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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마다 진달래요 촌마다 열사기념비라네> 이 시구는 중국 산둥성 출신의 시인 허징즈(賀敬之)가 연변의 산하를 둘러보며 읊은 것이다. 이처럼 연변을 비롯한 중국 동북방에는 남방보다 훨씬 많은 열사기념비가 있다. 특히 연변조선족자치주 6개 시와 2개 현, 66개 향.진, 1076개의 촌에는 모두 600여개의 혁명열사기념비가 있다. 실제 조선족 마을을 둘러보면 산언저리마다 우뚝 서 있는 콘크리트 기념탑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가까이서 보면 기념비는 대부분 색이 바래진 채 허옇게 탈색돼 있다. 항일전쟁, 중국 내 해방전쟁(국공전쟁), 항미원조전쟁(6.25전쟁)을 거치면서 희생된 조선족의 주검은 약 2만여명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혁명열사기념비는 이 세 전쟁을 통해 희생된 조선족의 넋을 기리는 기념비다. 연변을 비롯한 중국에선 매년 청명절 때 거주지역의 혁명열사비를 찾아 참배를 하곤 한다. 정신철이 쓴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조선족>이란 책을 보면, 항일전쟁시기 연변지역에서만 숨진 독립운동가가 2천7백26명이었으며, 이 중 조선족은 2천5백6십명이었다고 한다. 물론 좌익독립운동이 중심이 된 수치다. 이 수치가 정확하다면 연변에서 중국의 한족을 비롯한 기타 민족이 항일을 위해 한 것이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 세상에 자기 목숨만큼 소중한 것이 어디 있나? 연변은 조선족의 피로 세운 땅이다. 50년대이후 중국 정부는 의도적으로 연변과 북방지역에 이민족을 반강제적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펴왔다. 지금은 한족이 훨씬 많다.주로 연변에 온 족속은 산동의 한족이었다. 따지고 보면 산동인도 동이족이다. 정착과정에서 산동인들과 조선족 사이에 크고 작은 충돌이 더러 있었다. 그럴 때 산동인들은 조선족을 향해 가오리방즈(고구려 방망이)란 욕을 해댔고 조선족은 그들에게 산동방즈라고 맞받아 쳤다. 이권 때문에 두 족속 사이에 살인까지 벌어진 일도 있었다. 항일투쟁 말고도 중국 해방전쟁(국공전쟁)기간 동안 동북지역에서는 약 6만여명이 넘는 조선족이 참전했다. 연변에서는 1948년까지 약 3만5천명이 참전했다. 조선족 장병들은 대부분 동북민주연군 제10종대의 28, 29, 30사와, 조선족이 위주가 된 동북군구 소속 제4, 6, 11사에 편입됐다. 그들은 북방 장춘에서부터 황하, 장강을 지나 남쪽 끝 해남도에 이르기까지 숱한 전쟁터를 누비며 큰 공을 세웠다. 이 전쟁기간 동안 한족과 55개의 소수민족 중 인구대비로 환산해 가장 큰 희생을 한 민족은 조선족이었다. 전쟁에 참전한 길림성 전체의 혁명열사 중 41퍼센트가 연변지역 출신인데 이 중 92퍼센트가 조선족이다. 항일에서도 가장 많이 희생됐고 해방전쟁에서도 역시 가장 많은 피를 흘렸다. 이처럼 항일전쟁과 해방전쟁에서 조선족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며 열렬히 싸웠던 이유는 무엇일까? 항일전쟁은 물론 일제로부터 민족을 독립시키기 위한 것이었지만 해방전쟁은 중국 내에서 소수민족의 권리를 찾기 위해서였다. 유용태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에 따르면 소수민족이란 용어는 1924년 중국 국민당 문건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는 중화민족의 존재를 염두에 둔 것이다. 