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월이 다 가고 있다. 가을도 이젠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과 함께 막바지를 향해 달음질치고 있다. 아침저녁으로 제법 쌀쌀하더니 드디어 서리가 하얗게 내렸다. 넓적한 잎새로 울을 장식하던 호박잎이 금새 시들어버렸다. 아내는 호박을 땄다. 누렇게 익은 것은 두었다가 범벅을 해 먹어야겠다고 한다.
지난 봄, 여름도 마찬가지였지만, 이 가을도 아내를 참 분주하게 했다. 마당의 조그만 텃밭이 아내에게는 큰 일거리였다. 소일 삼아 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뿌리고 심고 가꾸는 일로 봄철에서 이 가을에 이르기까지 아내의 손길은 무척 분주했다. 이제 텃밭은 한 판 흐드러진 잔치가 끝난 집의 마당처럼 설렁해졌다. 텃밭을 풍성하게 채웠던 토마토는 다 거두어지고 잎만 달고 서 있던 고추대도 잎으로 나물을 해야겠다며 거두고 있다. 상추가 무성하던 곳엔 가을 배추가 자라고 있다. 몇 뿌리 심었던 고구마를 캐어보니 전부 엄지손가락만 한 것뿐이다. 마당의 밤나무며 호두나무, 은행나무가 그늘을 지어 고구마며 채소가 제대로 자라지 못했다고 아내는 이 나무들을 원망한다.
그러나 원망만 할 일도 아니었다. 이 나무들의 짙은 그늘이 아내의 속을 썩히기도 했지만, 이 가을에 들어서는 열매를 거두는 즐거움에 젖게도 했다. 마당에 서 있는 나무들이 아내의 가을을 바쁘게 했다. 호두나무는 여름 내내 아내를 청설모와 싸우게 만들었다. 그 싸움의 결과로 두어 됫박의 열매를 딸 수 있었다. 밤은 수시로 툭툭 떨어졌다. 아람으로 떨어지기도 했지만 송이째 떨어지기도 해다. 아람을 수습하고 침 숭숭한 밤송이를 치우는 것도 일거리였다. 아내는 더 바쁘게 한 것은 은행나무였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은행이 즐비하게 떨어져 있다. 바람이 불면 소낙비처럼 떨어지기도 했다. 은행 알을 줍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은행 겉씨껍질에서는 아주 고약한 냄새가 났다. 그 냄새를 감수하며 껍질을 벗겨 알을 거두어내는 일이 여간 성가시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는 하얀 은행 알을 보며 "살다보니 이런 것도 다 만져 보겠네!"하며 즐거운 비명에 젖기도 했다.
아내는 욕심이 났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바로 학교 숲으로 달려갔다. 떨어지는 밤을 줍기 위해서다. 마당에 떨어진 밤만 해도 서너 됫박은 될 것이건만, 가진 자가 더 갖고 싶어하듯 아내는 더욱 많은 밤을 갖고 싶어했다. 욕심 그만 부리라고 하면, "학교 선생님께도 좀 삶아 드려야지요, 어미 아비 시골 산다고 서울 아이들에게도 좀 부쳐 주어야지요, 대구 언니네도 좀 주어야지요……"하며 한껏 호기를 부린다. 가을은 사람의 마음을 넉넉하게 만드는 모양이다.
아내의 가을걷이는 집에서 나는 것을 거두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닷새마다의 장날이면 장판으로 내달았다. 도토리를 사고 산초나무 열매를 샀다. 묵을 유별나게 좋아하는 아내는, 도토리를 말려 가루로 내어 직접 도토리묵을 만들겠다고 했다. 산초 열매는 가루로 만들어 향미료로 써도 좋고 달여 마시면 기침, 감기, 치통에도 그만이라는 것이다. 언제 그런 상식까지 갖추었는지 모르겠다. 이런 것들을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시골 장터가 좋고, 그러한 장터가 가까이 있는 문경이 좋다고 했다. 그 장판 덕분에 '능이버섯'이라는 걸 알게 되어 문경이 더욱 좋다고 했다. 거무튀튀한 빛깔에 퍼진 쇠똥같이 흉물스럽게 생겨 겉보기로는 별 맛이 있을 것 같지 않는데 아내는 그리 맛이 있다고 했다. 장에 갔다가 우연히 능이를 보고서 조금 샀던 것이 아내의 마음을 사로잡은 모양이다. '일 능이 이 송이'라는 말이 있듯이 송이버섯보다 더 좋은 것이 능이버섯이라며 예찬에 열을 올린다. 능이는 그냥 요리를 해먹어도 좋지만, 썰어서 말려 가루를 만들어 음식에 넣으면 모든 음식 맛이 아주 좋아진다고 했다. 특히 고추장을 담는데 넣었더니 맛이 확연히 달라졌다며, 고추장을 단지째 갖다 놓고 나더러 먹어보라고 하며 아내는 마냥 자랑에 차 있다. 능이의 맛을 발견한 것은 문경에 와서의 큰 수확이라고 했다.
마성에서의 생활에 몸이 익게 된 것도 아내의 가을걷이였다. 지나온 아내의 생활 방식과 비교해 보면 불편한 일이 참 많을 시골 생활을, 여름나고 가을 들면서 아내는 차츰 즐거움으로 바꾸어 갔다. 땀 흘려 직접 가꾼 푸성귀를 찬거리로 삼을 수 있는 일이며 마당에 떨어져 내리는 열매들을 건사하는 일도 아내를 즐겁게 하지만, 장날 장판에서 얻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산물들도 아내를 즐겁게 했다. 백화점에 가면 온갖 것이 다 있을지라도 얼마나 진품, 신품인지를 믿기가 어려운데 갓 거두어온 싱싱한 것들을 마음놓고 사서 쓸 수 있으니 그 또한 즐거운 일이라는 것이다. 아내는 어느 동네의 한 농가에 가서 감을 한 상자 사왔다. 장터에서 만난 어떤 사람과 인연이 되어 그 집에 가서 샀다는 것이다. 아주 후하게 주더라고 했다.
시월의 마지막 일요일인 어제는 아내와 대야산 용추계곡을 다녀왔다. 현란한 빛깔의 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넓적한 반석 위로 가을 하늘을 담은 물이 옥빛으로 흘러내리고, 원색의 찬란한 잎새들이 저마다의 빛을 한껏 발산하고 있는가 하면 그것들이 어우러지면서 또 다른 빛깔들을 내뿜고 있다. 떠나갈 가을을 위해 환송연라도 벌리듯 파란 하늘을 배경 삼아 성대한 빛의 향연을 벌이고 있었다.
이렇듯 세상의 푸른 잎들은 붉고 노랗게 물드는데 사택 마당의 은행나무는 아직도 청청한 푸른빛이다. 보는 이들이 말하기를, 텃밭으로 가꾸느라고 넣어준 거름을 이 나무가 많이 먹어서 여태껏 푸른 것이라 했다. 아내의 텃밭 가꾸기는 가는 가을도 잡아 두었나 보다. 아내는 욕심이 많다. 좀더 오래 좀더 많은 가을걷이를 하고 싶은 모양이다.
시월이 다하는 오늘, 한 점 티끌조차 없는 파란 하늘 아래 시들 줄 모르는 은행잎이 성성히 나부끼고 있다.♣(2005.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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