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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27일 [연중 제25주간 금요일]
루카 9,18-22
인간관계 쉽게 끊는 것도 문제지만 못 끊는 것은 더 큰 문제다
베토벤과 그의 조카 카를 판 베토벤(Karl van Beethoven)과의 관계는 그의 개인 생활과 경력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그의 생애 마지막 몇 년 동안 그에게 큰 정서적, 육체적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베토벤은 1815년 그의 형이 사망한 후 카를의 양육권을 얻는 데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베토벤은 카를의 어머니에 대해 깊이 불신하고 있었고 그녀가 아들을 키우기에 도덕적으로 부적합 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칼의 완전한 양육권을 놓고 그녀와 길고도 격렬한 법적 싸움을 벌였습니다.
이 양육권 싸움은 베토벤의 시간, 에너지, 재정적 자원을 많이 소비했습니다.
그것은 수년 동안 계속되었고 종종 그의 음악 작업에 방해가 되었습니다.
그의 우울증과 좌절감은 끊임없는 법적 논쟁으로 인해 더욱 악화하였습니다.
베토벤이 양육권을 얻은 후 칼과의 관계는 이상적이지 않았습니다.
베토벤은 그의 조카에 대해 높은 기대를 하고 있었고 그를 교양 있었고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그러나 칼은 까다롭고 반항적이며 베토벤이 꿈꾸던 삶에 관심이 없었습니다.
칼을 징계하고 통제하려는 베토벤의 시도는 종종 둘 사이에 긴장을 초래했습니다.
베토벤은 소유욕이 강하고 위압적이어서 그들의 관계가 긴장되었습니다.
칼에게 엄격한 양육을 제공하려는 베토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칼은 종종 삼촌의 통제에서 벗어나려고 했습니다.
칼이 베토벤에게 끼친 가장 비극적이고 직접적인 영향은 1826년에 일어났습니다.
칼은 그에게 가해진 압력과 기대에 대처할 수 없어 머리에 총을 쏴 자살을 시도했습니다.
다행히 그는 살아남았지만, 이 사건은 베토벤을 황폐화했습니다.
그는 칼의 불행에 대해 개인적 책임을 느꼈고, 실제로 베토벤은 카를의 자살 시도 이후 건강이 악화하여 몇 달 뒤인 1827년에 사망했습니다.
베토벤의 죽음의 원인을 조카에 대한 집착으로 볼 수만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자기 책임 하에 놓으려고 하는 것에서 엄청난 에너지를 소진했음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조카는 삼촌의 음악을 본받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이 모든 책임은 베토벤에게 있는지 모릅니다.
끊어내야 할 사람을 끊어내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사람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서도 집착 때문에 얼마나 큰 피해를 보는지 모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내나 형제, 자녀의 잘못 때문에 정치 인생을 망치기도 합니다.
만약 나라를 위한 정치를 한다면 기회가 있을 때
비록 가족이라도 그 사람을 끊어냈어야 옳을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당신이 누구냐고 물으십니다.
다른 이들은 요한이 살아났다고 하고, 어떤 이들은 엘리야나 다른 예언자가 살아났다고들 하지만 베드로를 대표로 하는 제자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이시라고 고백하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그들에게 ‘당신이 메시아란 사실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이르시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당신의 복음을
전하라고 하시지만 왜 여기서는 당신에 대해 말하지 말라고 엄중히 이르시는 것일까요?
이 말씀 전에 예수님은 5,000명을 먹이시는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신나있을 때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당신을 따르는 길이 십자가의 길임을 알지 못합니다.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함구령이란 당신을 위해 십자가를 질 생각이 없는 사람에게 당신을 안다고 말할 자격도 박탈하시는 것입니다.
자칫 당신이 이용당하여 목적을 완수할 수 없게 되고 또 그 사람에게도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을 쉽게 끊는 것도 문제지만 못 끊는 것은 더 큰 문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저도 주교님에게 전화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아느냐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저의 이름을 대면서 아주 잘 아는 사이고 책을 쓸 때 조언도 해 주었기 때문에
머리말에 저의 이름도 나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구에서는 잘못된 교리를 가르치는
그 사람이 강의하고 책을 파는 것을 금하려는 때였습니다.
저는 그 신자를 압니다.
책을 쓸 때 조언도 해 준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만나지 않았습니다.
