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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한라산 추천 2 조회 35 15.06.26 15:06 댓글 3
게시글 본문내용

 

칼빈, 칼뱅:(Jean Calvin, 1509~1564)

 

장 칼뱅(프랑스어: Jean Calvin, 1509710- 1564527),

존 칼빈. 또는, 요한 칼빈은; 종교 개혁을 이끈, 프랑스기독교 신학자이다.

 

 

출생과, 학창시절:(1509-1564)

칼뱅이 처음으로 다녔던, 학교는; 누와용의 로마 가톨릭 참사회가 운영하던, 소년학교 까뻬뜨였다.

아버지의 노력으로, 칼뱅은; 11이 되던 인, 15215부터, 대성당으로부터 성직록을 받을 수 있었다.

 

 

법학 공부

젊은 시절의 장 칼뱅

 

1527927일 장 칼뱅은; 두 번째 성직록 장학금을; 받았다.

이것은; 누와용에서 멀지 않은 작은 마을인, 마르뜨비여(Martheville)의 쌩 마르뗑(Saint Martin) 사제직에서 생기는 수입이었다.

 

1527 칼뱅아버지는; 누와용교회 참사회와 직무 상의 일로 인해, 마찰을; 빚게, 되었다.

그는; 교회와의 마찰장학금취소될 지 모른다는 우려와, 아들의 출세를 바라는 마음 때문에,

칼뱅에게, 신학보다는, 법학을; 공부하라고, 권유했다.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칼뱅은; 1528년 초 무렵. 유명한 법학자 피에르 드 레스뚜왈이; 강의하는, 오를레앙 대학교로 옮겼다.

레스뚜왈의 유식함은; 칼뱅에게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오를레앙에서, 칼뱅은; 멜키오르 볼마르로부터, 그리스어를; 배웠다.

이 기간에 사귄 다른 친구들로는, 프랑수와 다니엘, 프랑수와 드 꼬낭, 니꼴라 뒤쉐맹 등이; 있다

1529 여름에, 칼뱅은; 친구 프랑수와 다니엘, 니꼴라 뒤쉐맹과; 함께, 부르쥬 대학교로 옮겨 갔다.

그곳에서는, 역사학파설립자이며, 법학자이자, 인문주의자인, 이탈리아 사람 안드레아 알키아티강의를; 들었다.

 

칼뱅은; 15313 니꼴라 뒤쉐맹<반박문>을; 가지고, 파리로; 돌아갔다.

는; 153136일에, 이 서문을 썼다. 이것이; 칼뱅출판물이 되었다.

 

칼뱅은; 파리에 머무는 동안, 아버지가 매우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누와용으로, 달려갔다.

그의 아버지는; 1531526 사망했다.

그의 아버지는; 사망하기 2년 전. 로마 가톨릭 교회로부터; 파문되었기 때문에,

칼빈의 형. 샤를르는; 아버지를 교회 묘지에 매장하기 위해, 교회의 참사회와 협상하여야, 했다.

 

1530 파리로 돌아간, 칼뱅은; 포르떼 대학정착하여, 히브리어를; 공부하였다.

153244 칼뱅은; 루키우스 안나이우스 세네카<관용에 관하여>를; 주석하여 출판했다.

1532 는; 다시, 오를레앙으로 돌아와, 법률 공부를; 마쳤다.

 

 

 

 

 

기독교 강요:

 

만성절(모든 성인의 날)인, 1533111. 새 학기를; 시작하는 공식 석상에서,

니꼴라 은; 교수들과, 고위 성직자들 앞에 두고, 기독교적 철학. 그리고, 복음관계 등에 관해, 비판적인 연설을; 하게 되었다.

파리 국회는; 연설내용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으며, 해명을 위해 소환 당하기 전에, 니꼴라 은; 도시를 빠져나갔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저주받은 루터 이단을; 박해하기로, 결심했다.

 

 

칼뱅도; 자신의 도서들과, 편지들을; 남겨 둔 채, 당국체포되기 전에, 도시를; 몰래, 빠져나갔다.

는; 파리 근교에 머물다가, 다시 도시로; 돌아왔다.

 

그리고, 1533년 말. 혹은, 1534년 초 즈음에, 파리 남부의 생통쥬 지방으로, 갔다.

칼뱅은; 샤를르 데스뻬비여(Charles d'Espeville)라는 가명을 사용하면서, 상당 기간 클레교구 목사이자,

앙굴렘에 있는, 개신교 교회참사회원이었던, 루이 뒤 띠예(Louis du Tillet)의 집에, 머물렀다.

이곳에서, 칼뱅은; 기독교 강요초판을; 구상하였다.

