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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일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루카 9,51-56
분노는 지옥으로 가는 길의 이정표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분노를 일으킵니다.
사마리아 인들이 예수님은 자신들 편인 줄 알았으나 예루살렘으로 명절을 지내러 올라가시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라고 분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기 위해 다른 마을로 가십니다.
만약 누군가 자신에게 짖는 개와 싸우고 있다면 그 사람은 왜 개와 싸우는 것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한가해서 그렇습니다.
아기를 안고 병원으로 가는 길이었다면 개가 짖건 말건 급해서 병원으로 갑니다.
두 번째는 행복으로 가는 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어차피 그 목적지로 가봐야 고통만이 있으니
여기서라도 자기를 무시하는 개를 두들겨 패는 기쁨을 느끼고 싶은 것입니다.
단편영화 ‘윌리 빙엄의 경우’(2015)는 형벌 제도가 바뀐 세상을 가상으로 만든 영화입니다.
한 여자아이를 살해한 범죄자는 피해자의 아버지와 가족들의 분노가 풀릴 때까지 몸의 일부가 잘려 나가야 합니다.
처음엔 팔 한쪽, 그다음엔 나머지 팔과 한쪽 다리,
그다음엔 신장과 허파 하나. 이런 식으로 조금씩 잘라가며 자신의 분을 풉니다.
코와 입술, 귀까지 잘린 범죄자는 더 이상 살아봐야 좋을 게 없어서 그냥 망연자실합니다.
처음엔 이 영화가 응당한 복수를 하는 사이다 같은 내용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지나친 복수에 아내도 떠나고 딸들도 아버지 곁을 떠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가서는 아버지가 범죄자의 모습처럼 처참하게 변해있습니다.
복수하면서 자신도 고통을 받고 있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 뒤에는 부활의 영광이 있습니다.
부활의 영광을 위해 십자가는 감사한 도구일 뿐입니다.
내가 의사 애인을 사귀고 있는데 길을 가다
돌부리에 발이 긁혀 피가 난다면 어떨까요? 자신을 만나러 오다가 피가 나는 그 애인을 더 사랑하여 잘 치료해 줄 것입니다.
그러니까 돌부리가 감사한 것이 됩니다.
그러나 무서운 직장 상사를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면 그 결말이 행복하지 않아 돌부리를 발로 차며 화풀이하게 됩니다.
따라서 지금 내가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고 복수심이 생긴다면 내가 가는 방향은 천국일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미 천국과 지옥을 정해놓고 가고 있습니다.
내가 어떤 사람이 용서되지 않는다면 조심하십시오.
지금 나에게 유일한 행복은 그 사람에게 분노를 터뜨리는 행복밖에는 남지 않은 것입니다.
알바니아 출신의 예수회 신부인 안톤 룰리 신부는 자국의 공산주의 정권 동안 극심한 박해를 겪으며 살았습니다.
1910년에 태어난 그는 종교 기관을 맹렬히 표적으로 삼은 알바니아의 무신론적 공산주의 정부가 등장하기 직전인 1942년에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는 1947년 정부에 반대했다는 혐의로 체포되어 17년 동안 감옥에서 살았으며, 그곳에서 극심한 고문과 비인간적인 환경에 직면했습니다.
그는 1989년 석방된 이후 고문자 중 한 명을 용서하고 포옹하기까지 했습니다.
고통에도 불구하고 인내와 사랑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특히 1996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와의 알현에서 깊은 인상을 남겨 교황을 감동하게 했습니다.
그가 평생을 감옥에 있으면서 자신에게 고문을 가한 사람들을 용서하게 된 이유는 그들이 그가 천국을 느끼게 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투옥 중 심한 고문을 당했던 특별한 크리스마스이브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발가벗겨진 채 냉동실에 묶인 그는 겨드랑이 아래에 밧줄로 매달려 있었고 간신히 발가락으로 서 있을 수 있었습니다.
추위가 그의 몸에 스며들자 그는 죽음이 임박했음을 느꼈습니다.
