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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 불교산악회 원문보기 글쓴이: 산오름(박윤덕)
2013년 동지(冬至) 12월 22일 02시경
크리스마스의 기원은 동지축제
새생명의 기운이 싹트기 시작하는 동지(冬至)
동지는 24절기의 하나로서 양력 12월 22일에 든다. 일년 중에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동지는 음력 11월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그믐께 들면 '노동지' 라고 하는데, 이는 동지가 드는 시기에 따라 부르는 말이다.
고대인들은 이 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축제를 벌여 태양신에 대한 제사를 올렸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주(周)나라에서는 동지를 새해의 시작 곧 설로 삼아 천지 신명와 조상신에게 제사를 올렸다.
이러한 문화가 생긴 연유는, 동지가 바로 '가는 해의 끝이면서 오는 해의 양(陽)기운이 처음 태동하는 진정한 새해 첫 날'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또 우리나라에서는 동지를 '다음해가 되는 날' 혹은 '작은설'이라 하여 크게 축하 하였다.
그리고 이날 새해 달력을 주고 받고는 했다.
그래서 옛말에 '동지를 지나야 한 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한 살 더 먹는다'라는 말이 전하기도 한다.
조선 초까지만 해도 동짓날은 어려운 백성들도 모든 빚을 청산하고 새로운 기분으로 하루를 즐기는 날이었다.
크리스마스(12월 25일)는 예수의 탄생일이 아니다
전세계적인 축제로 화한 크리스마스가 동지(冬至) 축제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걸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
크리스마스는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축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예수가 12월 25일에 탄생했다는 증거는 전혀 없다. 예수 탄생에 대해서는 [마태복음] 과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으나, 그 월 일에 대해서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즉 크리스마스인 12월 25일은 예수의 탄생일이 아니며 그렇게 믿고 있는 것은 기독교가 만들어낸 일종의 신화라고 볼 수 있다.
실제 역사의 근원을 따라 올라가 보면, 예수 탄생을 축하하는 의식은 3세기에 접어들면서부터 행해진 것으로 보이는데, 초기에는 그 날짜가 일정치 않아 1월 6일, 3월 21일(춘분), 12월 25일(동지축제) 가운데 어느 하루가 선택 되었다.
로마 교회(서방교회)가 12월 25일을 성탄절로 정한 것은 서기 354년부터로 보여지며, 379년부터는 그리스 교회(동방교회)가 이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크리스마스의 뿌리는 동지 축제
농경(農耕)을 주로하던 로마인들은 12월 21일부터 31일까지 농경신 새턴(Saturn: 이탈리아의 고대 곡물신, 로마인에 의해 그리스의 크로노스와 동일시 됨)의 제사일(祭日)로 삼아 성대한 잔치를 벌였는데, 이 제사일 기간을 '사투르날리아(Satutnalia)라 불렀다.
('토요일'을 뜻하는 영어 Saturday의 어원이 Saturn)이 사투르날리아 기간 동안에는 일반적으로 연령, 성별, 계급의 구별 없이 각종 연회, 경기 행렬 등이 펼쳐졌다. 그런데 이 기간 중에서 12월 25일은 동지가 지난 다음으로 '태양이 소생하는날'이라고 하여 특별히 기념되었다.
크리스마스는 다름아닌 이 사투르날리아 축제가 변형되어 전래된 풍속이다.
그리고 또 미트라(Mitrra)신의 축일도 이 날이었다.
미트라는 태양이 떠오를 때 태양에 앞서는 빛으로서, 어둠을 몰아내는 광명의 신이다.
본래 페르시아인의 신이었는데 전래되어 유럽 민족의 옛 신성(神聖)으로 자리잡았다.
켈트 민족의 제사계급들도 태양의 기운이 소생하는 이 기쁜 날을 축하 하였고 게르만인도 이날을 유쾌하게 축하 하였다.
이런 문화적 전통위에서, 초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농경력(農耕曆)상의 성대한 제사일 곧, 동지 축제를 정책적으로 예수의 생일과 결합시킨 것이다.
따라서 크리스마스의 문화적 전통은 사실상 그리스도교와는 전혀 무관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크리스마스의 어원(語原)
크리스마스란 중세기에 사용되던 '크리스뚜스 미사(Christus Missa)'라는 말에서 유래한다.
그러므로 이 말은 '그리스도'와 '미사'의 합성어이다.
