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는 어떻게 아이의 뇌를 망치는가 손석한
한 아이가 부모와 함께 진료실을 찾아왔다. 아이는 매우 불안해 보였다. 도무지 시선을 한 군데에 두지 못했고, 자리에 앉아서도 안절부절못했다. 아이 부모는 한숨을 푹 쉬면서 말했다.
“선생님, 이 아이 좀 안정시켜 주세요. 며칠 전부터 계속 불안해해요. 그리고 학교에서 선생님에게 야단맞을지 모른다면서 밤마다 울고불고요.” “공부를 싫어하나요?” “아니요. 공부를 오히려 너무 많이 하려고 해서 탈이에요. 그런데 기대만큼 점수가 나오지 않으니까 불안해해요. 저희가 너무 공부만 강조해서 그런 걸까요? 선생님, 이제 우리 아이 어떡해요?”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요즘 자주 보게 되는 임상 장면이다. 초등 학교 3학년 이 남자 아이는 지금은 치료를 받고 많이 좋아졌다. 치료의 핵심은 ‘공부 그만 하고 놀기’였다. 물론 여기까지 오기까지 부모의 용기 있는 결심이 한몫했다. 다니던 학원을 다 그만두고, 주말에는 식구가 모두 함께 체험 학습을 다녔다. 치료 전 이 어머니는, 자기 아이가 다른 아이들보다 뒤처질까 늘 노심초사하여 날마다 아이에게 잔소리를 해 가면서 공부를 시켰던 분이었다.
초등 학교 4학년 미정이는 한 달 전부터 눈을 깜빡이는 ‘틱(tic)’ 증상이 나타나서 우리 병원을 찾았다. 아이를 잘 살펴보니 다른 아이들과 견주어 판단이나 행동이 다소 느린 편이었다. 그런데 미정이 어머니는 아이의 이런 점을 참고 지켜보지 못했다. 빨리 하라고 재촉하다가 마침내는 화난 목소리로 아이에게 비난을 퍼부었다. 아이는 비난을 받으면서 더 불안해지고, 이런 불안한 마음 때문에 눈을 깜빡이는 틱 증상이 생긴 것이었다. 밤마다 악몽을 꾸고, 밥을 제대로 먹지 못하고, 글씨를 쓸 때 손이 떨기까지 했다.
이쯤 되면 아이 상태가 꽤 심각한데도, 엄마는 “선생님, 이 아이가 제발 스트레스를 이겨 내서 공부를 잘할 수 있게끔 도와 주세요.” 하고 부탁했다. “아이가 감당하기에는 학습 양이 너무 많습니다. 학교 숙제만 빼고는 줄여 주세요.” “안 돼요, 선생님. 남들 다 하는데 왜 우리 아이만 못 하지요? 학교 숙제만 하면 나중에 어떻게 되겠어요? 벌써부터 아이를 포기하란 말인가요?”
몇 년 전부터 ‘선행 학습’이 보편화되고 있다. 학교에서 배우기 전에 우리 아이만 미리 가르쳐서 남보다 더 좋은 성적을 내겠다는 기대를 가지고 선행 학습을 시키지만 이는 대단한 착각이다. ‘선행’ 학습은 아이의 두뇌 발달 단계를 무시하고, 아이의 흥미와 적성을 고려하지 않은 채 몰아붙이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이에게 학습에 대한 혐오감만 심어 주기 쉽다.
아이의 뇌 발달 과정에 맞지 않는 인위적이고 과도한 자극은 오히려 정상적인 뇌 발달을 방해한다. 그것은 마치 여섯 살 아이에게 그 연약한 팔로 쌀 한 가마니를 들라고 하는 것과 같다. 지나치게 무거운 쌀가마니가 아이 근육을 다치게 할 수 있듯이 과도한 자극은 아이 두뇌의 신경 세포를 손상시킬 가능성이 높다.
특히 언어 영역의 지나친 자극과 이로 인한 과부하 때문에 오히려 다른 영역(수학 같은 다른 학습 영역, 감정 영역, 운동 영역, 감각 영역)의 뇌 발달은 뒤처지게 된다. 일시적으로는 언어 능력이 좋아질 수 있으나,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전체 뇌 발달에 나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다.
