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o-3]
1920년대 중반부터 10년간은 탱고의 1차 황금시대로 불린다. 프란씨스꼬 까나로, 로베르또 피르뽀, 오스발도 쁘레쎄도, 훌리오 데 까로 등이 연주, 작곡, 레코드 녹음으로 대활약을 하던 시대였다. 1926년에는 레코드 녹음 기술이 음성 취입에서 전기 녹음 방식으로 비약적으로 진보되어 탱고의 섬세한 표정도 표출할 수 있게 되었으며 동시에 연주가들의 기술도 한층 향상되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을 포함한 20년간은 탱고도 큰 시련을 겪었다. 1930년에 영화가 토키 방식으로 되었을 때 최초의 위기가 찾아왔다. 그때까지 무성 영화의 반주를 맡고 있던 많은 탱고 악단은 활동 무대를 잃었으며 재즈의 육성기를 맞아 대중 음악의 왕좌 위치를 위협받기 시작했다.
이 같은 위기에 불을 지른 사람은 까를로스 가르델이었다.
프랑스에서뿐 아니라 북미, 유럽의 무대에서 인기 절정이었던 그는 1935년 6월 뉴욕에서 돌아오던 중 콜롬비아에서 비행기 사고로 44세의 생애를 마쳤다. 가르델의 죽음을 전후하여 하강선을 긋고 있던 탱고의 인기에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새로운 리듬의 등장과 오케스트라의 악기 편선이나 연주 스타일의 변화였다. 재즈 등의 유행에 탱고도 무관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중립을 고수한 아르헨티나는 전쟁의 피해를 입지 않았고 전후에도 호경기가 지속되었다. 페론 대통령이 탱고 부흥책을 취했기 때문에 연주가들의 사기도 높았다.
19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중반에 걸친 제2의 황금시대가 시작되었다. 레코드에 LP 방식이 도입된 것은 1952년이었다. 또 1959년에는 스테레오 레코드가 탄생했다.
따라서 레코드의 혁명은 탱고에 다시 혁명을 주게 되었다. 바이올린과 반도네온이 3~5명, 피아노, 베이스, 여기에 가수 1~2명으로 구성된 그때까지의 형태에 비올라나 첼로도 추가되어 넓이와 깊이를 더한 음이 등장했다. 아르헨티나 탱고의 역사에서 1960~70년대는 침묵의 시대였다. 아르헨티나의 경제 파탄이 1970년대에 들어 심화되면서 우수한 연주가가 가수를 상시 고용하기 어려웠다. 탱고의 쇠퇴는 경제적 이유로 인한 우후 오르께스따의 편성도 축소되어 레코드 녹음이나 해외 공연 등의 특별한 경우에만 연주되는 스타일이 되었다. 그 결과 침체한 국내를 떠나 해외에서 연주하는 악단이 많아졌다. 1960~70년대는 왕년의 거장들을 차례로 잃어버린 시대이기도 했다.
탱고의 등불이 아주 꺼져버린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작곡가가 아스또르 삐아졸라(Astor Piazzola)이다. 그는 탱고에 독창적인 화음 개념을 끌어 와 1959년에 ‘Adios Nonino’를 발표한 이후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4계(As Quatro Estacoes Portenas)’ 등의 걸작을 발표하면서 탱고에 새로운 차원을 제시하고 그것들을 클래식 연주가들의 공연 목록에 포함시켰다. 1977년 아르헨티나 정부는 매년 12월 11일을 ‘탱고의 날’로 제정했다. 이날은 명가수 까를로스 가르델과 훌리오 데 까로의 탄생일이다. 이 제정에는 탱고가 세계를 석권했던 좋았던 시절에 대한 추억과 부흥의 기대가 모아져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