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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 나들길 제9코스(교동 1코스 다을새 길)
다을새는 교동의 옛 지명으로 대운도(戴雲島: 구름에 뜬 섬) 또는 달을신(達乙新 : 하늘에 닿을 새)이라 하였으며, 다을새는 달을신의 소리음이라 한다.
삼국시대 이래 서해안 해상교통의 요지이며 고려 조선 왕족들의 유배지, 그리고 조선 중기에는 경기 황해 충청 삼도 수군을 담당하는 삼도수군통어영이 설치되었던 중요 섬이다.
한강 임진강 물과 예성강 물이 합수되는 물길 어귀에 교동도가 있다. 드넓은 간척지, 들판과 하늘을 휩쓸고 다니는 철새 떼가 몰려다니고 과거와 현재가 공존, 마을과 산자락에서 옛사람들의 흔적을 쉽게 만날 수 있다. 풍년이 들면 교동 주민이 13년은 족히 먹을 수 있다는 풍요의 섬, 천혜의 자연과 단 한 번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 것 같은 고즈넉한 숲길, 강화 속 강화다.
월선포를 출발하여 폭신폭신한 숲길을 따라가면 최초로 공자상을 모신 교동향교의 고풍스러운 솟을삼문이 맞이한다. 고려말의 문신이자 대학자 목은 이색이 머물렀던 화개사를 지나 화개산 정상에 오르면 섬 전체가 한눈에 들어오고 북녘땅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다가온다. 섬 전체가 민통선 지역인 데다 물때가 맞지 않으면 들고 나기가 매우 불편해서 그랬을까? 옛 정취가 섬 구석구석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헝클어진 일상사로 머리가 복잡할 때, 일에 치여 피폐해졌다고 느낄 때, 아무 일 없어 심심할 때 교동도에서 걸어보라. 시간여행이라도 한 듯 시계도 더디게 가는 느림의 평화와 생각이 우물처럼 깊어지는 걸 알게 될 것이다. 겨울철에 화개산 방향은 스틱과 아이젠을 준비해야 한다.
탐방코스: [월선포 버스 정류장~(81m)~월선포 선착장~(3.5 km)~교동 향교~(0.8 km)~화개사~(1.5 km)~화개산 정상~(3.4 km)~대룡시장~(2.8 km)~남산포~(1.0km)~교동읍성~(0.7 km)~동진포~(2.3 km)~월선포 선착장 ] [16km / 소요시간 5시간]
교동도(喬桐島) - 북한과 가장 가까운 접경지역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하는 섬으로 강화도 북서부에 위치한다. 면적 46.90km2, 해안선 길이 35.97km, 남북 6km, 동서 10km이며 인구는 1,435가구 2,997명이다. 관광명소로는 교동 읍성, 교동향교, 화개산, 화개사, 달우물 온천이 있다.
목차
교동도 개요
위치가 매우 중요한 교동도
유배의 섬 교동도
교동도 둘러보기
시간이 멎은 섬
관광 명소
교동도 개요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에 속하는 섬으로 강화도 북서부에 위치한다. 면적 46.90km2, 해안선길이 35.97km, 주민은 1,435가구 2,997명, 초등학생 77명, 중학생 32명, 고등학생 43명이 있다. 최고점은 화개산(華蓋山, 260m)이다. 동서길이 10km, 남북길이 6km이며 교동면의 북부 해안선은 휴전선의 남방 한계선이 된다.
교동도의 역사는 꽤 오래되어 『삼국사기』에 달을참(達乙斬), 고목근(高木根), 교동(喬桐)의 기록이 나온다. 달을참이란 뜻은 ‘크고 높은 산이 있는 고을’이라는 의미를 가진 지명이라고 전한다. 그 외에 대운도(戴雲島), 고림(高林)이라고도 불렸다.
위치가 매우 중요한 교동도
고려와 조선시대부터 시작된 간척은 일제강점기까지 지속되었다. 그래서 육지보다 더 많은 전답을 가졌는데 논 25.89km2, 밭 2.57km2, 임야 11.45km2이다. 광복 당시에 8,644명이 그리고 한국전쟁 뒤에는 더 많은 피난민이 몰려온 곳이다. 1965년에 1만 2,443명에 달하는 사람이 살았다고 한다. 최고의 인구를 가졌던 때로 보인다.
교동도는 한강하구인 임진강과 예성강이 흘러와 바다와 만나는 합류점에 위치한다.
행정구역은 강화군 교동면이지만 8.15 해방 전까지만 해도 강화읍보다는 거리상 가까운(약 12km 정도) 서해도 연백을 생활권으로 삼았다.
6 · 25동란 이전의 교동도는 이북 해주와 인천 사이를 연결하는 4개의 정기연락선으로 왕래하는 자유지대였으나 전란 이후 상황이 바뀌었다. 그 당시는 도로가 발달하지 못해서 배를 이용하는 해상로가 최고의 교통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접경지역인 까닭에 도선인 여객선은 일몰 한 시간 전에 운항이 중단된다. 그 이후에는 다른 대절선마저 오갈 수 없다. 분단의 현장임을 체감할 수 있는 곳이다.
