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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악산 중봉(1,446m : 가평)
*일 시 : 2004. 12. 19(일), 제8차 RTNAH 산행(18명), 날씨(구름 낀 하늘)
*코 스 : 관청리-큰골-애기봉갈림길-가마소-주능선삼거리-전망대-중봉-전망대-남릉-1142봉
-급경사-계곡-가마소-큰골-원각사-관청리(원점회귀산행)
*소 시 : 오전 8시 55분~오후 3시 45분 → 총 6시간 50분 소요
가평 화악산(1,468.3m)!
화악산은 경기도 가평군과 화천군 경계에 있는 높고 억센 肉山이다.
경기도 최고봉이요, 지붕인 화악산(1,468.3m)은 백운산((904m)에서 국망봉(1,168m)으로 이어지는 한북정맥 상의 937m봉(일명 도마치봉)에서 남동쪽으로 가지를 친 능선 상에 솟아 있다. 937m봉에서 남동으로 뻗은 능선은 경기도 가평군 북면과 강원도 화천군 사내면 道界다. 이 능선은 도마치를 지나 서서히 고도를 높여 석룡산(1,155m)을, 이어 계속 동진해 쉬밀고개에서 숨을 고른 후에 突兀한 산이 화악산이다.
정상일대는 민간인 출입금지 구역으로 묶여 있다.
경기오악(감악산-송악산-관악산-운악산)의 하나인 화악산은 한북정맥에서 분가해 나왔지만, 한북정맥 상의 어느 산보다도 많은 산들을 거느리고 있다. 정상에서 남쪽으로 가지친 능선 상의 애기봉(1,055m)-수덕산(794.2m), 계속 동쪽으로 밀고 나가 실운현-응봉(1,043.6m)을,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촉대봉(1,125m)을 들어올리곤 고도를 낮추며 동쪽으로 휘면서 홍적이고개에 이른다. 예서 분기한 줄기는 몽덕산(690m)-가덕산(858m)-북배산(867m)-계관산(710m, 일명 큰 촛대봉)을 연결하는 大산맥을 형성한다. 이어 남쪽 '작은 촛대봉'(690m)에 이른 능선은 두 가닥으로 나누어 남서쪽으로는 월두봉(453m)-보납산(330m)을, 남동으로는 석파령-삼악산(645m)까지 세력을 뻗친 후 가평천과 북한강에 그 여맥이 각각 끝난다. 거의 산으로 이뤄진 가평군 내에서도 가평천과 화악천을 품고 있는 화악산 일대는 주목과 산삼이 자라고, 물에서는 어름치가 서식하는 자연의 보고다.
옛날부터 화악산은 지리적으로 한반도의 正중앙으로 알려져 왔다.
우리나라 지도를 볼 때 전남 여수에서 북한 中江으로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선이 국토자오선(동경 127도 30분)이다. 그리고 북위 38도선을 그으면, 두 선이 만나는 곳이 바로 화악산 정상이다. 평북 삭주에서 경남 울산으로, 백두산에서 한라산으로 선을 이었을 때 그 두 선의 교차점도 화악산에서 만나는 것이 신기하다. 운악산-송악산-관악산-감악산과 함께 '경기 5악'인 화악산은 풍수지리상으로도 조선의 심장에 해당하는 大吉복지 명당으로 전해오고 있다. 또한 6.25 이후 입산금지구역으로 묶여 민간인 출입이 제한된 화악산 정상을 옛날에는 신선봉으로 불렀다는 얘기도 전한다. 대체로 화악산 정상은 국립지리원 발행 지형도에 가운데 중(中) 자를 써서 '中峰' 이라 불러 왔다.
화악산은 가평천과 화악천을 끼고 이어지는 도로가 포장되면서 예전의 자연미가 다소 손상된 게 저간의 현실이다. 그러나 계곡과 능선에 오르면 아직도 심산유곡의 신비함이 잘 간직하고 있다. 화악산 등산로는 관청리에서 큰골을 경유하여 주능선 삼거리나 애기봉을 통해 해발 1,420m인 중봉으로 오르는 코스가 가장 편리하고 산꾼들이 애용한다.
※ 입산통제기간
상반기 : 2월 1일부터 5월 15일까지
하반기 : 11월1일부터 12월 15일까지
가평읍을 지나 목동삼거리에서 좌회전, 도대리 방향으로 차선을 바꿨다. 명지산 입구인 익근리를 통과, 계속 진행하여 참숯공장을 우측에 끼고 조금 북진하여 도대리 보건진료소와 산돌중앙교회 산돌수양관 입구인 관청리 버스정류장에 멈춘 시각은 오전 8시 55분으로 다소 이른 시각이다. 관청리는 풀죽은 채소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은 산촌의 풍광 그대로다.
