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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북정맥 제 5 구간 산행 ▲▲▲
1. 산행일자 : 2007년 4월 8일 (일요일)
2. 산 행 지 : 국사봉(402.7m) - 충남 공주/연기
3. 날 씨 : 맑음 --- (흐림) --- 개임 --- 맑음
4. 참 가 자 : 강동규, 김미환, 김재윤, 박봉하, 안상경, 윤희원, 이영구 외 2인, 이용준, 장현옥(11명)
5. 총 산행 거리 및 소요시간
[1] 금북정맥
① 산행 거리
② 소요 시간 : 약 4시간 정도
[2] 마곡사 태화산(제1코스)
① 산행 거리
② 소요 시간 : 약 2시간 40분
6. 구간별 거리 및 소요 시간
[1] 수원(05:00) ∼ 경부고속 ∼ 천안휴게소(05:40/아침/06:10) ∼ 남천안IC ∼ 691번도 전의면 양곡리(06:50)
[2] 압실/양곡리 2구 마을회관(07:00) → 탄약부대능선분기봉/마루금(07:50) → 압실안부(08:00) → 철탑(08:15) → 능선분기점(08:50) → 국사봉(09:00) → 427봉(09:25) → 헬기장(09:30) → 철탑(09:40) → 밤나무단지(10:10) → 마지막봉(10:30) → 임도(10:50) → 차령고개(11:10)
[3] 23번구도로(11:30) ∼ 마곡사 태화산(12:00/점심, 산행/15:30) ∼ 남천안IC ∼ 수원(18:00)
7. 산행의 실제 (산악대장 제공 자료)
[1] 금북정맥 5 구간 산행
■ 수원(05:10) ∼ 경부고속 ∼ 천안휴게소(05:45/아침/06:10) ∼ 남천안IC ∼ 전의면 양곡리(06:35)
■ 압실/양곡2리마을회관(06:45)→압실안부/마루금(07:11)→356봉(07:19/07:24) →세멘트포장임도(07:41)→382봉(07:53/08:02)→국사봉(08:27)→427봉(08:54) → 헬기장(09:00)→임도(09:04)→국수봉(09:18/09:23)→밤나무단지삼각점(09:39)→ 118번 철탑(09:43)→임도→116번철탑(10:13)→차령고개(10:20)
■ 차량회수, 차령고개(11:00) ∼ 마곡사 태화산(11:30/점심),
[2] 태화산 산행
■ 마곡사 주차장(11:30/점심/12:20)
■ 마곡사주차장(12:25) →영은암삼거리(12:36) →은적암삼거리(12:38) →205봉(12:52)→355봉(13:05)→활인봉(423m, 13:12/13:23)→샘골고개(13:39)→묘지삼거리(13 : 51) → 나발봉(417m, 13 : 55) → 송림욕등산로 이정표(14 :00)→육각정(14 : 07/ 14 :14)→넓은묘지(14:32)→토굴암(14 : 42) → 영은교(14 : 50)→마곡사(14:52/15:00)→마곡사주차장(15:20)
■ 마곡사 주차장(15:40) ∼ 온양 ∼ 수원(17:30)
8. 산행기
[1] 산행 전
봄도 점점 무르익어 가는 것 같다. 남쪽 지방에는 벚꽃 축제가 절정을 이루고 온 누리에 봄기운이 퍼져 주택가와 관공서 울타리에는 개나리가 활짝 피었고 자목련, 백목련도 꽃망울이 봉긋이 돋아 2.3일 햇볕을 쬐면 모두 개화를 할 것 같다.
4월 8일, 금북정맥 5구간 산행이다. 3월 18일(일) 利川 원적산 산행 후 20여 일만에 가는 정기 산행이다. 원거리 산행 한지도 꾀 오래 된 것 같고 한배 산꾼들을 만나지 못한 것도 한참 되 그동안 近況도 궁금하다.
이번 산행은 정맥 산행 중 가장 짧은 단거리 산행이고 공주 마곡사 태화산 산행이 덤으로 있어 참여 인원도 많을 것으로 생각했는데 다음 카페에 신청 인원을 확인해 보니 평소와 별 변화가 없다. 11명 신청, 그래도 정맥산행에 가장 많은 인원의 참가다.