교동도 북단의 말탄포구에서 강 건너로 마주보면 2km 전방에 북한 땅 연백군이 빤히 바라보인다. “전쟁이 곧 끝나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잠시 머물렀지”하며 가족과 생이별하게 된 사람들, 고향땅을 쳐다보는 주민들이 어느 곳보다 많이 살고 있다.
옛집의 골목길까지 훤히 보이는 고향은 지호지간이건만 현실적으로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우리 민족의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차라리 경계의 지점을 넘어서 마음껏 자유를 만끽하며 날아가는 새들의 신세가 마냥 부러울는지 모른다.
6.25 전쟁 중 1.4후퇴 때는 육로가 막혀 연백군 연안읍 군민들은 고향과 가장 가까운 교동도로 피난을 와서 인연을 맺었다. 그래서 이제는 서해도 연백 출신의 수많은 사람들은 교동도가 두 번째 고향이 되었다. 바다 저쪽 연안읍이 손짓하듯이 뚜렷하게 보이는 곳이 봉아가미 마을이다. 실향민들은 내 고향이 지금은 어떻게 변하였는지 눈을 감은 채 그리움과 한숨으로 얼룩진 눈물을 삼킨다. 북녘에서 온 수많은 실향민이 있지만 연백군민들처럼 바로 눈앞에 고향을 두고서도 못 가는 망향의 정은 다른 지역 사람들보다 더 애절하고 진하다.
연백군뿐만 아니라 개풍, 개성, 옹진 등 지형적으로 교동도와 가까운 지역 출신 실향민들이 이곳으로 건너와서 향수를 달래며 살아가고 있다. 전란 당시 피난민 중에 연백군민들만 해도 5만 명이나 되었다 한다. 현재는 강화읍과 교동도 등지에 4천여 명(후손까지 합쳐서)이 살고 있다. 지금은 세월이 많이 흘러서 각각 생업의 터전을 찾아 전국으로 흩어져서 살지만 고향 생각은 변함없고 항상 통일의 염원을 잊지 않고 살아간다.
고향의 뿌리를 잊지 못하는 70대 실향민들은 젊은이들의 고향의식이 희미해진 것 같아 아쉬움을 느낀다고 한다. 강화읍내와 교동도에는 연안식당, 연백양화점, 연백고무신집, 연백가구점, 백천집 등등 연백군 출신들이 경영하는 것임을 짐작케 하는 간판들이 곳곳에 쉽게 눈에 뜨인다.
유배의 섬 교동도
육지와 멀리 떨어진 교동도는 고려 중엽부터 조선 말기까지 유배지가 되었고, 지리적 위치 때문에 외세의 침범이 심한 관계로 역사의 기록에 자주 등장한다. 어미섬 강화도와 부속섬 교동도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지역으로 일각에서는 하나의 왕국으로 보아도 무방하다는 주장이 제기될 정도이다. 국난을 맞아 왕조 자체가 강화로 이전한 일이 있기에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교동도는 예로부터 유배지로 많이 알려진 섬이었다. 희대의 폭군 연산군을 위시하여 광해군, 안평대군, 임해군, 능창대군 등이 갇혀 지내다가 세상을 달리했다.
광해군은 잠깐 유배됐다가 다른 지역으로 옮겨갔지만 연산군은 12년 동안 왕좌에서 영화를 누리다가 31세에 쫓겨나 여기서 64일 만에 실의에 빠진 채 살다가 숨졌다. 연산군이 기거했던 거처는 고구리 마을이라 하지만 아쉽게도 그 위치와 정확한 종적은 찾아볼 길 없다.
유배의 땅에서 이제는 분단의 상징 같은 섬이 되어 실향민들이 망향제를 올리는 곳으로도 잘 알려진 섬이 교동도이다. 동국여지승람을 보면 교동도는 옛날엔 독립고을로써 고목근현, 고목현, 달을신, 대운도 등 여러 가지 옛 이름을 가진 유서 깊은 고장이다. 경치가 아름답고 농토가 많아서 많은 선비와 시인들이 이 섬을 찾아와 절경에 취했고 인간 영욕의 무상함을 노래했다고 한다. 그래서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된 교동도에 대한 한시가 오늘까지 전해온다.
전국적으로 섬의 크기가 13번째인데 대규모 간척 덕분이다. 북쪽으로는 서해도와 가까이 연결되고 동쪽으로는 한강 하류와 만난다. 고려의 수도에 가까운 무역항 벽란도로 가는 중국 송나라 배들이 바람과 안개, 물때를 기다리며 잠시 머물던 국제교역의 중간 기착지 역할을 했다. 조선시대 인조11년에 삼도수군통어영을 설치하였던 해상 전략적 요충지이다. 경기, 서해, 충청의 수군을 관할하는 해군사령부, 삼도통어영까지 교동도에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조선의 수도인 한양의 관문 역할을 했던 것이다.
