 삼는 것으로 해결하려고 했다. 예조에서도 철종이 종묘에 읽을 축문에 순조를 훌륭하신 아버지라는 뜻의 '황고(皇考)'라 칭하고, 철종을 '효자(孝子)'라고 칭하게 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또한 헌종의 생부인 익종(효명세자)에 대해서는, 영조가 경종에 대해서 훌륭하신 형님이란 뜻으로 '황형(皇兄)'이라고 하고 영조 자신을 '효사(孝嗣)라 칭한 것에 의거해 쓰기로 했다. 그런데 이렇게 정하고 보니 철종이 헌종과 헌종비에 대한 축문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또 생겼다. 이는 전대 왕을 잇는 왕통의 문제와 직결된 것이어서 이를 둘러싼 논쟁이 펼쳐졌다. 이른바 기유예론(己酉禮論)이다.
먼저 풍양 조씨인 영의정부사 조인영(趙寅永)은 순조와 익종에 대해서는 예조의 의견대로 하되 헌종과 헌종비에 대해서는 "계승한 왕 신 아무는 아무에게 아룁니다(嗣王臣某昭告于)."라고 쓰자고 주장했다. 반면에 안동 김씨의 편에 있던 홍직필(洪直弼)이라는 학자는 제왕가는 대통을 잇는 것을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아저씨가 조카를 잇고 형이 동생을 잇더라도 모두 부자의 도가 있는 것이 만고의 진리라고 하면서도, 친속(親屬)의 호칭에서는 마땅히 형제와 숙질의 호칭을 쓴다고 했다. 따라서 철종은 헌종에 대해서 훌륭하신 조카라는 뜻으로 '황질(皇姪)'이라 하고, 헌종비에 대해서는 '황질비(皇姪妃)'라 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인영의 주장은 국가의 왕통을 중시한 것이고, 홍직필의 주장은 가문의 혈통상 서열을 중시한 것이었다. 결국 수렴청정 중이던 순원왕후는 두 가지 의견을 절충해 '사왕신(嗣王臣)'의 칭호와 '황질', '황질비'의 칭호를 모두 쓰도록 했다.
그러나 예론 문제는 그리 간단히 끝나지 않았다. 1851년(철종 2) 6월에 헌종의 삼년상이 끝나갈 때 헌종의 신주를 종묘에 모시고 대신 친(親)이 다한 진종의 신주를 영녕전으로 옮겨야 했다. 이때 안동 김씨 측의 좌의정 김흥근(金興根)과 학자 홍직필은 당연히 진종의 신주를 내와야 한다고 했다. 철종과 헌종이 친속으로는 숙질로 부르고는 있지만 왕통상으로는 철종이 헌종의 대통을 이었기 때문에 부자의 도리가 있다는 것이었다. 철종과 헌종 사이에 부자의 도리를 인정한다면 진종은 4대 제향 범위에서 벗어나므로 신주를 내오는 것이 맞았다. 이러한 의견은 대부분의 대신과 유학자 들의 의견과 일치했다.
그런데 영의정 권돈인(權敦仁)만은 의견이 달랐다. 그는 친속으로 볼 때 진종이 철종의 증조부이므로 4대 제향 범위에 든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진종의 신주를 내가면 안 된다고 반대했다. 그러나 그렇게 할 경우 익종과 헌종을 대통에서 제외시키게 되었다. 안동 김씨 세력은 권돈인의 이러한 주장을 종통을 교란시키는 주장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풍양 조씨 세력 중 한 명이었던 권돈인과 이러한 주장을 뒤에서 조정한 김정희(金正喜)가 탄핵을 받아 유배되었다.
