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존 칼빈,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 칼뱅(프랑스어: Jean Cal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 존 칼빈. 또는, 요한 칼빈은; 종교 개혁을 이끈, 프랑스의 기독교 신학자이다.
출생과, 학창시절:(1509년-1564년) 칼뱅이 처음으로 다녔던, 학교는; 누와용의 로마 가톨릭 참사회가 운영하던, 소년학교 까뻬뜨였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칼뱅은; 11살이 되던 해인, 1521년 5월부터, 대성당으로부터 성직록을 받을 수 있었다.
법학 공부 젊은 시절의 장 칼뱅
1527년 9월 27일 장 칼뱅은; 두 번째 성직록 장학금을; 받았다. 이것은; 누와용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인, 마르뜨비여(Martheville)의 쌩 마르뗑(Saint Martin) 사제직에서 생기는 수입이었다.
1527년 칼뱅의 아버지는; 누와용의 교회 참사회와 직무 상의 일로 인해,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는; 교회와의 마찰로 장학금이 취소될 지 모른다는 우려와, 아들의 출세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칼뱅에게, 신학보다는, 법학을; 공부하라고, 권유했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칼뱅은; 1528년 초 무렵. 유명한 법학자 피에르 드 레스뚜왈이; 강의하는, 오를레앙 대학교로 옮겼다. 레스뚜왈의 유식함은; 칼뱅에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오를레앙에서, 칼뱅은; 멜키오르 볼마르로부터, 그리스어를; 배웠다. 이 기간에 사귄 다른 친구들로는, 프랑수와 다니엘, 프랑수와 드 꼬낭, 니꼴라 뒤쉐맹 등이; 있다. 1529년 여름에, 칼뱅은; 친구 프랑수와 다니엘, 니꼴라 뒤쉐맹과; 함께, 부르쥬 대학교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는, 역사학파의 설립자이며, 법학자이자, 인문주의자인, 이탈리아 사람 안드레아 알키아티의 강의를; 들었다.
칼뱅은; 1531년 3월 니꼴라 뒤쉐맹의 <반박문>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갔다. 그는; 1531년 3월 6일에, 이 책의 서문을 썼다. 이것이; 칼뱅의 첫 출판물이 되었다.
칼뱅은; 파리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가 매우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누와용으로, 달려갔다. 그의 아버지는; 1531년 5월 26일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사망하기 2년 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되었기 때문에, 칼빈의 형. 샤를르는; 아버지를 교회 묘지에 매장하기 위해, 교회의 참사회와 협상하여야, 했다.
1530년 파리로 돌아간, 칼뱅은; 포르떼 대학에 정착하여,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1532년 4월 4일 칼뱅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의 <관용에 관하여>를; 주석하여 출판했다. 1532년 그는; 다시, 오를레앙으로 돌아와, 법률 공부를; 마쳤다.
■ 기독교 강요:
만성절(모든 성인의 날)인, 1533년 11월 1일. 새 학기를; 시작하는 공식 석상에서, 니꼴라 콥은; 교수들과, 고위 성직자들 앞에 두고, 기독교적 철학. 그리고, 법과 복음의 관계 등에 관해, 비판적인 연설을; 하게 되었다. 파리 국회는; 연설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며, 해명을 위해 소환 당하기 전에, 니꼴라 콥은; 도시를 빠져나갔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저주받은 루터 이단”을; 박해하기로, 결심했다.
칼뱅도; 자신의 도서들과, 편지들을; 남겨 둔 채, 당국에 체포되기 전에, 도시를; 몰래, 빠져나갔다. 그는; 파리 근교에 머물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그리고, 1533년 말. 혹은, 1534년 초 즈음에, 파리 남부의 생통쥬 지방으로, 갔다. 칼뱅은; 샤를르 데스뻬비여(Charles d'Espeville)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상당 기간 클레교구 목사이자, 앙굴렘에 있는, 개신교 교회의 참사회원이었던, 루이 뒤 띠예(Louis du Tillet)의 집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칼뱅은; 《기독교 강요》 초판을; 구상하였다.