교동도 둘러보기
교동도를 돌아보기 위하여 예전의 관문인 월선포로 갔다. 세 번째 온 교동도는 예전의 교동도가 아니었다. 다리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리가 생기기 전에 차도선을 타면 강화도의 창후리에서 출발하여 교동도의 월선포에서 내려 주었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만 교동도에 들어갔다. 이제 카페리호가 끊긴 이곳 대합실 문은 굳게 잠겨 있고, 교동도의 유일한 뱃길을 교동대교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이제 월선포는 거의 찾는 사람이 없는 외로운 포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수백 년의 바닷길을 이어온 나룻배는 노 젓는 배에서 동력선으로, 목선에서, FRP로, 마지막으로 철부선으로 바뀌어 가면서 차량을 싣고 씽씽 달렸는데 이제 그 배들은 다 어디 가고 그 많던 사공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안개가 자욱한 선착장 저편의 석모도가 을씨년스럽다. 이제 연륙이 된 석모도도 교동도의 전철을 밟을 것이다.
시간이 멎은 섬
강화도는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지역이지만, 교동도는 유배의 섬이다. 국난을 맞아 왕조 자체가 강화로 이전한 일이 있었기에 그런 모양이다.
22년 전인 1994년도에 이미 교동도를 방문한 바 있어 내심 강화도와 가까운 섬이니 만큼 눈에 띄는 발전상을 확인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다. 이러한 기대 속에서 강화도 창후리에 도착하여 뱃전에 올라 정확히 15분 후 교동도 월선포에 닿았다.
이윽고 교동 읍내로 들어섰을 때, 기다렸다는 듯 몰려드는 실망감을 감출 길이 없었다. 22년 전과 크게 달라진 것 없는 읍내 거리가 나의 동공 속을 애잔하게 채워진 까닭이었다. 육지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데 섬이라는 특수성 때문인지 교동도는 시간이 멈춰 버린 섬처럼 고즈넉하게 앉아 있었다.
그러나 읍내 거리를 걸으며 관광객이 된 심정으로 바라보니 교동도는 묘한 매력으로 다가들고 있었다. 2000년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이 1960~1970년대 풍의 건물과 거리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한 지역을 여행하기란 쉽지 않은 노릇이다. 마치 영화 세트장 속에 들어와 있는 듯 교동도는 어릴 적 추억 속으로 필자를 끌어당겼다.
개교 100주년을 맞는다는 교동초등학교를 잠시 구경하고 나서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에 자리잡은 시장과 상가 건물들 사이를 걸어다니다 보면 어느덧 고향마을 장터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져든다. 열 살 안팎의 소년처럼 상가에 진열되어 있는 온갖 잡화와 검정고무신, 플라스틱 그릇들을 구경하며 이유 없이 마음이 설레었다.
읍내 거리에서의 아련한 과거 체험을 끝내고 다시 현실 속으로 되돌아와 섬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꼼꼼히 살펴보면 사실 섬이라고 하지만 교동도는 전형적인 농촌마을에 속했다. 워낙 섬이 넓은데다 전체 면적에서 경지가 차지하는 비율이 66%나 되어 농업에만 종사해도 충분히 살아갈 수 있는 조건이기 때문이다. 임진강과 예성강, 한강의 빠른 물살이 실어 나른 진액의 땅이라 교동도의 논과 밭은 비옥하다. 교동 쌀이 예로부터 으뜸으로 손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농업이 우리나라의 주요 산업에 속했던 광복 당시만 해도 교동도 인구는 8천명이 훨씬 넘었다. 게다가 전쟁을 치르면서 피난민들까지 몰려들어 한때는 1만 2천 명이 훌쩍 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 산업발전 과정과 궤를 같이 하며 교동도의 인구는 점차 감소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섬들이 겪고 있는 것처럼 교동도 또한 이도 현상이 극심한 상태였다. 4곳이나 되었던 초등학교가 2곳으로 통폐합된 것만 봐도 인구 감소 실태를 짐작해 볼 수 있을 듯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주민들에게 물어 보았다. 교동도가 강화도만큼 발전하려면 어떤 것들이 필요하겠는가 하는 질문이었다. 주민들은 열이면 열, 강화도와 교동도를 잇는 연도교 건설을 첫째 조건으로 꼽았다. 제삼자의 생각에도 그것만이 유일한 방법인 것 같았다. 그런데 이제 연도교가 건설되어 개통되었다. 어떻게 변해 갈지, 무엇을 얻고 무엇을 버리게 될는지 궁금하다.
