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저, 또 경 베레나입니다^^
우리가 이렇게 궁궐에 대해, 그리고, 조선의 왕실과 문화와 사회, 경제, 정치~~~에 대해서 알수가 있는 것은...!!!
바로, 조선왕조실록이 있어서가 아닌가 싶습니다^^
바로, 조선왕조실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63 빌딩 높이의 3배에 이르는 방대한 양과 "정치문화 경제, 예술"등 다양한 내용 그리고, 객관적인 역사관....세계 최장수 왕조! "조선" 에는 실록이 있었다::::.
만약 조선왕조 실록이 란 기록이 없었다면?
"용의눈물" "왕과 비"...그 수많은 사극들은 없었을 것이고, 조선시대 외국사신에게 받은 코끼리 애기며, 울진의 지진사건등..그런사실들을 제대로 알수없었을 것이다..또한 정조 실록엔 이렇게 적고 있다.
"안경이란 200년 이후 처음 물건이므로, 만일 이것을 쓰고 조정에서 국사를 처결한다면,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것이다...정조 23년 7월 10일.)
영화 영원한 제국에서 정조로 분장한 안성기가 안경을 쓰고 나오는데 이는 위의 정조실록을 참고로 제작을 했을 것이다. 이처럼 조선왕조실록은 조선왕실의 역사 뿐 아니라 조선시대의 정치,사화,문화등 모든분야를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기록문화재에도 속해져 이제 이기록은 세계인들이 그 가치를 인정한 중요한 역사기록이 되었다.
그림: 예종대왕실록
200자 원고지로 쌓으면 높이가 63빌딩의 3배!!!(실록의 분량)
"태조대왕실록"부터 "철종대왕실록"까지 25대 왕들과 "고종, 순종실록"을 합치면 27대에 걸친 왕조의 기록이다. 하지만 고종 순종은 일제 강점기에
재위한 분이라 이미 춘추관이 폐지되어 없었고 따라서 일제에 의해 편찬되었다는 점에 실록으로 넣기가 조금은 애매하다. 이럼점에서 조선시대 편찬된실록은 25대 왕이신 철종대왕실록까지의 472년간의 기록이다
총 1,893권 888책의 방대한 양이다. 한사람이 하루 100쪽씩 읽어도 4년 3개월이 걸리고 200자 원고지로 적어서 쌓으면 그 높이가 63빌딩의 세배나 되는 엄청난 분량이다.국역하는데만도 학자 3,000여명이 동원되어 25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한다.
"사관 위에는 하늘이 있소이다..!!!
편전은 왕의 개인 공간임으로 사관은 이곳에 출입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날 태종은 편전에서 대신들과 정사를 논하였다.그때 사관 "민인생"은 "비록 편전이라 하더라도 대신이 일을 아뢰고, 또 경연의 강론을 하는데 신과 같은 사관이 들어오지 못한다면 어떻게 갖추어 기록하겠습니까?" 하지만 태종은 민인생을 달래면서 입실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자 민인생은 이렇게 고하였다.
"신이 만약 곧게 쓰지 않는다면 위에 하늘이 있사옵니다..!!"
하늘은 만백성을 뜻한다. 부모 없는 자식은 존재하지 않듯이, 백성없이는 왕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이러니하게 만백성의 주인인 왕이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가 바로 만백성인것다.그런 백성이 사관의 머리위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정확한 공정한 기록을 남기겠다는 사관의 의지일 것이다.
이렇게 사관 "민인생"은 귀찮을정도로 태종의 뒤를 쫓아다니며, 그의 일거수 일투족을 놓치지않고 기록을 하였다. 그런 사관이 미웠는지 태종은 후에 결국 민인생를 귀향보내 버렸다고한다.
여기서 사관이 왕에게는 얼마나 귀찮은 존재인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왕은 절대 그런 사초를 볼수없으며, 그것은 사관에 대한 신분을 보호해주는 것이다.(물론 태종때는 아직 사관제도가 정차되지 않을때이다)
어째든 이를 어긴 임금은 덕이 없고 결국 퇴출 당하기까지 했다. (연산군처럼 말이다..)
