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평윤씨 소정공파 인물사 내용 본 문중 인물사의 빈약한 자료를 안타까워 했으나 자료를 구하기 힘들어 애쓰던중 다행이 대종회 원로분의 도움으로 소정공파 인물사를 자료실에 올리게 된 것을 감사히 생각하며 그분의 조상님을 기리는 뜻을 세겨 잘 활용 하였으면 고맙 겠습니다 소정공파만을 ㄱ,ㄴ,ㄷ 순으로 정리했습니다 윤 강 (尹 絳 1597-1667) 소정공파 조선시대 문신. 본관 파평(坡平). 자 자준(子駿). 호 무곡(無谷).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셨다. 승문원(承文院)에 들어가 검열·봉교(奉敎)·정언·교리를 지냈다. 그 뒤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라 승지(承旨)가 되었으며, 이조참의(吏曹參議)·대사간을 지냈다. 한때 충원(忠原)현감으로 나갔으며,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이조참판·대사헌·도승지를 역임, 자헌대부(資憲大夫)가 되었다. 1659년 효종의 국상 때 예조판서로 빈전도감제조(殯殿都監提調)를 겸하였고, 의금부판사에 올라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었다. 인조·효종·현종 3조(朝)에 벼슬하였으나, 64년 민유중(閔維重)의 탄핵으로 사퇴, 안산(安山) 옛집으로 돌아가 여생을 마쳤다. 系譜 : 24世- 儼 25世- 民獻 26世- 絳
윤광소 (尹光紹) 1708 - 1783 소정공파 조선 후기의 문신. 자는 치승(稚承), 호는 소곡(素谷), 이조판서 동규(東奎)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신창맹씨(新昌孟氏)로 숙장(淑章)의 딸이다. 19세 때 생원시에 급제하고 1739년(영조 15) 의릉참봉(懿陵參奉)을 제수 받았다. 1740년(영조 16)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하고, 1744년(영조 20)에 시강원 겸 설서가 되었다. 같은해에 홍문관 수찬을 제수받아 이조 판서(吏曹判書)인 이종성(李宗城)과 같이『 속오례의(續五禮儀) 』를 수찬했다. 이때 그는 개원례(開元禮)에 의거하여 원본을 개정하는 한편, 그 차이점을 상세히 밝히고 문구를 교감하여 별도로『 고이(考異) 』를 첨가하기도 하였는데 그뒤 예(禮)에 밝다고 인정받아 여러 편찬사업에 참가하였다. 뒤에 사헌부지평에 제수되었으며, 이어 교리(校理), 사간(司諫), 필선(弼善), 승지(承旨), 공조참의(工曹參議), 이산 부사(理山府使), 병조 참판(兵曹參判) 등을 지냈다. 1755년 윤 지(尹 志)의 난에 관련되어 을해옥사(乙亥獄事 - 나주괘서사건) 때 투옥되었고 1776년(정조 즉위) 부사직(副司直)으로 정후겸(鄭厚謙)의 일파로 몰려 유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때마다 무고함이 밝혀져 복직되었다. 1786년 자헌대부지돈녕부사(資憲大夫知敦寧府事)가 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저서로는 『 소곡유고 』22권이 있고 편서로는 『 명재연보(明齋年譜) 』가 있다. 系譜 : 26世- 智敎 27世- 東奎 28世- 光紹 나주괘서사건(羅州掛書事件) 1755년(영조 31) 소론(少論)의 윤지(尹志) 등이 일으킨 모역(謀逆) 사건. 을해옥사(乙亥獄事)라고도 한다. 윤지는 숙종 때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1722년(경종 2) 임인무옥(壬寅誣獄)을 일으킨 김일경(金一鏡)의 옥사에 연좌되어 24년 나주로 귀양갔다. 오랜 귀양살이 끝에 노론을 제거할 목적으로 아들 광철(光哲)과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 이효식(李孝植) 등과 모의하여 동지규합에 나섰다. 이들은 수차의 변란으로 벼슬을 할 수 없게 된 부류들과, 소론 중에서 벼슬을 지낸 집안들을 흡수하고, 우선 민심동요를 위하여 55년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나주객사에 붙였는데, 이것이 윤지의 소행임이 발각되어 거사(擧事)하기 전에 붙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윤지는 영조의 직접 심문을 받고 2월에 박찬신(朴纘新)·김윤(金潤)·조동정(趙東鼎)·조동하(趙東夏) 등과 같이 사형당하였으며, 이광사(李匡師)·윤득구(尹得九) 등은 귀양갔다. 그 밖에도 윤지의 일당인 심정연(沈鼎衍)이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써서 체포되기도 하였다. 윤 지(尹 志) 1688~1755) 함안파 조선 후기의 문신. 나주괘서사건의 주모자. 자 사심(士心). 진사로서 1723년(경종 3) 문과에 급제하여 정언·지평을 지냈다. 24년 영조가 즉위하고 경종대의 신임옥사 때 큰 피해를 본 노론이 재기하여 그들을 모함했던 김일경(金一鏡)을 다스리게 되자 전 훈련대장이며 소론의 영수인 아버지 취상(就商)은 사형의 처분을 받고 자신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43년 벌이 감등되어 전라도 나주로 옮겨지고 이어 고향으로 축출되었다. 그 후로도 정치적 입지가 나아질 가능성이 없자 시국에 불만을 품은 나주목사 이하징(李夏徵)·이효식(李孝植) 등과 모의하여 소론 급진파 인물들을 규합해 나갔다. 먼저 민심을 흔들 목적으로 55년(영조 31) 나라와 노론을 비방하는 글을 나주의 객사에 붙였는데 소행이 발각되어 전라도관찰사 조운규(趙雲逵)에 잡혀 서울로 압송되었다. 즉시 국왕의 직접 심문을 받고 아들 광철(光哲),이하징,박찬신(朴纘新) 등과 함께 처형되었다.