철종 대의 왕통과 관련한 예론은 이렇게 마무리되었다. 또한 이 예론의 승자인 안동 김씨 세력은 조정에 남아 있던 풍양 조씨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마음껏 세도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절정에 달한 삼정의 문란과 민란의 확산
철종은 1852년(철종 3)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나 독자적인 정치력은 발휘하지 못했다. 항상 안동 김씨 세력의 눈치를 보면서 크고 작은 정사를 모두 그들의 뜻에 따라 처리했다. 일설에 의하면 철종이 점차 학식을 쌓고 정치적인 역량을 키우려고 하자 안동 김씨 세력이 일부러 철종에게 후궁을 계속 들여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철종은 주색에 빠진 채 점점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하게 되었고, 안동 김씨 세력의 학정은 더욱 극에 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가운데 더욱 문란해진 삼정과 탐관오리들의 부정부패, 거기에 자연재해로 인해 농사까지 망치게 되면서 백성들은 살아갈 길이 막막해졌다. 그러다 보니 여기저기에서 민란이 일어났다. 철종과 안동 김씨 세력은 선혜청을 통해 기근이 심한 지방에 돈을 풀어 구제를 시도하고 탐관오리들에 대한 징계를 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는 못했다.
1862년(철종 13), 마침내 수탈에 견디다 못한 백성들이 전국적인 규모의 민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규모의 민란은 2월 18일에 일어난 진주민란이었다. 진주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은 경상도 우병사 백낙신(白樂莘)의 탐학이었다. 백낙신은 부임하자마자 갖가지 방법을 동원해 농민들을 수탈했다. 하루하루 연명하기도 힘든 백성들에게 그가 수탈해 간 액수는 약 4~5만 냥에 이르렀다. 여기에 진주목에서 그동안 관리들이 불법으로 횡령한 세금을 일시에 거둬들이려고 하자 관리들은 이것을 또다시 농가에 부담시키려고 했다. 이에 농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몰락한 양반인 유계춘(柳繼春) 등이 중심이 되어 거사를 도모하고 한글 격문을 내붙여 민란에 가담할 농민들을 모았다. 이들 봉기군은 스스로를 초군(樵軍)이라고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고 향리들을 잡아다 죽였다. 또한 부호를 공격해 재물을 약탈하기도 했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낀 조정에서는 박규수(朴珪壽)를 진주안핵사로 파견해 민란을 조기에 수습하려고 했다. 그러나 진주민란은 3개월이 지난 후에나 겨우 진정되었다. 한편 진주민란으로 충격을 받은 철종은 자신의 심정을 다음과 토로했다.
내가 이번 진주의 일에 대해 실로 개연(慨然)하고도 두려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대령(大嶺) 이남은 옛날에 이른바 추로(鄒魯)의 고장으로 일컬어져 군현(群賢)들이 배출되었고, 풍속도 순후(淳厚)해 비록 집집마다 봉(封)할 만하다고 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근래에 탄식과 원망과 수심이 깊어 백성들이 잘 살아갈 수 없게 되었으므로, 마침내 지금의 이 거조가 있기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본심(本心)으로 하고 싶어서 그렇게 한 것이겠는가? 첫째는 내가 부덕(否德)한 탓으로 도솔(導率)하는 방도를 극진히 하지 못한 것이고, 둘째로는 백성을 다스리고 적을 막는 신하가 조가(朝家)에서 백성을 어린아이 보살피듯 하는 뜻을 잘 대양(對揚)하지 못한 탓이다. 스스로 돌아보건대 얼굴이 붉어져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 《철종실록》 권 14, 철종 13년 3월 10일
그리고 이 사태를 수습하면서 억울하게 벌을 받는 백성이 없도록 할 것을 특별히 지시하기도 했다. 그러나 철종의 이러한 마음도 성난 민심을 달래지 못했고, 민란은 충청도, 전라도 지역으로 계속 번져나갔다.
한편 조정에서는 민란을 수습하기 위해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을 설치하고 '삼정이정절목(三政釐整節目)' 41개조를 제정해 반포했다. 나름의 개혁 정책안이었다. 그러나 임시변통에 불과한 이 정책으로는 썩을 대로 썩은 삼정의 폐단을 시정할 수 없었다.
후사도 남기지 못하고 허무하게 죽다
철종에게는 부인이 8명이나 있었지만 후사가 없었다. 그런 와중에도 안동 김씨 세력은 자신들의 세도를 조금이라도 위협할 만한 종실은 그대로 두고 보지 않았다. 한때 헌종의 후사로 거론되었던 이하전을 끝내 역모로 몰아 사사한 것에서도 그들의 의도를 알 수 있다. 이하전은 평소 "이 나라가 이씨의 나라인가? 아니면 김씨의 나라인가?"라고 하며 안동 김씨 세력에 대한 불만을 공공연히 드러냈고, 그것이 그의 명을 재촉했다.