관광 명소
교동 읍성
1629년(인조 7년)에 축조한 것으로 둘레는 430m이고 높이가 약 6m로 동 · 남 · 북 세 곳에 문을 두었다. 1753년(영조 29년)에 통어사 백동원이 성곽과 여장을 고쳐 쌓았고, 1884년(고종 21년) 통어사 이교복이 성문루와 치첩을 수축하다가 마치지 못하고 물러나 그 후 세월이 흘러 무너져 없어졌다. 무너져 내린 성곽을 보며 각자가 느끼는 것은 무엇일지 알 수는 없다. 다만 연속되고 이어져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교동향교
고려 충렬왕 12년(1286년) 당시 유학 제거(提擧)로 있던 문선공 안유(安裕)선생이 원에 사신으로 갔다가 공자 등의 초상을 모셔와 당시 화개산 북록(현 향교골)의 문묘(1107년 설치)에 모셨다가 충렬왕 29년(1303년) 송도로 모셨다고 하여 수위(首位)를 이루게 되었고 따라서 교동향교를 수묘(首廟)라고 칭한다.
화개산
화개산은 해발 260m로 넉넉히 2시간이면 산행을 끝낼 수 있다. 정상에서 내려다보는 서해바다가 일품이다. 1555년(명종 10년)에 왜란을 당하자 지현 최제운이 내성과 외성을 증축하고 성안에 군량 창고를 두었다고 하는데 성터가 훼손된 상태이지만 산줄기 및 정상 부분까지 그대로 남아 있다.
화개사
창건 연대는 고려 때라고 전하는데 고려 말의 문신 목은 이색(1328~1396)이 독서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금불상 2개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 건물은 1840년경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건립되었으나 1967년 다시 화재가 일어나 1968년 중건했다. 절 뒤에는 문무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달우물 온천
지하 700m에서 올라오는 천연 광천수로서 검사 결과 알칼리성 염화물질, 칼슘, 칼륨 등이 다량 함유되어 다른 온천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살균력을 가진 것으로 밝혀졌다. 인근으로 소문이 퍼지면서 ‘기적의 물’로 불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식수로 적합한지 여부는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았으나, 위장병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인천 교동면 상용리에 있는 월선포 선착장
교동대교가 생기면서 월선포는 거의 찾는 사람이 없는 외로운 포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리가 생기기 전에 차도선을 타면 강화도의 창후리에서 출발하여 교동도의 월선포에서 내려 주었다. 다리가 놓이기 전에는 반드시 이곳을 통과해야만 교동도에 들어갔다. 월선포는 교동도의 관문이었다.
교동향교(喬桐鄕校)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에 있는 한국 최초의 향교.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28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인종(仁宗) 5년(1127년)에 창건된 한국에서는 가장 오래된 향교이다.
충렬왕(忠烈王) 12년(1286년)에 제거(提擧) 안유(安裕)가 왕을 따라 원(元)에 가서 공자(孔子)와 주자(朱子)의 상을 처음 그려왔고, 김문연 등을 중원에 보내 선현과 72제자의 상을 그리게 하였으며 각종 제기와 악기, 육경과 제자백가의 책, 역사서를 사들여 고려로 가지고 오게 했는데, 김문연 등은 서해 방면으로 귀국하면서 지금의 교동에 기착, 가지고 온 기물과 책들을 교동향교에 잠시 봉안하였다가 개경으로 이안하였다.
화개산 북쪽 계곡에 있던 것을 조선 광해군(光海君) 원년(1609년) 7월 11일에 교동현감 이직이 당시의 경기관찰사 김신원에게 큰 바람으로 향교의 지붕 기와가 모두 날아가고 나무는 모조리 뽑혔으며, 향교의 명륜당과 동서 재(齋)가 한꺼번에 바람에 무너졌음을 첩보하였고, 이에 대성전에서 위안제를 거행할 것을 요청하였다. 현종(顯宗) 8년(1667년) 각 도의 여러 고을에 배향 신위를 옮겨 정하도록 하면서, 교동현감 구문치가 대성전을 보수하고 양무를 신축하여 10철 5현을 배향하고자 청하면서 위판을 만드는데 필요한 밤나무와 향축을 보내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이때 교동향교도 대대적인 보수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영조(英祖) 17년(1741년)에 강화부사 조호신(趙虎臣)이 화개산 남쪽 계곡,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예전의 향교터는 지금의 고구리에 남아있으며, 현재도 구향교골이라는 지명으로 남아 있다). 관학(官學) 즉 국립학교라는 향교의 성격상 기본적으로 수령이 통치하는 관아와 가까운 곳, 읍치(邑治)의 중심에 위치하여야 했는데, 교동향교와 같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관아와는 다소 떨어진 곳에 향교를 중수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고종 27년(1890년)에 동서 재실을 중건하였다.
