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불교를 믿는 집안에서 자랐다. 아버지의 권고를 따라 일요일마다 절에 가서 참선을 하고 스님께 배우며 경전을 달달 외웠다. 풍경소리 들리는 고요한 평화가 좋았다. 하지만 산을 내려와 집으로 오면 왠지 모를 허무함이 느껴졌고, 산의 고요함 가운데 한 각오들은 잊고 예전과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그러나 다시 일요일이 되면 산에 올라갔다. 종교가 뭐냐는 질문을 받으면 불교라고 주저없이 말했지만 과연 그것이 인생에 어떤 의미를 주는지에 대해서는 스스로도 늘 회의가 들곤 했다. 왜 사는지, 뭘 위해 사는지…. 그러한 회의를 문제삼거나 파고들으려 하지는 않았다. 다만 열심히 살아가는게 최선이라 믿었던 게다.
시간은 흘렀다. 고3 12월, 대입원서를 들고 대학이라는 곳에 처음 발을 디디게 되었다. 한 언니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예수님을 믿냐고. 그 언니는 학교식당에 앉아 성경을 이곳저곳 보여주며 복음이라는 것을 내게 전하려 애썼다. 내가 죄인이며,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때까지 나는 죄라는 것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나를 죄인으로 몰고가는 언니가 원망스러웠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내 마음에는 "정말 그럴까"하는 생각이 싹텄으니 말이다. 공부를 하면서도 나는 자꾸 그 언니가 한 말이 떠올랐다. 버리지 않고 서랍에 넣어두었던 전도지를 한밤에 꺼내보고 다시 넣곤 했다.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요한계시록 21장 8절) 언니가 말해준 지옥얘기였다. '지옥이라고?' 사실 나는 그 몇 주전에 자살기도를 한 적이 있었다. 사업을 하던 큰 오빠는 부도로 도망다니고 있었고 우리 집은 은행, 빚쟁이들에게 시달려 참담한 나날을 지내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성적은 떨어졌고 나는 원하지 않는 대학에 원서를 넣게 되었다. 어려서부터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은 내 차지가 되지 않는다는 피해의식가운데 있었으며 대학도 마찬가지같이 여겨졌다. 누군가를 원망하고 싶었다. 한심하고 못나고 쓸모없는 내가 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 알려주는 곳은 없었다. 신앙이라 생각했던 그것마저도 내게는 아무런 의미도 해답되 되어주지 못했다. 어디를 봐도 희망이 없었다. 10년을 살고 20년을 더 살아도 내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끌려가는 그런 희망없는 삶의 연속일거라 생각되니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었다. '그럼 죽어야지.' 어느 날 나는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죽을 수가 없었다. 신발을 벗고 아래는 내려다보는데 죽음 이후의 그 무언가가 나를 두려움-공포에 가까운-에 휩싸이게 했었기 때문이었다. 인생의 어려움과 두려움보다 죽음이후의 두려움이 더 컸기에 나는 죽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나서는 죽지도 못하고 사는 자신을 미워하며, 인생에 애착이나 미련을 두지 않고 자포자기하며 살기로 결심하며 목이 터져라 울었다. 그 때의 생각이 자꾸 떠올랐다. 두려웠다. 나도 모르게 언니가 적어준 성경말씀을 꺼내 읽어보았다.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니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이사야 41장 10절) 이후 면접을 보는 날에도 나는 또 다른 사람을 만나 같은 이야기를 들었다. 내가 죄인이며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은정아 지금 네가 입고 있는 이 외투가 열대지방에 가면 잘 쓰여질 수 있을 있을까? 이 외투는 추운 사람들을 따뜻하게 해주기 위해 만들어진 거야. 은정이는 하나님과 교제하도록 지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날 때 가장 행복할 수 있어. 추운 곳의 외투처럼. 우리는 단지 대학에 들어가고 취직하고 결혼해서 살다가 죽으려고 지음 받았을까?" 이야기를 듣던 나는 점점 화가 나고 짜증이 났다. '왜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거야.'