크리스마스의 또 다른 이름인 'X_mas'의 'X'는 희랍어의 그리스도라는 단어의 첫 글자이다.
시대의 변천에 따라 점차 세속화된 크리스마스
중세의 크릿흐마스 행사는 교회 의식(儀式)과 더불어 농신제(農神祭)에 따르는 가장(假裝)행렬 행사 등이 뒤 섞여 행하여졌다. 그것이 근세에 이르러서 어린이들이나 가족 중심의 축일로 변모되었다.
또 크리스마스와 결부하여 산타클로스의 설화와 전승이 있다.
이것은 3세기 말, 어린이를 보호하는 소아시아의 '성 니콜라스'의 이름이 네덜란드어로 '성 클라우스'로 발음되었는데, 네덜란드인이 미국으로 이주하면서부터 잘못 불러서 성녀(聖女, 산타)를 뜻하는 것 같은 '산타클로스'라는 애칭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산타클로스가 썰매를 타고 와서 착한 어린이에게 선물을 준다는 이야기와 그에 관련된 행사는 오래된 기원이 아니라, 19세기 초부터 시작된 일로 보여진다.
결론적으로 크리스마스는 서양의 동지축제이다.
동지팥죽의 어원, 유래, 풍속입니다.
1. 동지의 어원
동지는 24절기의 하나로서 일년 중에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이다.
24절기는 태양력에 의해 자연의 변화를 24등분하여 표현한 것이며, 태양의 황경이 270도에 달하는 때를 '동지'라 고 한다.
동지는 음력 11월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그믐께 들면 '노동지'라고 하는데, 이는 동지가 드는 시기에 따라 달리 부르는 말이다.
2. 동지의 유래
동지는 일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길어 음(陰)이 극에 이르지만, 이 날을 계기로 낮이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여 양(陽)의 기운이 싹트는 사실상 새해의 시작을 알리는 절기이다.
중국의《역경(易經)》에는 태양의 시작을 동지로 보고 복괘(復卦)로 11월에 배치하였다.
따라서 중국의 주(周)나라에서는 11월을 정월로 삼고 동지를 설로 삼았다. 이러한 중국의 책력과 풍속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옛 사람들은 이날을 태양이 죽음으로부터 부활하는 날로 생각하고 경사스럽게 여겨 속절로 삼았다. 이것은 동지를 신년으로 생각하는 고대의 유풍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전통사회에서는 흔히 동지를 '작은 설'이라 하여 설 다음 가는 경사스러운 날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옛말에 '동지를 지나야 한살 더 먹는다' 또는 '동지팥죽을 먹어야 한살 더 먹는다' 라는 말이 전하기도 한다.
3. 동지의 풍속
중국의《형초세시기(荊楚歲時記)》에 의하면 "공공씨(共工氏)의 재주 없는 아들이 동짓날에 죽어서 역질(疫疾)귀신이 되었는데, 그 아들이 생전에 팥을 두려워하여 팥죽을 쑤어 물리친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다분히 후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는 이야기로 팥죽의 축귀(逐鬼) 기능에대한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동지팥죽이 절식이고, 팥은 붉은 색 깔을 띠고 있어서 축사(逐邪)의 힘이 있는 것으로 믿어 역귀(疫鬼) 뿐만 아니라 집안의 모든 잡귀를 물리치는데 이용되어 왔다.
이러한 점은 음양사상(陰陽思想)의 영향으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즉 팥은 붉은 색으로 '양(陽)'을 상징함으로서 '음(陰)'의 속성을 가지는 역귀나 잡귀를 물리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경상도 지방에서는 팥죽을 쑤어 삼신·성주께 빌고, 모든 병을 막는다고 하여 솔잎으로 팥죽을 사방에 뿌린다.
또 경기도 지방에서는 팥죽으로 사당에 차례를 지낸 후, 방을 비롯한 집안 여러곳에 팥죽 한 그릇씩 떠놓기도 한다. 한편 지방에 따라서는 전염병이 유행할 때, 우물에 팥을 넣으면 물이 맑아지고 질병이 없어진다고 한다. 한편으로 동지에는 동지팥죽과 더불어 책력을 선물하던 풍속이 전한다. 이에 대해《농가월령가 (農家月令歌)》11월 조에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동지(冬至)는 명일(名日)이라 일양(一陽)이 생(生)하도다 시식(時食)으로 팥죽을 쑤어 이웃(隣里)과 즐기리라 새 책력(冊曆) 반포(頒布)하니 내년(來年) 절후(節侯) 어떠한고 해 짤라 덧이 없고 밤 길기 지리하다. 옛부터 "단오(端午) 선물은 부채요, 동지(冬至) 선물은 책력(冊曆)이라"는 말이 전하여 온다.