[2] 금북정맥 5 구간 산행(양곡리 ~ 차령고개)
산행 당일 가볍게 준비(비옷, 물통 2개, 아침, 점심 제공)를 해서 집을 나선 것이 04 : 40분, 택시를 타고 경기도 여권 민원실 앞에 도착(05 : 00). 오늘 산행에 참가할 대원들이 일찌감치 나와 대기하고 있다.
강사장과 산악대장의 차에 分乘하고 이내 출발이다. 동수원 TG를 빠져 나와 고속도로로 올라붙었다. 아침 이른 시간이라 막힘이 없다. 잠시 눈을 감았다 했는데 망향 휴게소다. 휴게소에 내려 우거지 해장국으로 아침 식사를 하고 곧바로 출발이다.
(1) 산행 출발지 양곡리
남천안 TG, 1번 국도 자동차 도로를 따라 『전의』를 지나고 지선으로 접어들어 06 : 35분. 오늘 산행 출발지 양곡2리 마을회관 앞에 도착했다. 정확하게 마루금을 따라 산행을 하게 되면 굳이 들리지 않아도 될 마을인데 탄약창이 마루금을 차지해 버렸기 때문에 찾아 온 마을이다.
전의면 『양곡리』는 일명 『베장골』이라고도 하는데 비록 산중이나 넓게 퍼져서 양지 바른 곳이므로 『베장골 변정』이라 한다. 1914년 행정구역개혁 때 양곡리, 상세곡리(양지말 북동쪽 가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로 골짜기가 가늘고 그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세곡> <세동> <가느실>이라 불렀다고 함) 하세곡리, 양지리를 병합하여 <양지>와 <양곡>의 이름을 따서 『양곡리』라 하였다고 하며 순종 때 학자 류영무(柳榮茂), 보국 조경호(趙慶鎬), 고종때 효자 류봉석(柳鳳錫) 등이 이 마을 출신이라고 한다.
마을회관이며 수령 50년은 훨씬 더 된 회관 앞의 프라타너스며 마을의 전경을 살피고 산행 채비를 하여 산행을 출발 한 것이 06 : 40분. 오늘은 산행 거리가 짧아 한결 마음이 가볍다.
(2) 정맥 길 찾아
마을회관 앞 시멘트 포장도로를 따라 10여 m를 되돌아가다 좌측으로 방향을 틀어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올랐다. 『명산사(충청남도 연기군 전의면 양곡리 410-1, 041 - 868-8444) 』표지판이 보인다. 골짜기 깊은 곳에 자리 잡았는지 절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것으로 보아 최근에 생긴 작은 사찰 같다.
포장길이 끝나는 지점, 정맥 표시기가 드문드문 보이기 시작한다. 밭 가운데를 가로질러 산속으로 접어들었다. 작은 도랑이 흐르고 다락 논은 경작을 하지 않은지가 오래 되었는지 팔뚝 굵기의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고 있고 산비탈에는 군사시설 보호 지역 표지 기둥에 세워져 있다. 아마도 군부대가 들어서면서 경작을 금지시킨 모양이다.
(3) 압실 안부/마루금
얽힌 나무 가지를 헤치고 고개 마루에 오르니 숨통이 트인다. 탄약 부대 철망도 보이고 정맥 표시기며 길도 뚜렷하게 나타난다. 제 길을 찾아 든 모양이다.
07 : 20분, 참호와 묘 1기가 있는 산마루 도착. 마을을 출발하여 약 30여분 산행을 했는데 이마에 땀이 고이고 숨소리도 가쁘다. 산행 대비를 게을리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잠시 가쁜 숨을 고르며 휴식. 휴식도 잠깐, 다시 출발이다.
정맥 길은 소나무 숲 속으로 빠져 든다. 진달래 꽃망울은 모두 개화하여 산비탈과 골, 능선을 가리지 않고 점점이 짙은 분홍 點을 찍어 봄의 흥취를 더해주고 생강나무도 노랗게 꽃을 피워 색의 조화를 돕는다.