이렇듯 500년을 이어 온 이씨 왕실의 씨가 말라 가는 가운데 철종은 1863년(철종 14) 12월 8일에 3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떴다. 자신의 뜻과 상관없이 갑자기 왕위에 올라 결국은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지도 못하고 후사도 잇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어 버린 것이다. 이미 왕실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고 백성들의 삶은 더욱 피폐해지니 조선의 국운도 그렇게 서서히 기울어 갔다. 철종의 능은 경기도 고양시에 위치한 예릉(睿陵)이다.
강화군 강화읍 신문리에 있는 청하동 약수터 [약사사 근방에 위치]
[강화도령 철종과 강화도 처녀 봉이는 강화도 남산에 있는 청하동 약수터에서 만나 선원면의 찬우물 약수터까지 거닐면서 데이트를 했다고 전해진다.]
인천 강화군 강화읍 남산리 439-73 번지에 있는 강화산성 남장대
[남산(222.5m) 정상에 공작새처럼 솟은 화려한 2층 한옥이 남장대南將臺다. 사방으로 시야가 트인 천혜의 전망대이자 장군의 지휘소다. 조망도 장군급이다. 376m의 김포 문수산이 저렇게 높았나 싶을 정도로 거대한 장벽을 이루고, 북쪽으로는 개성 땅이 드러난다. 북한이 이토록 가깝다는 것에 놀란다. 날씨만 좋으면 바다 뒤로 북한의 송악산도 한 눈에 들어온다. 읍내 최고봉 남산 아래로는 강화읍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강화읍 뒤편으론 바다가 보인다. 저수지 한쪽에는 낚시꾼들을 위한 방갈로도 설치되어 있다.]
강화산성(江華山城)
강화도의 강화읍을 에워싸고 있는 고려시대 이래의 성곽으로 강화읍과 내가면·하점면 일대에 걸쳐 있으며, 성문 4개와 첨화루(瞻華樓)·안파루(晏波樓)·진송루(鎭松樓)의 문루, 암문(暗門)·수문(水門)·장대(將臺) 등의 방어 시설을 갖추고 있다.
고려말 몽고군의 침입으로 백성과 국토가 유린되자 1232년(고려(高麗) 고종(高宗)19) 6월 대몽항쟁을 위하여 강화로 도읍을 옮기고, 궁궐을 짓고 도성(都城)을 축조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왕궁과 도성시설이 완비된 것은 아니고, 1234년 1월부터 도성과 궁궐 및 백사 공해(百司公해)를 송도(松都)의 것과 방불하게 만든 것이다. 이때의 성은 내성(內城)·중성(中城)·외성(外城)이 있었는데, 내성은 주위 3,478척의 규모로 토축이었고, 중성은 1250년에 축성된 것으로 둘레가 2,960여간(間)으로 8개의 성문이 모두 개경(開京)의 도성(都城) 성문의 이름을 본뜬 것이다. 즉, 동쪽에 선인문(宣仁門)·서쪽에 선기문(宣祺門)·남쪽에 태안문(泰安門)·북쪽에 북창문(北昌門)을 두고, 그사이 방향인 동남에 장패문(長覇門)·서남에 광덕문(光德門)·서북에 선의문(宣義門)·동북에 창희문(彰熙門)을 둔 것이 그것이다. 외성은 중성을 보다 외곽에서 수비하기 위하여 해안의 배가 건너는 곳들을 차단하기 위한 대규모의 것으로, 1233년부터 축조하기 시작하여 1235년 12월에 각 주현(州縣)의 일품군(一品軍)을 징발하여 강화의 동쪽 해협을 따라 3만 7,070척에 이르는 대대적인 축성 공사를 실시하였다. 이 외성도 토성으로 지었으며, 몽고군이 바다를 건너 공격하지 못한 가장 중요한 방어 시설이자 고려의 강도(江都)정부가 39년간 육지로부터 보급 물자를 안전하게 지원 받았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1270(원종(元宗)11)년 몽고와의 강화조건으로 내성과 외성까지도 모두 헐게 하였다. 조선왕조의 초기에 읍성을 다시 축성하면서 고려의 도성이던 강화성은 변형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 때 청군(淸軍)에 의해 다시 파괴되었고, 1677년(숙종(肅宗)3) 강화유수(江華留守) 허질(許秩)이 대폭 개축하여 고려 시대의 규모로 넓혀 석축하였다. 1709년(숙종(肅宗)35) 강화유수 박권(朴權)이 중수하였고, 조선 말기에 이르기까지 계속적인 보수공사가 있었다. 이때 체성(體城)은 돌로 견고하게 쌓았고 여장(女墻)도 설치하였으나 여장은 모두 무너졌다. 성내에는 남장대(南將臺)·북장대(北將臺)·서장대(西將臺)가 있었고 수문이 두 개 있었다.
