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카페 게시글
박약회 대구광역시지회 스크랩 [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20. 의병장 고경명, 금산전투에서 순절하다 (하) ]
이장희 추천 0 조회 113 18.01.09 18:54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나라를 위하여 한번 죽을 따름이다"

전주 형세 위급 부득이 군사 옮겨 금산 주둔

고경명·인후 부자 순절 울음소리 들판 진동

다음은 이긍익(1736∼1806)이 지은 '연려실기술'의 기록이다.

7월 9일에 고경명이 곽영과 더불어 군사를 합쳤다. 고경명의 두 아들 종후(從厚)·인후(因厚)가 각각 남원·김제·임피 등 고을의 군량과 군사를 모아 여산에 모여서 그대로 충청도·경기도를 진군하여 평양에 도달하기를 기약하였다. 그런데 은진에 이르러서 막하의 장수들이 황간·영동의 왜적들이 금산으로 넘어 들어왔다는 말을 듣고는 되돌아가서 전라도를 구하여야 한다는 말을 고경명에게 청하였다. 고경명은 또한 전주의 형세가 위급하다는 보고를 받고는 부득이 군사를 옮겨 진산으로 들어가서 곽영과 더불어 좌·우익이 되어 금산의 10리 밖에서 주둔하였다.

경명이 정예기병 수백 명을 내보내어 적을 치는데, 군관 김정욱(金廷昱)의 말이 부상함으로 물러나 달아나니 우리 군사가 약간 후퇴하였다. 저녁에 경명이 광대하는 사람 30명을 시켜 성 밑의 토성에 달려들어가 성 밖에 있는 관청 민가들을 불지르고, 진천뢰(震天雷)를 터뜨리어 성내의 창고와 노적을 연소시키니 적군의 사상자가 많았다. 날이 저물어서 각각 군사를 거두었다.

곽영이 고경명에게 사람을 보내 다음 날 같이 싸우기로 약속하였다. 이 때 아들 종후가 고하기를, “오늘 우리 군사가 승리하였으니 이 승리한 형세를 가지고 군사를 온전히 보전하여 돌아갔다가 기회를 봐서 다시 나오는 것이 좋겠습니다. 만약 적병과 진지를 마주 대하여 들판에서 잔다면 밤중에 습격을 당할 우려가 없지 않습니다” 하니, 고경명이 말하기를, “네가 부자간의 정의로 내가 죽을까 걱정하느냐, 나는 나라를 위하여 한번 죽을 따름이다. 그것이 나의 직책이다” 하므로, 종후가 감히 다시 말을 못하였다.

10일 새벽에 성 밖으로 진군하는데, 경명이 먼저 기병 800여 명을 보내어 싸움을 돋우었더니, 왜적이 성벽을 비우고 나와서 먼저 관군에게 덤벼들으니, 전봉장(前鋒將)인 영암 군수 김성헌이 먼저 달아났다. 적이 관군의 진이 약한 것을 알고 다시 광주·흥덕 두 고을의 관군에게 달려들었으나 방어사 곽영의 진에서는 멀리 바라만 보고 흩어져 버렸다.

경명이 혼자 담당할 생각으로 군사들로 하여금 활을 버티어 기다리게 하는데, 갑자기 어떤 사람이 급한 소리로, “방어사의 진이 무너졌다.”고 외치니 의병(義兵)의 진영도 따라 무너졌다. 경명이 일찍이 말하기를, “나는 말 타는데 숙달하지 못하니 불행히 싸움에 패하게 되면 오직 한번 죽음이 있을 뿐이다” 하였다. 이런 위급한 상황에서 좌우에 있는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달아나기를 청하니, 경명이 말하기를, “내 어찌 구차스럽게 죽음을 모면하려 할 것이냐” 하였다. 부하들이 붙들어 말에 태웠으나 금방 말에서 떨어지고 말이 달아나 버리니 부하인 유생 안영(安瑛)이 말에서 내려 경명에게 말을 주고 도보로 따라갔다. 적이 경명에게 급하게 달려들었다. 그때 유팽로는 말이 건장해서 먼저 나가다가 그 하인에게, “대장이 모면하였으냐? ”고 물으니, “아직 못나왔습니다” 하였다. 팽로가 말을 채찍질하여 어지러운 군사들 속으로 되돌아 들어가니, 경명이 팽로를 보고, “나는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니, 너는 빨리 달려 나가거라” 하였다. 팽로가 말하기를 “내 어찌 대장을 버리고 살기를 구하겠습니까. 남과 군사를 도모하다가 군대가 패하면 거기에 죽는 것이 도리입니다” 하였다. 적의 칼이 드디어 다가오니 팽로가 자기 몸으로 막아 가리웠다. 경명이 드디어 유팽로·안영등과 더불어 함께 죽었다.

고경명의 둘째 아들 고인후(因厚)도 이 전투에서 죽고 큰 아들 고종후(從厚)는 무너진 군사들 속에서 나와 그 아버지의 시체를 거두었다. 가까운 고을의 선비와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듣고 울음소리가 들판을 진동했다. 무너졌던 군사들은 그가 죽은 것을 알지 못하고 차츰 모여 왔으나 죽었다는 소리를 듣고는 모두 부르짖어 울면서 흩어졌다.