(4) 시멘트포장 임도(송전 철탑 봉 분기점)
07 : 35분, 안부(압실안부?)를 지나 5분여를 더 진행하니 시멘트 포장길이 나타나고 2분여를 포장길을 따라 오르니 거대한 송전 철탑이 버티고 있다. 철탑을 지나 임도(송전탑을 설치하기 위해 만들어진 도로)를 따라 능선 마루에 오르니(07 : 50분) 또 하나의 철탑이 있고 정맥 표시기는 우측 소나무 숲 방향으로 매달려 있다. 완만한 소나무 숲, 능선을 따르다 작은 峰을 하나를 오르고 우측으로 방향을 바꾸어 급하게 산봉에 올라(07 : 55분) 잠시 휴식을 가졌다.
(5) 국사봉(國士峰)
08 : 27분, 능선 삼거리 도착, 우측 능선 내림 길을 따르다(08 : 34분) 급하게 峰 하나를 올랐다 내려가니 안부가 나오는데 아마도 이곳이 지도상에 표기 된 『되재』가 되는 것 같다. 다시 급하게 산봉을 치고 올라(08 : 43분) 휴식을 취했다. 오늘은 쉬는 횟수가 잦다. 아마도 시간 여유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참나무 높은 곳에 겨우살이 두 무더기가 매달려 있다. 참 오랜만에 보는 겨우살이다. 요즘은 암 예방에 효과가 있다하여 많은 사람들이 채취를 해 간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우리 대원들도 나무 가지로 팔매질을 해 보았으나 적중이 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오는 도중 가장 높고 가파른 峰을 두 개나 올랐는데 이쯤이 지도상에 표시된 『국사봉(國士峰, 402. 7m)』인가?
국사봉(國士峰)은 공주의 정안면, 천안의 광덕면, 연기의 금사리와 경계를 이루는 곳으로 남쪽을 바라보는 시점에서 좌측은 연기군이 되고, 우측 편은 공주시가 된다. 고려말엽에 어지러운 국운(國運)을 바로 잡기 위해 당시 3정승(三政承)이 국론(國論)을 협의(協議)한 산이라 하여 『국사봉(國士峰)』이라고 命名했다고 한다.
<출처 : 연기군 동면 지명 유래> 前 山行者들에 따르면 峰 頂上에 삼각점과 표지판이 있다고 했는데 그런 흔적이 없으니 좀 더 가야하는 것 같다.
느긋하게 휴식을 갖고 다시 출발해서 숨 가쁘게 봉에 오르니 넓은 헬기장이 나온다(08 : 58분). 지금 오른 봉이 『국사봉』이라 생각했는데 이미 지나친 모양이다. 경유지 자료를 확인해 보니 헬기장 직전에 쉬었던 곳이 427봉이고 그전 삼거리를 지나 힘겹게 올랐던 봉 근처가 『국사봉』이었던 것 같다.
(6) 국수봉 가는 길
헬기장을 지나 다소 급하게 내려와 완만한 능선을 따르다 임도로 내려서고 2, 3분여를 진행하니 송전 철탑이 또 나타난다. 그러고 보니 오늘 산행은 임도와 산길을 넘나들며 점점이 이어진 송전 철탑을 따라 산행을 하고 있다.
임도를 벗어나 작은 봉에 올랐다(09 : 15분). 나무에 매달린『국수봉(382.8m)』표지판이 눈에 띈다. 국수봉 정상 삼거리에서 우측으로 방향을 틀어 15본 가량 진행하니 NO 220 삼각점이 있고(09 : 29분) 길은 호젓한 능선으로 이어지는데 간간히 산새가 우는 소리도 들리고 멀리 차령고개와 연결되었을 자동차 고속화 도로에 차들이 지나가는 모습도 눈에 들어온다. 오늘 산행의 목표지점 『차령고개』도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
(7) 밤나무 단지를 지나
09 : 35분, 밤나무 단지, 09 : 40분, 밤나무 단지 내 삼각점 NO 219가 땅에 박혀 있고 나무에는 「삼각점」이란 표지판도 매달아 놓았다.
