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梅花 봄 / 김용옥
매신梅信이 온다. 꽃샘바람을 타고 꽃샘눈마저 느닷없이 흩날리는 풋봄에. 면사포를 두른 듯 안개 자욱이 낄리는 아침이면 매화향이 맡아진다. 목이 칼칼하니 매운 듯 향그러운 꽃내.
베란다 꽃밭에 매화 한두 송이 튼다. 오래도록 말없이 마주하고 있다. 아침안개가 햇살에 걷힌다. 연두색 꽃받침에 받쳐져 희다 못해 푸른 꽃이파리에 꽃수술조차 미백색이어서 창백한 청악매, 남몰래 한바탕 울고 울어서 마음조차 맑게 씻어진 눈망울 같다.
매화향기가 술렁술렁 나를 흔든다. 매화봄을 맞으러 나들이 가잔다.
무시로 드나들 수 있는 경기전. 내겐 친정집 안마당 같은 곳 그곳엔 사방 돌담에 가려진 채 조촐하고 절개있는 청상처럼 매화가 서있다. 얼마나 긴 세월이었을까.
매화나무는 대부분, 어릴 적엔 위로 주욱 자란다. 그러다 해묵을수록 팡파짐하고 둥시런 조선치마폭을 펼쳐놓은 듯이 사지를 팔방으로 벋으며 넉넉하게 자란다.
그런데 경기전 안뜰의 다섯 그루 매화목은 볼품없을 정도로 야위고 뼈만 남은 모양새다. 은행나무와 대나무 곁에서 마른 몸을 키워 올린 채 하늘 끝에 숭고한 소원을 매단 듯 피었다. 한 그루는 갈라지고 부러진 등걸에 여린 새순이 올라, 풍상을 견뎌온 흔적대로 둥글고 마디지며 권속 하나 없이 늙은 깨끗한 청상처럼 쓸쓸하다. 두 겹짜리 겹매화목이다.
그 수령을 알지 못하지만 경지에 닿을 만큼 해묵어서일R가. 꽃모양이 단아하면서도 소담하고 꽃송이가 성글면서도 결코 부족함이 없다. 마치 소치小癡 선생의 노매도老梅圖처럼. 그 앞에 서니 화식火食으로 배불리 먹은 내가 부끄럽다. 꽃 앞에서 부그러워지는 것이다.
영등바람 소스리바람이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음력 2월 경칩이 지나고 올매화 피기 시작하면 넘매화 만발하기까지 매화봄이 이어진다. 고요한 행복의 한달.
자투리시간에 발길 잫기 가까운 곳을 찾는다. 전주 고사동 담배인삼공사 정원의 매화를 올 들어 네 번째 문병갔다. 작년에 병색이 너무 깊었다. 병충해가 엉겨붙어 꽃조차 깨끗하게 벙글어보지 못하여 마음 아팠는데.
매화는 가차없이 잘라주라 했던가. 한쪽이 밑둥치까지 도려졌지만 새끼손가락 굵기로 죽죽 솟아오른 유록색 새 가지에 시린 빛을 토하는 백화가 열렸다. 그래, 다시 일어섰구나. 그러면서 살아가는 거란다. 병고에서 일어선 해맑은 안색이다. 정결하다. 오래 바라본다.
해가 깊을수록 기품있는 매화목. 굳은 가지에 붙을수록 청초하고 고아한 매화목. 잘 늙기가 어렵다는데, 이 매화목처럼만 늙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매화꽃 피고 피는 봄을 어리하리.
이제 승암산과 기린봉 자락을 들락거려야지. 선린사 안뜰까지 가 봐야지.
좁은목 약수터에서 무색, 무취, 무미의 물 한 모금으로 목울대를 행구고 가파른 동고사東固寺길을 깊은 숨 들이쉬며 오른다. 일부러 더디게 돌아가는 것이다.
동고사에서 쉬엄쉬엄 내려오면 일광암 종가 아래 괴불주머니도 내려다보고 성불사 둔덕에 청매 한 쌍과 금강봄맞이와 개구리발톱꽃들이 아리잠잠하게 펼쳐진 풀꽃 잔치상도 받는다. 길을 고부라들면, 보석사로 오르기 전 골물 졸졸 흐르는 옆에 팡팡한 중년아낙 같은 매화 한 그루, 거기 서 있다.
그 풍성한 매화 한 그루만 덩거러니 지키는, 슬레이트 지붕 인 허름한 블록 가옥의 주인은 늘 견공이다. 매화 꽃 그늘 아래 우두커니 섰는 낯선 이를 향해 반기듯이- 사람냄새가 그리웠을까- 고개를 하늘 향해 치어들고서 크어엉 크어엉 부드러이 소리한다. 그 울림에일까. 꽃잎이 하늘하늘 져 날린다. 양 볼에 매화꽃잎 같은 하얀 점을 가진 박새 소리도 쯔비 쯔비 들려오고.
김홍도가 생각난다.
밥술이나 뜨고 사는 웬 양반이 김홍도에게 매화도梅花圖 한 폭을 부탁하는데, 화가畵價가 자그마치 3,000냥이것다.
김홍도는 하는 양을 보니,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도 그림 그려줄 생각을 아니한다. 웬 호사인지 둘레둘레 매화나무를 심느라고 2,000냥을 써버린다는 소문뿐. 이제냐 저제냐 눈치만 보는 판인데, 매화꽃 벙글었다고 매화연만 벌이것다. 주안값으로 800냥을 홀닥 마셔버렸다니 안달이 난 건 주문자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렇게 해가 바뀌고 바뀌자 김홍도가 매화그림을 그려 주었는데 그 그림에 든 화구값은 겨우 200냥이었단다.
그림을 그리는 일에만이랴. 글을 쓰는 데도 이래야지.
난정蘭情을 알아야 난초를 칠 수 있다 했듯이 매화정梅花情을 알아야 매화를 써낼 수 있다고 할까.
저 우직하고 둔탁한 등걸에 꽃 한 송이도 우연히 터지는 법은 없다. 그 아무도 돌보지 않고 사람 손으로 물 한 모금 햇빛 한줌 내려주지 않아도, 매몰스러울 정도로 지켜온 생명력이 꽃피는 것이다.
어찌, 어느 날 들뜬 만으로 찾아가 환하게 부시게 핀 매화 한번 완상하였다고 매화를 안다 할 수 있을꼬. 매화가 마음에 가꾸어져야 그 깨끗한 꽃망울과 맵고 서늘한 향기가 저절로 우러나지.
사람과의 깊은 정도 이러할 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