중화민족의 개념은 1902~1922년 량치차오와 쑨원 등에 의해 제기됐다. 즉, 청나라가 곧 중화민국 내에 거주하는 모든 족속을 포함해 하나의 대민족을 형성한다는 개념이다. 중화민족의식은 항일투쟁 과정에서 국민당의 장제스와 공산당의 마오쩌뚱에게 같이 전해졌지만 마오쩌뚱은 마이너리티인 소수민족의 한과 서러움을 공산혁명에 교묘하게 이용해 성공했다. 중공의 탄생은 그 결과물이다 마오쩌둥은 소수민족에게 토지와 재산에 대한 권리를 한족과 차등 없이 공평히 배분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막말로 말하면, 조선족 병사들은 공산주의 이념을 정확히 알고 투쟁한 것이 아니라 되놈과 일본놈에 핍박만 받다가 공산당이 토지와 재산을 공평히 분배한다고 약속했기에 목숨 바쳐 싸웠던 게다. 한족 중심의 중화주의자였던 쑨원과 같이 장제스는 소수민족을 끌어안지 못하고 마오쩌뚱에게 결국 지고만다. 거주국인 중국을 위한 전쟁에서 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의 1등 공신은 조선족의 희생이었다. 그렇다면 조선족에게 항미원조전쟁(6.25)은 어떤 의미일까? 조선족에게 항미원조(抗美援朝)전쟁은 두 가지 의미를 갖는다. 하나는 항일투쟁의 연장선상에서 북조선을 도와 남조선을 지배하고 있는 미 제국주의로부터 남조선을 해방시키고자 하는 항미투쟁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두만강과 압록강을 넘어 중국을 침범할 수도 있는 미국을 저지하기 위한 보가위국(保家衛國)의 의미였다. 독립지사 김동삼 선생의 손자 김중생시가 쓴 <조선의용군의 밀입북과 6.25전쟁>에 따르면 6.25전쟁 3년간 참전한 조선족은 모두 10만여명에 달한다. 중국의 초중 2학년 역사교과서에는 6.25전쟁에서 북한이 중국 정부에 파병을 요청해 참전한 것으로 서술하고 있으나 중국은 이미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1년여 전부터 인민해방군 내 조선족 병력을 북한에 배치했다. 그 주력부대는 중국공산당의 지휘 아래 항일투쟁과 해방전쟁에 참전했던 조선의용군이다. 그러나 현재 조선족을 포함한 대다수의 중국 대학생들은 6.25가 남한의 북침으로부터 시작됐다고 본다. 또 1950년 11월 중공군의 개입이 중국 경내(압록강 및 두만강 변경 북쪽)에 대한 미국의 조준폭격으로 어쩔 수 없이 참전할 수밖에 없었다고 알고 있다. 조선의용군의 전신인 조선의용대는 1938년 중국 우한에서 결성한 항일무장독립부대였다. 중국 국민당 산하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조선 청년 122명을 중심으로 출범한 조선의용대는 1942년 좌우익 노선갈등으로 쪼개졌다. 하나는 충칭에 남아 광복군으로 편입되고 다른 하나는 화북으로 가면서 조선의용군이 되었다. 김일성이 1949년과 50년 두 차례에 걸쳐 마오쩌뚱에게 밀사를 보내 항일투쟁과 해방전쟁을 통해 무수한 전투경험을 쌓은 조선족 부대를 파견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은 정설로 알려져 있다. 중국 정부는 1980년대 중반이후부터 6.25참전 조선족 퇴역군인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 조선족의 북한 이동과 관련한 공식적인 언급은 일절 하지 않는다. 이는 한국과의 외교관계를 고려해서다. 전투경험이 풍부한 조선의용군의 도움을 받지 않았으면 북한이 6.25개전 초기 3.8선을 지나 낙동강까지 단숨에 내려올 수는 없었다. 김중생씨에 따르면 6.25개전 초기 북한 인민군의 주력부대였던 21개 연대 가운데 47퍼센트가 북방에서 건너 온 조선의용군으로 채워졌다고 증언한다. 알다시피 무기는 주로 소비에트로부터 지원받았다. 