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성의 남고문(南 顧 門)의 모습
구(舊) 나주 역을 알으십니까?
지금은 초라한 나주역이 역사의 뒤안 길로 사라지고,과거 일제 강점기에는 광주학생
사건의 중심의 역이었다. 지금은 나주시로 승격되어 나주역이 영산포쪽으로 새로 지어
나주시가지의 중심지역에 거대하게 나주역의 모습을 보아고 있다.
본인도 초라한 이 나주역의 역사에서 6 십년대의 가난을 물리치고 무언가 해보 고져 야간행
호남선에 몸을 실코,그리운 고향을 뒤로하고 서울로 상경을 하였으며, 농경사회를 탈출하여
도시로 진입을 하였다. 물론 상당히 큰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않고 ....
그의 앞에는 '나주시청'이 흥룡동이라는 동네에 자리를 하고 천년고도 나주목사골과
호남의 혁신도시와 함께 거대한 도시로 웅장한 과거와 현존이 어울리는 도시로 발전을 하고
있으며, 나주 동신대학교 그리고 한전공과대학이 나주에 세워져 우수한 인재들이 발굴되어
이 시대의 역군으로 태어 날 것 같다.
원래가 나주라는 곳은 천년고도의 4대 문과 읍성으로 형성되었으며, 위로는 금성산이 우람이
자리를 하고, 그 아래 장원봉 아래에는 나주향교가 조선사회에서 인재를 배출하는 교육의
기관으로 자리를 잡고 있으며,앞으로는 영산강이 유유히 서해로 흐르고 주변에는 배나무
과수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한때에는 영산포구와 함께 물산이 풍부하여 살기좋은 고장
수 많은 인재들이 배출되어 구국의 대열에서 서서 혁혁한 공을 세우기도 한 지역이다
구 나주역사(驛舍)는 원형 그대로 보존되어 오고 그 앞에는 역사 박물관이 있어 과거의
역사의 현장을 고사란히 지키고 있다.
일제 강점기때에도 신흥 명문가 출신의 '박준삼'씨는 일본 와세대 대학을 나오시고,어두운
일제 강점기의 나주에서는 깨어 있는 분이시다. 지금도 그의 집은 사대부 명문가 집으로
국가 문화재 263호로 지정이 되어있다.
또한 그의 친동생 '박준채'씨며 사촌누이가 '박기옥'씨이다. 그러니 광주학생사건의 발단의
주역이 나주에 사는 학생들이다. 물론 광주로 통학을 하다가 일본 학생들 하고 충돌이 되어
학생사건으로 번지고 ,결과적으로는 항일운동으로 비화를 하게 되었다.
나는 나의 친구 그러니 '박준삼'씨의 손자가 나의 초등학교 친구이다. 서울에서 화순으로 내려가서
친구집을 방문하였다가 그의 친구집안의 이야기를 하다가 '나주역이 있는 나주박물관'을 답사를
가게 되었다.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을 하는 '박기옥'여학생의 뒤로 딴 머리채를 가지고 일본남학생들이 희롱을
하다가 그 광경을 본 그의 사촌동생인 남학생 '박준채'라는 학생이 가만히 있을 수가 있을까?
희롱을 한 그 일본의 남학생을 박준채 학생이 두둘겨 패고 싸우다가 드디어 차안에서 우리나라
나주에서 광주로 통학하는 학생들하고,일본의 학생들하고 집단적으로 싸움이 벌어 진 것이다.
이 학생들은 광주로 학교로 돌아 갔으나,일본경찰은 우리학생들만 불리하게 처리를 하니,분통이터진
학생들이 가만히 있을까? 광주에 있는 모든 학교의 학생들이 일어나게 된 학생사건으로 번지다.
그렇지 않아도 , 우리 민족의 비애를 느끼고 ,갖은 일제의 침략에 울분이 터지는 마당에 학생들의
분화가 오죽하리오!