1931년에 대성전을 중수하였다. 대성전에는 중국의 5성의 위패 및 유교의 현인 16위와 한국의 유학자 18위를 봉안하고, 동서 무에 각각 한국의 9현을 봉안 배향하였는데, 1949년에 모화사상을 축소하자는 전국유림대표회의의 결의에 따라 16현 동서 배향위 가운데 주자(주희)와 정자(정이)를 제외한 14위의 위패를 매향하고, 해동 18현을 승봉하여 제향하였으며 봄과 가을에 행하던 석전(釋奠)을 폐하고 공자의 탄일인 음력 8월 27일에 기념 석전을 봉행하다가, 3년 뒤인 1952년에 공문십철과 송조 4현을 복위하는 동시에 석전도 다시 부활시켰다.
한국전쟁으로 향교 건물이 퇴락한 것을 1960년에 중수하였으며, 동서 재실과 내외삼문의 개건 및 단청 보수가 1981년에 이루어졌다.
건물 배치
향교의 구성체계에 있어 교동향교는 전성기의 향교건축 체제, 즉 내삼문에서 대성전에 이르는 대성전을 비롯한 동서 무(廡)와 제기고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제향공간과, 내삼문에서 명륜당 사이의 명륜당을 비롯한 동서 재를 중심으로 하는 강학공간을 구성하는 형태를 갖추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홍살문에서 외삼문에 이르는 진입공간과 명륜당에서 내삼문 사이에 이르는 과정적 공간까지 모두 네 개의 공간이 네 개의 계단의 지면상 높낮이 차이를 통해 (향교 대지 자체가 경사져 있다) 전학후묘의 전형적인 배치수법을 따르면서도, 제향공간은 그 위계성을 따라 후면의 높은 곳에 배치하였다.
강학공간은 강당인 명륜당을 중심으로 동서 재가 일렬로 병치된 특이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1] 명륜당과 동서 재가 이루는 강학공간의 배치 기법은 전성기 향교건축의 배치에 비해 미진화된 수법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받는데, 후벽면이 일직선상에 놓여있으면서도 동서 재가 명륜당의 측면에 위치하여 그 연장선이 자연스럽게 강학공간의 중정을 형성하도록 했지만, 중정의 앞뒤 폭이 외삼문 기단과 명륜당 기단을 기점으로 약 2.85m 정도로, 외삼문과 명륜당 사이의 거리가 상당히 협작한 공간을 이루며 거의 중정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있는데, 이러한 배치는 그간의 향교나 서원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로서 초창기 한국의 향교 건축에서 '강학공간'에 대한 명확한 설정과 그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다소 결여된 데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동서재의 경우 동재는 부엌이, 서재는 광(창고)이 딸린 일반살림집의 형태로 전성기 재사가 온돌방과 대청으로 구성되고 특히 재사의 형태가 정연해져서 동재가 서재보다 높고 재사에 기거하는 향교생들의 서열상 명륜당에서 가까운 부분이 상위자들에게 돌아가는 형태로 구성되는 개념을 교동향교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명륜당 뒷면에서 제향공간으로 넘어가는 곳에는 약 15단의 계단을 통해 2.5m 정도의 높이차를 두어 내삼문까지 이르도록 설계되어 있는데, 내삼문과의 간격은 충분한 여유를 갖고 있지만 상당부분이 후원으로서 경사지 위에 수경으로 처리되어 강학공간이라기보다는 조경공간을 위한 전이공간으로 보여짐으로써, 향교의 강학공간이 공간보다는 건물 자체로서 인정되는 모습을 보인다.
제향공간 한 곽을 두른 담 오른쪽에 제기고가 설치되어 제향공간을 위한 지원영역을 구축하였다. 내삼문 안에는 일반적인 향교의 제향공간에서 볼 수 있는 품(品)자형 배치로 대성전이 한 단 높은 곳에, 앞면 낮은 곳에 동서 무가 병렬로 배치되었다. 대성전의 동서쪽 영역과 대성전 영역을 이루는 기단 부위의 진입이 중앙의 계단 설치와 더불어 양옆면에 램프(Lamp)를 이용하여 다양한 진입 형식을 갖추고 있다는 점이 특색이다. 건물은 모두 옆면과 뒷면에 방화벽이 둘러싸고 있다.
주요 건물
명륜당
일반적으로 앞면에 짝수칸을 쓰지 않는 한국의 목조건축에서 특이하게도 앞면 4칸, 옆면 2칸이라는 칸수를 채택하고 있다. 중앙의 2칸은 대청으로 하고 양옆면을 대칭으로 앞면 각 1칸씩 온돌방을 배치하였다. 중앙의 대청은 앞면을 띠살문의 들어열개로, 뒷면은 판장문 미닫이를 두었다. 오른쪽 온돌방 주변에는 함실을 두어 윗쪽을 수납공간으로 사용했다. 좌우측 온돌방의 앞면 창호는 상부에 두어 진입은 대청을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했으며, 5량 구조로서 민도리 형식의 소박한 가구를 갖추고, 외무의 보뺄목 밑에 헛첨차 형태의 구조가 밑을 받치고 있다. 막돌초석에 방주, 팔작지붕의 홑처마로써 단청을 제외하고는 일반 민가의 건축적 구조를 보여주고 있다. 명륜당 뒷면과 내삼문 사이의 공간에는 계단 양쪽에 조경이 조성되어 있고, 진흙을 쌓고 그 위에 항아리를 거꾸로 세워놓은 듯한 굴뚝과 함께 계단 왼쪽에는 음각으로 명문이 새겨진 한 기의 괴석이 있다.