중봉 산행기점은 淸淨지역이라고 소문난 가평천 상류 관청리로 원점회귀산행을 계획했다.
관청리에서 바라본 동쪽 정면으로 패인 큰골 위로 하늘금을 이루는 거대한 중봉과 애기봉 사이 산세가 산 사이로 은근하게 다가들며 가로막아 출발 전부터 가슴은 누른다.
더욱 철저한 산행 준비를 할 때다.
지난 11월 12일자 스포츠 신문이 정리한 산행에 대한 일반론이 참조가 될 것이다.
사계절 어느 산행에도 복장과 장비를 꼼꼼히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
등산은 산길을 오래 걸어야 하는 운동인 만큼 신었을 때 발이 편한 등산화를 고르는 게 좋다. 하루 일정의 산행이라면 무게가 가볍고 바닥이 부드러운 경등산화가 무난하다. 1박이 넘는다면 바닥이 딱딱하고 목이 높아 발목을 감쌀 수 있는 중등산화가 적합하다.
등산용 바지는 신축성이 좋은 소재로, 티셔츠와 재킷은 방수와 방한 방품 기능을 지닌 제품을 권할 만하다.
등산양말은 땀 배출이 잘되고 항균·방취 기능이 뛰어난 쿨 맥스, 은사 소재가 인기다.
추위에 대비해 모자나 스카프를 준비하는 것도 필요하다. 하루산행과 장기산행으로 구분해서 챙겨가야 하는 기본 장비의 목록을 미리 만들어두면 쉽고 빠르게 배낭을 꾸릴 수 있다.
하루산행에 꼭 필요한 장비로는 방풍·방수옷·랜턴· 물통· 나침반과 지도·압박붕대 등이며 요즘처럼 갑작스런 추위에 대비해야 할 계절에는 장갑과 스웨터를 준비하면 좋다. 장기산행에는 이외에 야영·취사에 장비와 준비물이 더 필요하다. 도시락 외의 비상식량은 열량이 높고 부피가 작은 초콜릿·양갱·육포·사탕 등을 준비한다.
배낭을 꾸릴 때는 먼저 커다란 비닐봉지를 배낭 안에 넣어 방수가 되도록 한다. 방수가 아무리 잘 된 배낭이라도 오랫동안 비를 맞으면 물이 스며들게 마련이므로 꼭 필요하다. 하루산행에서는 방수비닐 대신에 배낭커버를 준비했다가 비가 오면 배낭에 덮어씌워도 된다.
짐은 가볍고 부피가 큰 것을 아래쪽에, 무거운 것을 위쪽에 넣는다. 침낭이나 옷 등은 배낭 밑에, 도시락과 물통 등은 위쪽에 넣고 카메라처럼 깨질 염려가 있는 것은 맨 위에 수건 등으로 싸서 넣는다. 나침반과 지도 주머니칼 필기구 등은 배낭 바깥주머니에 넣으면 가장 좋다. 당일산행 배낭은 지퍼가 양쪽으로 열리게 된 것들이 많은데, 한쪽 옆으로 지퍼손잡이가 모이도록 한다. 배낭 위쪽에 지퍼손잡이가 오게 하면 산행 도중에 열리기 쉽다.
보건진료소 맞은 편 포장도로를 따라 마을을 좌우에 끼고 큰골을 향한 東進이다.
큰골입구 계곡의 계류는 신선한 겨울아침처럼 맑디맑다. 우측 두릅밭을 지나면 외래인을 맞는 狗鳴소리가 요란하다. 어린 강아지가 목걸이에 잡혀 행동반경이 좁은 2~3개월 짜리 어린 강아지가 아침햇살을 받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온 몸을 떨고있다. 코끝엔 콧김으로 인해 작은 고드름이 달려있다. 산촌마을의 풍경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이곳은 원목채취의 원점이나 보다. 길이 3~5m 짜리 원목을 자른 동발(鑛山용어)을 쌓은 집하장이 군데군데 보인다. 우측에는 최근에 지어진 원각사라는 사찰이 있다.
오전 9시 5분.
시멘트 포장소로 끝나며 본격적인 임도를 통한 등로에 들었다.