왠지 자신을 위해 저를 이용하지, 저의 생각으로는 한 발자국도 다가오려 하지 않는 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래도 인연이 중요하다고 여겨 계속 그 인연을 유지하고 있었다면 자칫 저도 그 일 때문에 혼이 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절연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나를 위해 전혀 십자가를 지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나를 아는 것에 대해 말할 자유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더 큰 일을 할 미래를 위해 그 사람을 끊어내야 합니다.
사랑은 무능력이나 우유부단함이 아닙니다.
사명이기에 그에 어긋나는 것은 가차 없이 끊어낼 줄도 아는 일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9월27일 [성 빈첸시오 드 폴 사제 기념일]
복음: 루카 9,18-22
그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더 큰 그릇이 되었습니다!
수많은 성인성녀들 가운데 빈첸시오 드 폴처럼 기구하고 파란만장한 생애를 사신 분은 드물 것입니다.
사제품 이후 좀 더 깊이 있는 신학 공부에 매진하고 있던 빈첸시오 드 폴에게 한 가지
좋은 제안이 들어왔습니다.
마르세이유의 한 귀부인이 학비에 보태라고 거금의 유산을 기증하겠다는 것입니다.
한걸음에 달려간 그는 두둑한 봉투를 건네받고 품에 간직한 채 배를 타고 돌아오던 중이었습니다.
불행하게도 해적선의 습격을 받아 돈뿐만 아니라 지니고 있던 모든 소지품마저 탈탈 털리고 말았습니다.
불행은 한꺼번에 몰려온다고, 그뿐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온 몸은 굵은 철사줄에 꽁꽁 묶여 아프리카로 끌려갔습니다.
그는 순식간에 전도양양하던 사제에서 노예 신세로 전락한 것입니다.
그는 선주의 손에서 의사의 손으로, 의사의 손에서 농사꾼의 손으로 넘어갔습니다.
다행히 좋은 주인을 만나 기적과도 같이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젊은 사제 시절 빈첸시오 드 폴이 겪었던 특별한 바닥체험은 그의 성소 여정을 더욱 굳건하고
아름답게 만들어주었습니다.
저같았으면 그런 불운을 겪게 해주신 주님과 해적들을 원망했을 텐데, 오히려 그는 고통과 시련을 통해 더 성숙해지고, 더 큰 그릇이 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불행한 사람들만 만나면 빈첸시오 드 폴은 자신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 청년 시절을 떠올리며, 자신이 베풀수 있는 가장 큰 사랑과 호의를 베풀었습니다.
빈첸시오 드 폴은 당시 사회 안에서 넘쳐흐르던 고아들과 과부들, 환우들과 임종자들, 노예들과 재소자들, 걸인들과 병든 나그네들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로 여기고 섬겼습니다.
한 가장이 잘못을 저질러 교도소에 수감되었는데, 그가 없으면 부인과 어린 자녀들이 굶어죽게 되었다는 소식이 빈첸시오 드 폴에게 전해졌습니다.
저 같았으면, 부인과 어린 자녀들을 위해 금일봉을 전달하는 선에서 도와주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교도소 당국에 부탁해 가장을 석방시켜주도록 탄원했습니다.
남은 형기는 자신이 대신 뱃사공 역할을 하며 채워주었답니다.
참으로 위대한 자비의 성인, 빈첸시오 드 폴 사제였습니다.
그래서 오늘날 ‘가난’ ‘자선’ 하면 즉시 떠오르는 얼굴이 바로 그의 얼굴입니다.
그의 생애와 영성에서 가장 두드러진 예수님의 모습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삶은 온통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을 향해 아낌없이 조각나고 나눠진 거룩한 성찬의 삶,
빛나는 자선의 삶이었습니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웃들을 향한 자비심, 연민의 정, 측은지심이 많이도 결핍된 우리입니다.
피눈물 흘리는 이웃들, 죽어가는 이웃들의 고통 앞에서도 무더덤한 우리를 향해 빈첸시오 드 폴 신부님은 외치고 계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우리의 스승이고 주님이십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봉사할 때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봉사하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9월27일 [연중 제25주간 목요일]
루카 9,18-22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예수님께서 혼자 기도하실 때에 제자들도 함께 있었는데, 그분께서 ‘군중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고 물으셨다.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옛 예언자 한 분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자, 베드로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였다가 사흘 만에 되살아나야 한다.’ 하고 이르셨다(루카 9,20-22).”
