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서체 - 차주일
목련꽃봉오리가 화선지에 먹물 스미듯 부풀고 있다.
붓이 한 획을 내려 긋기 전
점 하나 힘주어 누르는 저 잠깐을 겨울이라 부르겠다.
우듬지마다 찍어놓은 꽃봉오리를
한 무리의 말발굽소리가 내처 달려오는 중이라 말하겠다.
오직 북쪽만 향하던 외골수가 잎보다 먼저 피운 꽃
그 낙화를 겨울이 내려놓는 잔상이라고 말하겠다.
꽃 진 자리에서 햇잎이 길어난다,
넓어지는 잎 따라 바람의 획이 굵어진다,
바람의 그림자가 먹물 스미듯 땅 위에 퍼진다,
이 가필을 봄이라 부르겠다.
말[馬]의 땀내 짙은 향기를 봄의 속도라 말하겠다.
당신 몸에서도 봄 떠난 지 오래되었다는 어머니
봄철 내내 궁서체 ‘ㅣ’ 내리긋기 습자 중이다.
한 획 채 내리긋지 못하고
봄 한 철 차마 놓아주지 못하고
목련꽃봉오리 같은 먹점을 화선지에 가득 채워놓았다.
보다 못한 내가 참견하는 것을 이른 봄이라 말하겠다.
어머니, 당신의 굽은 손가락 끝마디 하나 만들고
손가락 두어 마디 쭉 내리그으세요.
내 뒷머리 쓰다듬다가 냅다 내 손을 쥔 속도로 말이에요.
먹점 위에 다시 먹점을 찍어보던 어머니
굽은 채 굳은 열 손가락 끝마디를 하나하나 만져본다.
그래 이제 갈 때가 되었구먼, 어머니 혼잣말이
내 성대에 조율한 침묵을 나의 겨울이라 부르겠다.
뒷목덜미께 고이는 이 온기를 봄맞이라 말해야만 하는가.
어미 몸에서 내게로 내처 달려오는 무채색의 온기
내 몸에서 펴나므로 내가 모음이 되리라.
그때 나는 비로소 아들의 손을 쥐고
궁서체 ‘ㅣ’처럼 고개 숙여 한 손의 서사를 들려주리라.
월간 『현대시학』 2010년 9월호 발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