"여러분도 생각해보자 여러분앞에 항상 비디오 카메라와 녹음기가 쫓아다닌다면.....".
임금이 다니는 곳엔 사관 2명이 함께 다닌다. 한명은 임금의 행동을 글로 남기고 한명은 임금의 말을 글로 남긴다. 따라서 행동을 기록하는 사관은 오늘날의 비디오 녹화가 되는 것이고 말을 기록하는 사관은 오디오의 녹음이 되는 것이다....
그런 사관이 되는 조건은 까다롭다.
우선 3장(長)을 갖춘 지조있는 선비로 조상대대로 부정부패가 없이 신분이 확실한자를 선발했으며, 선발 기준도 몹시 까다로왔다. 그도 그럴것이 한 나라의 왕조실록을 남겨야할 중대한 임무를 맡는 것이 사관이기에 사관의 선발은 철저히 했다.
위에서의 삼장은 ,재(才)학(學)식(識)의 순으로,
재는 역사를 서술하는 글재주 말하며,
학은 역사를 연구하는 방법이고,
식은 역사를 통찰하는 관찰력,판단력을 말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조상들은 특히 "덕"을 으뜸으로 생각했다. 이는 3장과는 차원이 틀린 것이며 , 그 까닭은 그만큼 사관의 가장 큰 임무는 정확한 공정한 역사의 서술이란 말일 것이다.어떠한 정치적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목숨으로서 사초를 작성하는 사관의 힘은 바로 여기서 나왔을 것이다.
실록제작 과정.
실록은 사관들이 쓰는 사초와시정기(정부관리들이 매일 쓰는 업무일지 예 승정원일기등)등의 자료를 토대로 작성된다. 여기서 사초는 사관들이 작성하는 것인다.
(그림: 가장사초)두가지로 나뉜다. 현장에서 들은 것을 바로적은 글을 "입시사초(入侍史草)"라 하여 이는 객관적인 사실을 적는다. 또 나머지 한가지는 사관이 퇴청후 집에가서 기록하는 "가장사초(家藏史草)"라하여 사관의 주관적인 판단을 적는다. 입시사초는 주기적으로 춘추관에 납부를 하며, 가장 사초는 집에 보관하다.
그중 현존하는 사초가 있는데 인조대의 정태제라는 사관이 남긴 가장사초를 보면 사관왈...이란 말이 나온다 이는 사관이 스스로 평가를 했다는 말인데 여기에는 인조가 덕이없고 임금으로서의 자질이 없다라고 평가를 한다. 이렇듯 사관은 임금의 잘못도 스스럼없이 적었던 것이다. 이것이 사관의 본분이요 생명과도 같은 것이기 떄문이다.
왕이 승하하면 실록청에 제출한다.
그럼 실록의 편찬 과정을 보면
1. (왕의 승하후)실록청을 세운다.보통 100명 이상이 제작에 참여한다. 이는 몇몇 사람들이 제작했을 경우의 역사왜곡을 막고 공정한 편찬작업을 하기 위함이다.
2. 실록청은 하급관리 부서인 방(方), 중급관리 부서인 도청(都廳), 그리고 실록청내 최고부서인 "총재관(總裁官)"으로 분리가 된다.
3. 방에서는 모아온 사초와 시정기등의 자료를 바탕으로 실록의 초본인 초초(初草)를 작업한다.
4. 도청은 방에서 제작된 초초(初草) 수정보안해 중초(中草)를 제작한다.
5, 총재관(總裁官)에서는 그렇게 만들어진 중초(中草)를 최종적으로 정리해 정초(正草)을 완성한다.
6. 이렇게 삼차 수정보완한 정초는 교서관에 넘겨져 활자로 찍게된다.
7. 실록 완성
8. 세초작업
실록이 편찬되면 자료가 됬던 사초는 지금의 세검정이아래 바위인"차일암"이라는 곳에서 사초를 쓴 종이를 모두 물로 글씨를 씻어낸다 이를 세초(洗草)라 한다. 이 세초의 목적은 사초의 공개를 막고, 종이의 재생이다.