 

15344 칼뱅은; 80세가 된, 르페브르(Jacuques Lef?vre d’Etaples, 1536년 사망)를 방문하기 위해, 네락(N?rac)으로, 갔다.

르페브르는; 마지막 시간을 네락에 있는 앙굴렘의 마르거리뜨 소유의 에서, 보내고 있었다.

칼뱅은; 또한 클레락(Clairac)의 수도원에 살고 있었던 궁정 설교자 제라르 루셀도; 방문하였다.

1534년에 칼뱅은; 여러 가지 성직록에서 비롯된 수입을; 포기했다.

 

당시에는, 25가 되어, 공식적으로 교회 봉사에 입문하지 않으면, 성직록을; 포기하는 것이; 관례였다.

 

칼빈은; 파리 근교에 머무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 에띠엔느 들 라 포르쥬 그룹을; 방문했다.

그곳에서, 아마도, 플람스의 설교자이자, 유명한 재세례파교회지도자인, 깡뗑 티프리를; 만났을 것이다.

파리에서, 약학을; 공부하고 있었던, 미카엘 세르베투스는; 칼뱅을 만나고 싶어 했지만,

그가; 칼뱅과 만나기로 한 약속은; 성사되지 못했다. 세르베투스가;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칼뱅은; 띠예와; 함께, 끌레를 경유하여, 푸와티에르(Poitiers)에 있는, 지지자들에게; 갔다.

그리고, 칼뱅은; 그 곳 도시 외곽 생-브누와(Saint-Beno?t)에서 설교를 하기도 했다.

칼뱅은; 푸와티에르를 떠나, 띠예와; 함께, 오를레앙으로 여행 했으며, <영혼불멸>을; 집필했다.

 

 

15341017-18일 밤 성만찬 때,

면병과, 포도주가; 예수로 변한다는, 로마 가톨릭교회성변화 교리에; 반대하는, 과격한 벽보가;

파리 전체(심지어는, 왕의 침실 문에도)와, 전국 각지에 나붙었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플래카드 사건. 즉, 벽보 사건이다.

문서기안자는; 앙뚜완느 마르꾸르였다. 는; 리용에서 추방된 후, 뇌샤뗄의 주교가; 되었다.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는; 인문주의자 기욤 뷔데의 권고 등으로; 인해, 일단의 조치를; 취했으며,

파리에서의, 상황은; 점점, 더 험악해져 갔다.

11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몇 달 동안에, 많은 사람들이; 처형되었는데,

그 가운데는 칼뱅후원자요, 절친한 친구인, 에띠엔느 들 라 포르쥬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뱅과, 띠예는; 개신교에 대한 탄압을; 피해, 스트라스부르를; 거쳐, 바젤로; 갔다.

칼뱅은; 바젤에서, 마르티아누스 루카누스(Martianus Lucanus)라는, 가명으로; 지냈다.

 

 

당시. 동료로는, 바젤개혁가 요하네스 외콜람파디우스후계자 오스발트 미코니우스(Oswald Myconius)와, 스트라스부르크목사인, 볼프강 카피토 등이; 있다.

칼뱅은; 이 외에도 학자 세바스티안 뮌스터, 변호사 보니파키우스 아메르바흐, 미래제네바 동지인 피에르

비레 등과, 친분을; 쌓았다.

15362월에는, 하인리히 불링거와도, 사귀게; 되었다.

 

15356 바젤정착하여,

1536년에 712일에 사망에라스무스를; 칼뱅이 만났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153564일에는, 올리베땅에 의해, 불어 성서 번역본이; 출판되었다.

라틴어로 된 추천 서문은; 칼뱅이; 직접 작성한 것이었으며,

신약성경 앞에 나오는, 두 번째 추천 서문은; 익명이지만, 1545 이후부터는, 칼뱅의 것으로; 간주된다 

칼뱅은; 이 번역본개정 작업에도, 참여했다.

 

 

기간에, 칼뱅은; 고대 교회교부, 인, 크리소스톰 주교설교집에 추천 서문을; 썼으며,

 

기독교 강요초판 작업도; 계속해, 나갔다.

 

 

 

기독교 강요는; 1535에, 완성되었다.

 

칼뱅은; 이 을; 프랑스의 국왕 프랑수아 1세에게, 헌정하였다.

 

 

기독교 강요라틴어 초판은; 15363 바젤에서, 출판되었으며, 빠른 속도로 전파되었다.

 

 

 

작품으로, 칼뱅은; 종교개혁주도적인, 신학자가; 되었다.

 

 

<기독교 강요>가; 출간되기 바로 직전15362. 칼뱅은; 이전에 사용했던 샤를르 데스뻬비여(Charles d'Espeville)라는 가명으로, 루이 뒤 띠예와; 함께, 이탈리아로; 여행했다.