1534년 4월 칼뱅은; 80세가 된, 르페브르(Jacuques Lef?vre d’Etaples, 1536년 사망)를 방문하기 위해, 네락(N?rac)으로, 갔다. 르페브르는; 마지막 시간을 네락에 있는 앙굴렘의 마르거리뜨 소유의 성에서, 보내고 있었다. 칼뱅은; 또한 클레락(Clairac)의 수도원에 살고 있었던 궁정 설교자 제라르 루셀도; 방문하였다. 1534년에 칼뱅은; 여러 가지 성직록에서 비롯된 수입을; 포기했다.
그 당시에는, 25세가 되어, 공식적으로 교회 봉사에 입문하지 않으면, 성직록을; 포기하는 것이; 관례였다.
칼빈은; 파리 근교에 머무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에띠엔느 들 라 포르쥬 그룹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아마도, 플람스의 설교자이자, 유명한 재세례파교회의 지도자인, 깡뗑 티프리를; 만났을 것이다. 파리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칼뱅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그가; 칼뱅과 만나기로 한 약속은; 성사되지 못했다. 세르베투스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뱅은; 뒤 띠예와; 함께, 끌레를 경유하여, 푸와티에르(Poitiers)에 있는, 지지자들에게; 갔다. 그리고, 칼뱅은; 그 곳 도시 외곽 생-브누와(Saint-Beno?t)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칼뱅은; 푸와티에르를 떠나, 뒤 띠예와; 함께, 오를레앙으로 여행 했으며, <영혼불멸>을; 집필했다.
1534년 10월 17일-18일 밤 성만찬 때, 면병과, 포도주가; 예수의 몸과 피로 변한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변화 교리에; 반대하는, 과격한 벽보가; 파리 전체(심지어는, 왕의 침실 문에도)와, 전국 각지에 나붙었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플래카드 사건. 즉, 벽보 사건이다. 이 문서의 기안자는; 앙뚜완느 마르꾸르였다. 그는; 리용에서 추방된 후, 뇌샤뗄의 주교가; 되었다.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는; 인문주의자 기욤 뷔데의 권고 등으로; 인해, 일단의 조치를; 취했으며, 파리에서의, 상황은; 점점, 더 험악해져 갔다. 11월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몇 달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칼뱅의 후원자요, 절친한 친구인, 에띠엔느 들 라 포르쥬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뱅과, 뒤 띠예는; 개신교에 대한 탄압을; 피해,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바젤로; 갔다. 칼뱅은; 바젤에서, 마르티아누스 루카누스(Martianus Lucanus)라는, 가명으로; 지냈다.
당시. 그의 동료로는, 바젤의 개혁가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의 후계자 오스발트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와, 스트라스부르크의 목사인, 볼프강 카피토 등이; 있다. 칼뱅은; 이 외에도 학자 세바스티안 뮌스터, 변호사 보니파키우스 아메르바흐, 미래의 제네바 동지인 피에르 비레 등과, 친분을; 쌓았다. 1536년 2월에는, 하인리히 불링거와도, 사귀게; 되었다.
1535년 6월 바젤에 정착하여, 1536년에 7월 12일에 사망한 에라스무스를; 칼뱅이 만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535년 6월 4일에는, 올리베땅에 의해, 불어 성서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라틴어로 된 추천 서문은; 칼뱅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으며, 신약성경 앞에 나오는, 두 번째 추천 서문은; 익명이지만, 1545년 이후부터는, 칼뱅의 것으로; 간주된다. 칼뱅은; 이 번역본의 개정 작업에도, 참여했다.
이 기간에, 칼뱅은; 고대 교회의 교부 중, 한 명인, 크리소스톰 주교의 설교집에 추천 서문을; 썼으며,
《기독교 강요》의 초판 작업도; 계속해, 나갔다.
《기독교 강요》는; 1535년에, 완성되었다.
칼뱅은; 이 책을;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하였다.
《기독교 강요》의 라틴어 초판은; 1536년 3월 바젤에서, 출판되었으며,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이 작품으로, 칼뱅은; 종교개혁의 주도적인, 신학자가; 되었다.
<기독교 강요>가; 출간되기 바로 직전인 1536년 2월. 칼뱅은; 이전에 사용했던 샤를르 데스뻬비여(Charles d'Espeville)라는 가명으로, 루이 뒤 띠예와;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그는; 개혁정신을 가진, 국왕 루이 12세의 딸이며,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의 친척인 레나타(Renata, Ren?e) 공작 부인의 페라라 궁정에서,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수 주간 머물렀다.