계곡을 따라 들어가는 큰골 코스가 운치도 있고 조용하고 울창한 숲 속 길의 정감도 신선하며 호젓하다. 갑자기 맞은편에서 1960년대에 많이 봤던 GMC를 닮은 트럭 한 대가 동발을 가득 싣고 내려오고 있다. 마치 성난 코뿔소의 저돌적인 공격같다는 생각이 들어 얼른 길 옆구리로 붙었다. 우측 둔덕은 이곳의 명물인 잣나무 숲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다. 전나무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양의 피톤치드를 발산하는 잣나무가 아침을 더욱 향기롭게 빛낸다.
임도를 막는 철문을 통과하면 좌측 계곡출입을 통제하는 철책이 보인다. 마치 1960년대 후반기 임진강 최전방에서 軍복무시절 함께 했던 DMZ 철책을 연상케 한다. 경사가 완만하게 이어가며 차츰 고도가 높아간다. 우측에 동발집하장 공터엔 많은 원목이 쌓여있고, 원목을 운반하는 포크레인 중기도 서있다. 임도 바닥엔 트럭바퀴자국이 손금보다 선명하고 깊숙하게 패어있다. 계곡으로 올라갈수록 폭포와 청정한 소와 담이 차례로 나오는데 화악산이 자랑하는 큰골의 경관중의 하나다.
오전 9시 17분.
삼거리 갈림길에서 좌측으로 들면 이내 너덜계류를 가로지른다.
또 하나의 소와 작은 臥瀑이 나오고 길은 낙엽송 숲 속으로 올라온 큰길과 합류하여 개울을 건너 잣나무 숲 속으로 이어진다. 헐벗은 낙엽송 나목의 겨울은 왜 그리 을씨년스러운지 모르겠다. 우측으로 계류를 건너간 다음, 양쪽으로 잡초가 무성한 산길을 따라 5~6분 거리 왼쪽으로 길이 20m의 물줄기 세 개가 바위를 타고 내리는 계류를 다시 건넌다.
오전 9시 24분.
<관청리 1.2Km, 애기봉 2.1Km, 중봉 3.8Km>
첫 번째 합수점이 나타난다. 합수점에서 오른쪽 계곡길은 애기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한적한 잣나무 숲지대다. 오늘은 우리들만의 코스다.
청정한 소를 바라보며 이동하는 渡溪다. 합수점을 지나 좌측에 계곡을 끼고 둔덕을 향한 오르막이다. 잡목림 나목지대에 이어 물박달나무와 박달나무 군락지대를 통과했다. 좌측 아래 계곡이 깊게 보인다는 것은 해발이 차츰 높아지고 숨가쁜 오르막이라는 것을 알리는 지형적인 신호다.
오전 9시 50분.
<관청리 2.2Km ↔ 중봉 2.8Km>
<중봉, 애기봉-17, 산불구조 및 구난신고 031-110, 581-119>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 시간이다. 은근하게 운치가 넘치는 조용하고 울창한 숲길은 정감이 어리고 호젓하기 이를 데 없다. 두 번째 합수지점이다. 개념도에 가마소라고 표기된 지점이다. 다래덩굴 나목이 우거진 급경사 오르막의 시작이다. 세상과 사람을, 그리고 자연을 읽으며 숨가쁘게 오르는 이 길은 길 없는 길인가?
오전 10시 10분.
삼거리 갈림길에서 우측 오르막을 택했다. 향긋한 침엽수 특유의 피톤치드냄새가 코를 찌르는 잣나무 노거수 숲을 지나고, 잡초목으로 덮인 오래된 구 임도를 벗어난 지 오래다. 어제 관계업자들과의 연말모임에서 새벽 4시까지 지루한 酒行(?)을 마치고 참여한 정재근 감사님, 산행에는 참여치 못하고 버스에 잔루한 속 아픈 그의 사연을 모를 리 있겠는가. 그가 미약골 귀목식당에 중식을 예약했다는 전화다. 그 동안 여러 차례 교신이 있었으나 불통이더니 1,000m 가까운 고지에서 가까스로 통신이 됐다. 애매하게도 우리 일행들을 위해 토종 닭 6마리가 燔祭로 '犧牲羊'이 아닌 '犧牲鷄'가 됐으니 어쩔 수 없이 이승의 업보하나를 더 얹게 됐다. 아프기는 하지만......
오전 10시 20분.
<관청리 3.0Km ↔ 중봉 2.0Km>
<중봉, 애기봉-16, 119신고처>
불경기와 더불어 오여사님의 주량이 많아진 모양이다. 들머리부터 꽁무니를 내리던 그네의 행보가 워키토키 통신내용대로 오늘이 몹시 힘든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누구라도 술 앞에 장사가 어디 있겠는가. 작취미성의 정감사님처럼 아예 들머리에서 잔류하는 사례도 가끔 있는 일이지만 그의 속내인들 편안할 리 없을 께다. 신갈나무 나목군락지대를 벗어나면 다시 물푸레나무군락지대 오르막이다. 주능선이 가까운지 몰아치는 북풍이 예사롭지 않다.