이 이야기를, 복음서를 기록할 때의 시점에서, 그리고 사도들의 입장에서 회상하는 이야기로 재구성하면, 이렇게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때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을 세례자 요한, 엘리야, 다시 살아난 옛 예언자라고 생각했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신 분’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수난 예고 말씀은 알아듣지 못했고, 그리스도이신 분이 왜 수난을 당해야 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랬다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모든 것을 깨닫게 되었고, 이해하게 되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영적인 구세주’로 믿긴 했지만, 그때에는 아직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 예고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 사도를 비롯해서 사도들의 믿음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완성되었습니다.
<당시 사람들이 말한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는 모두 이미 죽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예수님을 가리켜서 말할 때에는 ‘되살아난 세례자 요한, 재림한 엘리야, 다시 살아난 옛 예언자’로 표현됩니다.
당시 사람들이 예수님을 그렇게 생각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서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느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세례자 요한, 엘리야, 옛 예언자는 모두
메시아의 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분부하신 일과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신 일은 하나로 연결됩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예수님 말씀은 여러 가지 뜻으로 해석됩니다.
1) “때가 되기 전에는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여기서 ‘때’는 예수님의 수난, 죽음, 부활, 승천, 성령 강림이 모두 이루어졌을 때입니다.
실제로 사도들이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신 분”이라고 공적으로 처음 선포한 때는 성령 강림 때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승천하시기 전에 사도들에게 이렇게 지시하셨습니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그리고 보라, 내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분을 내가 너희에게 보내 주겠다.
그러니 너희는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까지 예루살렘에 머물러 있어라(루카 24,44.46-49).”
‘높은 데에서 오는 힘을 입을 때’는 ‘성령 강림 때’입니다.
(사실 사도들은 성령을 받기 전에는 믿음도 부족했고, 용기도 부족해서, ‘예수님이 그리스도’ 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을 생각하면, “때가 되기 전에는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라는 말씀은, “때가 되면, 너희는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말하게 될 것이다.” 라는 뜻이 되기도 합니다.)
2) “너희가 확신하기 전에는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예수님은 하느님의 그리스도이신 분”이라고 베드로 사도가 신앙을 고백한 일은, 머리로 생각하는 믿음을 고백한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머리로 믿는 것도 믿음이긴 하지만, 목숨을 바쳐서 증언할 정도로 믿는 것은 아직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 단계에서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 단계에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은 믿음을 증언하는 일이 아니라, 지식을 전달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나중에 사도들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은 구세주” 라고 선포하게 된 것은 성령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들 자신들이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정도로 자신들의 믿음에 대해서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의 경우, 천사가 전해 준 ‘기쁜 소식’을 믿지 못해서, 요한이 태어날 때까지 말을 못하게 되는 일을 겪었는데(루카 1,20), 그 일은, ‘믿음’이 없으면 선포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잘 나타내는 상징적인 일입니다.>
3) “내가 그리스도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선포하는 일은 ‘말’로만 해서 될 일이 아니라 ‘삶’으로 해야 하는 일이다.”
예수님이 구세주라는 것을 확신한다면 당연히 ‘삶’이 변화되어야 합니다.
구세주이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나아가는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삶’에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그것은 믿는 것이 아니고, 그런 상태로는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님에 대해서 증언할 수 없습니다.
(증언을 한다고 해도 그 증언에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 전과 부활 후의 ‘사도들의 삶’은 완전히 다릅니다.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구세주’ 라고 선포할 수 있었습니다.
또 사도들은 선교활동을 ‘말재주’로 하지 않았습니다.
‘삶’으로 했습니다(사도 2,42-47).
물론 설교도 했지만, 그들의 설교는 ‘삶’을 바탕으로 한 설교였습니다.
4) “너희는 나에 대해서 증언할 때, 부활만 말하지 마라.
반드시 수난과 죽음을 함께 말하여라.”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돌아가셨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하나의 사건입니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의 뒤를 따르는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은 부활과 영원한 생명을 향해서 가는 길입니다.
그리고 그 부활과 영원한 생명은, 각자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간 사람들만 얻게 될 것입니다.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