실록의 역사
이렇게 완성된 실록은 총 4부를 찍는다, 그래서 1부는 궁내의 춘추관에 보관하고 나머지 3부는 지방 깊숙한 곳(전주,충주,성주)에 나눠서 (그림:태백산 사고)보관한다.(여기서 서울 이남쪽으로 실록을 보관한 이유는 북쪽에 오랑캐가 있기 때문에 남쪽에 사고를 보관 한 것이다 하지만 뜻밖게도 남쪽에서 임진란이 일어난다.)
임진왜란으로 춘추관,성주 충주사고가 불탄다. 하나 남은 전주사고의 실록은 당시전북 태인이라는 지방의 유생 안의와 손홍록이 왜군이 온다는 소문을 듣고 전주로 달려가 전주사고 참종인 유신 오희길등과 함께 실록을 정읍까지 피신시킨다. 64궤짝이나 되는 실록등을 말등에 싣고 전주를 떠난 네사람은 6/22 정읍에 도착하고, 내장신 은봉암이라는 작은 작은 암자에 옮기고 다시 7/1일 태조의 어진을 좀더 (그림 오대산 사고)깊숙한 산중인 내장산 용굴암으로 옮기고 밤잠을 자지않고 교대로 실록을 지켰다고한다. 그리고 1년 뒤 왕명으로 실록을 정읍현청으로 옮겨지고 선조가 피신해있는 해주로 이송됐다가 영변 묘향산으로 다시 부본을 위해 강화까지 옮겨졌다. 이때 실록을 옮긴것도 바로 이 두사람이다. 당시 손홍록의 나이가 56세이고, 안의의 나이가 64세였다. 이들의 노력으로 실록은 그위기를 넘기게 되었고 4벌로 등사되 "오대산, 적상산, 태백산, 궁내 춘추관"으로 봉안된다. 모두 이 이름없는 두명의 유생때문이다.이들은 선조에게 관직을 제수 받았으나 끝내 마다하고 만다.여기서 우리는 조선시대 일개 유생까지도 역사적 기록의 가치를 인식하고 소중히 여겼다는 것이다 오늘날과 비교하면 그런 역사 의식은 계속 퇴보되는 듯 하다.
이렇게 위기를 넘긴 실록중 춘춘관보관 실록은 이괄의 난때 불타버리고 후에
일제시대 오대산사고는 일본 동경으로 건너갔으나 동경대지진때 불타버리고 적장산 실록은 창경궁에 봉안되었다
한국전쟁때 북한으로 옮겨졌고 태백산사고와 정족산사고의 실록은 당시 경성제국대학(서울대학의 전신)에서 보관하다가 실록 원본인 정족산본(97년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재로 지정)은 지금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보관되고 태백산본은 정부기록보존소로 남겨졌다.
"세계의 왕조사"를 봐도 이처럼 긴역사를 가진 왕조는 없었다.
조선왕조가 500년이란 긴세월동안 왕조를 유지할수있었던 것은 실록이란 기록이있었기 때문이다.
실록이란 무엇인가? 기록이다. 왕과 신하의 일거수일투족은 모두 기록에 남는다.
(실록은 글 뿐 아니라 중요한 그림도 기록되었다)
퇴보하는 정치문화
기록문화는 당시 정치의 척도이다.
정치의 생명은 도덕성 확보이다.
도덕성을 높이는 가장 중요한 수단은 바로 기록하는 것이다.
통치 일거,일동을 기록한다는 것은 정치를 모두 노출시키고 만인의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다.
기록정치는 정치수준을 가름하는 중요한 수단이되며, 한단계 높은 정치적 발전일 것이다,
몇년전 IMF환란 이슈가 됬던 사건을 기억할런지 모르겠지만 재경부장관이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미리 보고를 했냐 안했냐를 가지고 청문회를 개최하네 마네 하는논란의 여지를 만든적이 있었다. 한 나라의 장관이 대통령을 만나는데 당시 기록이 없다?.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가 없다.
지하에 누워계신 조선왕조 역대 임금님들께서 땅을치고 통곡할 일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