6.25개전 이전에 북한으로 건너간 조선족의 수는 약 6만5천으로 집계하고 있다. 중국은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두 달 전 조선족으로 구성한 세 개의 사단(156사단, 164사단, 166사단)을 평양에 보냈다. 6만5천은 정규군 외에 노동자, 통역, 공작대, 간호원, 운전병 등을 모두 포함한 숫자다. 이 밖에도 애국생산운동, 헌납운동 등이 있었다. 연변지구에서만 97억 위엔의 돈을 북한에 지원했다. 당시 이 돈은 전투기 8대를 살 수 있을 만큼 큰 돈이었다. 물론 동북에 흩어져 있는 산재지구에서도 모금운동이 있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북한이 유엔군에 몰리자 중국은 100여개 사단의 1백만이 넘는 병력을 한반도에 추가로 투입했다. 이때는 대부분이 한족으로 알려져 있다. 김씨는 1개 사단에 150명 정도의 조선족 통역이 배치된 것으로 증언했다. 그러나 막연히 한족으로 알려져만 있지 부대의 족속이 제대로 드러난 사실은 아직 없다. 중국에는 자기들 말대로 55개의 민족이 있다. 내가 중공이라면 이 전쟁에 한족을 몽땅 집어넣진 않았을 것이다. 전쟁을 잘하기는 거센 만주족과 충성스런 산동인들이 제격이다. 아니면 한족에겐 두려운 위굴족, 유전인자가 한국인과 비슷한 티벳인들을 집어넣었을 것이다. 개전 초기 주력부대로 활약했음에도 북한에 간 김무정, 방호산, 박일우 등 조선의용군 출신 고위관료는 휴전 이후 대부분 김일성에 의해 숙청당했다. 그들은 한국에서도 아직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북한과 중국에 이용당해 같은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눴기 때문이다. 혹자는 조선의용군을 ‘역사의 미아’라고 부른다. 1952년 9월3일 6.25전쟁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연변조선족자치구가 성립됐다. 이 시기는 해방전쟁에서 항미원조전쟁으로 이어지는 격동기가 진정될 무렵이었다. 초대 자치구 대표는 주덕해였다. 그는 윤동주의 고향인 용정 명동촌과 가까운 승지촌 출신이다. 주덕해는 지금의 연변보다 훨씬 큰 자치구를 구상했다. 그가 처음 구상한 연변조선족자차구는 원래 발해의 오랜 수도였던 흑룡강성 영안현에서 길림성 장백현을 포함하는, 지금의 4만3559평방킬로미터보다 2배가 넘는 넓이였다. 한편 1952년 이후 중국에서는 반우파운동, 대약진운동,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렸다. 이 와중에 대표였던 주덕해는 ‘지방 민족주의자’와 ‘분파주의’로 낙인찍혀 숙청당해 고향에 돌아오지도 못한 채 우한에서 숨을 거뒀다. 연변조선족자치구는 1955년 4월 자치주로 격하됐다. 심하게 말해 자치구와 자치주의 차이점은 민족자치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크다. 자치구는 성과 동급기관이다. 만약 연변이 자치구로 계속 남았다면 지난해 백두산의 관할권이 길림성으로 구렁이 담 넘어가듯 넘어가진 못했을 것이다. 주덕해에게 돌멩이를 던진 것은 다름아닌 조선족 홍위병들이었다. 주덕해로 인해 조선족은 둘로 갈라졌다. 동북의 산재지구에 살고 있는 같은 조선족이 연변조선족을 싫어하는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가 주덕해사건 때문이다. 그는 1978년에서야 겨우 명예를 회복했으며 지금 연길공원 뒤에 잠들어있다. 조선족은 반우파투쟁과 대약진운동, 문화혁명의 소용돌이에서도 서로 피를 흘리며 싸웠다. 이 과정에서 많은 조선족 민족주의자들이 압록강, 두만강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갔다. 