그런 판국에 몰입식 영어 교육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그 물결은 참으로 대단한 것이어서 이제는 웬만한 집이면 다 아이를 영어 유치원에 보내야 하고, 방학 때면 영어 캠프에 보내야 하는 분위기가 되어 버렸다. 이런 분위기에서 이른바 ‘학습 스트레스’ 때문에 병을 얻어 병원을 찾는 아이들이 점차 늘고 있다. 안타까운 사실은 그 아이들의 부모님이 ‘학습 스트레스’ 때문에 아이들에게 나타나는 온갖 증상들은 인정하면서도 여전히 ‘학습 유지’를 고집한다는 점이다.
잘못된 교육 정책 때문에 공교육이 무너지고 사교육에 기댈 수밖에 없는 현실은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닐 것이다. 오죽하면 “개천에서 용 난다.”는 속담은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말이 되었고, “아이가 공부 잘해서 좋은 대학에 가려면 부모가 잘살아야 한다.”는 말이 나올까. 하지만 진심으로 아이가 ‘공부 잘하는’ 아이로 자라기를 바란다면 아이의 두뇌 발달 단계에 맞게 교육을 시켜야 한다. 아이의 두뇌 발달 단계에 따라, 아이의 관심과 적성에 맞는 자극을 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부모의 욕심 때문에 아이의 두뇌, 인성 발달을 망쳐 버릴 수 있다.
많은 부모들은 아이의 두뇌에 자극을 많이 줄수록 좋다고 생각한다. 이는 완전히 잘못된 믿음이다. 부모가 아이를 따끔하게 야단치고 가르쳐야 한다는 믿음이 지나쳐서 자녀를 학대하는 경우가 생길 수 있는 것처럼 아이에게 과도한 학습을 시키는 것도 또다른 학대라고 할 수 있다.
신체 학대를 받은 아이의 뇌 사진을 찍어 보면 뇌의 전반적인 기능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마찬가지로 학습 스트레스 증후군에 걸린 아이들의 뇌 기능 또한 심각할 정도로 떨어져 있다. 특히 충동 조절을 담당하는 전두엽, 건강하고 긍정적인 감정을 유지하는 변연계, 기억과 학습 기능을 맡고 있는 해마와 편도체 들의 작동에 이상이 생긴다.
어릴 때 받은 과도한 자극 때문에 뇌에 치명적인 손상이 일어나게 되면 정신 장애와 정서의 황폐화가 평생 이어질 수 있다. 어릴 적 부모의 강요에 따라 과도한 학습을 했던 이가, 어른이 되어 하루 종일 자기 방에 틀어박혀 인터넷 게임만 하는 폐인이 된 사례를 본 적이 있다. 그이는 부모에 대한 원망과 적개심 또한 극단적이어서 폭력과 폭언을 일삼곤 했다. 부모님은 자식의 이런 모습을 보이기 창피해서 친척들과 왕래조차 하지 않았다. 부모의 그릇된 욕심이 한 사람의 삶을 망쳐 버린 안타까운 사례였다.
‘설마 우리 아이가 그럴 리가.’ 하고 생각하는 부모가 있다면, 다시 한 번 잘 생각해 보기를 바란다. 부모의 억압 때문에 아이가 자신의 욕구와 감정을 참고 있는 동안, 눈에 보이지 않는 아이의 뇌와 정신은 망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손상은 언젠가는 겉으로 드러난다. 마치 복수라도 하듯이 끔찍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부모는 깜짝 놀라고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현명한 부모라면 아이를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지 고민할 때가 바로 지금이다.
*손석한 : 소아 청소년 정신과 의사로 어린이, 청소년 문제를 주제로 다루는 여러 방송에서 자문, 상담 역할을 맡고 있다. 대한소아청소년정신의학회 이사, 연세의대, 성균관의대, 한림의대 외래 교수, 영등포종합사회복지관 아동, 가족 상담 센터 자문 의사를 맡고 있다. <부모와 아이 마음 간격 1mm><아이의 미래를 바꾸는 아빠의 대화 혁명><엄마 아빠의 칭찬 기술> 같은 책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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