동서재
두 건물이 강당 앞면에 대칭으로 배치되어 있으나 평면은 모두 'ㄱ'자 형태를 가지고 있으며 평면 구조는 조금 차이가 있다. 동재는 정면 3.5칸, 측면 5칸의 ㄱ자 형태로서 장방향의 3칸과 단방향의 2칸을 온돌방으로 구성하고 중앙에 정면 1.5칸 측면 2칸 규모의 부엌 공간을 배치시켰다. 중정을 향하는 장방향 부분의 온돌 앞면에는 툇마루를 두고 단방향 부분에는 온돌방 전면에 전실형태의 퇴간을 부엌과 온돌방에 걸쳐 내부 공간으로 구성하였다. 온돌방들은 앞면 모두 띠살창호로 뒷면은 모두 윗부분에 살창을 두었다. 내부는 5량 구조로서 민도리 형식의 가구 구조로 팔작지붕에 홑처마이다. 동재 앞과 외삼문 사이에는 사선 방향으로 명륜당의 것과 같은 진흙으로 하단을 만들고 나무로 윗부분을 만든 납기둥 모양의 굴뚝이 마련되어 있다.
서재는 앞면 2칸, 측면 3칸의 ㄱ자형태로 동재보다 규모가 다소 작은데, 측면 2칸은 칸막이가 없이 온돌방으로 되어 있다. 앞면 2칸은 흙바닥의 광(창고)을 이루고 있으며, 온돌방 앞면은 띠살창호, 뒷면은 상부에 빗살창호를 두고 광에는 판장문 외의 채광창을 두지 않았다. 가구는 5량, 팔작지붕에 홑처마, 그리고 민도리 양식의 소박한 형태다.
두 건물 모두 벽체를 방화벽으로 하여 화재에 대한 엄격한 보호구조를 택했고, 전성기 향교에서 보이는 평면구조와는 현저한 차이를 보인다. 거의 일반 살림집의 짜임새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삼문
대성전과 동서무가 있는 제사공간으로 들어가는 입구로 명륜당 바로 뒤에 있다. 계단 오른쪽 아래에 노룡암(老龍巖)이라는 작은 바위가 있다. 교동현 관아 동헌의 북쪽 층계에 있었던 돌로써 숙종 43년(1717년)에 이봉상이 '노룡암'이라는 글자를 새겼고, 영조 49년(1773년)에 이달해가 글을 지어 새겼던 것을 1982년에 지금의 위치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
대성전
약 1.2m 높이의 막돌허튼층쌓기로 만든 기단 위에 지어졌는데, 앞면 5칸[5], 옆면 1.5칸의 맞배지붕으로 양쪽에 풍판을 두었다. 겹처마이며 전체 건물에 단청을 하였다 퇴간부에만 팔각추 형태의 장주형 주춧돌과 원형 기둥을 쓰고 나머지는 네모난 초석에 네모난 기둥으로 되어 있다. 향교내의 유일한 초익공 형식의 공포를 갖추고 있으나 그것도 후면부에는 민도리 형식으로 보뺄목만 내놓은 상태이다. 대성전 가운데 앞면 3칸에는 띠살창호로 들어열개문을 달고[6] 가구는 1고주 7량 구조로 윗부분 종도리 밑에는 판대공으로 간단히 받치는 구조를 취하였다. 대성전 앞면에 있는 방형의 판석은 가로 2.05m에 세로 1.19m로 생단(牲壇)으로 여겨진다.
동서무
3칸 모두 흙바닥으로 앞면에만 창호를 두고 양옆칸에는 띠살문을, 가운데칸에는 문이 없이 위쪽에 띠살창만 두었다. 맞배지붕에 풍판을 달고 내부는 5량 구조에 민도리 형식의 백골집이다. 동무 앞에 놓여있는 가로 0.27m에 세로 0.37m의 석물은 손을 씻던 곳으로 여겨진다. 현재는 향토관과 충효교육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제기고
앞면 3칸, 옆면 1.5칸의 맞배지붕으로 맞배지붕 옆에는 풍판이 있고 좌우측 및 뒷면 벽체는 두터운 방화벽을 쌓아 만들었다. 앞면부에만 판장문 미닫이로 열고닫을 수 있게 했으며, 왼쪽 판장문 윗쪽에 환기용 살창이 설치되어 있다. 가구는 3량 구조이며 홑처마에 납기둥, 민도리 형식으로 소박한 형태이다. 내부에는 유기 보궤와 용작, 작, 작대, 저상, 향합, 향로, 촛대, 목두, 축변, 향상, 가마, 식정, 제복, 유건 등이 있다.