남문은 안파루(晏波樓)·북문은 진송루(鎭松樓)·서문은 첨화루(瞻華樓)·동문은 망한루(望漢樓)라 하였으나, 동쪽 성벽은 시가지화되었고, 성벽은 남북쪽의 산자락으로 잘 보존되어 있다.
강화산성 복원사
북문 진송루 누각은 병화로 헐리고 석축만 남아 있던 것을 1976년에 강화 중요국방유적 복원정화사업으로 현재와 같이 복원하였다.
서문 첨화루는 숙종 38년(1711)에 당시 유수 민진원에 의해 복원되었는데 1955년 5월 많은 비로 인해 붕괴 되었던 것을 1975년 문루와 성곽의 일부를 복원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남문 안파루는 서문과 같은 시기에 복원되었다. 그러나 동문 망한루는 2004년에야 복원을 시작하여 2004년 8월에야 마쳤다.]
인천 강화군 선원면 중앙로 320 번지에 있는 찬우물 약수터
[철종이 어린 시절 강화도 용흥궁에서 지낼 때 냉정리에 있던 외갓집을 오가기도 하였다. 그럴 때마다 잠시 쉬어서 물을 마셨던 곳이 바로 찬우물 약수터이다. 또한 철종과 같은 마을에 살던 강화도 처녀인 봉이(鳳伊, 일명 양순이)를 처음 만난 곳도 찬우물 약수터라고 전한다. 철종과 강화도 처녀 봉이는 강화도 남산에 있는 청하동 약수터에서 만나 찬우물 약수터까지 거닐었다. 시간이 지나 임금이 된 철종이 한양 궁궐에서 생활할 때도 강화도에서 만났던 봉이를 잊지 못했다. 그래서 사람들을 시켜 찬우물 약수터에서 떠가지고 온 물로 막걸리를 담그게 했다고도 한다. 찬우물 약수터는 강화도 사람들에게 소문난 약수터 가운데 한 곳이다. 언제나 시원한 물맛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강화도 사람들은 물론 관광객들도 많이 찾는다. 찬우물 약수터 앞에는 인근에 사시는 분들이 밭에서 기른 호박, 옥수수, 양파, 땅콩 등 제철 농산물들을 판매하기 위해 좌판을 벌여 놓는다.]
찬우물 약수터는 ‘냉정약천’, ‘냉정약수’ 등으로도 불렸다. 강화군 선원면은 고려시대 고종 때 전국 2대 사찰 가운데 한 곳이었던 ‘선원사(禪源寺)’가 있었던 곳이다. 이곳 선원면에 ‘냉정(冷井)’이라 부르는 마을이 있는데, 찬우물약수터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차고 맛있었기 때문에 마을 지명까지도 생기게 되었다. 또한 선원면에는 ‘옥곡물’이라는 우물이 한 개 더 있어서 강화도에서는 찬물이 나는 마을로 유명하다. 현재 찬우물 약수터는 1914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선원면 창리에 포함되어 있다.]