한글의 말살 교육,일본어를 국어로 하여 교육을 시키고, 쌀을 공출로 빼았아 가고 ,명주,무명등
돈이 되는 것은 영산포구를 통하여 목포 앞 바다로 해서 일본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때의 시대상이란 ? 일본총독의 모든 통치가 이루어지고,지식층들은 친일세력으로 끌려드리려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도록 하고, 강력한 경찰국가로 모든 통치를 하고, 지주와 친일세력들은 먹고 사는지
모르지만, 가난한 농촌은 소작쟁이로 전락을하고 ,한글을 모르는 세대가 8~90%가 문맹자라는 내용을
어디 책자에서 본 것 같다.
일본은 조선총독부산하에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치하여 8 년에 걸쳐 우리나라의 전국의 토지조사를
실시하여 거의 애매한 토지는 국유지로 환원을 해버리고, 그 국유지를 일본에 있는 자국민들이 조선으로
오도록 헐값에 불하하여 일본인은 졸지에 지주가 되기도 하며 일본인들의 이주정책이 시해되어 왔으며
조선은 완전히 일본인들로 잠식해 가고 ,소작농으로 전락하여 살기 힘이 들면 '북간도'로 머나먼 두만강을
넘어가는 우리 민족들이 있었으니....
신소설의 작가 '이인직'이나 춘원 이광수 같은분들도 관비로 일본으로 유학을 시켜 이인직도 결과적으로
친일에 편승한 글을 쓰고, 전국을 다니며 계몽이란 미명아래 친일정책에 동조를 하며,춘원 이광수도
나중에는 친일의 글을 쓰게 되고 말았다.
그리고 나주에는 '뻔데기 공장'이 있다, 이 공장도 일본놈이 운영하는 공장인데, 농민들에게 누애를
장려하여 '뻔데기' 즉 누애를 생산하여 명주를 생산하여 일본으로 가지고 가곤 하였다.
일제 강점기때 유독 '명주옷'과 목화'를 장려한 것은 일본은 기후가 습하여 이러한 의류들을 만들수
없어 조선민들에게 강제로 장려하여 일본으로 수탈하곤 하였다.
본인이 어렷을적에 나주 초등학교.그리고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닐때 '맛재'라는 재를 넘어 다니는데
재를 막넘으면, 크나 큰 배밭과 과수원이 있으며,일본놈이 왕년에 살았던 집 자리이기도 하다.
나주학생사건의 주인공 '박준채'씨도 일본의 와세다 경제학부를 다녔던 책자들을 나주역사 앞에 있는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슴을 알게 되었다.
역사는 말 없이 흘러 소리없이 지나고 있지만, 과거 우리 선대의 조상들은 그의 일제의 침략에 치한을
떨고, 삶의 질곡(桎梏)에서 신음을 하며 살아 왔을 것을 생각하니,괜시리 눈물이 흐름을 어이하리 ...
작금에도 일본의 아베는 우리나라의 사법부는 일제 강요에 의한 징용에 대한 배상판결을 보고
우리나라의 I.T 산업의 중요한 분야에 타격을 주어 우리나라를 보복으로 하고 있어, 옛 일제강점기를
모습을 보고 있는듯 하니 국민의 한사람으로써 답답한 마음뿐이다.
글쓴이/ 나주목 향토문화연구회 소속
첫댓글 "광주학생사건"의 발달이야기 글
자상하게도 올려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어제는 비바람 불고 춥더니
햇볕이 창가에 환하게 비추어 주어
따사롭게 느껴집니다.
늘 항상 고향을 지키시고 사시면서
많은글들을 올려 주셔서 배웁니다.
12월의 첫날에 행운을 빌어주면
모든분들에게 행운이 온다지요.
늘 항상 행운이 함께 하시길 빕니다.
감사합니다
사실은 고향으로 내려와서 어렷을적의 고향의 추억과 향토사나 향토의 문학을
즐기는 삶은 즐겁습니다 날씨가 추워지니 건강조심하십시요
잘 보았습니다
일본놈들은 죽어도 일본놈들입니다
절대로 이뻐지지 않는 ,,,??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도 치가 떨림니다
세월도 많이 흘렀지만 "광주학생사건"
그때를 상상 해봅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12월 첫날 모든 소원 성취 기원드립니다.
샛별사랑님 감삽니다
우리 민족의 비애를 폭로한것이지요
날씨가 추워짐니다 건강조심하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