윤광안(尹光顔) (1757~1815) 소정공파 조선시대 문신. 본관 파평(坡平). 자 복초(復初). 호 반호(盤湖). 1786년(정조 10) 정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교리를 지냈다. 대사간, 대사성, 충청도관찰사, 이조참의, 예조판서 등을 거쳐,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영양(英陽)의 운곡서원(雲谷書院)을 철거한 탓으로, 1808년(순조 8) 암행어사 이우재(李愚在)의 탄핵을 받아 무산(茂山)으로 유배되었으며, 이듬해 풀려났다. 편저서에 《윤충헌실기(尹忠獻實記)》가 있다. 系譜 : 26世- 恕敎. 27世- 東美. 28世- 光顔.
윤 단(尹 단) (1628-1675) 소정공파 *휘의 "단"은 "뭉칠단"임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 파평(坡平). 자 자상(字上). 호 매촌(梅村). 송시열(宋時烈)의 문인. 할아버지 황(煌)에게서 글을 배웠으며, 과거에 실패한 뒤 오로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문집에 《매촌유고(梅村遺稿)》가 있다. 系譜 : 23世 - 煌. 24世 - 文擧. 25世 - 단. 윤문거(尹文擧) (1606~1672) 소정공파 조선시대 학자. 字 여망(汝望). 號 석호(石湖). 諡號 충경(忠敬). 김집(金集)의 문인. 1630년(인조 8) 생원이 되고, 33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부교리 등을 지냈다. 36년 병자호란 때 인조를 남한산성(南漢山城)에 호종한 뒤 제천현감을 사퇴하였다. 52년(효종 3) 동래부사 때 교역 단속을 게을리하여 파직되었다. 그 뒤 관직을 사퇴하고 주자(朱子)연구에 전념하였다. 좌찬성(左贊成)이 추증되고, 연산(連山) 구산서원(龜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석호집》이 있고, 글씨에 뛰어나 <병판송암권징비(兵判松庵權徵碑)> <감사이춘광비(監司李春光碑)> <참판임광비(參判任광碑)> <참의시남유계비(參議市南兪棨碑)> <이응교수록비(李應敎綏祿碑)>(경기 양평) <집의윤선거표(執義尹宣擧表)> 등이 있다. 系譜 : 22세- 昌世. 23세- 煌. 24세-文擧. 윤민헌(尹民獻) (1562~1628) 소정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字 익세(翼世). 호는 태비(苔扉). 이조좌랑 윤엄(尹儼)의 아들로,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 1588년(선조 21)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160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자(正字). 전적(典籍). 형조정랑. 괴산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인조반정 이후에 군자감정(軍資監正). 장령(掌令) 등을 제수받았으며, 24년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를 공주(公州)로 호종하였다. 명리(名利)를 탐하지 말라는 성혼의 가르침을 깊이 새겼으며, 동문인 오윤겸(吳允謙) 등과 교유했다. 경사(經史)와 시문·글씨에 뛰어났는데, 시문은 아건(雅健)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글씨는 조맹부체(趙孟體)에 특히 능하였다. 채유후(蔡裕後)가 묘지명(墓誌銘)을 썼다. 系譜 : 22세- 之함(화할 함). 23세- 儼. 24세- 民獻. *이괄의난(李适의亂) 1624년(인조 2) 평안병사 이괄이 인조반정의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반란. 이괄은 인조반정에 공이 많았는데도 논공행상에는 반정계획에 늦게 참가하였다 하여 2등공신이 되었으며 한성부윤(漢城府尹)에 임명되었다. 그러던 중 관서(關西) 지방에 호인(胡人)이 침입할 염려가 있다 하여, 이괄을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의 부원수(副元帥) 겸 평안병사로 좌천시켜 평안도 영변(寧邊)에 머무르게 하였다. 이에 그의 불만은 더욱 커져 반란을 꾀하게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이러한 사실을 전교수(前敎授) 문회(文晦)의 밀고로 미리 알고 서울에 있던 이괄의 아들을 체포하였다. 이괄은 그의 부하 이수백(李守白), 기익헌(奇益獻), 구성부사(龜城府使)인 한명련(韓明璉)과 함께 가까운 병영(兵營)의 군사 1만여 명과 항왜병(降倭兵) 100여 명으로 먼저 개천(价川)을 점령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을 도체찰사(都體察使)로 삼아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는 한편, 반란군과 내응할 것을 염려하여 전 영의정 기자헌(奇自獻) 등 35명을 처형하였다. 반란군은 평안도의 순천(順川), 자산(慈山), 중화(中和), 황해도의 수안(遂安), 황주(黃州) 등을 차례로 점령하고 평산(平山)으로 진격하였다. 중앙에서 파견한 토벌군과 장만이 이끄는 추격군은 합세하여 저탄(猪灘)에서 반란군과 싸웠으나, 도리어 반란군에게 패하였고 반란군은 승승장구하여 경기도의 개성·벽제에 이르렀다. 이에 인조는 공주로 피란을 갔고 한성은 반란군에게 점령되었다. 이괄은 24년 2월 11일 선조(宣祖)의 열번째 아들 흥안군(興安君) 제(제당 제)를 왕으로 추대하였는데, 바로 그날 밤 장만은 패잔병을 수습하여 반란군을 한성 근교의 안령(鞍嶺)에서 대파(大破)하였다. 이괄은 패잔병을 이끌고 광희문을 빠져나와 경기도 이천(利川)으로 달아났으나, 전부대장(前部大將) 정충신(鄭忠信)의 추격을 받았다. 이에 이괄의 부하 기익헌,이수백 등은 자기들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이괄, 한명련 등 9명의 목을 베어 관군에 투항하여 반란은 평정되었다. 