밤나무 단지를 벗어나 약 3분여를 진행하면 118번 송전 철탑이 나타난다(09 : 43분). 급한 오름 길, 능선을 따르다 다시 임도로 내려 섰다(10 : 00분). 많은 정맥 표시기가 매달려 있고 진행 방향 앞쪽으로 다소 높은 봉이 가로막고 있는데 봉만 넘어 내려가면 오늘 정맥 산행도 끝날 것 같다. 마지막 힘을 내자고 생각했는데 앞서가는 강동규, 김미환, 산악대장 산으로 접어들지 않고 임도를 따라 계속 진행을 한다.
(8) 임도를 따라 차령고개로
10 : 10분, 공동묘지 앞을 지나고 5분여를 더 임도를 따라 내려가니 산자락 끝 임도와 만나는 지점에 정맥 표시기가 여러 개 나무에 매달려 있다. 결국 마루금을 약간 벗어난 산행을 한 것이다.
10 : 15분, 116번 송전 철탑 봉 삼거리에 도착했다. 강사장, 산악대장, 차를 가져오기 위해 먼저 내려가고 후미 팀을 기다리며 휴식. 잠시 후 후미 팀을 만나 임도를 버리고 표시기가 매달린 정맥 길로 접어들었다. 산 속 여기저기에 많은 생활 쓰레기가 버려져 있다. 참 고약한 심보다. 돈 좀 아끼자고 몰래 버린 쓰레기만큼이나 그 심보가 지저분하게 느껴진다.
10 : 25분, 공주와 천안의 市界가 되는 차령휴게소에 내려섰다. 공주(좌)와 천안(우)임을 표시한 대형 표지판이 세워져 있고 휴게소 광장에는 건축 자재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자동차 전용 도로가 생기며 차령 터널이 뚫리고 차들의 왕래가 뜸해져 업종 변경을 위한 공사를 하고 있는 중이라 영업은 하지 않고 있다. 고개 휴게소에 도착하면 도토리묵과 파전으로 안주해서 막걸리 한 잔을 했으면 했는데 아쉽다.
(9) 차령고개
차가 도착되는 동안 공사 중인 휴게소에 들려 공주 관공 안내도를 살펴보았다. 『차령고개』에 대한 안내도 적혀 있는데 이 고개는 공주에서 천안으로 통하는 市界로서 호남지방에서 한양으로 넘나드는 三南大路의 가장 큰 고개로 이름나 있다. 근래에 와서 강진에서 천안까지 국도 23호선 중에서 가장 높은 고개로 알려져 있다.
산의 높이가 360m나 되고 고개 양쪽의 산봉우리가 쌍으로 솟아 있어 옛날에는 이 고개를 雙領고개라 불렀다.라고 설명해 놓았고 안내도 옆으로 작은 게시판을 세워 『차령고개』에 대한 상세 설명을 해 놓은 것 같은데 게시물이 찢겨져 나가 내용을 알 수가 없다.
차령고개는 “인저원 북동쪽에 있으며 공주에서 천안으로 통하는 큰 고개로써 옛날엔 한양을 드나드는 삼남대로의 한 고개로 남도 사람들이 아끼는 귀중한 고개였고 많은 애환이 서리기도 한 고개다. 차령 또는 「원터고개」라고도 하는데 『차령고개』는 원래 높은 고개라는 뜻을 가진 『수리고개』로 「수리」는 수레로 바뀌고, 수레의 한자어인 차령(車嶺)으로 바뀌었을 것이다”라고 <관광 공주 역사문화 탐방> 자료에 소개해 놓고 있다.
또 <미래신문, 정현채의 문화읽기>에는 “옛날부터 고개와 나루터는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고 머무는 자리에는 이야기와 만남의 인연이 있다. 또한 물자가 교류되는 도착점과 시발점이 되는 곳이기도 하다. 이 도령(이몽룡)이 춘향이 만나는 꿈을 꾸며 하루 밤을 머물고 갖던 공주 정안면의 차령고개는 수십 년 동안 개발이 거듭되면서 이제는 산 중앙을 관통하는 터널이 개통되어 차량들은 고개를 넘어갈 필요가 없어지고 몇 분이면 정안면을 지나가는 길이 되었다.”고 소개를 하고 있다.