강화 선원사지 (江華 禪源寺址)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고려시대 대몽항쟁 당시 고려대장경 목판을 조각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사찰터. 사적.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산133번지
1977년11월 2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선원사는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1245년(고려 고종 32)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崔瑀)가 자신의 원찰(願刹)이자 대몽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자 창건한 곳이다. 강화도 피난 당시 국찰(國刹)의 격을 갖던 사찰이었으며. 충렬왕 때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목판을 조각, 봉안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때 조각된 팔만대장경 목판은 현재 합천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데 1398년(조선 태조 7)한양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1456년경(세조 2) 해인사로 다시 옮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선원사는 순천 송광사와 함께 2대 선찰(禪刹)로 손꼽혔으나 1398년(조선 태조 7) 이후 아무런 기록이 없으며, 그 터는 잊혀져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조사단이 지표조사를 통해 처음 발견하여, 몇 개의 주춧돌과 보상화무늬 전돌, 범자(梵字) 새긴 기와, 지붕에 얹었던 잡상 등을 확인하였다. 이후 선원면(仙源面) 도감마을, 도감산에 있는 절터이므로 학술적·역사적 가치와 지역 연원에 근거하여, 1977년 사적 강화선원사지로 지정되었으나 위치에 대한 논란이 있다.
내용
1996년부터 2001년까지 4차례에 걸쳐 동국대학교박물관이 발굴조사 한 결과, 독립된 건물지 21개소와 부속 행랑지 7개소가 확인되었으며, 건물들은 북고남저의 지형 위에 동서로 긴 4개의 층단을 두고 빼곡히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부 대형건물지(기단길이 38m)에는 삼존불을 지탱한 것으로 보이는 불단 유구가 확인되었고, 5개의 건물지에서 온돌시설과 배수시설 등이 확인되었으나 탑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은 건물지가 집중되어 있는 중심구역으로 남북길이 180m, 동서너비 180m정도이다. 출토유물은 자기류, 기와류, 소형 청동탄생불, 금동나한상, 탄화된 사경편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자기류(총 2,300여 점)는 12세기 후반∼1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청자편이 대부분(94%)이고, 기와류는 평기와가 가장 많다. 막새, 취두, 잡상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중 막새류는 연화문, 범자문, 귀목문이 대부분인데 ‘박씨(朴氏)·유씨(劉氏)’명(銘) 막새도 있다. 취두편은 모두 21개가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로 보면 절터와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되나,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고려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선원사(禪源寺) 터로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다. 더구나 1931년 편찬된 『속수증보강도지(續修增補江都誌)』에 “선원면 선행리 충렬사 앞 인근 일대가 선원사의 유지”라 되어 있어, 향토사가들은 이를 근거로 현재 선원사지는 가궐터(假闕址)이며, 충렬사 전면 터가 선원사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헌사학계에서도 현 위치가 문헌자료와 배치된다는 이유로, 선원면 선행리의 충렬사 부근이 선원사지이며, 대단히 많은 수량의 치미, 용두, 잡상이 출토된 현 선원사지는 사찰이라기보다 궁궐과 가까운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2013년 5월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강화군 선원면 신정리에서 발견한 건물 터가 고려시대 가궐(假闕) 터로 추정되고 있어, 앞으로의 조사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특징
사역이 크게 네 구역으로 구분되어 층단식(層段式)으로 대지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의의와 평가
남한지역에 현존하는 고려시대 사찰 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강화 선원사지 (江華 禪源寺址)
인천광역시 강화군에 있는 고려시대 대몽항쟁 당시 고려대장경 목판을 조각하던 곳으로 추정되는 사찰터. 사적.
소재지 : 인천 강화군 선원면 지산리 산133번지
1977년11월 29일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선원사는 고려시대에 몽골의 침략을 받아 강화도로 도읍을 옮긴 후 1245년(고려 고종 32)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최우(崔瑀)가 자신의 원찰(願刹)이자 대몽항쟁의 정신적 지주로 삼고자 창건한 곳이다. 강화도 피난 당시 국찰(國刹)의 격을 갖던 사찰이었으며. 충렬왕 때에는 임시 궁궐로 사용하기도 했다. 특히 대장도감(大藏都監)을 설치하여 팔만대장경(八萬大藏經) 목판을 조각, 봉안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이때 조각된 팔만대장경 목판은 현재 합천 해인사에 봉안되어 있는데 1398년(조선 태조 7)한양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1456년경(세조 2) 해인사로 다시 옮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고려시대의 선원사는 순천 송광사와 함께 2대 선찰(禪刹)로 손꼽혔으나 1398년(조선 태조 7) 이후 아무런 기록이 없으며, 그 터는 잊혀져 흔적도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1976년 동국대학교 강화도학술조사단이 지표조사를 통해 처음 발견하여, 몇 개의 주춧돌과 보상화무늬 전돌, 범자(梵字) 새긴 기와, 지붕에 얹었던 잡상 등을 확인하였다. 이후 선원면(仙源面) 도감마을, 도감산에 있는 절터이므로 학술적·역사적 가치와 지역 연원에 근거하여, 1977년 사적 강화선원사지로 지정되었으나 위치에 대한 논란이 있다.
