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와 완주는 같은 뜻이다. 전주는 <온다라=온고을>이라는 말에서 시작한다. <온>은 온전함, 완전함을 뜻하고 <다라>는 고을을 의미하는 말이다. 온은 둥글고 완전하다는 원(圓 둥글원), 그리고 완(完 완전할완)으로 변했다가 온전하다는 전(全 온전할전)으로 변한 것이다.그러니까 전주와 완주는 같은 뜻이며 지금은 행정구역상 갈려있지만 같이 한 고장을 두고 온전하고 완전하다는 것을 이름이다. 전주와 완주는 한 고장으로 삼한시대에는 마한땅이었고 삼국시대에는 백제땅이었으며 완산이라고 불렀고 신라시대에는 완산주라고 불렀던 곳이다. 그래서 전주와 완주가 행정구역으로는 나누어져 있으나 전주는 지금도 여전히 완산이라는 이름을 그림자처럼 곁에 붙이고 있어 오랜 역사와 전통을 말해주듯이 전주시는 완산구와 덕진구로 나누고 있다. 이 고장 이름의 변천은 완산에서 신라경덕왕 16년(757)에 전주-고려 현종 9년(1018)에 안남도호부-1022년에 다시 전주-조선 태조1년(1392)에 완산유수부-태종3년(1403)에 전주- 1935년에 완주군-이후에 전주와 완주로 나누어져 지금에 이르고 있다. 행정의 편의로 봐서나 지역정서로 봐서나 한 행정구역으로 하는 것이 편리할 것이다. 전주를 풍패지관(豊沛之館)이라고 하는 것은 명나라 사신인 주지번이 스승인 표옹 송영구선생을 찾아왔다가 중국 한고조 유방의 고향이 풍패인 것을 비유하여 전주는 태조 이성계의 고향임으로 풍패와 같은 고장이라고 휘호를 써준 것을 이름이다.
전주는 풍수지리적으로 돗단배가 서해바다로 나아가는 형국인 행주형국이다. 전주의 동쪽은 만덕산에서 은내봉과 묵방산을 지나 기린봉-건지산으로 이어지고 남서쪽에서는 전주천을 사이에 두고 기린봉과 마주보는 완산칠봉이 있으며 완산칠봉너머로 솟은 산이 모악산(794m)이다. 모악산의 기운을 받은 일곱개의 봉우리가 서쪽으로 휘어지면서 세운 다가산의 줄기는 북쪽으로 달리다가 가련에서 멈춘뒤 광할한 들판을 만든다. 남으로부터 동서로 나아가던 용맥들이 서북쪽으로 감아돌지 못하고 터져 있으므로 예로부터 전주의 기운이 서북쪽으로 빠져나간다고 생각하여 이를 막기 위해서 고려시대에 동쪽의 건지산과 서쪽의 가련사이를 커다란 연못을 팠다고 하며 그 연못이 바로 지금의 덕진연못이다. 또한 전주의 주산인 기린산이 화산이라 전주에 화재가 자주 나므로 이를 막기 위하여 덕진연못을 팠다는 설도 있다. 또한 전주 사람들이 북쪽의 허전함을 비보하기 위해서 전주지방법원을 새로 옮길 때 북쪽으로 이전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조선조 영조때에 전라도관찰사로 부임한 이서구라는 이가 전주의 지세를 보고 북쪽의 허함을 막기 위하여 나무를 많이 심었는데 이것을 숲정이공원이라고 하였으나 지금은 개발되어 아파트숲이 이를 대신하고 있는 형세라 아파트벨트로 북쪽의 허전함을 막는 격이 되었다. 한편 전주의 동쪽에는 고덕산이 있는데 이는 동방산이라기 보다는 객산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고덕산이 인간의 삶에 가장 중요한 동쪽의 해가 떠오르는 것을 정면에서 가리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덕산이 아침해를 가리기 때문인가 전주에서 많은 인재가 배출되나 일정한 고개를 넘지 못하고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는 것은 고덕산이 전주의 인물발복을 막고 있다고 보기도 한다는 것이다.
완주는 삼례읍과 봉동읍의 2개읍과 11개의 면으로 서북의 익산쪽을 남겨두고는 전주시를 거의 감싸안고 있으며 남쪽의 모악산과 북쪽의 대둔산의 정기를 받아서 이어주는 전주의 배후지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전주일대는 주민들이 역사적으로 인간들에게서 얻을 수 없는 구원의 한을 땅에 대한 희망으로 승화시켜서 일까? 도선국사가 남겼다는 <유산록전주편>에 의하면 무려 40여개의 대혈이 전주 주변 곳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으로 소개하고 있으며, 전주.완주는 땅에 대한 희망과 하늘에 대한 희원이 많아서 인지 특히 종교적인 마음, 신앙적인 믿음이 크게 이어져 왔던 고장이다.