차령고개에 대한 내용을 메모하고 돌아서는데 난데없이 아주머니 한 분이 나타나 “허락도 없이 공사장에 들어왔다”고 성화가 대단하다. 잠시 쉬고 있던 대원들도 얼떨결에 당하는 일이라 당황하는 모습이다. 차근차근 이야기하고 내보내면 될 것을 물건이나 집어가는 사람으로 몰아붙이는 심성이 참 고약하다.
(10) 마곡사(麻谷寺) 가는 길
휴게소를 빠져나오는데, 대장 전화. 공주 방향으로 걸어내려 오란다. 10여분을 걸어갔는데도 지정해 준 위치가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확인해 보니 천안으로 가고 있다. 쉽게 간다는 것이 더 멀고 힘들게 만들고 말았다. 건성으로 생각하고 행동한 代價다.
차령고개를 뒤로하고 봄이면 왕 벚꽃, 산수유, 자목련 등이 꽃을 피우는 봄이 가장 아름답다 하여 옛 부터 봄은 마곡사 가을은 갑사라는 뜻의 '춘마곡 추갑사(春麻谷 秋甲寺)'라는 太華山 자락에 자리 잡은『麻谷寺』로 향했다.
(11) 마곡사 귀빈 식당
차를 타고 깜빡 졸았다 싶은데 마곡사 입구 주차장 도착이다. 11 : 30분, 『태화산』산행(2시간 40분소요)을 하고 느긋하게 점심시간을 가져도 될듯한데 모두 배가 출출한 모양이다. 「金剛山도 食後景」라, 주차장에 인접해 있는 『귀빈식당』으로 안내를 받아 자리를 잡았다. 고향 땅(公州) 산행을 한다고 하여 오늘 점심은 산악대장이 제공하겠다고 한다. 산행 안내에 점심까지 제공한다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더하여 태화산 산행 후 酒案床은 윤사장님이 차지하겠단다. 오늘 산행은 橫財 중 橫財다.
우선 급한 대로 동동주 두 동이에 빈대 煎, 메밀 煎을 안주하여 ‘위하여’로 잔을 부딪치니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酒案이 금세 동난다. 식당 안주인도 신명이 났는지 빈 접시를 이내 갈아주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주문하란다.
된장국과 더덕구이에 산채비빔밥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니 눈까풀이 千斤萬斤이다.
[3] 덤 산행, 太華山
(1) 태화산 가는 길목
오후 산행 희망자를 조사해 보니 네 사람(김재윤, 김미환--->온천욕, 여자 두 분--->나물 뜯기)이 불참이다.
식당을 나와 배낭을 챙기고 주차장에 세워 놓은 『태화산』등산 안내도를 확인해 보았다.
○ 제1코스 : 은적암→활인봉→나발봉→토굴암→유물관(5.0km ---> 2시간 30분 소요)
○ 제2코스 : 은적암 입구 → 활인봉 → 샘골 → 대웅전 (4.0km ---> 2시간 소요)
○ 제3코스 : 은적암 입구 → 백련암 → 대웅전 (2.5km - 1시간 30분 소요)
오늘 우리는 제1코스를 산행하는 것으로 계획 돼 있다. 점심 때 반주로 먹은 동동주가 기운을 돋워 줄지 모르겠다.
배낭을 메고 川邊을 따라 난 길을 쉬엄쉬엄 걸어가니 봄나물로 廛(전 : 물건을 늘어놓고 파는 가게)을 차린 할머니가 가는 길을 막는다. 권에 못 이겨 달래 한 줌 사서 배낭에 넣고 마곡사 매표소(입장료 대인 2000원)로 향했다.
매표소를 통과하여 좀더 진행하니 『은적암』 입구가 나오고 입구에서 몇 발작을 더 가니 등산로로 진입하게 된다.