전통사회에서는 단오가 가까워오면 여름철이라 친지와 웃어른께 부채를 여름 선물로 선사하고, 또 동지가 되면 책력을 선사하는 풍속이 성하였다. 책력은 농경사회에서 생업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요긴하게 사용되었던 생활의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불교에서의 동지의 유래
동지는 일년 중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입니다.
이때는 태양이 남회귀선, 적도 이남 23.5도인 동지선에 도달한 시절로 해가 하늘에 머무는 시간이 가장 짧으므로 반대로 밤은 가장 길게 되는 것입니다.
지구의 우리 반대편인 남반부에서는 당연히 이날이 하지에 해당하니 밤이 짧고 낮이 길겠지요. 즉, 북반구의 우리는 동지에 해당되지만, 남반구 사람들에게는 하지가 됩니다.
하늘의 절기도 역시 고정된 바가 없다 하겠습니다. 동지인 이날부터 하지가 될 때까지는 다시 낮이 점점 길어집니다.
동지는 원래 상고시대에는 새해의 기점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즉, 중국 고대의 주나라와 당나라 때에도 동지를 설로 잡고 달력의 시작으로 삼았으니 이는 태양의 운동이 시작되는 날을 동지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동지는 묵은 것을 보내고 새것을 맞음에 잡귀와 재앙을 멀리하고 복을 구하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부처님 전에 간절한 마음으로 지난해를 참회하면서 소원을 빌어 복을 구하는 것이며, 항상 부처님과 함께 하겠다는 발원의 의미로 동짓날 부처님 전에 불자들의 광명과 지혜를 상징하는 붉은 팥죽공양을 올리는 것은 부처님 가피로 모든 악귀를 몰아내는 원화소복(遠禍召福)의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동지를 귀한 날로 여기고 있으나 언제부터 그래왔는 지는 정확한 기록이 없습니다. 옛날 중국 총림(叢林)<대중 스님들이 모여 사는 선원>에서는 동재라 하여 절의 주지스님이나 일반신도가 시주가 되어 동짓날에 대중을 위하여 베푸는 재회를 봉행(奉行)하였습니다.
총림의 4절은 <결하(結夏); 여름결제><해하((解夏); 여름해제><동지><연조>를 말하며, 그 중 동지를 동년이라 하여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하여 왔으며, 동지의 전야를 동야(冬夜)라 하여 성대하게 치뤄왔습니다. 서양의 크리스마스 이브도 바로 이 동지의 전야를 동야라 하는 풍습에서 전해진 것이라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불교에서 동지의 전야를 크게 중요시한 것은 연말연시를 맞아 젊은 스님들이 은사스님이나 스승님을 찾아 뵙고, 일년 동안의 가르침에 감사함을 회향하는 뜻에서 인사를 하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팥죽의 유래
가. 민간에서 전해지는 팥죽의 유래
엣날 중국 진나라의 공공이라는 사람에게는 늘 말썽을 부려 속을 썩이는 아들이 하나 있었습니다. 그 아들 때문에 하루도 맘 편한 날이 없었는데, 어느 동짓날 그 아들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죽은 아들은 그만 역질 귀신이 되고 만 것입니다.
역질이란 천연두라는 무서운 전염병으로 그 당시에는 역질이 마을에 돌면 마을 사람들 대부분 꼼짝없이 앓다가 죽어 버리니 공공은 자신의 아들이었다 해도 그냥 둘 수가 없었습니다.
공공은 생전에 아들이 팥을 무서워했다는 기억을 떠올리고는 팥죽을 쑤어 대문간과 마당 구석구석에 뿌렸습니다. 효과가 있었던지 그 날 이후로 역질은 사라졌고 이를 본받아 사람들은 역질 귀신을 물리치기 위해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쑤었다고 합니다.
옛사람들은 붉은 색은 귀신들이 싫어하는 색이라고 생각했기에 곡식들 중에서도 유난히 붉은 색을 지닌 팥을 그런 용도로 사용했다 합니다.