윤봉오(尹鳳五) (1688 - 1769). 소정공파. 조선의 문신. 자는 계장(季章), 호는 석문(石門), 창수공(諱: 明運)의 5 남이다. 1714년(숙종 40)에 형님인 병계 봉구(屛溪 鳳九)와 함께 생진 양시(生進 兩試)에 합격하고, 성균관(成均館) 유생(儒生)으로서 일찍이 왕세제(王世弟 -영조)를 측근에서 보필(輔弼)하여 1725년(영조 1)에 시직(侍直)이 되었다. 1746년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해 필선(弼善), 부수찬교리(副修撰校理)를 거쳐, 홍천현감(洪川縣監)으로 계셨고, 1749년(영조 25) 1월에 길주목사(吉州牧使)에 부임하시고, 1750년(영조 26)에 예조참의(禮曹參議), 그 이듬해인 1751년에 공조참의(工曹參議)를 거쳐, 1752년에 예조참의(禮曹參議), 이후 1759년(己卯)에 동지의금부사(同知義禁府事)로 계셨으며, 庚辰, 辛巳, 壬午의 3년동안 대사헌 첩지(大司憲 牒紙)를 받았으나 부임(附任)하지 않고, 1763년(영조 39)에 가의대부 특진관, 판돈령부사(嘉義大夫 特進官, 判敦寧府事)를 겸하고, 1768년(영조 44)에 사직(司直)을 거쳐 1769년(己丑)에 우참찬(右參贊)이 되고 70세가 넘어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다. 그의 형 봉구와 함께 문장에 능하였으며 명도선생(明度先生)의 화상찬(畵像贊)을 봉구가 이천선생(伊川先生)의 화상찬을 봉오가 썼는데 모두가 80세가 넘은 고령의 작품이다. 저서로는 「석문집」8권이 있으며 시호는 숙간(肅簡)이다. 系譜 : 24세- 飛卿. 25세- 明運. 26세- 鳳五. 윤봉구(尹鳳九) (1681~1767) 소정공파. 조선시대의 학자. 자 서응(瑞膺). 호 병계(屛溪)·구암(久菴). 시호 문헌(文獻). 1714년(숙종 40) 진사시에 급제, 25년(영조 1) 청도군수, 38년 집의(執義)를 지냈다. 41년 주자(朱子)를 송시열(宋時烈)의 영당(影堂)에 추봉(追奉)하게 하여 삭직되었다가 재등용되어 자의(諮議)·찬선(贊善) 등을 거쳐 판서가 되었다. 한원진(韓元震)과 함께 호락논쟁(湖洛論爭)에서 호론을 주장하였다. 강문8학사(江門八學士)의 한 사람이다. 문집에 《병계집(屛溪集)》, 저서에 《화양존주록(華陽尊周錄)》이 있다. 系譜 : 24세- 飛卿. 25세- 明運. 26세- 鳳九. - 참고 - * 호락논쟁(湖洛論爭) 조선 후기 성리학에서 인물성동이(人物性同異)에 관한 논쟁.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을 주장한 한원진(韓元震)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호서(湖西:지금의 충청도 일대)지방에 거주하였고, 인물성동론(人物性同論)을 주장한 이간(李柬)의 견해에 동조하는 학자들은 주로 낙하(洛下:지금의 서울 일대)지방에서 거주하였기 때문에 그들 간에 전개된 인물성동이론을 그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하여 지칭한 것이 이른바 호락논쟁이다. 윤봉조(尹鳳朝) (1680~1761). 소정공파. 조선 후기 문신. 자 명숙(鳴叔). 호 포암(圃巖). 1705년(숙종 3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정언(正言)·부수찬 등을 역임하였다. 13년 암행어사가 되고, 이조좌랑·부교리·응교(應敎)·승지(承旨)를 거쳐 대사간에 승진되고, 이어 우승지로 나갔다. 경종이 즉위하면서 소론이 집권하자 사직 은퇴하였다. 25년(영조 1) 승지에 재등용되어 곧 이조참의가 되고, 다시 부제학으로 실록도청당상(實錄都廳堂上)을 겸하여 《경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으며, 이듬해 예조참판이 되었다. 27년 정미환국으로 노론이 숙청될 때, 앞서 25년 방만규(方萬規)가 탕평을 배척하는 상소문을 올린 일에 관련되어 파직되었다. 삭주(朔州)에 유배, 이어 정의(旌義)에 안치되었다. 41년 공조참판에 등용되고, 43년 부제학, 57년 우빈객(右賓客)이 되었으며, 다음해 대제학에 올랐다. 문장에 능하여 특히 소차(疏箚)가 유명하였다. 문집에 《포암집》이 있다. 系譜 : 24세- 飛卿. 25세- 明遠. 26世- 鳳朝. 윤비경(尹飛卿) (1607 - 1680). 소정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는 충거(沖擧). 호는 국헌(菊軒). 유건(惟健)의 아들이다. 어린 나이인 12세에 아버지(坡寧君)를 여의고 어머니인 정부인 안동권씨의 엄한 가르침을 받았으며, 후에 참판 이민구(李敏求)의 문인으로 들어갔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가 재임(齋任)이 되었다. 1650년(효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와 전적을 거쳐 정언에 올랐다. 1559년(현종 즉위) 지평(持平)·장령(掌令)을 역임, 다음해 헌납(獻納), 이후 10여 년의 관직(官職)이 대부분 양사 사이에 머무르면서 각 아문의 둔전과 여러 궁가의 절수(折受)를 혁파할 것 등 국정쇄신의 방안을 내놓기도 하였다. 1660년(현종 1) 장령으로 있을 때, 효종(孝宗)이 승하한 후 대왕대비의 복제문제를 놓고 송시열(宋時烈) 등 서인의 1년설과 윤선도(尹善道) 등 남인의 3년설이 대립하였다. 이때 윤선도의 상소를 예론(禮論)에 거짓으로 의탁한 흉계라고 지적하면서 국문에 부칠 것을 청하였다. 이후 효종(孝宗)의 부묘 때에 독축관(讀祝官)이 된 예에 따라서 당상관에 오르고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지방관으로 나갔다. 1664 년 좌부승지(左副承旨)를 거쳐, 통진 현감(通津縣監)에 있을 때 양전(量田)의 시행과 부역을 부과하는데도 백성의 편한 것을 따라 칭송이 자자하였다. 1667년 우승지(右承旨)가 되고 병조의 참지(參知) 및 참의(參議), 공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어서 경주부윤(慶州府尹), 회양부사(淮陽府使)에 제수되었다. 