(2) 활인봉(活人峰)
12 : 40분, 등산로 진입 활인봉을 향해 비탈진 산길로 올라붙었다. 봄날이라지만 한 낮의 태양 열기가 만만치 않다. 금세 이마에 땀이 고이고 점심 때 반주로 한 동동주의 취기가 온 몸으로 퍼져 다리에 힘이 빠지고 맥박이 평소보다 배로 빨리 뛴다. 德 보자고 한 잔 한 술이 毒이 될 줄이야. 더하여 食貪을 부려 산채를 덤으로, 덤으로 더 보탠 것도 부담이 되고 ---
지팡이에 의지해 힘겹게 산 중턱을 오르니(13 : 00분) 다소 완만하게 길이 이어지는 곳에 의자가 있다. 쉬어가고 싶었지만 선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멀찌감치 가고 있다. 급하게 숨을 몰아쉬며 선두를 따라 4분여를 더 진행하니 갈림 길이 나오고 활인봉(좌) 460m, 백련암 1km(우)라 표시된 이정표가 세워져 있다. 메모를 핑계 삼아 잠시 숨을 돌리고 ----
점점 경사 각도가 심해지고 비래하여 땀 닦는 回數도 잦아진다. 13 : 15분, 『활인봉』정상, 亭子. 10여명의 산행 인들이 모여 점심 식사를 하고 있다. 좀도 진행하여 峰 그늘진 곳에 배낭을 내려놓고 물 몇 모금을 들이-키니 가쁜 숨이 진정이 된다. 이리 숨 가쁘고 허벅지가 나른할 줄 알았으면 溫泉 浴이나 할 걸 공연히 傲氣를 부린 것 같다.
『活人峰』, 해발 423m로 「생명수 샘터(샘골약수터)에서 생명수를 먹게 되면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이정표 표지판 설명).
전설대로면 오늘 산행 중 죽을 일은 없겠다. 잠시 호흡 조절과 흐느적거리는 다리에 힘을 모으고 다시 출발이다.
(3) 나발봉과 육각정
앞서가는 장부장, 봄의 모습을 연신 카메라에 담고 있다. 관심이 달라서인가? 낙엽에 뭍인 작은 꽃 하나도 찾아내 사진으로 담아내는 정성이 놀랍다. 오늘 산행을 함께한 한배 산꾼들의 一擧手一投足은 어떤 모습으로 카메라에 담겼을지 궁금해진다.
13 : 39분, 나발봉 / 샘골, 대웅전 분기점에 도착했다. 이정표에 「나발봉 1.1km(1코스), 샘골, 대웅전 2km(2코스)」라 표시되 있다. 산행이 힘들면 이 지점에서 下山을 하면 되는 것 같다.
이미 선두는 분기 지점을 벗으나 급경사 산봉을 공략하고 있어 하산의 유혹을 접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갑자기 빗방울이 떨어진다. 雨天은 예상도 하지 않았는데 ---. 함께 가던 대원들, 급한 대로 덮개를 꺼내 배낭을 덮고, 계속 산행이다. 하늘 상태나 바람의 속도로 보아 많은 비가 오지는 않을 것 같다.
계속되는 오름 길, 시간이 경과했기 때문인가. 몸놀림이 다소 부드러워 진다. 이 상태면 무리 없이 계획대로 산행을 마칠 수 있을 것 같다.
14 : 00시, 육각정이 있는 봉에 도착했다. 이 봉이 『나발봉인』인가 했는데 395봉이란다. 395봉 오기 전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6,7분 더 가 있는 산인데 산악대장만 급히 다녀오고 우리는 직진하여 395봉에 오른 것이다.
나발봉 이름이 생소하다. 무슨 연유로 나발봉이라 했는가?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나발봉』아래는 골이 깊어 도적들이 隱居해 살았다고 한다. 도적들은 나발봉 정상에 파수꾼을 세워 무슨 일이 있으면 나발을 불어 요새(마을)에 전하는 조직적인 활동하였기 때문에 관군도 토벌하기가 여의치 않았다고 한다. 나발봉 정상에서 도적의 보초가 나발을 불어 신호를 했다고 하여 『나발봉(417m)』이란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395봉 정상에는『활인봉』에서와 같은 정자(육각정)와 쉴 수 있는 의자가 마련 돼 있어 배낭을 내리고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고 조망을 하며 느긋하게 휴식을 가졌다. 가늘게 뿌리던 비도 그치고 날씨도 제 모습을 찾았다. 이제 하산만 하면 된다.