합격후 신체검사를 받는 날이었다. 그날 아침 작은 오빠는 내게 '학교에 가서 하지 말아야 할게 두 가지 있는데 영어 잡지 정기구독 하는 거랑 예수 믿으라는 말 듣는거야. 알았지?'라고 일러주었다. 검사를 마치고 나오는데 언제나 그랬듯이 어떤 언니가 또 내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또 예수 얘기하는 사람이잖아.' 싸늘한 표정으로 쏘아붙이고는 성큼성큼 걸어갔다. 근데 그 언니가 따라오는게 아닌가. 휴. 무슨 과냐 물어 특수교육과라 했다. 사실 나는 생각하지 않았던 과에 합격해버렸고, 재수를 할 수 없는 집안사정으로 그 '이상한' 과에 다녀야 하는 형편이었다. 그런데 그 과를 물어보는 것이었다.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용케도 나를 붙잡은 언니는 육체와 정신의 필요만을 채워주는 교사가 아니라 영혼의 필요를 채워주는 진정한 교사로 확신있게 설 수 있겠냐고 물었다. 나는 대답없이 다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 언니는 나를 또 따라오며 성경을 읽어보지 않겠냐고 했다. 삶의 목표도 의미도 상실하고 그야말로 매일 연명하고 있던 나였다. 걸음을 멈추었다-나는 읽는 것을 좋아한다. '심심한데 한번 읽어볼까?' 그 언니는 성경은 베스트셀러라는 둥, 성경을 읽어야 문화와 역사를 이해할 수 있다는 둥 했다. "믿으라는 말하면 안 읽을 거예요." 좋다고 하며 그 언니는 가지고 있던 성경을 그 자리에서 주었다. 그렇게 성경공부가 시작되었다.
우리 집에서는 성경을 본다는 것은 금기와도 같은 일이었다. 언니와 동생이 잠든 새벽에 스탠드를 켜고 몰래 일어나 가슴을 졸이며 성경을 읽어 내려갔다. 그러나 성경은 쉬운 책이 아니었다. 성경을 처음 접한 나는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되었다. 너무나도 낯선 그 책은 마치 내가 외국어 책을 보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학교에서 언니와 공부하는 것도 별로 마음에 다가오지 않았다. '이게 말이 돼? 성경이 그리스 로마 신화와 다른 게 도대체 뭐야? 김일성이 가랑잎을 타고 강을 건넜다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어?' 도서관에서 언니의 교회 친구들이라는 다른 언니들도 만났다. 왠지 기쁘고 행복해 보이는 그들의 모습. 딴 세상 사람들 같았다. '저 사람들은 이게 다 믿어지나봐.' 하지만 그들의 '행복'은 왠지 나에게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았고, 내 몫이 아닌 것 같았다. '아 다시 내가 나의 인생에 희망을 걸고 애착을 가지려고 했구나. 다 포기하기로 했었는데.' 행복, 그건 내것도 아닌데 상처받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성경을 공부한다는 것도 별 의미가 없다는 마음에 나는 겨울이 다 지나가고 있던 어느날 새벽 결심을 했다. '그래 공부 관두자.' 마침 언니랑 성경공부하고 있던 교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시겠습니까?' 하는 질문이 있었다. 결심을 굳힌 나는 '아니오'라고 쓰고 그 이유를 적어 내려갔다. 공란이 부족했다. 종이를 붙여서 계속 써내려 갔다. 그리고 언니를 만나러 학교에 갔다. 다시 고3 때 죽으려고 내려보았던 건물아래의 모습이 떠오르듯 아찔했다. '뭐 될대로 살기로 했는데….' 어지러운 가운데 슬프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던져져 저주받은 인생의 쳇바퀴를 돌고 있는 것만 같은 인생의 남은 길이 너무나도 아득하고 멀게만 느껴졌다. '이게 마지막 공부야.'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공부를 하다가 '예수님을 영접하시겠습니까?' 하는 질문에 내가 '네'라고 대답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도 한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베드로후서 3장 18절) 내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마음으로 받아들여졌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그동안 경험했던 공허함과 두려움, 모든 피해의식과 부정적인 자아상….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과 분리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죄의 그림자였다. 죽으려고 했을 때 내가 직면했던 죽음, 심판의 두려움이 섬광처럼 지나갔다. 바로 죄 때문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의 그 죄를 위해 죽으셨다는 것이다.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나는 이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하나님은 한번도 나를 잊어본 적이 없는, 바로 그런 존재였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로마서 4장 25절)
나를 둘러싼 상황은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은 너무나도 즐거웠다. 지하철에서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와 고개를 숙이며 다녔다. 웃는 얼굴도 다니는 것은 내게 없던 일이었다. 새생명을 얻은 나는 어린 아이처럼 행복했다. 행복하다고 느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를 결박하고 짓누르던 무거운 것이 사라진 듯한 자유와 해방감에 날아갈 것 같았다. 그리고 이상한 일이 또 생겼다. '하나님 이제 이게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어요.' 성경을 읽으니 그게 깨달아지는 것이었다. 너무나도 신기했다. '내가 왜 그전에는 이걸 이해하지 못했었을까?' 어려움은 여전했다. 그러나 염려대신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하늘에 계신,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 입학식 날이 되었다. 대강당 앞에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한복음 8장 32절)'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하나님 이제는 저도 저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