1680년(숙종 6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으로 남인이 추방되고 숙종이 회맹(會盟)할 때에 인함(仁涵)의 적장손이라는 이유로 호조참판(戶曹參判)에 제수되었고, 가선대부에 올랐다. 그해 12월 29일에 수(壽) 74세로 졸(卒)하시어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추증(追贈) 받았고 파원군(坡原君)에 봉해졌다. 배위(配位)는 좌랑 구연(佐郞 九淵)의 여식(女息)인 정부인 한산이씨(貞夫人 韓山李氏)이며, 묘는 경기도 포천군 신북면 고일리 유원(酉原)에 상하장이며 슬하에 3남 1녀를 두었다. 系譜 : 21-仁涵. 22-弘立. 23-惟健. 24-飛卿 윤사로(尹師路) (1423~1463) 소정공파 조선 전기 문신. 호 과옹(果翁)·주옹(周翁). 諡號 충경(忠景). 1436년(세종 18) 세종의 딸 정현옹주(貞顯翁主)와 결혼, 영천군(鈴川君)에 봉해졌다. 52년(문종 2) 영천위(鈴川尉)로 다시 봉해지고, 세종릉의 수릉관(守陵官)을 지냈다. 문종이 죽자 다시 문종릉의 수릉관에 임명되고 숭덕대부(崇德大夫)에 가자(加資)되었다. 그 뒤 수양대군의 세력에 가담, 안평대군(安平大君) 등을 추방하였다. 55년 세조의 즉위를 도와 좌익공신(佐翼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56년 좌찬성(左贊成)에 발탁, 이어 중추원영사가 되고, 58년(세조 4) 영천부원군(鈴川府院君)에 진봉되었다. 61년 간경도감도제조(刊經都監都提調), 62년 충훈부당상(忠勳府堂上) 등을 지냈다. 系譜 : 15-坤. 16-希齊. 17-垠. 18-師路. 윤 선(尹 銑) (1559~1637) 소정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택원(澤遠). 호 추담(秋潭). 경남 삼가(三嘉) 출생.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합격하고 88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삼사·육조 및 승정원 등의 여러 관직과 경주부윤을 거쳐 한성판윤(漢城判尹)에 이르렀다. 1614년에는 주문사(奏聞使)로서 명(明)나라에 파견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피란 간 국왕을 수행하기 위해 고향으로부터 뒤쫓아갔으며, 명령에 따라 세자를 수행하였다. 광해군대에는 폐비론(廢妃論)에 참여하는 등 권력을 독점한 북인의 독주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1613년(광해군 5) 인목대비(仁穆大妃)가 유폐당하자 쌀과 고기를 바쳤으며, 당시 정치를 비판하다가 위기에 빠진 조경기(趙慶起)·홍무적(洪茂績) 등을 힘써 구원하였다고 한다. 인조반정 후, “정인홍에 붙어 양사(兩司)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후에는 남근(南瑾)의 무리가 되었다”는 평과 함께 한성판윤에서 파직되어 재기용되지 못하였다. 문집으로 《추담집》이 있다. 系譜 : 19-硏. 20-秀宗. 21-彦禮. 22-銑. 윤선거(尹宣擧) (1610~1669) 소정공파. 조선 중기의 학자. 자 길보(吉甫). 호 미촌(美村)·노서(魯西)·산천재(山泉齋). 시호 문경(文敬). 증(拯)의 아버지. 1633년(인조 11) 생원시. 진사시에 급제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36년 후금(後金)의 사신이 입국하자, 유생의 소두(疏頭)로서 명나라에 대한 의(義)를 지키기 위해 사신을 죽이자고 상소하였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로 피란하여 성문을 지켰으며, 성이 함락되자 평민을 가장하여 탈출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살아남은 것을 자책하여 모두 사퇴, 금산(錦山)에 내려가 학문에 정진하였다. 성리학에는 당대의 대가였으며, 예론에도 정통하였다. 절친한 송시열(宋時烈)과 윤휴(尹휴)가 학문으로 대립하자, 중립을 취하여 오히려 오해를 샀다. 죽은 뒤 아들 증이 송시열에게 아버지의 묘갈(墓碣)을 청탁하였으나 무성의하자 감정대립이 격화, 서인이 노소론으로 분파된 원인이 되었다. 1715년 유계(兪棨)와 함께 펴낸 《가례원류(家禮源流)》의 발문을 놓고, 노소론이 싸움을 벌여 증과 함께 관작이 추탈, 22년(경종 2) 복구되었다. 문장과 글씨에 능하였다. 영의정이 추증되고, 영춘(永春) 송파서원(松坡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노서유고》 《노서일기》, 저서에 《계갑록(癸甲錄)》 《우계연보후설(牛溪年譜後說)》, 글씨에 <김집묘갈(金集墓碣)> 등이 있다. 系譜 : 21-暾. 22-昌世. 23-煌. 24-宣擧. 윤순거(尹舜擧) (1596~1668) 소정공파. 조선 중기의 지사(志土). 자 노직(魯直). 호 동토(童土). 우계(牛溪) 성혼(成渾)의 외손으로 성문준(成文濬)에게서 학문, 강항(姜沆)에게서 시(詩),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예(禮)를 배웠다. 1633년(인조 11) 사마시에 합격했으나 문과에는 실패했다. 36년(인조 14) 병자호란 때 아버지 황(煌)은 척화죄로 유배되고 숙부 전(전-불꽃 전)이 강화(江華)에서 순절(殉節)하자 고향에 내려가 학문(學問)을 닦았다. 45년 대군사부(大君師傅)가 되고 영월군수 등을 거쳐서 군자감정(軍資監正)·상의원정(尙衣院正)을 지냈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다. 찬선(贊善)이 추증, 연산(連山) 구산서원(龜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동토집》, 저서에 《노릉지(魯陵志)》, 글씨에 <심원사취운당대사비(深源寺翠雲堂大師碑)>(鐵原)가 있다. 系譜 : 21-暾. 22-昌世. 23-燧. 24-舜擧.