이 얼마나 감성적인 필치인가. 글의 마지막 부분은 장엄한 죽음이다. 죽음 이야기를 대하면 나도 몰래 숙연하여 진다. 임진왜란 그 당시로 돌아가 보면, 고경명, 고인후 부자가 함께 죽었다는 소식에 전투에 참여한 의병들은 얼마나 울부짖었을까. 고경명 부자의 시신 앞에서 무슨 다짐을 하였을까.

한편, 다른 기록에 의하면 의병장 고경명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감하였다 한다. 신경이 지은 '제조번방지'에는 고경명이 집에 있을 때 천문을 관찰하고 집안사람들에게 말하기를 “금년에는 장성이 불길하니 반드시 불길 할 것이다”하면서 “내가 금년에 반드시 횡액이 있을 것이다” 말하고, 사위 박숙에게 편지를 보내어 가독의 일을 부탁하고 전주에서부터 북을 향하여 길을 떠났다는 글이 있다.

조선왕조실록과 연려실기술. 두 책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정사와 야사의 차이를 느낀다. 정사가 이성적, 논리적이고 기록에 충실하다면, 야사는 보다 감성적이고 구전에도 의존하며 인간의 희노애락에 호소하고 있다.

고경명 순절지에서 국난극복에 대하여 한참 생각을 한 나는 다시 발길을 금산군 금성면 의총리에 있는 칠백의총으로 옮긴다. 1592년 8월 18일(양력 9월23일) 의병장 중봉 조헌과 승병장 기허당 영규 대사가 이끄는 700명의 의병은 금산 연곤평에서 고바야가와·앙코쿠지·다치바나 장군들이 이끄는 왜군 1만5천명과 싸워 모두 순절한다. 이 의로운 칠백의사의 무덤이 바로 칠백의총이다. 이곳에는 의총과 함께 조헌 선생 순의비, 종용사 사당, 기념관이 있다.

먼저 '중봉 조선생 일군순의비 (一軍 殉義碑)'를 찾는다. 비를 보니 윗 부분이 파괴되어 있다. 이 비는 1603년에 건립된 것인데 1940년에 일본 경찰이 비를 폭파하였단다. 이 비가 폭발될 때에 갑자기 하늘에 먹구름이 뒤덮히고 뇌성벽력이 천지를 진동하여 일본인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전하여 진다. 참, 지독한 일본 사람들이다. 철저히 역사 말살 정책을 펴다니.

이어서 칠백의총을 구경한다. 그리고 종용사 사당을 찾는다. 종용사에는 연곤평 전투에서 순절한 의병장 조헌과 영규 대사 등의 신위 뿐만 아니라 눈벌 전투에서 순절한 고경명과 유팽로·안영, 고경명의 둘째아들인 고인후 그리고 그의 막좌와 사졸들의 신위가 있다. 고경명의 신위는 한 가운데의 왼편에 조헌은 오른편에 있고, 고경명 신위 왼편은 유팽로·안영등 고경명 막좌와 사졸들 신위가 있다.

종용사 글씨는 한글인데 박정희 대통령 글씨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순국선열에 대한 애정이 많은 사람이다. 특히 임진왜란을 극복한 충무공 이순신을 성웅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

사당 앞에서 향을 피우고 묵념을 하였다. 그리고 '호남절의록'에서 읽은 적이 있는 고경명과 함께 금산전투에서 순절한 사람들을 생각하였다. 순절한 의병들은 고경명, 유팽로, 안영, 고인후 뿐만 아니라, 김덕홍, 이억수, 최응룡·최영수 부자, 김신문, 채희연, 최후립·최홍립 형제, 박광조, 양정연, 김봉학, 정귀세, 강염, 고훈, 박언신, 이인우, 조효원, 신건, 박응주, 고묭룡, 하정, 김세근, 전용관 등 26명이다.

그런데 종용사 사당에는 오직 고경명과 고인후, 유팽로, 안영의 신위만 있고 나머지 의병들은 막좌, 사졸 신위로 뭉쳐 있다. 막좌의 신위도 별도로 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종용사에서 돌아 나오는 길에 기념관에 들른다. 기념관 입구에는 고경명의 친필 글씨 세독충정(世篤忠貞) 편액이 붙어 있다. 세독충정. “나라에 충성하고 오로지 독실하게 살아 절개를 지켜야 한다”는 의병장 고경명의 좌우명. 이 글씨를 보니 다시 한 번 마음이 숙연해진다. 그래, 고광순(1848-1907)같은 고경명의 후손도 한말에 나이 60세에 항일 의병장으로 나섰다가 구례 연곡사 계곡에서 순절하였다.

기념관 안을 들어서자 중봉 조헌의 의병활동을 그린 기록화가 눈에 들어온다. 국방강화 상소도, 근왕창의도부터 금산혈전 출진도, 금산혈전 순절도까지 모두 7편의 기록화이다. 기념관에는 주로 의병장 조헌의 기념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런데 한 곳에서 고경명이 쓴 문집 제봉집과 정기록 그리고 마상격문을 보았다. 마상격문에는 “마상격문은 고경명 선생이 1592년 6월 24일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출전하던 중 각도의 관원, 군인, 백성들에게 나라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을 일깨우기 위하여 말 위에서 작성하여 발표한 글이다” 라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광주로 돌아오는 길에 다시 한 번 의병장 고경명에 대하여 생각한다. 다음에는 광주광역시 남구에 있는 그의 생가터와 포충사 그리고 장성에 있는 묘소를 가보아야겠다.김세곤 (전남지방노동위원회 위원장)

무등일보         무등일보 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