나. 불교에서의 팥죽의 유래
옛날 신라 시대의 이야기입니다.
젊은 선비가 살았는데, 사람은 참으로 진실하였으나, 집안이 궁핍하였습니다.
어느날 과객이 찾아와 하룻밤 묵어가고자 하여 쉬어가게 해주었더니, 다음날 새벽 길을 떠나기 앞서 그 과객은 선비에게 서로 친구가 되자고 하였습니다. 이후로 그 과객은 선비에게 종종 찾아와 내년에 벼를 심으라 하면 벼가 풍년이 들고, 고추를 심으라 하여 고추를 심으면 고추농사가 풍년이 되는 등, 수년간 많은 재산을 모으게 하여 그 선비를 부자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허나, 이상한 것이 그 과객은 늘 한밤중에 찾아와서는 날이 새기 전 닭이 울면 사라졌습니다.
주인인 선비는 재물은 남부러울 것 없이 많이 모았으나, 세월이 갈수록 몸이 계속 야위어가더니 마침내 몸이 아파오기 시작했습니다.
병색이 너무나 심하게 짙어지자, 그 선비는 어느 스님에게 여쭈어 보았는데, 스님께서는 그 과객에게 싫어하는 것이 무엇이냐? 고 물어보라 하였습니다.
시키는 대로 했더니 그 과객은 백마의 피를 가장 싫어한다고 하였습니다.
젊은 선비는 스님의 말씀을 새겨들은 이후로, 점점 그 과객이 무서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선비는 자기 집의 백마를 잡아 온 집안 구석구석 백마의 피를 뿌렸더니 그동안 친절하던 과객이 도깨비로 변해 도망을 가면서 선비에게 저주를 퍼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 선비는 건강이 다시 좋아졌습니다.
그런데 해마다 동짓날이면 이 과객이 잊지않고 찾아오는지라 젊은 선비가 스님께 해마다 백마를 잡아서 피를 바를 수 없으니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하고 방도를 묻게 되었습니다.
스님께서는 그렇다면 팥물이 백마의 피와 빛깔이 같으니 백마의 피 대신 팥죽을 쑤어 그것을 집에 뿌리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동짓날 팥죽을 끊이는 유래라 하기도 합니다.
삼국지의 전략가 제갈량이 남만(베트남)을 평정하러 갔을 때 노수의 귀신들이 사람의 목을 원하는지라 밀가루로 사람의 머리 모양을 만들어서 제사를 지낸 것이 만두의 유래라는 이야기를 꺼내며, 자비정신이 넘치는 불교의 동지 이야기가 만두의 전설과 비슷한 점은 바로 불교의 불살생(不殺生) 자비 방생이 그 근원을 이루고 있다고 보는 견해를 밝히는 이도 있습니다.
또 초순에 동지가 들면 그 해는 애기 동지라 하여 일반가정에서는 팥죽을 끊이지 않고 절에 가서 팥죽을 먹고 돌아오는 풍습도 있습니다. 이렇듯 우리는 동지의 전통을 사찰에서 맛 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민속을 종교적 차원에서 받아들여 더욱 그 의미를 심화시킨 불가의 동지절 행사, 이런 전통의 향기를 지켜온 불교인들이 이제 다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마음의 불씨를 일체 모든 생명들의 가슴에 불을 지필 수 있도록 해야겠습니다.
동지에 얽힌 불교 설화
1) 선덕여왕과 지귀
선덕여왕은 신라 제 27대 임금으로 부처님에 대한 신심이 아주 돈독하여 국사를 돌보는 바쁜 중에서도 매일 조석으로 황룡사에 가서 예불 올리는 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합니다.
어느 날 저녁 여왕이 예불을 드리러 가는 도중에 난데없이 어떤 남자가 여왕의 행차에 뛰어들어 소란을 피우기에 여왕은 시종을 시켜 그 남자에게 연유를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소란을 피운 남자가 말하기를, "소인은 지귀(志鬼)라고 하는데 평소부터 여왕님을 남몰래 연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늘 여왕님의 예불 행차를 몰래 지켜보기 여러날이었습니다."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왕이 재차 묻기를, "행차를 늘 지켜보고 있었다는 말이냐?" 하니 지귀가, "예, 그러하옵니다. 하오나 오늘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여왕마마께 제 연모하는 마음을 하소연하려고 행차에 뛰어든 것입니다."
