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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헤드린 의원이요 유대의 선생인 니고데모가 어느 날 밤에 조용히 예수님 앞에 나와서 영생의 도리를 물었습니다. 이 사실은 우리의 인생 전체에게 여러가지를 시사해줍니다.
니고데모는 유대인이었습니다. 즉 하나님의 선민이었습니다. 나면서부터 특별한 약속을 입었을 뿐 아니라 약속을 굳게 잡고 살 아가는 사람이었습니다. 둘째로 바리새인이었습니다. 열심 있는 종교가였던 것입니다. 모세의 율법을 엄격히 배우고, 전문적으로 연구를 했습니다. 셋째로 정치, 종교 지도자였습니다. 당시 산헤드린 의회의 의원은 70여명밖에 되지 않은, 선민 중의 선민이요 그 신분과 명예가 보존되었습니다. 넷째로 이름 있는 학식과 경험을 갖춘 학자였습니다. 다섯째로 이스라엘의 선생, 스승, 교사 , 랍비였습니다. 여섯째로 예수님에 대해서 호의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본래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반대하는 선동자들 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나온 것을 보면 예수님을 존경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일곱째로는 겸손한 구도자(求道者)였습니다.
당시 예수님은 30세 전후의 연령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마도 예수님보다 더 나이가 많았을 법한 니고데모가 정중히 나와서 "선생님이여!" 하면서 자신의 문제 해결을 구했다고 하는 것은 겸손한 인격자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종교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수준이 매우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인 안목으로 볼 때에 하나도 더 필요한 것이 없을 만큼의 존재였 습니다. 이런 사람이 많으면 사회 발전이 넉넉히 되리라고 기대될 정도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장 근본적인 영생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 찾아 나왔습니다. 그에게 요구되는 것은 구원이었습니다. 인생은 영혼의 구원을 얻기 전에 다른 모든 것을 가져도 인생의 문제 해결은 오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니고데모는 근본적인 이 구원 문제에 대해서 우리에게 가장 귀중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첫째로 예수님 앞에 나왔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께로 나아온 것은 구원의 길을 가장 바로 찾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모든 것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온갖 은총을 입습니다. "만물도 세계도 생명도 죽음도 이제 일도 장래 일도 다 너희 것" 이라고 고린도전서 3장 22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신앙할 때에 보이는 것 보이지 아니하는 것 하늘의 것 땅의 것 모두가 다 나의 소유가 됩니다. 지식, 부, 도덕, 종교, 철학, 사상, 예술, 사회 활동도 또 아브라함, 모세, 이사야의 영성이, 소크 라테스, 플라톤, 칸트의 학문이, 단테, 베토벤, 바그너, 미켈란젤로, 다빈치, 밀레의 예술 세계가 모두 나의 소유가 됩니다. 그 리스도의 십자가를 소유하면 하나님과 하나가 됩니다. 즉 하나님을 소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상속자가 됩니다. 우주의 상속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만이 인생의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마틴 루터는 인생을 세 가지로 나누었습니다. 첫째가 보통 사람이라고 하는 것인데,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저 무사안일하게 살 아갑니다. 자신이 더러워 졌다고 하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합니다. 내가 지은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진노하신다는 것도 느끼지 못 합니다. 무감각자 입니다. 이런 사람은 세속적인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율법으로 위협을 느끼고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좀 바로 살려고 무한한 노력을 기울입니다. 그러나 불가능한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고 절망에 빠지게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도덕가입니다. 그리고 셋째로는 자기 죄도, 하나님의 진노도 모두 깨달아 알고 자기만으로는 멸망 받을 것을 알기 때문에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고 구원 얻으려고 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 그리스도인 입니다.
니고데모는 지금까지 루터가 말한 두 번째 사람이었을 것입니다마는 다행히도 그리스도 앞에 나오게 된 것입니다. 바로 니고데모는 다른 것은 다 가지고 있었지만 그리스도 한 분을 가지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럴 때 영생을 비롯한 모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찾게 됨으로써 영생을 비롯해서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또 이 본문에서 둘째로 가장 중요한 것은 신생(新生), 중생(重生), 거듭 남을 얻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으로서 유대인의 선생이요 지도자였지마는 영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눈 먼 사람처럼 어두웠습니다. 죄의 문 제 해결이 없는 인생의 심령은 눈 먼 사람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지금까지 자기 죄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예민하게 고민하며 아파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첫째로 그저 선한 일을 많이 하면 지난 날의 죄가 없어지지 않겠나 하고 선행에 힘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선행, 공덕이 지난 날의 죄과를 없애지 못합니다. 장 발쟝이 회개하였어도 지난 날의 '도둑'이었다는 사실은 남아 있습니다.