윤심형(尹心衡) (1698~1754) 소정공파 조선 후기의 문신. 자 경평(景平). 호 임재(臨齋). 시호 청헌(淸獻). 1721년(경종 1) 정시문과에 장원, 전적(典籍)이 되고 이듬해 정언(正言)에 재직 중 소론의 과격파 김일경(金一鏡)이 내시 박상검(朴尙儉), 문유도(文有道) 등을 시켜 왕세제(王世弟:英祖)를 죽이려다 발각되자 이들 하수인들을 죽여 증거를 인멸해버린 사실을 규탄하여 상소했으나 소론파의 방해로 묵살당했다. 이때 신임사화로 노론이 추방당할 때 삭직당하고 은퇴, 24년(영조 즉위) 노론이 집권하자 응교(應敎)가 되고 이어 공조참의가 되었으나 28년(영조 4)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다시 파직당했다. 뒤에 부제학에 기용되어 예조참판에 이르고, 이조판서가 추증되었다. 문집에 《임재유고》가 전한다. 系譜 : 24-飛卿. 25-明遠. 26-鳳韶. 27-心衡. 윤안성(尹安性) (1542~1615) 소정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계초(季初). 호 의관(宜觀). 1572년(선조 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83년 복병장(伏兵將)으로 여진족의 침입을 격퇴, 1589년 요직에 등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명원(金命元)의 종사관(從事官)으로 출전, 왜적과 싸웠다. 이어 안동판관·, 숙천부사를 지냈다. 1593년 전주부사 때 금산(錦山)에서 왜적을 막지 못하고, 전주의 관고(官庫)가 불탄 죄로 파직되었다. 충주목사로 등용된 뒤, 온성·회령의 부사 때는 선정을 베풀어, 1597년 표리(表裏)를 하사받고 가자(加資)되었다. 1599년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온 뒤 동부승지가 되었다. 1601년 우부승지에 이어 해주목사 등을 거쳐, 1610년 형조참판이 되었다. 1612년 양양부사 때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관련, 파직되었다. 1615년 능창군(陵昌君) 전(佺) 추대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문집에 《의관유고집》이 있다. 系譜 : 19-侃 . 20-承弘. 21-釜. 22-安性 윤여임(尹汝任) (1590~1637) 소정공파. 조선 중기의 무신. 무과에 급제, 선전관(宣傳官)이 되었다. 1637년 상주토포사(尙州討捕使)로서, 창원부사 백선남(白善男)과 함께 쌍령(雙嶺)에서 적을 맞아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병조판서가 추증, 영원군(鈴原君)에 추봉(追封)되고, 고향에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섰다. 系보 : 19-奎. 20-之孝. 21-찬높이 솟을 찬). 22-汝任 윤원거(尹元擧) (1601~1672) 소정공파. 조선 중기의 학자. 자 백분(伯奮). 호 용서(龍西). 김장생(金長生)의 문인. 1633년(인조 11) 생원(生員), 진사(進士) 양시에 합격, 1635년 성균관 유생(儒生)이 되었다. 이듬해 병자호란(丙子胡亂) 때 아버지가 강화(江華)에서 순절한 뒤 은거했다가 58년(효종 9)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공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현종 때 지평·장령 등으로 수차 임명되었으나 역시 사양하였다. 격조 높은 시(詩)를 지어 명성이 높았고 이조참판이 추증되었으며, 연산(連山) 구산서원(龜山書院)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용서문집(龍西文集)》이 전한다. 系譜 : 21-暾 22-昌世 23-전(불꽃 전). 24-元擧 윤이병(尹履炳) (1885~1921) 소정공파. 독립운동가. 호 성재(省齋). 충남 논산(論山) 출생. 1895년 일본인들에게 명성황후가 시해되자 여러 차례 복수토역(復讐討逆)의 소(疏)를 올리고, 고종의 밀령을 받아 명성황후 시해의 진상을 조사·보고하려다가 실패하였다. 1903년 청나라의 상표(商標)와 일본은행권의 국내유통을 반대하는 민중운동을 벌였고, 1905년 을사조약을 반대하는 격문을 전국에 살포하는 등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07년 서울에 동우회(同友會)를 설립, 제2대 회장이 되었는데, 일진회(一進會)를 성토하고, 13년 독립의군부(獨立義軍府)를 조직, 일본의 강압정책에 항쟁하다가 체포되어 3년간 전남 지도(智島)에서 유배생활을 보냈다. 또 3·1운동 때는 서울 적선동(積善洞)에서 독립만세시위를 하다가 체포되어, 21년 병보석되었지만 곧 죽었다. 문집에 《성재유고(省齋遺稿)》가 있다. 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았다. 系譜 : 계파불명(魯宗派) 윤 인(尹 인) (1555~1623) 소정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인지(之). 1601년(선조 34) 생원이 되고, 식년문과에 급제, 판관이 되었다. 1605년 형조좌랑을 거쳐, 장악원첨정으로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12년 장령·필선이 되었으며, 이이첨(李爾瞻) 등의 사주를 받아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생모 인목왕후의 유폐(幽廢)를 주장하였는데, 김효성(金孝誠) 등의 탄핵을 받고 삭직되었다. 다시 판교로 기용되어 집의·동부승지 등을 역임하였다. 1618년(광해군 10) 대사간으로 있을 때, 대사헌 이각(李覺)과 함께 다시 폐모론을 내세워 서인(庶人)으로 만들고,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1623년 인조반정 때 이이첨 등과 함께 주살되었다. 계보 : 20-承世. 21- 자(옹달솥 자). 22-從龍 . 23- 인(밀더듬을 인) 윤인함(尹仁涵) (1531~1597) 소정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양숙(養叔). 