2. 전주.완주의 역사적인 한
전주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글자그대로 만경창파와 같은 들판인 <징개맹개한배미들>인 김제.만경평야를 앞에 두고 있으면서 오랫동안 전라도와 제주까지의 수도역할을 해왔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전주를 도읍으로 정하였으나 고려가 전국을 통일한 이후에는 별로 전주라는 이름이 역사에 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려 공민왕때부터 조선시대가 종말을 고할 때까지 700여년동안 전라도와 제주까지를 관장하던 지방의 큰 도읍으로서 웅지를 품고 있으면서도 크게 세움을 보지 못하고 무수한 좌절과 한의 세월을 보냈던 기간이 더 많았던 고장이다.
역사적으로 볼 때 호남은 한반도의 서남에 치우침으로 이곳에서 뜻을 세워도 금강을 넘지 못하고 좌절되었으며 많은 한을 더해가는 아픈 세월을 겪어왔다. 신라의 배반으로 나당연합군에 의해서 백제가 망한 이후 백제지역과 백제사람들의 후예들은 현대까지도 남아있는 '구다라나이'라고 하는 일본말이 의미하듯이 백제의 것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남은 것은 땅과 사람이니 그들은 역사적으로 말할 수 없는 핍박과 압제를 당하면서 지내왔다. 그러다가 신라말기에 상주사람 견훤이 호남에 내려와서 힘을 모아 나라를 세우니 행여나 백제와 같은 나라가 다시 재건될까하여 밀어보기도 하였으나 고려 태조에게 운주전투에서 크게 패하자 견훤은 운세가 기울어졌음을 느끼고 나라를 들어 고려에 귀부하고자 하였으나 아들 신검과 신하들의 반대로 못하고 금산사에 유폐되었다가 고려로 귀부하여 아들을 치는 싸움에 앞섰다가 화병으로 죽으니 후백제사람들의 부흥에 대한 꿈은 사라지고 소위 <훈요십조>라는 참으로 우리민족사상 가장 엉터리같은 위서를 조작하여 금강이남의 사람들이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는 호남의 이름이 거의 역사적으로 나오지 않다가 조선조에 들어와서 소위 왕족이 된 전주이씨들의 관향지라 하여 관심을 가졌으나 별로 특별한 혜택을 받지 못하였고 오히려 더 많은 수탈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끊임없는 저항과 도전을 해보았으나 끝내 금강을 넘지 못하고 좌절하고 말았다. 특히 조선중기 선조때 임진왜란 직전에 벌어진 <정여립역모무고사건>은 서인 모사들인 천환된 송익필형제와 반배의 정철과 성혼 등의 사감에 의하여 무려 3년간이나 궁중에서 국문과 살육을 자행하여 무려 1000여명이 넘는 호남의 인재들이 전멸되었으며 실제로는 수천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때에 말하기를 앞으로 400-500년동안은 호남에서 인물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라고 한탄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말인 고종때에 동학교도들을 중심으로 최제우선생의 신원운동으로부터 시작한 갑오농민혁명은 전봉준장군 등을 중심으로 호남지역에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났으나 공주로 넘어가던 우금치전투에서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서 참패하는 비참한 역사의 한을 남겼으며 이때 열혈의 호남의 남아들이 40만이나 떼죽음을 당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주와 완주를 비롯한 호남의 남아들은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고 올곧은 자주정신, 강인한 저항정신, 선비들의 의리정신이 강하여 국가가 위난에 처할 때는 항상 선봉에 서서 국가를 수호해 왔으니 바로 임진왜란때에 전주에 있던 전라감영을 중심으로 권율의 군사, 장수의 황진의 군사, 금산사의 처영대사의 승군, 그리고 고경명 호남의병장의 군사, 조헌의 군사 등이 연합하여 대둔산뒤의 골짜기로부터 왜군과 싸워 이치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곡창인 호남을 지켰고 서울로의 진격을 지연시켰을 뿐만 아니라 이순신과 원균을 비롯한 수군들의 배후를 엄호해줌으로서 바다에서 마음놓고 왜적을 물리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권율장군은 그길로 서울까지 진격하여 행주대첩에서 승리를 이루었고 이순신은 한산대첩과 명랑대첩에 승리를 거두고는 호남이 없으면 나라도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가지 한을 안겨준 것은 바로 천주교도의 탄압으로서 1784년에 천주교가 제일 먼저 들어온 곳중의 하나가 지금의 완주 이서면 남계리 초남성지에 있는 전동성당인데 1791년에 윤지충과 권상연 등이 공식적으로는 최초로 사형집행을 당한 순교성지가 된 곳이며 승암산 정상에 있는 치명자산성지는 세계종교사상 유래가 없는 첫 동정부부 유중철과 이순이 등과 그의 가족순교자들이 안장되어있는 곳이며 천주교 전래이래 100년간이나 각지에서 수많은 신도들이 희생과 탄압을 당하였다.