이 고통과 무력함으로 울부짖던 순간에 룰리 신부는 그가 묘사한 특별한 영적 만남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말씀이 사람이 되신 신비와 십자가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되었고, 그렇게나 자신을 사랑하시는 그리스도께서 자신과 함께 계심을 느꼈습니다.
지극한 고통에도 불구하고 그 행복은 그를 기쁨과 위로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 행복이 없이 어떻게 그들을 용서할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부활 앞에선 십자가는 감사의 도구가 될 뿐이지만, 지옥 앞에서는 모든 게 분노의 대상이 됩니다.
이 이정표를 잘 보고 나아가야 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10월1일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복음: 루카 9,51-56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을 단호하게 뿌리칩시다!
한류 열풍의 기세가 아직도 수그러들지 않고 계속되니,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특히 음악이나 영화 등 문화 예술 분야에서 전 세계 사람들의 이목을 지속적으로 끌고 있다는 것, 정말이지 자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진지한 성찰도 필요합니다.
전 세계 수많은 청소년들이나 어린이들이 열광하는 K-드라마나 영화, 가요인데, 그저 흥행만을 추구하며 지나치게 폭력적이거나 선정적으로 흘러가서는 안 될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영화나 드라마가 너무 지나치게 폭력적입니다.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폭력성을 드라마를 통해서라도 풀라는 의미인지, 여차하면 주먹을 휘두르고 총을 쏘고 칼을 휘두르니, 아이들이 보고 따라 하지 않을까 걱정입니다.
우리는 모두 냉철한 지성을 소유한 인격자인 인간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뜨거운 피가 돌고 있는 생명체이기에, 내면 깊숙한 곳에 강한 공격성이 분명 자리잡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구체적인 일상생활 안에서 절실히 느끼는 유혹 한 가지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를 이성과 논리와 대화로 풀어나가기보다는 그냥 확 힘으로 밀어붙이고 싶은 유혹입니다.
책상이고 컴퓨터고 다 엎어버리고 뛰쳐나가고 유혹, 평소 꽉 참고 눌러왔던 하고 싶은 말들
속 시원히 해주고 싶은 유혹, 우월한 힘을 총동원해서 눈엣가시 같은 누군가를, 천하 밉상인 이웃 나라를 확 쓸어버리고 싶은 유혹...
그런데 놀라운 사실 한 가지가 있습니다.
예수님과 오랜 기간 동고동락하면서 특별 제자교육을 받은 제자들, 그중에서도 핵심 제자들, No2, No3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 사도들도 그런 유혹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목적지인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사마리아 지역을 거쳐 가시게 되었는데, 제자들이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습니다.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는 개와 고양이 이상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과 말도 안 섞고, 상종조차 하지 않았는데, 그것은 사마리아인들이 이런저런 연유로 이민족들과 혼혈하게 된 것을 용납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반면 사마리아인들은 별것도 아닌 것에 목숨을 거는 유다인들, 나름 전통 신앙과 관습을 고수한다고 잔뜩 폼을 잡지만, 실상 죄란 죄는 다 짓고 사는 유다인들, 뒤로 호박씨를 까는 유다인들을 또한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당연히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 일행이 자기 마을에 머무르는 것을 거부한 것입니다.
노골적인 냉대를 받은 것에 대해 노발대발한 요한과 야고보 사도가 예수님께 다가와, 저것들 그냥 확 한번 엎어버릴까요, 라고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요한 9,54)
사실 당시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여러 가지 능력을 부여받아, 사마리아 고을 하나 순식간에 날려버릴 힘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 순간 제가 예수님이었다면 이랬을 것입니다.
“그래, 그게 낫겠네. 감히 우리를 배척하다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군. 속 시원히 한번 봐버리게!”
그러나 생애 내내 비폭력 평화주의 노선을 한결같이 고수해오신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두 제자를 크게 꾸짖으십니다.
그리고 다른 마을로 발길을 돌리셨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힘을 사용한다면 그 힘은 사랑의 힘이어야 합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26주간 화요일 강론>
(2024. 10. 1. 화)(루카 9,51-56)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신앙인은 축복하는 사람입니다. 저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루카 9,51-56).”