또 혹 잊어버리면 된다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를 잊어버리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죄는 마치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면 서 결정적일 때 우리를 고발하는 것입니다. "맥베드 부인의 손의 피는 씻을수록 피 냄새가 난다"고 누가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지난 날의 죄는 결코 없어지는 법이 없습니다. 결코 잊어 버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셋째로 어떤 사람들처럼 죄의 존재를 부정하는 논설을 말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죄라는 것은 종교가들이나 도덕가들의 병적 과민에서 오는 산물이다. 본래 죄라고 하는 것이 어디 있는가....... 죄라는 것은 있다면 있고 없다면 없는 것이다....." 이렇게 죄에 대한 부정을 말하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을 것입니다.
가령, 여기 한 청년이 만유인력이 어디 있느냐 ? 만유인력은 없다. 만유인력이 없는 것을 내가 보여주겠다고 63층 꼭대기에 올라가서 한 번 날아가려 해 본다고 해 보십시다. 청년이 주장하는 대로 되겠습니까 ? 온 세상 사람들이 만유인력은 없다고 한 목 소리로 주장한다고 이 엄연한 만유인력이 없어지겠습니까 ? 틀림없이 63 층 꼭대기에서 발을 떼는 순간 만유인력의 영향을 받아 서 가속도를 받으며 떨어져서 그 몸이 부서지고 말 것 아니겠습니까 ? 죄 역시, 그 존재가 없다고 주장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죄가 없다고 하시지 않고 "거듭 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래 출생 그 자체는 "신비"에 속합니다. 부모 마음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의사들이 주장하는 것도 못 됩니다. 시편 139편 13절 이하에 "주께서 내 오장육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 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 내가 은밀한 데에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 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나의 형체가 주의 앞에 숨기지 못하였나이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니고데모에게 "거듭 나라"고 하는 이 말씀은 육신이 아닙니다. 영혼이 다시 나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육 보다 영은 더 신비의 세계입니다. 이 "거듭 나라, 새로 나라"고 하는 "위로부터"라고 하는 뜻이 포함된 말 입니다. 이 땅에서 새로 나는 것이란 없습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영적으로 재 탄생하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새로 나면 설명 할 필요가 없습니다. 체험으로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마치 "바람"을 볼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디서 오는지 어디로 가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소리로 들을 수가 있고 피부로 느낄 수가 있고 나뭇가지가 흔들리우고 아니, 공기 와 바람 그 영향권 안에 없는 존재가 없습니다. 알고도 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을 받으면, 새로 거듭나게 되면 우 리 생활 속에 명확해집니다. 전에는 세상 것 좋아하고 그것만이 제일이었지만 이제는 경건과 하나님 나라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즐거움이 오는 것입니다. 인생이 죄에서 구원 얻는 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신생(新生)"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또 이 본문에서 한가지 더 중요한 것은 이 거듭 나는 것은 오로지 "믿음"으로만 이루어진다고 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라"고 하셨을 때 이 "물"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통한 "세례 "입니다. 또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하는 점도 됩니다. 베드로전서 1장 23절에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 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납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세례"의 뜻을 알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송이 꿀보다 더 달게 받아들이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 속에서만 이 신비스러운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신생"이라는 것이 어느 시점에서 이루어지느냐 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십자가를 신앙할 때 이루어 집니다. 예수님께서 구체적으로 이해시켜 주시려고 예(例)까지 들어 말씀해 주셨습니다. 요한복음3장 14절, 본문에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고 말씀했습니다. 이 말씀은 민수기 21장에 있는 사건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홍해 길 에돔 땅에서 모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며 앉아서 먹고 일어나 뛰놀며 우상을 섬기고 방탕하면 서 범죄 했습니다. 그 때 불 뱀이 나타났습니다. 하루에 이만 삼 사천 명씩 물려 쓰러지고 죽었습니다. 피 바다, 시체의 산 더미 , 울부짖는 소리가 진동하고 하늘에 사무쳤습니다. 백성들이 그때야 자신의 죄를 깨달아 알고 회개하면서 모세에게 간청하였습니 다. "우리가 다 범죄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 간구하여 불 뱀을 없애 주시옵소서..." 그렇게 요청했습니다. 모세가 다시 하나님 앞에 가서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놋뱀을 만들어 장대 끝에 매어 달아서 누구든 지 불 뱀에 물리게 되면 이 장대 끝의 놋뱀을 보게 하라. 그리하면 죽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위기 속에서도 살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놋뱀을 봄으로써 살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생각하기를 "하나님께서 어찌해서 백성이 원하는 대로 불 뱀을 없애 주지 아니하시고 놋뱀을 달게 하셨는가..." 하고 의아해 할 수가 있을는지 모르겠습니다. 불 뱀을 없애 주신다고 하면 물릴 염려도 없고 놋뱀을 만들어 장대에 다느라고 수고를 안 해도 되고 바라보아야하는 번거로움도 없었을 텐데 어찌해서 그렇게 아니하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물론 불 뱀을 없애주셨다고 하면 우리들이나 마찬가지로 그 백성들, 그저 한 서너 시간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며 역시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고 간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곧 더욱 심한 불평과 불만에 빠지고 범죄와 타락에 넘어졌을 것입니 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원하시는 것은 중심으로부터의 신앙과 순종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육체의 구원이 아니라 죄에 서의 구원을 주신 것입니다.