호 죽재(竹齋). 1553년(명종 8) 진사가 되고, 5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檢閱). 대교(待敎)를 거쳐, 1559년(명종 14) 정자(正字)가 되었다. 이어 박사. 부수찬 등을 지내고, 1561년 병조. 이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1563년 이조정랑으로 있을 때, 동료들에게 전선(銓選)에 관한 기밀을 누설한 죄로 파직되었다. 뒤에 등용되어 공조. 호조의 참의를 지내고, 1584년(선조 17)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92년 임진왜란 때 경주부윤으로서 적군을 방어하지 못한 죄로 좌천되었으며, 경주가 함락되자 의병을 모집하여 적과 싸웠다. 97년 형조참판으로 영위사(迎慰使)를 겸하여, 명나라 장수를 평양으로 영접하러 나갔다가 객사하였다. 문장과 그림에 뛰어났으며, 특히 대[竹]를 잘 그렸다. 문집에 《죽재집》이 있다. 系譜 : 18-師夏. 19-宕. 20-應奎. 21-仁涵. 윤자덕(尹滋悳) (1827~1890) 소정공파. 조선 후기의 문신. 자 중수(仲樹). 호 국헌(菊軒). 시호 문헌(文獻). 1848년(헌종 14) 증광문과에 별과로 급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1861년(철종 12) 이조참판에 올랐다. 이어 대사헌·공조판서. 좌참찬. 경기도관찰사를 지내고 1879년(고종 16) 이조판서가 되었다. 이듬해 관제개혁에 따라 상호군으로서 통리기무아문당상(統理機務衙門堂上)이 제수되고, 이후 의금부판사. 한성부판윤을 거쳐 82년 김홍집(金弘集) 등과 함께 내각을 수립했다. 병조판서·독판내무사·수원유수 등을 역임하고 90년 중추부지사(中樞府知事)에 이르렀다. 계보 : 魯宗派. 윤 증(尹 拯) (1629~1714) 소정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 파평(坡平). 자 자인(子仁). 호 명재(明齋), 유봉(酉峯). 시호 문성(文成). 조부는 八松 황(煌)이고, 우계 성혼(成渾)의 사위였다. 부 미촌 선거(宣擧)는 김집(金集)의 문인으로 일찍이 송시열(宋時烈). 윤휴(尹휴). 박세채(朴世采) 등 당대의 명유들과 함께 교유하였다. 그는 부사(父師)를 시작으로 유계(兪棨)와 송준길(宋浚吉), 송시열의 3대 사문(師門)에 들어가 주자학을 기본으로 하는 당대의 정통유학을 수학하면서 박세당(朴世堂). 박세채. 민이승(閔以升) 등과 교유하여 학문을 대성하였다. 특히 송시열의 문하에서는 많은 문인들 중 유독 뛰어나 고제(高弟)로 지목되었고, 서인계 정통으로서는 주자의 성리학을 바탕으로 하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체득하였다. 등과(登科)는 하지 않았지만, 학행이 사림 간에 뛰어나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내시교관(內侍敎官)에 발탁을 시작으로 공조좌랑. 세자시강원진강(世子侍講院進講). 대사헌. 이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의 임명을 받았으나, 이는 그의 학문적, 정치적 위치를 반영할 뿐 일체 사양하고 실직에 나아간 일이 없다. 그러나 그의 정견은 정치적 중요문제가 생길 때마다 상소로 피력하였고, 또는 정치당국자나 학인과의 왕복서를 통하여 나타났다. 그러한 그의 정치적 성행이 노소분당과 그를 이은 당쟁에 큰 영향을 끼쳤을 뿐만 아니라 노론의 일방적인 정국 전횡을 견제하였다. 그의 사상적 배경은 16세기 이래로 변화해온 조선사회 이해에 대한 시각의 차이에서 송시열과의 대립을 초래하였다. 그것은 밖으로는 병자호란 이후 야기된 국제관계의 변화에 따른 숭명의리(송시열)와 대청실리외교문제(윤증)의 대립이었고, 양난 이후의 사회변동과 경제적 곤란은 주자학적 의리론과 명분론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다는 역사적 명제를 제기시켰다. 그는 많은 문제(門弟) 중에서도 특히 정제두(鄭齊斗)와 각별한 관계를 가졌다. 두 사람 사이의 학문 사상적 교류는 《명재유고(明齋遺稿)》와 《하곡집(霞谷集)》의 왕복서한에서 실증되고 있다. 그것은 송시열의 주자학적 조화론과 의리론만으로는 변모하는 정국을 바로잡을 정치철학으로 미흡하다는 것이었고, 왕학적(王學的) 학문과 실학적(實學的) 경륜을 담은 정치철학이 내재되어 있었다. 또한, 그가 스승인 송시열에게 보낸 신유의서(辛酉擬書)에 의하면 스승을 의리쌍행(義利雙行)이라 비판하여 배사론으로 지목받았고, 송시열의 주자학적 종본주의와 이에 근거한 존화대의(尊華大義) 및 숭명벌청(崇明伐淸)의 북벌론을 정면으로 반박, 회니시비(懷尼是非)의 발단을 이루었다. 그의 아버지인 윤선거 비문 찬술 시비와 더불어 신유의서의 작성으로 노소당인 간의 격렬하게 전개된 회니시비는 송시열과 윤선거 부자가 모두 죽은 후에도 더욱 격렬하여 노소당인들이 대립되었던 17세기를 넘기면서도 끝을 맺지 못하고 경종. 영조. 정조 대에 해당되는 18세기 노소당론으로 넘겨졌다. 그는 어진 스승을 배반했다는 패륜으로 지목받았지만, 그를 따르던 소론 진보세력들에 의해 그의 사상이 꾸준히 전승 발전되어 노론일당 전제체제 하에서 비판 세력으로 자리를 굳혔다. 홍주의 용계서원, 노성의 노강서원 등에 향사되었다. 계보 : 22-昌世. 23-煌. 24-宣擧. 25-拯. 윤지교(尹智敎) (1658~1716) 소정공파. 조선 후기의 학자. 자 숙정(叔正)·숙우(叔愚). 호 숙야재(夙夜齋). 부수찬(副修撰) 윤절(尹절)의 아들로 종조부 윤증(尹拯)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일찍부터 과거를 포기하고 성리학과 경사자집(經史子集)의 학문에 전념하였다. 1713년(숙종 39)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세마(洗馬)를 제수받았으며, 서연관(書筵官)으로서 세자의 학문을 정진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윤증은 “예학의 정밀함에 있어서는 윤지교를 따를 사람이 없다”고 평하였다. 