페라라에서, 칼뱅은; 프랑스로부터 피신해 온 개신교도들과; 만났는데, 그 중에는, 프랑스의 시인 클레망 마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빈과, 뒤 띠예는; 아오스타를 거쳐서, 바젤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망명객의 귀환을 허용하는 임시 특별 사면과 6개월 안에 공개적으로 이단과 관계를 단절해야만 한다는 내용의 특별 사면이; 포고되자, 칼뱅은; 프랑스로, 곧장 떠났다. 그는; 파리에 있는 친구들을 방문하였고, 프랑스를 영원히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자신의 일을; 정리했다.
동생 앙뚜완느와, 마리가; 그와 동행했다. 그는; 슈트라스부르크로 가서, 조용히 공부를; 마칠 계획이었지만, 프랑스 왕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의 이동을 피해, 우회하여 갈 수밖에 없었다. 칼빈은; 하룻밤을 묵어가기 위해, 우회로인 제네바에, 들렀다.
첫 번째 제네바 체류 시절:(1536년-1538년)
칼뱅을; 제네바에 머울도록 한, 기욤 파렐.
1536년 당시의 제네바는; 약 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1526년 사부와 공작령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으며, 베른과 프라이부르크의 주들과 시민연대라 불리는 상호 방위 동맹을; 맺고, 있었다.
제네바의 로마 가톨릭 주교 피에르 들 라 봄은; 주로, 사부와의 원조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네바에서, 사부와 공작의 세력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1532년 이후. 개신교 주(洲)가 된, 베른을; 계기로 삼아,
기욤 파렐과, 그를 돕던 사람들은; 1532년 10월 이래, 줄곧 제네바에 종교개혁운동을; 도입하려고, 노력하였다.
베른의 도움에; 힘입어, 제네바는; 이 시기에, 사부와의 공작과, 로마 가톨릭 교회 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데, 성공했다. 1536년 5월 21일에, 제네바의 모든 시민은; 파렐의 지휘 아래, 종교개혁을; 수용하기로, 맹세했다.
1534년 공식적으로 제네바의 목사가 된, 파렐은; 칼뱅이 제네바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칼뱅에게 찾아가, 제네바에 남아서, 이 도시의 종교개혁을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거절하던 칼뱅은; 결,국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에 그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썼다. “ 기욤 파렐은; 조언과 간곡한 경고로서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저주로서, 나를; 제네바에 붙들어 두었다. 이는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나에게 얹어 잡으시려는 것 같았다. ”
10월에, 파렐과, 삐에르 비레는; 칼뱅과 함께, 로잔에서 열린, 공개 종교 토론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칼뱅은; 교부들에 대한, 지식으로, 매우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일설에; 의하면, 칼뱅은; 북아프리카 히포 교회의 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을; 책 페이지와, 줄 수까지, 정확하게; 인용할 정도로, 대단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제네바로 돌아가기 전에, 베른에서 열린 또 다른 종교회의에 참석했다.
※ 칼뱅은; 1558년~1559년의 겨울 동안, 심하게; 앓았다. 1564년 5월 27일에, 그는; 사망하였다.
■ "교리"에; 대한, 평가:
칼뱅은; 장로교의 뿌리다. 그는; 목사·교사·장로·집사로 구성된, 교회직제의 기초를; 세웠다.
칼뱅은;
“하나님이; 구원과, 멸망을; 이미. 예정해; 놓았다.
그걸, 바꿀 수는; 없다.
사람은; 단지, 신의 영광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는, 예정설을; 주창했다.
그의 예정설을; 놓고, 개신교 내부에서도, 격한 논쟁이; 일었다.
제네바 소재 종교개혁박물관의 이사벨 그래슬레 소장은;
“칼뱅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신화와 폭군’ 사이에서, 아직도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역사적 진실은; 이 둘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한 바; 있다.
http://blog.daum.net/nhs9323/1575393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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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log.daum.net 원문보기 글쓴이: 한라산
첫댓글 존 칼빈 ( 장 칼뱅), 기독교 강요 감사합니다.
좋은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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