오전 10시 52분.
미약골이나 적목리, 또는 조무락골에서 올라오는 능선과 만나는 주능선 삼거리 중봉과 서쪽 928봉을 잇는 능선이다. 능선해발 약1,100m정도의 전망대 너른 공터다. 주능선에 올라서는데 예까지 가장 힘이 든 구간이었다. 관청리에서 서릉 삼거리인 이곳까지 오르는 데만 2시간 가깝게 흘렀다. 이 지점 해발을 감안해 중봉이 고산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을 정도로 전망만은 그만이다. 북쪽 화악산 정상과 중봉과 석룡산(1120)을 잇는 능선이 웅장한 하늘금을 이룬다. 서쪽의 국망봉(1168)-개이빨산(1120)-민드기봉(1023)-강씨봉(830)을 잇는 한북정맥이 북풍을 타고 장쾌하게 들어오고, 남쪽의 명지산(1264)-사향봉(1013) 능선 또한 훌륭한 天上의 캠퍼스다.
주능선은 거의 수평이거나 완만한 경사를 보여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는 나목 능선길이다.
야광나무, 참회나무, 귀룽나무, 고로쇠나무, 다릅나무, 거제수나무와 해오라기보다 더 흰 수피의 사스레나무 나목들이 군데군데 보인다. 예상했던 북풍은 그다지 혹독하진 않았다. 이른봄 훈풍처럼 오히려 시원한 기분이었다.
오전 11시 30분.
<38교 6.6Km ↔ 중봉 1.0Km>
<중봉, 애기봉-15, 119신고처>
삼거리에서 중봉 방향인 동쪽 능선길을 타고 40만에 왼쪽 복호동폭포가 있는 조무락골로 내려가는 갈림길이 있는 삼거리에 닿았다. 자작나무와 신갈나무 낙엽이 푹신하게 깔린 능선엔 교통호와 참호가 패어있다. 능선 바닥에 비로소 눈이 쌓여있다. 한 낮 햇살에 눈이 아리게 반사하는 눈빛이 금년 겨울들어 첫 눈을 만난 기쁨을 배가한다. 동북쪽 멀리 화악산 정상의 각종 군사시설과 회교사원을 닮은 돔형 지붕건물이 신기루처럼 확연하게 들어온다.
중봉을 향한 마지막 가파른 오르막 능선이다.
11시 45분.
너럭바위와 이정표, 구난신고 안내판이 있는 중봉 삼거리다.
<중봉 0.3Km↗ 관청리 4.7Km ←. 애기봉 2.97Km↘>
<중봉, 애기봉-14, 119신고처>
애기봉과 수덕산으로 이어지는 남릉 너머로 목동과 가평읍이, 왼쪽으로는 움푹 패어 내린 화악리 협곡 너머로 북배산-가덕산-계관산을 지나 삼악산으로 이어지는 산릉이 천상 만리장성이다. 제법 따사한 햇살이 구름사이로 흘러나온다. 중봉을 향한 수평능선을 재촉했다.
11시 52분.
철조망으로 막아선 중봉 직전이다.
<중봉 0.05m, 건들내 4.9Km, 애기봉 3.37Km>
오전 11시 53분. 중봉에 올랐다.
祭壇모양의 사각지형 위에 대리석으로 만든 높이 80Cm 가량의 정사각기둥 정상석이 서있다. 예상대로 매운 북풍이 몰아들더니 전신의 땀과 체온을 앗아간다.
<中峰 해발 1450m, 1998년 8월 1일 가평군수>
중봉 정상 공터에는 철제로 만든 거대한 군용 통신 안테나가 2개 서있고, 화악산 정상에는 커다란 레이더 돔과 건물들이 보인다. 중봉에 올라서면 산 자체의 덩치에 우선 놀라고 환상적인 조망에 질린다.
북으로 이름그대로 바위들로 형성된 石龍山과 국망봉 너머로 백운산 및 광덕산이 또렷하고, 동으로는 촉대봉 줄기 너머로 오봉산과 사명산 줄기와 응봉(1,436m)위에 군 시설물과 촉대봉이, 그리고 촉대봉(1125) 우측으로 몽덕산(700)-가덕산(858)-북배산(867)-계관산(660)을 잇는 山海가 인상적이다. 정 남쪽으로는 애기봉능선과 애기봉과 수덕산 줄기를 중심으로 오른쪽의 가평천, 그 뒤로 명지산 줄기가 발치 아래다.
