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설동역
조재선
가끔 지하철 1호선 신설동역을 지날 때가 있다. 집에서 가까운 역과 신설동역 사이를 왕복하는 곁가지 노선이 있어서 국철로 갈아탈 때 요긴하다. 차 없이 출근할 때 신설동역을 거쳐 직장이 있는 녹천역까지 가면 대부분 구간이 지상 노선이다. 창밖 풍경을 구경할 수 있어서 좋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고 있으면 열차 소리가 반주처럼 들린다. 창밖으로 보이는 사물들이 곡조에 맞춰 춤을 춘다. 오늘도 집으로 돌아올 때 신설동역을 지나왔다. 화강암을 깎아서 만든 계단들이 오래된 사찰의 돌계단처럼 윤이 나고 미세하게 닳아 있었다. 세월의 흔적이 역력했다. 이 돌들은 어디서 왔을까? 한때 육중한 산봉우리의 뼈대였을 이 납작한 돌의 고향은 어디일까?
평생 서울에 살면서 신설동역 환승구간에 있는 돌계단을 무수히 디뎠다. 맨 처음 신설동역에 와 본 건 이모와 사촌들과 함께였다. 이모는 새마을 시장 안에 있던 선술집 위층에 세 들어 살고 있었다. 간혹 소포나 편지를 보낼 때는 번지수를 적고 그 옆에 ‘모아 살롱 2층’이라고 썼다. 얼마 전에 새마을 시장에 갈 일이 있어서 지나는 길에 들러보니 이모가 살았던 2층 건물이 시장통 한가운데 그대로 남아 있었다. 다만 선술집은 점집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사이 술에 취하는 것보다 운명을 예견하는 쪽이 더 중요한 약삭빠른 시절이 되었나 보다.
그날 이모는 긴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몸이 너무 가녀려서 원피스가 헐겁게 느껴졌다. 신설동역 환승 구간은 군데군데 반 층 정도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오게 되어 있다. 이모는 그 구간 어디선가 겨울철 꼬마들이 얼음을 두 발로 지치는 시늉을 했다. 그때만 해도 새로 지은 환승구간이라 바닥이 미끈해서 몇 걸음만큼은 관성으로 미끄러져 갔다. 늘 초조하고 걱정이 많은 엄마에게는 찾아보기 힘든 천진함과 낙천적 태도가 이모에게는 있었다. 동생이란 그런 것이다.
이모는 그해 대전 목동에서 운영하던 의상실을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모는 항상 김정숙이라는 원래 이름 대신 김젬마라는 세례명으로 자신을 소개했는데 ‘리라 의상실’이라고 적힌 명함에도 김젬마라고 새겼다. 재봉틀로 숙녀복이나 아동복을 지어서 식구들을 부양하고 의과대학에 다니던 시동생의 대학 등록금을 댔다. 가끔 엄마와 여동생 옷을 지어서 서울로 보내주었다.
대학생 때 아침마다 신설동역에서 내려서 대광고등학교 앞까지 걸어가서 버스를 탔다. 버스로는 딱 두 정거장이지만 제기역에서 하천을 따라 하염없이 걷는 것보다는 그편이 빨랐다. 지금은 철거된 고가도로 곁을 걷다 보면 오른쪽으로 장의사를 지나치게 되었다. 장의사라는 게 문을 열어 놓고 영업하는 곳이 아니므로 안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는 없었다. 어떤 날은 아침부터 문이 열려 있었다. 그러면 누군가 간밤에 세상을 떠났나 했다. 매일 아침 장의사 앞을 지나니까 익숙해질 만도 한데 번번이 으스스한 느낌이 들었다.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 그런 기분이었다.
나중에는 그 앞을 지나갈 때마다 성모송이라는 짧은 기도를 바쳤다. 혹시 지난밤 누군가 선종했다면 좋은 곳으로 가기를 기원했다. 아무튼 그 순간만큼은 지각을 하지 않으려고 뛴다든지, 중간고사에 어떤 문제가 출제될지 짐작한다든지, 군 복무를 어떻게 할 건지, 취업을 어떻게 할 건지 고민하는 일이 그다지 의미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죽음에 대한 상념은 늘 그랬다.
얼마 전 그 앞을 차로 운전해 지나다 보니 장의사가 없어졌다. 대신 그 자리에는 근사한 커피숍이 생겼다. 어릴 적 친구들과 했던 무서운 이야기, 공동묘지를 없애고 지은 초등학교 이야기가 생각났다. 장의사를 운영했던 아저씨도 돌아가셨을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묘했다. 평생 죽은 이를 대했던 분은 자기의 죽음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한번은 신설동역에서 대만 아가씨 두 명을 만난 일도 있었다.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 때였다. 선배들과 당일치기로 청평으로 놀러 가던 길이었다. 머리가 길고 큰 귀걸이를 찬 두 명의 아가씨가 영어로 길을 물었다. 매일 다니는 길이었지만 외국어로 길을 가르쳐 주려니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자로 써서 알려 주는 건 얼추 되어서 필담으로 길을 알려 주었다. 그녀들이 함께 사진을 찍고 싶다고 해서 승강장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주소를 물어보길래 대학교 학과 주소와 이름을 역시 한자로 알려 주었다. 여름 방학을 마치고 개강했더니 학과 우편함에 봉투 가장자리가 빨간색과 파란색 선으로 알록달록하게 인쇄된 국제 우편물이 도착해 있었다. 어쩌다 대만에 갈 일이 생기면 그 사람들이 여기 어딘가에 살고 있겠다고 생각하게 된다.
언젠가는 환승구 굽은 구간에서 어떤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자기 가방을 던져 놓고 도망가고 있었다. 여학생이 어찌나 재빠르던지 남학생을 따라잡아서는 옷가지를 붙잡았다. 어린 시절 다방구나 얼음땡을 할 때처럼 친구같이 어울리는 그 두 사람이 보기 좋았다. 우리 때는 연애도 공부나 학생 운동처럼 치열하고 의미를 깊게 담아서 하는 분위기였다. 그때는 쾌활함이라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삶의 덕목인지 잘 몰랐다. 살다 보면 나이가 들어도 유연하고 유머 감각이 넘치는 사람을 종종 마주친다. 자기와 남에게 관대하며 조용한 자신감이 있는 사람을 만나면 수지맞은 기분이다.
오늘 신설동역에서는 일본 관광객 셋이 성수역으로 가는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서울의 일본어 표기인 ‘ソウル’라고 적힌 관광 안내 책자를 들고 있었다. 갑자기 각 나라는 어떤 유형의 젊은이를 길러내는지 궁금해졌다. 낯선 나라에 가서 길을 찾고 생존할 수 있는 능력, 그 사회의 특징을 포착하고 해석하는 능력, 경계를 넘어 다른 문화에서 살아온 사람들과 소통하는 능력, 낯선 곳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능력을 각 나라는 어떻게 가르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지상으로 달리는 이 짧은 왕복 지선이 있어서 좋다. 겨울에는 철길 위로 눈이 쌓여 그 풍경이 일품이다. 머나먼 채석장에서 잘려 나와 여기 신설동역 계단으로 붙박이 생활을 사십 년 넘게 한 화강암도 이제는 서울 생활이 제법 익숙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