당시의 본문을 문답식으로 바꾼다고 하면 아마 이렇게 될 지 모르겠습니다.
"너희는 왜 고생하느냐 ?" "네, 불 뱀 때문입니다." "어찌해서 불 뱀이 나왔느냐 ?" "하나님께서 보내 주셨습니다." "아, 내가 왜 불 뱀을 보내 주었는지 아느냐 ?" "우리들이 원망하고 불순종하고 범죄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너희의 이 고통이 불 뱀 때문이냐 ? 너희 죄 때문이냐 ?" 이 경우에 불 뱀 때문이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있다면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른 대답일 것입니다. 인생의 모든 고통은 자신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이 당하고 있는 이 근본 원인인 "죄" 에서 인생을 구원하려고 하시는 것입니다.이 죄에서의 구원은 오로지 신앙과 순종으로만 얻는 것입니다. 광야에서 모세를 통해서 "누구든지 불 뱀에게 물리면 즉시 놋뱀을 바라보아라. 그리하면 살리라"고 하신 이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아마 대중들은 불 뱀을 없애달라고 하는데 놋뱀은 무슨 소용이 있느냐, 당장 불 뱀의 독이 핏줄을 통하고 있는데 놋뱀 바라볼 시간이 어디 있느냐 ..... 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 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불평없이 물리자마자 곧 놋뱀을 바라본 사람은 아무런 해(害)도 받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 없이 액면 그대로 믿고 순종하는 것이 신앙인 것입니다. 놋뱀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의 말을 믿으라는 말도 아닙니다. 하나 님을 신앙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불 뱀은 한 마리도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어제나 마찬가집니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신앙입니다. 어제까지는 불 뱀에 물릴 걱정이 있었습니다. 오늘 아침엔 걱정이 없습니다. 물리면 놋뱀을 바 라보면 됩니다. 신앙 있는 사람들은 "자, 염려하지 맙시다. 이젠 다 일어나서 전진하십시다. 물리면 당장 놋뱀을 바라보십 시다. 하나님의 일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하면서 일어설 수가 있었을 것입니다. 달라진 것은 그들의 신앙, 절대 순종입니다 . 전에는 사사건건 따지기만 하던 것이 이제는 이유가 없습니다. 신앙과 순종 뿐으로 실행하면 된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인생들은 모두 다 도덕적 파산자들입니다. 아무리 노력하고 수고하고 수양(修養)해도 생명을 얻기에는 부족합니다. 죄악이라고 하는 불 뱀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다만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의 제물이 되어 주신 그리스도의 피를 믿는 믿음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옛날 놋뱀을 여러 번 바라보아야 된다든지 오래 바라보아야 된다든지 가까이 가서 바라보아야 된다든지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순종하는 것만이 중요합니다.
우리 신앙 생활에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순종"입니다. 믿음만은 철두철미, 순수하여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은 단순하며 무조건적이어야 합니다. 옛날 불 뱀 정도가 아닌 죄악에 물려서 영과 육이 멸망에 빠지게 된 현대인들이 놋뱀 아닌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신앙의 자세가 왜 이렇게 해이 해졌습니까 ? 무슨 이유가 그렇게 많아졌습니까? 의심이 깊어졌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데 조건이 왜 그렇게 많아졌습니까 ? 하나님을 신앙하는데 있어서는 어린 꼬마가 엄마를 믿는 이상으로 철두철미, 분명해야 하고 세상을 이기고도 남는 강한 믿음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 키는 데 있어서는 어리석을 정도로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참 사는 길입니다. 이것이 사회 변화의 근본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