경기일대의 유명한 산들이 거의 다 잡힌다. 2월 하순, 3월초엔 본격적인 深雪산행을 즐길 수 있고 가을 단풍이 아름다운 화악산이다. 하산하며 명지산을 바라보는 경관은 보너스다.
강고문님과 강사장님이 늘상 마련하는 라면타임이다.
따끈한 국물이 그리운 지금이다. 정지한 상태에서 몰리는 한풍을 달래기란 쉽지 않다. 몸이 저절로 떨린다. 신체 내 화학반응 최저온도는 37도다. 그 이하로 내려가면 화학반응이 느려지고 궁극적으로 정지한다. 35도가 되면 빠른 근육 활동으로 나타나는 화학적 반응에서 발생하는 열을 자율적으로 생성하기 위한 오한 증상이 나타난다. 30도에서는 지각·인지력이 완전히 사라지고 심장에 섬유질이 형성되며 26도에서는 심장이 멈추고 심폐기능이 정지한다.
오후 12시 35분.
이정표가 있는 전망대 삼거리로 되돌아 왔다.
후미 홍기오 대장님의 수고는 오늘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오여사님과의 씨름 장면이 프리즘을 통해 비치는 오색빛깔처럼 확실하게 들어온다. 꽤 오랫동안 기다렸다. 겨울철능선은 장시간 기다리기가 힘들다. 선두 양경태대장께서 일행을 이끌고 먼저 남릉을 타겠다는 제의다. 그들이 떠난 후 20분이 지나서 후미와 합류했다. 3시간의 시공을 두고 만난 두 사람의 표정이 이채롭다. 각기 속내는 달랐지만 겉은 어찌도 그렇게 동일한지 잠시 웃음이 나왔다. 패잔병치곤 화려한 패잔행군이었다.
오후 12시 56분.
드디어 애기봉 방향 남릉 내리막을 향해 출발했다.
남릉으로 접어들자 남향받이 능선답게 눈은 모두 녹아있었다.
대신 급 내리막 바닥은 몹시 미끄러웠다.
일단 첫 번째 바위지대는 서쪽으로 우회하여 조심스럽게 미끄럼지대를 통과했다.
오후 1시 20분.
좌측 승원폭포와 천도교 수련원으로 내려가는 첫 번째 삼거리를 지났다.
<중봉 1.6Km, 애기봉1.67Km, 승원폭포-화악리>
<중봉, 애기봉-22>
바위지대 우측 옆구리로 우회했다.
오후 1시 32분.
1142봉을 지났다. 급경사의 내리막길, 길을 막는 바위, 절벽, 가파른 내리막길이 연결된 구간이다. 시간여유만 허락된다면 계속 능선을 따라 애기봉까지 답파하고 싶었으나 선두와의 시차감소를 위해 인근 안부에서 서쪽의 큰골로 내려서기로 작정했다.
오후 1시 36분.
<중봉 1.83Km, 애기봉 1.44Km, 관청리 2.65Km>
안부에서 큰골로 내려서는 초입에 붉은 색 리본이 걸려있다.
우측 옆구리가 그런대로 선명했다. 1995년 8월 당시 이 코스로 내려왔던 기억이 떠올랐다. 당시는 짙은 여름이어서 밀림으로 인해 길이 매우 까다로웠었다. 애기봉까지 주파하고 하산하겠다는 선두일행과 교신이 있었다. 잠시 휴식시간을 거쳤다.
내리막은 몹시 미끄럽고 급경사였다. 후들거리는 오여사님의 거북이 행보가 더딜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한참 늦었다. 잦은 주석을 피하라고 미안하지만 은근한 핀잔을 곁들였다. 본인의 건강이 가장 우선이 아니겠는가. 잠깐 수평능선이 나타나는가 싶더니 이내 급경사 내리막이다. 계곡 방향으로 그대로 직진하며 길을 만들어 큰골 상류를 향해 부지런을 떨었다. 껍질이 담배 잎 말리듯 또르르 말린 다릅나무 수피는 언제 보아도 또렷하다. 좌측의 애기봉능선, 우측의 중봉능선, 앞가슴을 막는 한북정맥 국망봉 능선을 음미하며 하산하는 재미도 좋다. 북쪽 방향의 큰골 쪽으로 내려가는 성긴 길이다.
오후 2시 47분.