아마 중국의 공산당 본류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을 것이다. 조선족은 중국 공산당이 약속했던 소수민족의 권리를 찾기 위해 헌신했다고 하지만 거꾸로 중국정부로부터 처절하게 농락당했다고 할 수 있다. 조선족 지식인들 사이에선 아직도 이런 부분에 대한 이해관계가 상당히 얽혀있음을 알 수 있다. 그들 역시 세대간, 지역간 이념적 갈등이 많다. 이 시대 조선족은 크게 문혁을 겪은 세대와 겪지 않은 세대로 나눠진다. 중공 한족은 조선족에게 선물을 준 것이 별로 없음에도 대다수 조선족들은 이를 고마워한다. 적어도 내 눈엔 그렇게 보였다. 그러나 고마워할 게 뭐 있는가? 연변은 조선족의 피로 세운 땅이 아니던가? 오래 전 연변의 주인도 역시 조선인이었다.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보라. 근세 조선족의 역사는 피로 점철된 역사였다. 중국 내 다른 민족도 예외는 아니다. 그러나 민족주의적 시각으로 본다면 이는 중국 내 중화주의자들이 즐겨 쓰던 이이제이(오랑캐로 오랑캐를 잡는다)에 당한 억울한 피의 역사였다. 말도 안돼는 소리라고 말하는 조선족도 있을 것이나 긴 역사의 호흡으로 살펴보면 틀린 것이 아니다. 실제 연변에서 그런 주장을 펴다가 한 조선족 역사학자와 서로 얼굴을 붉힌 적이 한번 있다. 그분은 50년대초 연변에서 태어나 줄곧 연변에서만 살아오신 분이었다. 그의 조국은 중국이었고 나의 조국은 한국이었다. 그분도 나도 서로 다름을 인정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렇지가 않았다. 다방에서 술만 된통 마시다가 그냥 헤어졌다. 중국의 다방은 한국과 달리 술도 판다. 그분은 계속 줄담배를 피워댔다. 연변에서 금기시되는 말을 양파 까듯이 이야기하자 그는 상당히 불안해 했다. 참 답답한 느낌이 들었다. 그분은 중화인민공화국 공민의 시각에서 조선족을 바라보았고 나는 한민족의 입장에서 조선족을 보았던 것이다. 그날 이후 중국에서 가급적 역사, 정치 ,종교 같은 이야기는 입에 담지 않았다. 왜냐하면 나의 주장 대부분은 조선족 지식인들이 꺼려하는 부분들이었다. 흑룡강성 목단강에서는 그분보다 더한 분도 만났다. 나에게 노골적으로 “김정일이 좋다”며 김정일에 대한 찬양을 늘어놓았다. "한국은 조선에 비하면 배알도 없다"는 말도 했다. 나는 “그럴 수도 있겠지요.” 라면서 “그래도 한국이 그런대로 잘 사니깐 제 같이 별 볼일 없는 놈도 목단강까지 와서 선생님을 뵙지요.”하고 웃어 넘겼다. 한국전쟁과 관련해 중국 공산당의 실질적 핵심 정책자문기구인 정협(전국정치협상회의)이 펴낸 책을 연길 신화서점 2층에서 구입한 적이 있다. 한국에 귀국하면서 짐이 너무 무거워 연길에 두고 온 이 책의 내용은 6.25때 한국군과 유엔군에 큰 타격을 준 조선의용군 김길송, 최룡덕, 이영래, 김허준, 문정일 등의 무용담이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끝까지 읽은 느낌은 한마디로 착잡함 뿐이었다. 차라리 북한이었다면 공감이나 했을 것이다. 북한에선 아마 더할 것이다. 연변에서도 아직 공산주의의 망령에서 깨어나지 못한 사쿠라 지식인들이 더러 있다. 그들은 대개 중화인민공화국 격변기에 살아남아 영화를 누리고 있거나, 죽을 때까지 공산주의자로 남아 끝까지 인생을 마감하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공산주의 혁명에 민족을 이용할 뿐 진정한 민족주의자는 아니다. 중국과 한국, 혹은 조선에 양다리를 걸친 채 박쥐와 같이 민족을 읊으면서 오로지 햇볕을 지향할 뿐이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 한 줌의 돈과 한 푼의 명예 앞에 쥐새끼가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친일파를 가장 증오하면서도 자신이 친되놈, 친중공파인 것은 까마득히 모른다. 