계보 : 23-燧. 24-舜擧. 25-절(밝을 절). 26-智敎. 윤지선(尹趾善) (1627~1704) 소정공파.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 파평(坡平). 자 중린(仲麟). 호 두포(杜浦). 1660년(현종 1) 진사가 되고, 2년 뒤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674년 헌납(獻納). 이조좌랑을 거쳐, 숙종 즉위 뒤 이조정랑에 올랐다. 이어 부수찬. 동부승지를 거쳐, 1681년 대사간. 공충도(公忠道:충청도)관찰사. 함경도관찰사, 1683년 한성부좌윤을 지냈다. 1694년 병조판서로 의금부지사, 1696년 공조판서. 좌참찬. 우의정에 이어 좌의정에 올랐다. 1698년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중추부행판사로 죽었다. 성품이 온건(穩健)하여 당화(黨禍)를 입지 않았으며, 숙종의 총애를 받았다. 계보 : 23-儼. 24-民獻. 25-絳. 26-趾善. 윤 진(尹 搢) (1631~1698) 소정공파. 조선 후기의 문신, 학자. 자 자경(子敬). 호 덕포(德浦). 장령(掌令) 윤순거(尹舜擧)의 아들로, 165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별제(別提). 주부(主簿) 등 하위직을 지내다가, 66년 별시문과에 장원급제하여 병조좌랑. 정언(正言). 지평(持平). 헌납(獻納) 등 청요직을 역임하였으며, 89년 대사헌이 되었다. 숙종대에 고위관료로 있으면서 붕당(朋黨)을 없앨 것과 구황(救荒)에 노력할 것 등의 시정책을 수시로 제기하였다. 1703년 나라에 한재(旱災)가 극심하자 이조참의 박세채(朴世采)는 염퇴(恬退)한 선비인 박세당(朴世堂)과 윤진 등을 조정에 등용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용계서원(龍溪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덕포유고》가 있다. 윤증(尹拯)이 묘표(墓表)를 썼다. 계보 : 22-昌世. 23-燧. 24-舜擧. 25-搢. 윤 찬(尹 찬) (?~?) 소정공파 조선 중기의 무신. 자 중립(仲立). 호 청곡(靑谷). 영흥군(鈴興君) 윤지효(尹之孝)의 아들로,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의 어가(御駕)를 호종하였다. 1601년 곽산군수가 되었으며, 1604년 영원군수를 지냈다. 이후에 천거로 선전관(宣傳官)에 올랐으며, 부총관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호가(扈駕)한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고 파릉군(坡陵君)에 봉해졌다. 계보 : 18-衡老. 19-奎. 20-之孝. 21-찬(높이 솟을 찬)
윤필상(尹弼商) (1427~1504) 소정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자 양좌(陽佐). 1447년(세종 29) 사마시에 합격하고, 50년(문종 즉위년) 추장문과(秋場文科)에 급제, 55년(세조 즉위년) 호조좌랑에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고 서연관(書筵官)이 되었다. 67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에 도승지로 왕명을 신속하게 처리하여 우참찬에 특진하였고, 71년(성종 2) 우찬성으로 경상도에 가뭄으로 기근이 심하자 농민을 구제하였다. 74년 이조판서·의금부당상(義禁府堂上)을 겸직, 이때 권신들의 인사권 간섭이 심하자 분개하여 사직하였다. 77년 좌찬성으로 명나라에 다니오는 도중 건주위(建州衛) 야인들의 정세를 자세히 탐지, 보고하고 이듬해 우의정에 올랐다. 84년 영의정에 오르고 부원군(府院君)에 봉하여져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96년(연산군 2) 궤장(궤杖)을 하사받았다. 1504년 갑자사화 때 앞서 성종 때 연산군의 생모 윤씨의 폐위를 막지 못했다는 죄로 진도(珍島)에 유배, 사약을 받았다. 계보 : 15-坤. 16-希齊. 17-坰. 18-弼商. 윤 향(尹 向) (1374~1418) 소정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시호 소도(昭度). 고려 우왕 때 생원으로 사예(司藝) 유백순(柳伯淳) 등과 함께 불교가 나라를 망치니 정도전(鄭道傳) 등 유학자를 존중하고 유학을 권장하라는 상소를 올렸다. 1404년(태종 4) 사간원지사 때 남재(南在)의 부정을 탄핵하다 공주로 귀양갔다. 1407년 이조참의, 대사헌, 한성부윤, 1408년 전라도도관찰사 겸 완산부윤을 지내고, 1409년 상평보(常平寶) 설치를 건의하여 시행하게 하였다. 1410년 경상좌도병마도절제사 겸 계림부윤, 1412년 한성부윤, 1413년 공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형조판서를 거쳐 호조판서로 있을 때, 위화도회군 당시 공을 세운 장수들의 공신녹권(功臣錄券)을 개정하라고 상소하였다가 파직, 적성(積成)에 유배되었다. 18년 형조판서로 진하사(進賀使)가 되어 명나라에 갔으며, 돌아오다 평양에서 객사하였다. 소도공파 파조(派祖). 계보 : 12-安淑. 13-陟. 14-承順. 15-向. 윤헌주(尹憲柱) (1661~1729) 소정공파. 조선 후기의 문신. 자 길보(吉甫). 호 이지당(二知堂). 시호 익헌(翼獻). 음보(蔭補)로 참봉(參奉), 봉사(奉事)를 지내고, 1698년(숙종 24) 알성문과에 장원하여 전적(典籍), 정언(正言)을 거쳐 헌납(獻納)을 역임하였다 . 1716년(숙종 42) 성주목사, 이듬해 충청도관찰사, 이어 형조, 병조, 호조참판, 도승지를 지냈다. 이듬해 함경도관찰사로 부임, 독직사건으로 용천(龍川)에 유배, 1724년 풀려나와 한성부판윤, 형조, 호조판서를 역임하고 은퇴하였다. 28년 이인좌(李麟佐) 등의 반란 때 북도안무사(北道安撫使)로 기용, 분무원종공신(奮武原從功臣)에 추록,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다. 계보 : 24-宗福. 25-受說. 26-澤. 27-憲柱.