일명 가마소라 불리는 폭포다. 겨울인 탓에 수량이 적어 본래의 모습을 잃었다. 여름한철이면 굉장한 모습으로 표변할 것이다. 삼거리 안부를 떠난 지 약 1시간이 지나서야 와폭이 있는 큰골 합수점으로 原點回歸했다. 예서 들머리까지는 아직도 한참이 남았다.
3시 5분.
애기봉 갈림길 이정표지점 통과했다. 5분 후에는 많은 리본이 걸린 3거리 갈림길을 벗어났다. 비록 사방이 나목으로 덮였지만 제철이면 우거진 숲일 것이다. 건강한 숲에는 각종 동식물은 물론 많은 기생동식물을 비롯한 삼라만상이 서식하는 여백을 허락한다. 그러기에 숲은 자연순환에 따른 遷移를 거듭하며 건강한 생태계를 유지한다. 균형인간은 이런 건강한 숲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많은 여백을 남겨두는 것을 생활의 일부분으로 알고있다. 그것을 우리의 최소한의 배려라고 일컫는다. 건전한 심신을 유지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의 인연을 잊지 않고 忘年之友로서 서로를 염려하며 새벽을 지나 현재를 밟고 있다. 그래서 삼림에 들어서면 마음은 한없이 너그러워지고 어질게 되나보다.
동발집하장 옆 비포장 소로바닥은 한낮 태양으로 녹아 트럭 자국으로 인해 몹시 질척거렸다. 마른 부분을 골라 깨금질을 하며 내려섰다.
오후 3시 25분.
원각사 옆구리 관청리 마을이다.
강세진 이사님의 마중에 이어, 먼저 하산한 남자회원들의 마중이 이어졌다.
오후 3시 45분
관청리 버스 정류장에 후미 두 사람이 내려온 시각이다.
그것도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를 받으면서 말이다.
들머리인 관청리 마을을 출발, 큰골-애기봉 갈림길-가마소-주능선삼거리-전망대-중봉-전망대-남릉-1142봉-안부-가마소-큰골-원각사-관청리로 원점회귀산행 10Km 거리에 선두5시간 50분(50분 기다림 포함), 후미 6시간 50분이 소요됐다. 오랜 시간 기다렸던 선두 일행들에게 미안했다. 아픈 공복을 달래는 고통을 주었기 때문이다.
오후 3시 50분.
미약골 '귀목식당'으로 이동했다.
번제(燔祭)에 올려진 희생계 6마리의 영혼(?)을 제공한 정재근 감사님의 정성과, 오늘을 즐겁게 만들 주류를 제공한 최영복씨, 그리고 식탁 앞에 앉은 19명의 일행 모두는 맛깔스런 기본반찬과 요리 앞에 잠시 옷깃을 여몄다. 그리곤 정말 맛있는 시간을 맞았다. 특히 23세의 주여니님 令愛가 동반한 오늘은 훨씬 젊어진 하루였다. 요즘 젊은이들은 힘든 일은 무조건 거부한다. 특히 본격적으로 등산에 참여하는 젊은이는 흔치않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미쓰 파이브(5)'는 우리들의 꽃이며 소망이었다.
오후 4시 50분.
긴 식사시간을 접고 식당을 떠났다.
버스에 오르면 제2의 酒宴이 있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대부분 피곤한 잠자리에 들었다.
뒷자리에 아예 길게 누운 홍대장님의 臥身은 오늘이 그렇게 긴 행보였을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신뢰하고 봉사하는 일은 항상 이렇게 무거운가보다. 받는 즐거움보다 주는 즐거움에 우리 모두 익숙해지자.
경춘가도 일부구간(마석-구리 사이)이 지루하게 밀렸다.
팔당대교 부근에서 숨통이 트였다. 88도로는 다른 날과 비교하면 그런대로 한산했다.
새벽에 이어 차례로 하차하는 밤의 이별행진이 여느 때처럼 이어갔다.
밤 8시.
발산역에 내렸다.
강세진 이사님과 落穗를 헤는 시간을 가졌다.
귀로의 서울 하늘은 별이 없어서 비극적이다.
그래서 서울은 더욱 참담하다.
사람이 무너지는 일이 없기를 老婆心같은 밭은 심정으로 기원했다.
*<꽃의 詩人 '큰 꽃'이 되다>
꽃처럼 살다가 '거울 속의 천사' 곁으로 간 김춘수 시인.
"시는 언제나 언어로부터 해방되려 한다" 관념 탈피 '순수 무의미' 실존을 추구했던 김춘수 시인이 82세로 지난 11월 29일 타계했다.