외삼문
향교로의 진입로, 전면 30m 부근에 홍살문이 설치되어 있으며, 홍살문을 중심으로 진입로가 약간 꺾여서 외삼문에 이르는데 전면부에 몇 단의 계단을 두고 외삼문으로 진입하게 되어 있다. 솟을삼문 형식이다.
홍살문
원주형 주춧돌 위에 두 개의 원기둥을 세우고 윗부분에 홍살을 얹었으며, 가운데에는 태극 문양의 장식을 두었다. 앞에는 수령변장하마비(守令邊將下馬碑)라는 글자를 새긴 비석이 세워져 있다.
화개사(華蓋寺)
창건 연대는 고려 때라고 전하는데 고려 말의 문신 목은 이색(1328~1396)이 독서했다고 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다. 고려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도금불상 2개가 동국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원 건물은 1840년경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건립되었으나 1967년 다시 화재가 일어나 1968년 중건했다. 절 뒤에는 문무정이라는 우물이 있다.
화개산
화개산은 교동대교를 건너 왼쪽 지척에 있다. 해발은 260m에 불과하지만 교동도에서는 가장 높은 산이라 사방으로 조망이 트여 있다. 동쪽의 교동대교부터 오른쪽으로 석모도, 상주산, 남산포, 기장섬, 주문도, 미법도, 서경도가 차례로 보인다. 북한 땅도 가까이 보인다. 강화만 건너 황해도 연안군(옛 연백군)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온다.
산행 들머리는 화개산 북쪽 연산군유배지나 남쪽 화개사에서 시작한다. 어느 쪽이든 주차가 가능하고 정상까지 약 1.5km 거리로 40~50분 정도면 닿을 수 있다. 연산군유배지 쪽에서 오르면 정상 200m 직전에 화개약수터를 지난다. 음용 가능 유무를 알리는 안내판은 없지만 물은 깨끗한 편이다.
정상에는 정자 1동과 산불감시초소가 설치되어 있고 이 사이에 공터가 있다. 공간은 넓지만 텐트 칠 만한 평평한 곳은 제한적이라 울퉁불퉁한 곳에는 약간의 평탄화 ‘공사’가 필요하다. 과거에는 스피커를 통한 북한의 대남방송이 아주 시끄러웠지만 현재 그런 일은 없다. 정상엔 망원경과 섬 안내도가 설치되어 있다.
수도권 근처 당일치기 어디로 놀러가지?
교동도 화개정원
박상은 기자
오마이뉴스 기사 입력 : 2023. 11. 10. 14:27
수도권에서 당일치기 여행을 생각한다면 후보지에 강화도를 넣어도 좋겠다. 강화도에 생긴 지 얼마 안 된 '화개정원'이 있기 때문이다.
'화개정원'은 교동도 내 화개산 일대에 조성된 곳이다. 교동도는 고려시대부터 왕족들의 유배지이며, 연산군의 유배지로 유명하다.
화개정원에는 연산군의 유배지를 테마로 한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소달구지를 타고 유배 온 연산군 등을 재현해 놓았으며 바로 옆 전시관에는 유배형에 관련된 내용이 설명되어 있다. 아이들에게 재미있는 역사 공부가 될 듯하다.
광장에는 윷놀이, 제기차기, 굴렁쇠 등 재미있는 민속놀이 체험이 마련되어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장소이다. 집에서는 접하기 힘든 놀이도구들이 마련되어 있어 남녀노소 즐겁게 체험하기 좋다. 아이들은 새로운 놀이를 알게 되고 어른들은 추억을 되새길 수 있어 모두가 웃을 수 있는 공간이다.
화개정원은 치유의 정원, 평화의 정원, 추억의 정원, 역사 문화 정원, 물의 정원 총 5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다. 산에 위치하다 보니 정원이 오르막길로 되어 있지만, 한 곳 한 곳 볼거리가 많아 천천히 즐기며 걷다 보면 정상에 도착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화개정원으로 놀러 온 가장 큰 이유는 모노레일이다. 모노레일은 레일바이크와는 다르게 페달을 굴리지 않아도 되고 사방이 막혀 있다. 계절 불문 여유롭게 경치를 즐길 수 있다.
모노레일은 천천히 이동하는 이동 수단이지만 눈앞에 높게 들어선 레일이나 뚝 떨어질 것 같은 레일을 보면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스릴도 있었다.
화개정원을 방문한다면 모노레일을 적극 추천한다. 모노레일은 9인승이나 가족 단위로 탑승하여 가족들과 편안히 대화하며 이동할 수 있고 화개산 전망대까지 손쉽게 이동이 가능하다. 이동시간은 왕복 40분 이내이다.
전망대는 스카이워크로 되어 있어 바닥이 보인다. 고소공포증이나 겁이 많은 사람들은 이용하는데 무서울 수 있다. 실제 관람하였을 때 여러 명이 바닥이 투명하여 전망대 난간까지 가지 못하였다.
