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유정란(癸酉靖難)은 계유년(1453)에 일어난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책동한 사건을 이르는 말이다.
이 사건 이후 세조는 단종에게서 왕권을 이양 받게 된다.
어린 임금 단종을 지키고자 하는 이들은 죽거나 처형당했다.
이들의 수만 헤아려도 어림잡아 70여 명에 이른다.
이들 중에는 사지를 마차에 묶은 다음 찢어 죽이는 형벌인 ‘거열형’에
처해진 이가 적지 않았다. 그 사지가 한양 군기감 앞에 3일 동안 효수돼
거리가 핏빛으로 물들었다는 말이 전해질 정도다.
심지어 이들의 시체가 한강변에 널브러져 있었지만 시체를 거두는 자
또한 엄하게 처벌된다고 하여 누구하나 거두지 못한 채 끔찍하게 널려
있었다고 한다. 한강변에 나타나 핏자국이 선명하게 밴 사육신의 시체를
거두는 자가 있었다. 바로 김시습(1435~1493)이다.
그는 이미 삼족이 멸한 사육신의 일가친척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그들을
상전으로 모셨던 하인도 아니었다.
김시습은 그의 나이 5세 때부터 그 비범함과 영특함이 대단하여
세종이 친히 김시습을 불러 재능을 알아봤다고 한다.
매월당 김시습은 이보다 더 일찍 천재성을 드러낸다.
그는 세살 때 이미 책을 줄줄 읽고 시를 지었다고 한다.
신동이 나타났다는 소문에 당시의 재상 허조가 직접 찾아가 시험했다.
“늙을 노(老)자를 넣어 시 한 수 지어 보아라.
” 말이 끝나자마자 김시습은 바로 시를 읊었다.
‘늙은 나무에 꽃이 피었으니 마음은 늙지 않았네(老木開花心不老).’ 허조는 무릎을 쳤고, 이 이야기는 궁중에까지 들어간다.
김시습이 전국적인 명성을 날리는 ‘국민 신동’이 된 계기는 세종과의 일화이다.
<해동잡록>(海東雜錄)은 세종이 다섯 살 때의 김시습을 부른 이야기를 전한다.
세종이 승정원으로 불러, 지신사(知申事) 박이창(朴以昌)에게 명해 물었다. 박이창이 무릎 위에 앉히고 세종을 대신해,
“네 이름을 넣어 시구를 지을 수 있느냐?”라고 묻자 곧 ‘올 때 포대기에 쌓인 김시습’(來時襁湺金時習)이라고 대답했고,
또 벽에 걸린 산수도(山水圖)를 가리키면서 “네가 또 지을 수 있겠느냐?”고 하자,
곧 ‘작은 정자와 배 안에는 누가 있는고’(小亨舟宅何人在)라고 지었다.
박이창이 대궐로 들어가 아뢰니, “성장하여 학문이 이루어지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기용하리라”라는 전교(傳敎)를 내리며
크게 칭찬하고 비단 30필을 주며 가지고 가게 했더니 그 끝을 서로 이어서 끌고 나갔다는 내용이 전한다.
이때부터 그는 ‘김오세’(金五世)라는 별명으로 널리 알려졌다.
김시습이 유양양에게 보낸 편지에는 “세종이 ‘내가 보고자 하나 남들이 해괴하게 여길까 두려우니,
마땅히 드러내지 말고 교양시켜서 자라고 학업이 성취되기를 기다려 장차 크게 쓰겠다’라고 했다”면서
‘내려주신 물건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김시습은 수양대군이 단종을 내몰고 왕위에 오르자 책을 태워 버린다.
중이 되어 전국을 방랑하는 그의 모습은 개인의 불운이자, 그 시대의 불행이었다.
김시습은 조선의 역사에서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狂人)으로 인식된 인물이다.
《조선왕조실록》은 그가 따뜻한 우물이 있다고 허위로 말해 옥사를 치렀고, 흰 돌을 백옥(白玉)이라 하여
혹세무민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배운 바를 실천에 옮긴 한 시대의 지성인으로 꼽히기도 한다.
15세에 어머니 장씨가 죽고 아버지 역시 병을 앓고 있었다. 결혼은 했지만 순탄치 않았으며,
어머니의 죽음에 그 무상함을 깨닫고 18세에 송광사(松廣寺)에서 출가하였다.
이후 삼각산 중흥사(重興寺)를 비롯해 경주 용장사(茸長寺)등에 머무르면서 수많은 유교와 불교관계 저술을 남겼다.
의상(義湘, 625~702)스님이 저술한 《화엄일승법계도(華嚴一乘法界圖)》에 대한 주석서인 《대화엄법계도주(大華嚴法界圖註)》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그는 의상스님의 이 저술에 대해 “하나의 해인도(海印圖)로써 가없는 교해(敎海)를 널리 포섭하고 있다.”고
했으며, “삼세간(三世間) 십법계(十法界)의 장엄무진한 뜻을 잘 나타내고 있다.”고 극찬하였다.
이 주석서의 특성은 교리적인 주석이기 보다는 《벽암록(碧巖錄)》의 착어(着語)와 흡사한 선적 표현(禪的 表現)에 있다.
깨달음의 세계를 그 자신의 말로 표현해 보라고 강조하기 때문이다.
“나는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능히 글을 알아서 일가 할아버지 최치운(崔致雲)이 시습(時習)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세 살에 글을 지을 수 있어서, ‘복숭아는 붉고 버들은 푸르르니 봄이 저무는구나/ 푸른 바늘로 구슬을 꿰니 솔잎 이슬이로다
’(桃紅柳綠三春暮/ 珠貫靑針松葉露)라는 구절을 지었다. 다섯 살 때 <중용>과 <대학>을 수찬(修撰) 이계전(李季甸)의
문하에서 배웠다.” 어숙권(魚叔權)의 <패관잡기>(稗官雜記)에는 김시습이 유양양(柳襄陽)에게 보낸 편지에
자신의 어린 시절을 요약한 내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