‘울고 가는 저 기러기는 알리라
알리라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
울지 않는 저 콩새는 알리라
누가 보냈을까
한밤에 숨어서 앙금앙금
눈뜨는,’(최근작 ‘달개비 꽃’ 전문)
그는 최근까지 경기도 분당에서 큰딸 집의 맞은편 아파트에 홀로 살았다.
유치환, 윤이상 박경리와 함께 “통영이 낳은 위대한 예술혼”으로 통했던 그는 고향을 끔찍이 사랑했다.
“통영 앞 바다는 호수 같습니더. 파도가 웅장하지는 않지만 쪽빛이었다 연두빛이었다 사금파리처럼 반짝이고요.”
“젊을 때 윤이상·전혁림과 함께 어울렸는데, 그들의 음악과 그림에도 통영 앞 바다의 코발트블루가 있지요.”
교과서에도 실렸던 시‘부두에서’그리고 최근작‘찢어진 바다’에서 보듯 그의 시에는 항상 통영 바다가 출렁거렸다.
1999년에 세상을 버린 아내를 생각하며 쓴 시만 모아서 이태 뒤 시집‘거울 속의 천사’를 냈다. 최근에도 그는“사람 그리운 정은 갈수록 더해져요. …왜 그때 그리 못했을꼬, 그리 하지 말아야 했을 텐데 지금은 돌이킬 수 없다”며 늙은 눈시울을 껌벅거렸고, 마주앉은 이의 콧잔등까지 편치 않았다.
통영의 만석꾼 집 손자로 태어난 김춘수는 양복·구두·모자를 몇 벌씩 갖추고 요정을 드나든 멋쟁이였다. 경기중학생 때는 농구, 일본 니혼(日本)대 시절엔 야구선수를 했는데 쓰러지기 전까지 야구중계를 빼놓지 않고 즐겼다. 그는 영남대 터주대감 교수였고, 시론 名강의는 다음 시간 교수를 복도에 세워놓을 정도로 유명했다. 하지만 1981년 학교를 떠나 “전국구 국회의원으로 징용 당한 것”때문에 두고두고 마음고생을 했다.
그는 릴케와 엘리엇을 흠모했다. 그들을 빗댄 듯 작년 11월‘시의 날’강연에서는,
“한국 시단 100년 史에 아직 큰 시인은 나오지 않았다”는 말로 충격을 주었다.
우리 시엔 “입체적 인간 해석이 더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김춘수는‘타향살이’‘애수의 소야곡' ‘목포의 눈물’을 즐겨 불렀고, 혼자서도 꽁치찌개를 맛있게 끓인다고 자랑하던 그의 말이다.
“시는 언제나 언어로부터 해방되려는 충동을 버리지 못한다.”
그렇다면 마침내 육신을 벗고, 언어까지 버렸으니, 이제 김춘수는 시 자체가 된 것인가.
유족들은 유언을 남기지 않았지만,“하지만 평소에 어머니 곁에 묻어달라 하셨다”고 전했다. 그의 시 ‘꽃’은 ‘우리 시인들이 가장 애송하는 시 1위’(2004년 시인세계 가을호)다.
< 꽃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는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의 빈소가 마련된 삼성서울병원 영안실은 29일 오전부터 부고를 듣고 찾아온 문인들과 일반인들로 붐볐다. 老시인은 여든 넘은 나이에도 시와 산문을 쏟아내며 글쓰기를 평생 업으로 삼은 근대문인의 초상이었다.
고인은 스무 살이었던 1942년, 일본 니혼(日本)대 유학생활 중 가와사키 부두에서 하역작업을 하다가 한국인 동료들과 함께 일본 천황과 총독정치를 비방한 것이 동료의 고자질로 알려져 6개월 간 옥고를 치르고 퇴학당했다. 그는 고향에 돌아온 뒤에도 광복이 될 때까지 불령선인(不逞鮮人)의 딱지가 붙여진 채 살았다.
고인은 생전에 “함께 수감돼 있던 일본의 유명한 좌파 교수가 모진 고문이 끝난 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빵을 혼자 먹는 것을 보고 이데올로기를 믿지 않게 됐다”고 말했다.
5년 전 부인과 사별한 뒤 직장에 다니는 외손녀 두 명과 함께 성남시 분당에 살았던 고인은 쓰러지기 직전까지 시작(詩作)을 멈추지 않았다. 신작 시집‘달맞이꽃'이 12월에 출간될 예정이다.