내용
1996년부터 2001년까지 4차례에 걸쳐 동국대학교박물관이 발굴조사 한 결과, 독립된 건물지 21개소와 부속 행랑지 7개소가 확인되었으며, 건물들은 북고남저의 지형 위에 동서로 긴 4개의 층단을 두고 빼곡히 들어서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중앙부 대형건물지(기단길이 38m)에는 삼존불을 지탱한 것으로 보이는 불단 유구가 확인되었고, 5개의 건물지에서 온돌시설과 배수시설 등이 확인되었으나 탑지는 확인되지 않았다. 발굴조사가 이루어진 지역은 건물지가 집중되어 있는 중심구역으로 남북길이 180m, 동서너비 180m정도이다. 출토유물은 자기류, 기와류, 소형 청동탄생불, 금동나한상, 탄화된 사경편 등이 주를 이루고 있다. 자기류(총 2,300여 점)는 12세기 후반∼14세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청자편이 대부분(94%)이고, 기와류는 평기와가 가장 많다. 막새, 취두, 잡상 등이 출토되었는데, 이중 막새류는 연화문, 범자문, 귀목문이 대부분인데 ‘박씨(朴氏)·유씨(劉氏)’명(銘) 막새도 있다. 취두편은 모두 21개가 조사되었다.
출토 유물로 보면 절터와 관련된 유적으로 추정되나,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고려팔만대장경』을 판각했던 선원사(禪源寺) 터로 볼 수 있는 고고학적 자료가 확인되지 않아 논란이 되고 있다. 더구나 1931년 편찬된 『속수증보강도지(續修增補江都誌)』에 “선원면 선행리 충렬사 앞 인근 일대가 선원사의 유지”라 되어 있어, 향토사가들은 이를 근거로 현재 선원사지는 가궐터(假闕址)이며, 충렬사 전면 터가 선원사지라고 주장하고 있다. 문헌사학계에서도 현 위치가 문헌자료와 배치된다는 이유로, 선원면 선행리의 충렬사 부근이 선원사지이며, 대단히 많은 수량의 치미, 용두, 잡상이 출토된 현 선원사지는 사찰이라기보다 궁궐과 가까운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던 곳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2013년 5월 한국문화재보호재단이 강화군 선원면 신정리에서 발견한 건물 터가 고려시대 가궐(假闕) 터로 추정되고 있어, 앞으로의 조사에 귀추가 주목되고 있다.
특징
사역이 크게 네 구역으로 구분되어 층단식(層段式)으로 대지가 마련되어 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의의와 평가
남한지역에 현존하는 고려시대 사찰 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철종외가(哲宗外家)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에 있는 조선시대의 건물.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관리단체 : 파주염씨대종회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선원면 철종외가길 46-1 (냉정리)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1853년(철종 4)에 조선 제25대 철종이 강화유수 정기세(鄭基世)에게 명하여 지은 기와집으로, 철종의 외척인 염보길(廉輔吉)이 살았다.
원래 안채와 사랑채를 좌우로 둔 H자형 구조의 건물이었으나 지금은 행랑채 일부가 헐려 몸체만 남아 있다. 집 뒤에는 염씨 집안의 묘가 있다.
일반 사대부 집의 웅장한 규모와는 다르게 법도에 맞도록 고졸(古拙)하게 지은 건물이어서 양반가옥에서 볼 수 있는 기품과 화려함은 없으나 단아하고 고풍스럽다. 평면 구성은 경기 지역의 사대부 가옥 형태를 따랐으나 안채와 사랑채를 一자로 연결시켜 안채와 사랑채의 공간을 작은 화장담으로 간단하게 나눈 점이 특이하다.
강화 나들길 제 14코스(강화도령 첫사랑길)
탐방지도
강화 나들길 제 14코스(강화도령 첫사랑길)
안내문
강화 나들길 제 14코스(강화도령 첫사랑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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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종의 가계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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