원래 자비로운 품성의 소유자인 선덕여왕은 그를 참으로 가엽게 생각하여 황룡사까지 동행하게 하였습니다. 이윽고 황룡사에 도착하여 절문 앞의 9층탑 곁에 이르자 여왕은 안으로 들어가면서 지귀에게 말하기를. "내가 부처님께 예불을 마치고 그대를 궁으로 데리고 갈 것이니 이곳에서 잠깐만 기다리거라"
그러나 밖에 남게 된 지귀는 일각이 여삼추라 예불 시간도 채 기다리지 못하고, 마음에 심화(心火)가 끊어 올라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참, 지귀란 양반 성미도 급하지. 그 후에 죽은 지귀는 그야말로 사랑에 한을 품고 죽은 몽달귀신이 되어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니 신라의 방방곡곡에는 이 지귀의 행패가 심하여 많은 사람이 해를 입게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이에 이 지귀 귀신의 달래주기 위한 방편으로 해마다 동짓날이 되면 팥죽을 끓여 집집마다 대문에 뿌리고 길에도 뿌렸더니 귀신이 사라졌다고 합니다.
2) 팥죽과 나한님
동짓날에 절에서는 팥죽을 쑤어 대웅전이며 나한전 등에 공양을 올리고 온 대중이 팥죽으로 공양을 하며 한 해의 묵은 때를 벗어버리고 새해를 맞이하는 풍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마하사라는 절의 공양주 보살은 그만 동짓날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공양주 보살. 아니 오늘이 무슨 날인데 잠만 자고 있습니까?
빨리 일어나세요"
스님의 호령 소리에 겨우 기지개를 펴고 나오던 공양주 보살은, "허 참, 오늘이 바로 동짓날 아닙니까? 동짓날! 빨리 팥죽을 쑤어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야지요." 하는 말에 그만 정신이 번쩍 들어 황급히 부엌으로 달려갔지만, 늦잠을 잔 덕분에 아궁이의 불씨마저 꺼져 버리고 회색 재만 남아 있었습니다.
옛날인지라 불씨가 다 사그라들고 없어져버리면 불씨를 다시 얻어 오기 전에는 부엌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공양주 보살은 그만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눈앞이 캄캄해 질 수 밖에요.
부처님께 죄송한 마음은 둘째 치고 당장 주지스님의 불호령이 떨어질 것 만 같아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결국 생각다 못한 공양주 보살은 절 아래 동네의 김서방네 집에 가서 불씨를 얻어오려고 부리나케 발길을 재촉했습니다.
그 날 따라 찬바람이 쌩쌩 불고 눈은 발목까지 푹푹 빠지니 김서방네 집은 천리 만리나 되는 것 같았습니다. 겨우 김서방네 집에 도착한 공양주 보살은 큰 소리로 김서방을 불러 자초지종 사정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자 김서방은, "아까 행자님이 오셔서 불씨를 얻어 갔는데 불이 또 꺼졌나요?" 하며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 것이었습니다.
"행자님이라니요? 우리 절에는 행자님이 없는데요?" "그래요? 하지만 조금 전에 어떤 행자님이 와서 배가 고프다고 하시면서 팥죽까지 한 그릇 드시고 불씨도 얻어가셨는데요"
마하사에는 행자 스님이라곤 없었으니, 공양주 보살은 마치 귀신에 흘린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그래도 급한 마음에 불씨를 빌려 가까스로 절에 도착했으나 더욱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놀랍게도 부엌의 아궁이에 장작불이 활활 타고 있었던 것입니다.
공양주 보살은 급히 서둘러 팥죽을 쑤어 먼저 법당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곧 나한전으로 팥죽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런데 나한님께 팥죽을 올리던 공양주 보살은 그만 까무러치게 놀라고 말았습니다. 공양주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고 계시는 나한님의 입가에 붉은 팥죽이 묻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아이고, 나한님. 잘못했습니다."
공양주 보살은 그대로 엎드려 크게 절을 올렸습니다. 김서방네 집에서 팥죽을 얻어 드시고 불씨를 얻어다가 아궁이에 장작불을 지핀 행자는 바로 그 나한님이었던 것입니다.
어느 절에나 나한전에 모신 나한님은 모두가 미소를 머금고 계시고 그 입술은 한결같이 붉은 색인데, 이는 바로 동짓날 드신 그 팥죽이 묻어있기 때문이라고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