이와 같이 전주.완주 사람들은 그들의 허한 민심을 땅과 하늘에 빌어보고자 하여 불교의 미륵신앙을 통해서, 정여립 등의 대동사상을 통해서, 전봉준 등의 갑오농민혁명사상을 통해서, 천주교의 천주사상을 통해서, 강증산의 해원상생사상을 통해서, 풍수지리사상을 통해서 민심을 모아 신앙으로, 믿음으로 승화시켜보고자 했던 것이다. 그래서 전주, 완주는 모악산을 중심으로 하여 미륵신앙의 근원지요 증산도의 발상지가 되었으며, 대동사상과 천주사상, 그리고 풍수지리사상 등을 의지하고 꽃피우고자 했던 고장이다.
3. 전주.완주에서 풍수지리적으로 보아야 할 곳
1) 회안대군(이방간)과 부인 금씨묘 - 전주시 금상동 2) 경기전. 대한조경단 전주이씨 시조 이한공묘 3) 전주김씨 시조 김태서묘 - 완주군 구이면 상학리 4) 예종 태실지 - 완주군 구이면 태실마을과 태봉초등학교 태실은 일제에 의해서 강제철거되어 경기전으로 가고 그 자리는 전주유씨 선산이 되었다. 5) 봉서사와 진묵대사 부도 -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6) 밀양박씨 박침의 부인 밀산박씨묘 -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7) 전주최씨 문성공 최아묘 - 완주군 소양면 죽절리 8) 전주최씨 최용각묘 - 완주군 동상면 대아리 대아저수지변 9) 전주최씨 최양묘 - 완주군 소양면 신원리 10) 전봉준장군이 살다간 집터명당 - 완주군 봉동읍 구미리
4. 전주최씨의 내력
전주를 본관으로 하는 성씨들은 무수히 많다. 그중에서도 이번 간산여행의 주대상인 전주최씨에 대하여 알아볼 필요가 있다. 최씨는 우리나라 성씨가운데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씨족이며 수많은 인재를 배출한 전통있는 명문거족이다. 최씨의 원조는 신라 3대 유리왕 9년(서기32)에 6개부를 개정하고 성씨를 부여할 때에 돌산 고허촌장 소벌도리에게 최씨를 사성하면서 최씨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최씨들은 신라말에 이르러 역사에 큰 빛을 발하는데 소위 신라말의 3최라고 하여 최치원(신라), 최승우(후백제), 최언위(고려)를 비롯하여 고려개국 1등공신 최응(개성최씨), 해동공자라는 최충(해주), 무신정권의 최충헌(우봉), 최영(동주) 등이 고려사를 주도하였고 조선조에 와서는 최유경(전주)의 후손들이 크게 출중하였는데 휴정 서산대사, 최명길, 최석정, 최석항 등이 유명하고, 경주최씨에서 최진립, 최제우, 최익현, 최준 등이 특출하였다. 그리고 신라말에 최치원을 중심으로 윗대와 아래에서 분적하여 무수한 본관지가 다른 최씨가 발전하였는데 그중 전주최씨는 본관이 같은 최씨로서 4개의 계통이 있다.
1) 최순작계통으로 최순작은 경주최씨 최언위의 후손으로 고려 정종때 문과에 급제하여 문하시중으로 완산부개국백에 봉해짐으로 문열공 최순작을 1세조로 하고 전주(완산)를 본관으로 한 계통이다.
2) 최균계통으로 최균은 경주최씨 최언위의 후손으로 (또는 경주최씨 최치원의 후손) 고려 명종때에 동북로지휘사를 역임시에 조위총의 난이 일어나 싸우다가 포위되어 순절하여 완산군에 추봉되어 사도공 최균을 1세조로 하여 본관을 전주(완산)으로 하였고
3) 최군옥계통은 동주(철원)최씨의 시조 최준옹의 후손으로 고려때 삼중대광 문하시랑 평장사를 지냈으며 완산부원군에 봉해진 문충공 최군옥을 1세조로 하고 본관을 전주로 하였으며
4) 최아계통은 시조 문성공 최아는 최순작의 7세손으로 분계한 전주최씨이나 문열공 최순작계와 합보가 이루어진 것으로 전하고 있다.
그러니까 전주최씨는 문열공파(최순작), 사도공파(최균), 문충공파(최군옥), 문성공파(최아)로 분류하고 있다.
전주.완주는 전북의 중심지로서 지금도 전통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쉬는 고장이다. 전통문화가 잘 보존되어오고 있으며 특히 전주대사습놀이는 유명하고 전통음식으로는 전주비빔밥, 콩나물국밥, 돌솥밥, 이강주 등이 유명하다. 앞으로 이 고장의 주민들이 아름다운 전통과 문화를 유지하면서 차원높은 문화의 세계에서 좋은 삶을 이루기를 기대하는 마음이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