윤 현(尹 鉉) (1514~1578) 소정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자용(子用). 호 국간(菊磵). 시호 충간(忠簡). 1531년(중종 26) 진사가 되고, 37년 식년문과에 장원, 이듬해 정언(正言), 이어 수찬을 지냈다. 사가독서하고, 1548년(명종 3) 검상(檢詳), 50년 장악원정(掌樂院正)으로 「중종실록」편찬에 참여하였다. 그 뒤 경기도관찰사, 형조·호조의 참판, 우참찬(右參贊)을 거쳐 호조판서·돈령부지사(知事)에 이르렀다. 시문(詩文)에 뛰어났으며, 명종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문집에 「국간집」이 있다. 계보 : 18-輔商. 19-英. 20-鶴齡. 21-鉉. 윤 호(尹 壕) (1424~1496) 소정공파. 조선 전기의 문신. 자 숙보(叔保). 시호 평정(平靖). 1476년(성종 7) 춘장문과(春場文科)에 급제, 이듬해 병조참지(參知)를 지냈다. 딸이 성종비 정현왕후(貞顯王后)가 되자, 국구(國舅)로서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에 봉해졌다. 1476년 공조참판, 1488년 돈령부영사, 이듬해 사복시제조를 겸하였다. 1494년 우의정으로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궤장(杖)을 받았다. 계보 : 14-承順. 15-坤. 16-三山. 17-壕. 윤 혼(尹 혼) (1676~1725) 소정공파 *(혼-빛날 혼) 조선 후기의 문신. 자 회보(晦甫). 호 천서(泉西). 윤동명(尹東明)의 아들로, 권상하(權尙夏)의 문하생이다. 1709년 권상하의 문하생인 한원진(韓元震), 현상벽(玄尙璧) 등과 함께 만동묘(萬東廟)의 건립에 참여하여 명나라에 대한 의리를 지켰다. 1614년 사마시에 합격하고, 1619년 학행으로 천거를 받아 참봉(參奉)이 되었다. 이 해에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으며, 관직이 지평(持平)에 이르러 죽었다. 계보 : 24-獻徵. 25-琛. 26-東鳴. 27-혼(빛날 혼). 윤홍규(尹弘圭) (1760~1826) 소정공파. 조선 후기의 문신. 자 의보(毅甫). 호 도계(陶溪). 초명 두기(斗基). 1792년(정조 16) 생원(生員)이 되었다. 주자학(朱子學)을 연구하여 예학(禮學)에 밝았다. 1800년(정조 24)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이어 익찬(翊贊)을 거쳐 고성군수(高城郡守)를 지냈다. 저서에 「상례홀기(喪禮笏記)」「도계유고(陶溪遺稿)」가 있다. 계보 : 26-이敎. 27-東野. 28-光後. 29-弘圭.
윤 황(尹 煌) (1572~1639) 소정공파. 조선 중기의 문신. 자 덕요(德耀). 호 팔송(八松)· 노곡(魯谷). 시호 문정(文正). 1597년(선조 30) 알성문과에 급제, 1601년 전적(典籍)에 이어 감찰·정언(正言)을 지냈다. 1623년의 인조반정 뒤 동부승지·이조참의, 전주부윤 등을 지냈다. 1624년 부응교(副應敎)로서 이괄(李适)의 난 때 검찰사(檢察使)로 있던 이귀(李貴)가 임진강 싸움에서 패한 죄를 탄핵하였다.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때 사간으로서 극력 척화를 주장하였다. 환도 후 부제학 전식(全湜)의 탄핵을 받아 영동군에 유배되었다가 병으로 풀려나와 죽었다. 죽은 뒤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팔송봉사(八松封事)」가 있다. 계보 : 20-先智. 21-暾. 22-昌世. 23-煌.
윤효정(尹孝定) (1858~1939) 소정공파. 독립운동가. 한말의 정치가·독립운동가. 자 사성(士成). 호 운정(雲庭). 1894년(고종 31) 갑오개혁 후 탁지부주사로 있었으며 1898년 제위(帝位) 양위음모사건이 발각되자 일본으로 망명, 그 곳에 피신해 있는 명성황후시해사건의 관련자 우범선(禹範宣)을 고영근(高永根)을 시켜 죽이게 하고 귀국했다. 1906년 서울에서 장지연(張志淵) 등과 함께 이준(李儁)이 세운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토대로 대한자강회(大韓自强會)를 조직하였다. 1907년 11월, 유근(柳瑾), 장지연(張志淵) 등의 발의로 대한자강회를 발전적으로 해산,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조직하고 그 총무가 되어 항일조직 확대에 힘썼다. 저서에 「풍운한말비사(風雲韓末秘史)」가 있다. 계보 : 31-學永. 32-相大. 33-熙燮. 34-孝定(初名 - 定鉉). 소정공파의 자랑스런 조상님을 둔 후손들 로 항상 선조님의 위업을 기리며 참고 자료로 잘 활용하여 주었으면 고맙 겠슴니다 파평윤씨소정공파인물사 [출처] 파평윤씨 소정공파 인물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