이렇게 말하는 나에게 그들은 연변에 죽을 때까지 살아보라고 할 것이다. 그 러면 입장이 달라질 것이라고 이야기 할 것이다. 고백컨데, 달라질 것은 하나도 없다. 사실 혁명가가 되지 않고 조선족 참 지식인으로 연변에 살기엔 많은 인내심을 요구한다. 얼마 전 한국에 온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는 중국의 리스크에 대해 경고했다. 20년간 중국이 폭발적으로 성장했으나 또 다른 폭발이 반드시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 심지어 중국이 쪼개질 것이라고도 했다. 부패한 관료와 분노한 노동자, 농민은 중국을 지금과 같이 놔두지 않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의 말이 사실이 될지 아니면 공허한 메아리로 남을지 알아서 판단할 일이나 또 다시 한국에 전쟁이 날 경우 조선족은 어떻게 할 것인가? 또 역사의 미아가 될 것인가? 화교(화의)와 유태인, 그리고 조선족이 다른 점은 무엇인가? 미국에 살고 있는 수 많은 화교들은 중국인이란 자부심이 있다. 그들은 미국과 중국이 축구시합을 하면 대다수가 중국을 응원한다. 동남아에 있는 화교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조선족은 그러한가? 한국과 중국이 축구시합을 하면 조선족의 75퍼센트 이상이 중국을 응원한다는 여론조사 결과가 나와 있다. 미국에 살고 있는 한국교포는 어떠한가? 한국교포들은 한국본토에 살고 있는 한국인보다 더 열심히 한국을 응원했다. 2002년, 2006년 월드컵때도 그랬다. 올 초 미국에서 열린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시합때 미국에 있는 교포2,3세들은 한국과 미국이 경기를 할때 미국을 응원하지 않았다. 한국에 있는 화교도 마찬가지다. 대구시 중구 종로에 집거해 살면서 주로 중국식당을 하고 있는 대구의 화교들은 자기들끼리 있으면 철저히 중국어를 한다. 화교학교의 국기게양 및 교가는 모두 중국대만 국기고 그들의 교가는 모두 중국어로 돼 있다. 그들은 철저히 중국의 역사를 가르치고 배운다. 한국은 그들의 민족관에 대해 터치하지 않는다. 중국 연변에서 통일된 한반도의 통일된 애국가가 언제쯤 울려 나올까? 땅은 중국 땅이더라도 통일조국의 국가가 연변의 한겨레 학교에 울려퍼져도 신경을 안 쓰는 중국은 언제 태동할까? 중국이 미국처럼 세계속에 초강대국이 되려면 그런 정도의 당당함과 자부심이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아직 중국은 껍데기만 용이다. 중국의 조선족이 한민족 재중동포의 일원으로서 동참하려면 '중국의 조선족'이란 퇴화된 박제의식에서 벗어나야한다. 조선족의 정체성을 '중국속에 살고 있는 한민족'이란 전향된 패러다임으로 바꿔야만이 민족의 장래에 희망이 보인다. 후손의 잘못으로 조상의 무덤 관할권이 남에게 빼앗겼다고 해도 그 무덤 안에 있는 조상의 혼이 남의 것은 아니다. 남이 그 무덤의 주인에게 제사를 지내 줄 것인가? 조선족 후손들에게 이런 왜곡된 민족의식을 자리잡게한 책임은 누구로부터 비롯된 것인가? 당연히 중국 공산당의 책임이 크겠지만 공산당의 총칼과 뇌물에 부화뇌동한 박쥐같은 일부 조선족 지식인과 비굴한 관료의 책임이 더 크다. 조선족에게 중국과 한국이 축구경기를하면 누구를 응원할 것인가?라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질문이 아니다. 중국을 응원하겠다고 대답한 75퍼센트는 중국 공산당의 민족 순치교육 때문에 그랬던 것 뿐이다. 