화개정원을 즐기는 방법에는 모노레일뿐만 아니라 스탬프 투어길도 있다. 화개정원 곳곳에 설치된 솥뚜껑 조형물을 찾아 모바일 스탬프를 찍어 인증하면 기념품을 받을 수 있다.
관람 팁을 주자면, 화개정원 관람 시간을 넉넉히 세 시간 정도로 잡고 한 번은 모노레일을 타고 전망대를 구경하고 다시 입구에서부터 천천히 화개정원의 오색 테마를 몸으로 즐기는 것을 추천한다. 스탬프 투어에 성공하면 기념품을 받을 수 있다. 지난 1일 기준, 기념품은 쌀이었다.
화개정원의 관람 시간은 주말 기준 오전 8시부터 오후 8시까지이며 입장은 오후 7시까지 가능하다. 평일은 마감 시간이 한 시간 이르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교동동로471번길 6-58에 있다.
대룡시장
대룡시장은 땅이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황해도 연백군에서 피난 온 실향민들이 고향에 있는 시장인 '연백장'을 그대로 본떠서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세월은 비록 수십 년이 흘렀지만, 옛 1960, 1970년대의 간판과 골목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있어 타임머신을 타고 예전으로 돌아가는 듯하다.
단순히 영화 세트장과 테마파크 같은 분위기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의 현장이 담긴 생생한 장터를 직접 체험해 볼 수 있고,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변화도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장소다. 단순히 낡고 오래된 시장이 아니라 젊은 사람들의 기호에 발맞춰 쌀국수집 등 시대의 변화에 빠르게 적응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장 본연의 매력은 잃지 않았다.
대룡시장의 입구에는 교동 제비집이라 불리는 인포메이션 센터가 있어 간단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시장은 좁은 골목에 형성되어 있고, 생각보다 크기도 작지만 어린 시절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간판들과 가게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가는 장소마다 볼거리가 대단하다.
특히 정육점에는 돼지와 소가 도축되어 있는 상태로 그대로 보존되어 있는 생소한 광경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옛날 이발소와 방앗간 등이 고스란히 남아있어 가는 곳마다 발길을 멈추게 만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교동도에서 나는 쌀 등을 이용하여 반죽한 호떡과 꽈배기의 맛이 쫀득하고 반죽이 그대로 살아 있다. 참기름병을 이용한 밀크티는 이 시장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이템이다.
골목은 성인 2~3명이 통행할 수 있을 정도로 좁다. 길이도 약 400미터로 뭔가 더 나올까 싶어 걸어가다가 금방 길이 끝났다. 여느 지방의 시장들보다 작은 규모다. 수십년간 평화로운 분위기 때문일까 제비들이 많이 날아다녔다. 가게마다 제비집이 여럿 있었다.
남산포
새우젓으로 유명한 교동도 남쪽의 남산포구는 작은 어선 몇 척만 한가롭게 정박해 있지만 고려시대 송나라 사신들이 기착했던 국제항이기도 했으며, 삼도수군통어영의 본진이 있던 항구였다. 현재는 흔적조차 찾기 힘들지만 우리나라와 중국 사신이 왕래할 때 뱃길이 무사하기를 기원하는 제사를 지내던 당집, 사신당만 남아 있다.
교동읍성(喬桐邑城)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읍성.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소재지 :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읍내리 577번지
1995년 3월 2일 인천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둘레는 430m, 높이는 약 6m이다.
1629년(인조 7)에 축조된 읍성으로 동남북 세 곳에 성문이 있고 각 문에는 문루(門樓)가 세워졌는데, 동문은 통삼루(統三樓), 남문은 유량루(庾亮樓), 북문은 공북루(拱北樓)라 하였다. 1753년(영조 29) 성곽을 고쳐 쌓았고 1884년(고종 21) 성문을 다시 세웠으며, 1890년(고종 27) 동문과 북문을 다시 세웠다. 현재 동문과 북문은 남아 있지 않으며, 남문인 유량루는 1921년 폭풍우로 무너져 홍예(虹霓)만 남아 있다.
동진포
다음 내용은 교동읍지에 기록된 내용이다
"교동도에 영이 설치되어 읍성이 축조된 뒤 가장 번화했던 포구가 바로 동진포다. 서울과 해주를 잇는 주요 관문이었던 동진포는 중국으로 가는 사신들에게는 바다 날씨를 살피기 위해 반드시 들러야 하는 곳이었다. 기상이 좋으면 바로 배를 띄워 중국으로 향했지만 그렇지 않으면 동진원이라고 부르는 객사에서 하룻밤을 묵고 길을 떠났다. 동진포를 떠나 서해로 나아가는 이들을 배웅하던 동진송객은 그 모습이 얼마나 장관이었는지, 이를 교동팔경 중 하나로 기록하고 있다."
제 9코스(교동 1코스 다을새 길)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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