*교통 :
-열차[청량리역~춘천행 1일 20회. 가평 버스터미널~목동 1일 18회]
-대중버스[동서울터미널~춘천행 20분 간격 운행, 가평에서 버스 이용] 목동~용수동,
화악리행 버스이용. 또은 가평~용수동행 1일 5회, 관청리 가림 제령리, 선바위,
1일 4회 운행하는 화악리행 버스, 홍적이, 애기골, 화악2리 종점
-대중교통
상봉터미널과 동서울터미널~춘천 간 아침 5시15분~저녁 9시30분까지 10분 간격 운행하는 춘천행 버스
→가평버스터미널(031-582-2308)에서 1일 5회(08:50, 11:00, 15:00, 16:40, 19:20) 운행하는 적목리 용수동행 버스 이용, 제령리(수덕산), 선 바위(애기봉), 관청리(중봉, 언니통 봉), 가림(언니통봉), 용수동 종점(석룡산, 언니통봉), 홍적이(촉대봉), 애기골 입구
(애기봉), 화악2리 종점(화악산 천도교수련원, 오림계곡)에서 하차. 에서 하차. 요금 제령리 1,000원, 익근동 1,700원, 선바위 1,750원, 관청리 1,900원, 가림 2,300원,
용수동 2,450원. 홍적이 1,400원, 애기골 입구 1,600원, 화악2리 종점 1,650원.
45분~50분 안팎 소요.
용수동에서 가평행 버스 1일 5회(07:00, 10:20, 12:00, 16:10, 17:50) 운행.
관청리에서 가평행 버스 1일 5회(09:00, 11:10, 14:40, 16:40, 19:10) 운행.
-목동에서 서울 상봉동 전철역까지 500번 좌석버스 1일 18회(06:30~19:30) 운행.
-승용차
도농3거리∼청평∼가평읍내∼북면사무소에서 좌회전하여 도대리∼관청리 방향
서울청량리역-가평:(1일 14회 운행하는 경춘선열차 승차, 가평 하차)
가평-화악리: 하루 4회 운행(8.00, 11.00, 17.00, 19.30분) 화악골 종점에서 하차
가평-적목리: 하루 4회 운행(첫차 8시 10분, 막차 7시)
*숙식 :
-용수동 : 개나리쉼터 031-582-9380, 금자네식당 -582-5574]
-익근리 승천사 방향 : 김만복씨댁( 031-582-0502)
-왕소나무 유원지(민박음식점):031-582-5257, 031
-관청리 : 마을회관 맞은편 화명쉼터(주인 서양순, 031-582-0515). 민박료 1실 20,000원 기준(비시즌). 이 집에서 된장찌개백반(4,000원), 토종닭 백숙(30,000원)
-화악2리 버스종점 위 : 덕산만물상회슈퍼(주인 강경자, 031-582-0645) 손두부집, 순두부
(1인분 3,000원), 두부전골(2인 7,500원/ 3~4인분 15,000원), 토종닭 백숙(30,000원)
민박료는 3~4인용 방 1실 20,000원(비시즌), 10인용 방 1실 50,000원.
-익근동 : 명지산 입구 명지산쉼터(주인 김성태, 031-582-9380), 금자네식당(582-5574)
-용수동 버스종점 : 젤라캠프(주인 이충복, 031-582-1431) 20명수용 큰 방 6개,
4인용방 5개. 큰 방 30,000원~40,000원, 작은 방 20,000원. 된장찌개백반 4,000원~5,000원.
-가림 : 가림약수민박(주인 박중규, 031-582-0730) 이용. 30명수용 큰 방 60,000원.
가림마을 30년 동안 10대째 거주한 박중규씨 소유인 가림약수는 200여 년 전
박씨의 6대 선조 때부터 탕치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다. 각종 피부병과
부인병, 소화불량 등에 특효. 약수는 팔지 않고, 대신 5리터(3,000원), 10리터(4,000 원)들이 물통을 사면 통속에 약수를 가득 채워줌.
-화악리 방향 : 두부집 031-582-0645(사전 연락할 것), 대추나무민박(582-8826),
두릅나무민박(582-2395), 샘골소나무민박(582-7735), 왕소나무민박(582-5257)
-도대리 방향 : 밸리하우스(582-8428), 용소폭포민박(582-0092), 화영쉼터민박(582-0515)
-귀목산장(032-582-9987, -582-6895)
*기타 :
-집다리 휴양림 종합휴게소(033-243-2470, 016-9276-2470)
-가평장[1-6일 장. 잣, 산채, 꿀]
-가평군청 문화관광과(031-580-2065~7) http://www.gp.go.kr
첫댓글 감사님의 닭도리탕에 새삼 감사드립니다. ' 사노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