그들은 항상 그랬다. 만주족에게도 그랬고, 내몽공의 몽골족에게도 그랬고, 위굴족과 티벳인들에게도 그랬다. 문제는 이런 순치교육에 앞장 선 거짓 지식인이다. 청맹과니는 후손들까지 청맹과니로 만들지 말라. 한민족의 역사 속에 친일파는 최악의 닉네임이다. 연변과 산재지구에 살고 있는 동포들은 친중파가 되지 말라. 당신들은 어쩌면 그곳에 우리말과 글을 사용하며 산다는 것 자체만으로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일제가 1930년대 이후 한민족에게 총칼 대신 문화정책을 써 '조선인은 별 볼 일 없는 조상과 문화를 가졌다'고 쇄뇌 공작을 했다. 지금 중국이 벌이고 있는 동북공정의 작당이 일제의 야비한 문화정책과 무슨 차이가 있단 말인가? 지금 보이지 않는 중국의 무서운 힘이 조선족을 지배할지라도 당신과 우리들의 위대했던 조상처럼 꿋꿋하게 버티시길 바란다. 중국의 조선족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아니 중국 내 한겨레는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중국내 조선족은 사라져도 한겨레는 사라지지 않는다. 중국은 중국에 건너간 한국인을 신선족이라고 한다. 중국내 한국인이 1백만을 넘어 2백만이 되면 55개의 소수민족이 아니고 56개의 소수민족이 생겼다고 떠들기 위해 미리 사전작업을 하기 위한 선전술이다. 차라리 '족'자를 빼고 신선이라고 하면 이해하겠다. 그러나 연변에는 희망도 있다. 왜냐하면 박쥐를 우습게 보는 수리부엉이나 검수리같은 분들이 더 많이 계시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공통점은 연변과 중국 내에서만 갇혀 사는 분들이 아니란 것이다. 세계 속 한민족의 일원으로서 조선족의 역할이 크다고 믿는 분들이다. 그분들은 출판도 중국에서 하지 않는다. 전시도 마찬가지다. 지난해 조선일보의 모 사진기자가 연변에서 '일제가 남긴 흔적'이란 사진전을 했다가 하루만에 공안에 의해 강제철거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이유는 미리 검열과정을 거치지 않아서였다. 예술에 정치, 종교, 민족과 같은 민감한 주제는 건드려선 안된다는 것이 불문율이다. 이는 연변 뿐만아니라 전 중국에서 자행되고 있는 현실이다. 차라리 돈을 주고서라도 자신의 책을 한국에서 출판하고 싶다는 분도 계시다. 환경재앙이 인류에게 닥칠 미래에 고민하는 분도 계시다. 한국의 웬만한 지식인도 그의 독서량과 지식의 깊이에 탄복한다. 앞서가는 분들이 있기에 연변은 그래도 희망이 있다. 그분들은 친중도 친한도 친조도 아니다. 언젠가 때가 되면 그분들은 민족문제에 대해 행동하는 양심으로 보여줄 것이다. 세대와 지역, 관료와 자본가, 노동자 농민에 따라 정도의 차이가 있다. 재미있는 것은 관료보다는 자본가들이, 자본가들보다는 노동자들이 더 할 말을 하고 산다는 점이다. 박쥐같은 일부 부패한 조선족 관료들은 중국 공산당의 눈치를 보지만 노동자는 그렇지 않았다. 과거 고조선, 고구려, 발해를 이어오면서 북방을 호령해 오던 조선족은 근세에 이르러 해방전쟁과 6.25, 문혁 등을 통해 육체와 정신이 무참히 파괴됐다. 특히 문혁이 남긴 피해의식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러나 이 정신의 피폐함을 문혁의 탓으로만 돌려선 안된다. 나는 한국과 조선, 조선족이 다함께 자랑스럽게 간직해야할 소중한 정신적 가치는 항일투쟁의 역사 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나머지는 당신들의 혁명이었고 당신들의 전쟁이었다. 홍색관광(혁명열사기념비 순례)속에 해방전쟁과 항미원조는 빼야한다. 그것을 집어넣으면 당신들의 관광이 될 뿐이다. 