1) 지금 이 이야기의 상황은,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상황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들’이 ‘유대인들’을 적대적으로 대한 상황입니다.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지름길은 사마리아를 통과하는 길이었고, 그 길로 가면 도보로 사흘이 걸렸습니다.
예수님께서 심부름꾼들을 당신에 앞서 보내신 것은, 복음을 전하라는 것이 아니고, 일행이 많았기 때문에 음식과 숙소를 미리 준비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 사도가 심부름꾼이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에 사마리아인들이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는 말은, 당시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의 갈등을 나타냅니다.
유대인들에게는 예루살렘 성전만이 유일한 성전이었지만, 사마리아인들은 자기들이 ‘그리짐 산’에 세운 성전에서 예배를 드렸고, 예루살렘 성전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유대인들이 그것을 업신여기고 무시하면서 예루살렘으로만 가는 것에 대해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특히 모든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으로 순례를 가는 축제 기간 중에는 그 적대감과 반감이 더욱 깊어졌습니다.
<그 당시에 전반적인 실제 상황은,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을 박해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사실 사마리아인들도 야훼 하느님을 믿고 있었고,
모세오경을 성경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종교와 신앙을 인정하지 않고 무시했고, 배척하고 학대하고 박해했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그 박해에 맞서 싸울 힘이 없어서
소극적으로 적대감과 반감을 드러내는 정도로 그쳤습니다.
루카복음 10장에 있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는 그런 상황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랑 실천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사마리아인으로 설정하셨습니다.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고 있는 입장에 있는 사마리아인이 박해를 하는 위치에 있는 유대인을 도와주는 이야기는 ‘이웃 사랑’과 ‘원수에 대한 사랑 실천’을 잘 보여줍니다.>
2) 아마도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께서 보내신 심부름꾼들을 모욕하면서 쫓아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신체적인 폭행도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그 심부름꾼들이 먼저 사마리아인들을 무시하면서, 오만한 태도로 음식과 숙소를 구했을지도 모릅니다.
먼저 자극했기 때문에 모욕당했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 심부름꾼들이 야고보 사도와 요한 사도였다면, 그들은 모욕당한 것을 참지 못하고 크게 화를 냈을 것입니다.
둘 다 불같은 성격이었기 때문입니다(마르 3,17).
<겉으로만 보면, 두 사도는 자기들이 당한 일은 곧
예수님이 거부당하고 모욕당하신 일이라고 생각해서 화를 내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자신들이 모욕당한 것에 대해서 화가 났을 것입니다.>
몹시 화가 난 두 사도는 엘리야 예언자가 했던 일을, 사마리아인들에게 똑같이 하고 싶어 했습니다(2열왕 1장).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는, “저들에게 천벌을 내립시다.”, 또는 “저들에게 천벌을 내려 주십시오.” 라는 뜻입니다.
3) 예수님께서 두 사도를 꾸짖으신 일은, 다음 가르침에 연결됩니다.
“내 말을 듣고 있는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7-28).”
우리도 살다보면 두 사도와 같은 심정이 될 때가 있습니다.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악인들의 횡포를 참기가 힘들 때,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이 너무나도 불공평하고 부당하게 보일 때......
그럴 때에 하느님께 ‘정의의 심판’을 간청하기도 하는데, 그 간청이 선을 넘어서, 악인들에게 천벌을 내려 달라고 빌거나 악인들이 큰 불행을 당하게 해 달라고 청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기도’가 아니라 ‘저주’ 라는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신앙인에게는 다른 사람을 저주할 권리와 권한이 없습니다.
가끔 예외적으로 하느님께서 직접 천벌을 내리시는 경우가 있긴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우리가 청할 수는 없습니다.
저주 자체가 죄입니다.
우리는 죄인들의 회개와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죄인들이 멸망당하기를 바라지 말고, 함께 구원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혀로 주님이신 아버지를 찬미하기도 하고, 또 이 혀로 하느님과 비슷하게 창조된 사람들을 저주하기도 합니다.
같은 입에서 찬미와 저주가 나오는 것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이래서는 안 됩니다.
같은 샘구멍에서 단물과 쓴물이 솟아날 수 있습니까?(야고 3,9-11)”
(전주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