 

그는; 개혁정신을 가진, 국왕 루이 12세의 이며, 프랑스 왕 프랑수와 1세의 친척인 레나타(Renata, Ren?e) 공작 부인의 페라라 궁정에서, 같은 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수 주간 머물렀다.

 

페라라에서, 칼뱅은; 프랑스로부터 피신해 온 개신교도들과; 만났는데,

그 중에는, 프랑스의 시인 클레망 마로도; 포함되어, 있었다.

 

 

칼빈과, 띠예는; 아오스타를 거쳐서, 바젤로; 돌아왔다.

 

프랑스에서 망명객의 귀환허용하는 임시 특별 사면6개월 안에 공개적으로 이단과 관계를 단절해야만 한다는 내용의 특별 사면이; 포고되자, 칼뱅은; 프랑스로, 곧장 떠났다.

그는; 파리에 있는 친구들을 방문하였고,

프랑스를 영원히 떠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자신의 을; 정리했다.

 

동생 앙뚜완느와, 마리가; 그와 동행했다.

그는; 슈트라스부르크로 가서, 조용히 공부를; 마칠 계획이었지만,

프랑스 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사이에, 전쟁이 발발하자, 군대의 이동을 피해, 우회하여 갈 수밖에 없었다. 칼빈은; 하룻밤을 묵어가기 위해, 우회로제네바에, 들렀다.

 

 

첫 번째 제네바 체류 시절:(1536-1538)

 

칼뱅을; 제네바에 머울도록 한, 기욤 파렐.

 

1536 당시제네바는; 약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1526 사부와 공작령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으며, 베른과 프라이부르크의 주들과 시민연대라 불리는 상호

방위 동맹을; 맺고, 있었다.

 

제네바로마 가톨릭 주교 피에르 들 라 봄은; 주로, 사부와의 원조에; 의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제네바에서, 사부와 공작의 세력을; 회복시키고자, 노력하였다.

 

 

한편, 1532 이후. 개신교 주(洲)가 된, 베른을; 계기로 삼아,

 

기욤 파렐과, 그를 돕던 사람들은; 153210 이래, 줄곧 제네바종교개혁운동을; 도입하려고, 노력하였다.

 

베른의 도움에; 힘입어, 제네바는; 이 시기에, 사부와의 공작과, 로마 가톨릭 교회 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데, 성공했다.

1536521에, 제네바의 모든 시민은; 파렐지휘 아래, 종교개혁을; 수용하기로, 맹세했다.

 

1534 공식적으로 제네바목사가 된, 파렐은; 칼뱅제네바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는; 칼뱅에게 찾아가, 제네바에 남아서, 이 도시종교개혁을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거절하던 칼뱅은; 결,국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에 그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썼다.

기욤 파렐은; 조언과 간곡한 경고로서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저주로서, 를; 제네바에 붙들어 두었다. 이는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나에게 얹어 잡으시려는 것 같았다. ”

 

10월에, 파렐과, 삐에르 비레는; 칼뱅과 함께, 로잔에서 열린, 공개 종교 토론에 참석했다.

 

 

그곳에서, 칼뱅은; 교부에 대한, 지식으로, 매우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일설에; 의하면,

은; 북아프리카 히포 교회교부 아우구스티누스을;

페이지와, 지, 정확하게; 인용정도로, 대단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제네로 돌아가기 전에, 베른에서 열린 또 다른 종교회의에 참석했다.

 

※ 칼뱅은; 1558~1559겨울 동안, 심하게; 앓았다.

1564527에, 는; 사망하였다.

 

 

"교리"에; 대한, 평가:

 

은; 장로교뿌리.

는; 목사·교사·장로·집사로 구성된, 교회직제기초를; 세웠다.

 

 

 

칼뱅은;

 

하나님이; 구원과, 멸망을; 이미. 예정해; 놓았다.

 

그걸, 바꿀 수는; 없다.

 

 

사람은; 단지, 영광을 위해, 살아갈 뿐이다.는, 예정설을; 주창했다.

 

 

예정설을; 놓고, 개신교 내부에서도, 격한 논쟁이; 일었다.

 

 

제네바 소재 종교개혁박물관이사벨 그래슬레 소장은;

 

칼뱅에 대한, 평가를; 둘러싸고, 신화와 폭군사이에서, 아직도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역사진실은; 사이에, 놓여; 있다.고, 말한 바; 있다.

 

 

 

 

 

 

 

 

 

 

http://blog.daum.net/nhs9323/1575393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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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5.06.26 19:02

    첫댓글 존 칼빈 ( 장 칼뱅), 기독교 강요 감사합니다.

  • 15.09.24 14:03

    좋은글 감사합니다.

  • 16.10.31 23:10

    좋은 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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