지금은 연변의 깡촌에 살고 있는 80세가 넘은 조선족 할아버지도 항미원조의 훈장이 이제는 자랑이 아니라고 하는 마당이다. 광주민주화 운동 때 광주시민들을 총칼로 탄압했던 공로로 훈장을 받은 자들이 꽤나 있다. 그들 대부분 이젠 그것이 별로 자랑할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대가 바뀌면 이념은 바뀐다. 그러나 민족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지난해 중국은 단둥의 끊어진 철교 계단 옆에 마오쩌뚱이 쓴 ‘항미원조 보가위국’을 지우고 웨이러허핑(爲了和平.평화를 위하여)이란 문구를 써 넣었다. 중국에서 가장 앞선 지역은 역시 홍콩과 상하이, 광조우와 선전이다. 이젠 심양, 단동, 하얼빈까지 그 불길이 번졌는데도 연변의 일부 청맹과니들은 변하지 않고 아직껏 혁명타령을 하고 있다. 최근 동료 연수자의 추천으로 쟈오궈뱌오 전 베이징대 신문전파학과 교수가 쓴 <당신들의 중국>이라는 책을 읽었다. 그는 중국의 발전을 가로막는 부패본부 중국 공산당 중앙선전부의 전횡을 폭로하다가 해직된 교수다. 토벌중선부(중앙선전부를 토벌하자)는 마치 최치원의 토황소격문을 연상케한다. 중국에 아직 이런 양심적인 지식인이 살아있다는 것이 중국 공산당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중국 공산당이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기엔 너무나 커 버린 존재다. 전 세계 20여개 나라에서 번역돼 소개된 책으로 중국에서는 금서다. 한국의 80년대 보도지침을 연상케 하는 이 책을 한번 보시길 바란다. 특히 ‘정보의 돼지우리’와 '겸청(兼聽)'이란 말을 유의해서 봐야한다. 정보의 돼지우리는 중국의 발전을 막는 16개의 썩은 걸림돌을 일컫고,겸청은 '겸청즉명, 편청즉암'(兼聽卽明,偏聽卽暗)의 준말로 '양쪽을 다 들으면 시비를 밝힐 수 있고 한 쪽 말 만 들으면 어둡게 된다'는 뜻이다. 특히 미몽에서 깨어나지 못한 친되놈, 친중공 조선족이 필독하길 바란다. 이는 두번 다시 열사란 미명으로 중화주의자에 속아 민족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일이 없어야겠다는 바램에서다. 사진설명: 연변 왕청현 동신향 태양촌 안동마을에 있는 혁명열사기념비. 이곳에 정착한 안동의 후손들도 항미원조전쟁에 동원됐다. |
첫댓글 조선족은 각성 좀 해야 합니다. 지네가 무슨~ 중국놈이나 된다고~ 기고만장을 해대는지~ 겨우 죽어라 이용만 당하는 주제에~
중국인구 10억이 훨씬넘는 나라에서 조선족 200만은 존재감 없습니다. 그나마 한국 때문에 주목이라도 받는거죠
중국,한국 어디에서도 환영 받지 못하는 자신들의 한계를 헤쳐나가기 위한 방편이 현재 저들의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조선족들 하는 행태를 보면 망나니도 그런 망나니가 없습니다. 조선족들에게서 인간으로서의 예절이란 조금도 없더군요. 상대방을 이용만 하려고하는데 기가찰 노릇입니다. 기초적인 가정교육도 제대로 못받고 자라서 그런가보다하고 이해를 하려해도...도무지 이해가 가지않습니다.
조선족뿐만 아니라 공산주의했던 국민들은 다 예의범절 그런걸 모르죠. 윤리의식자체가 부제입니다.몇년전 세이클럽에서 어떤 다소 특이한 가치관을 가진 한국남자(?)와 채팅을 한적 있는데, 나중에 알고봤더니 조선족이더군요. 이상하다 했더니 역시나더군요. 특히 인터넷에서 한국비하 조롱 자학조성 같은 코멘트들 상당수가 조선족이 쓴것이라고 하더군요. 미국사는 조선족 하나가 s korea를 일컬어 전세계에서 가장 인종차별 심하다라고 적은 외국사이트도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