(4) 하산 길
정상을 벗어나면서 급경사 내림 길로 이어진다. 10여분을 급하게 내려오다 우측 사면으로 방향을 틀어 7,8분을 가니 『토굴암』직전 사거리가 나오고 이정표도 세워져 있다. 「토굴암 20m, 대웅전 700m」라 표시되 있다. 작은 암자 하나 있는데 그 뒤로 굴속에 부처님을 모셔 두었는가? 20m 거리라 암자의 모습을 살피고 온데도 무리가 없을 것 같은데 암자로 발길을 옮겨 놓는 대원이 없다. 산악대장만 급히 다녀오고 대웅전을 향해 하산이다.
(5) 마곡사(麻谷寺)
① 마곡사 창건
14 : 50분, 마곡사 도착. 생각 보다 규모가 큰 절이다.
태화산 기슭아래 자리 잡고 있는 『마곡사(麻谷寺)』는 신라 선덕여왕 9년(640)에 자장율사가 창건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조계종 25개 본사 중 제6교구 본사로서 충남의 대표적인 사찰이다.
자장율사가 당나라에서 불법을 공부하던 중 범승으로 화신한 문수보살을 친견하였는데, 문수보살이 가사 한 벌과 다른 유물을 주면서 '이 유물은 석가모니의 유물이니 본국으로 돌아가서 절을 짓고 탑을 세워 그 안에 봉안하라'고 했다. 자장율사가 신라로 돌아와 세운 7대 사찰 중 하나가 『마곡사(麻谷寺)』라고 한다.
② 마곡사의 명칭과 전설
마곡사(麻谷寺)란 이름은 자장율사가 사찰을 개산(開山)하고 보철화상(普徹和尙)이 설법할 때 그 설법을 들으려 몰려드는 사람들이 마치 삼(麻)밭에 삼이 선 것과 같이 골짜기(谷)를 가득 메웠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특히 이 절의 기둥들은 둘레가 2m가 넘는 싸리나무로 되어 있는데 모두 반들반들하다. 그 이유는 ‘사람이 죽어 염라대왕 앞으로 가면 이 기둥을 안아 봤느냐고 물어보는데 그런 일이 없다면 지옥으로 보내고, 안아본 사람은 극락 세계로 보낸다.’는 전설이 있어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몇 번이고 이 기둥을 안아 보았기 때문이란다(믿거나 말거나).
③ 마곡사의 地形
그리고 마곡사 자리는 주변 산과 물의 형태가 태극형이라 하여 '산태극 물태극(山太極 水太極)'으로 불리는데, '정감록', '택리지' 등에서도 기근이나 전란의 염려가 없는 삼재팔난불입(三災八難不入)의 십승지지(十勝之地) 중 한 곳으로 꼽히고 있다.
실제로 마곡사를 가로지르는 태극천의 모양이 활처럼 휘어져 태극 모양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으며, 마곡사는 임란과 병란을 거치면서도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고 한다.
④ 마곡사의 주요 문화재
마곡사의 주요문화재로는 「마곡사5층석탑(보물 799호)를 비롯하여 마곡사영산전(보물 800호) 마곡사대웅보전(보물 801호), 대광보전(보물 802호)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1(보물 269호), 감지은니묘법연화경 권6(보물 270호), 천왕문(문화재자료 62호), 응진전(문화재자료 65호) 명부전(문화재자료 64호), 동제은입향로(문화재자료 20호) 해탈문(문화재자료 66호), 동종(문화재자료 71호) 심검당 및 고방(문화재자료 135호), 국사당(문화재자료 63호) 세조대왕가마(문화재자료 14호), 괘불(문화재자료 345호)」이 보존 되어 있다.
<출처> 한국 여행 정보은행
(http://tour123.co.kr/tour/area/cn/sachal/magoksa.htm)
(6) 장승 공원
마곡사 境內를 둘러보고 解脫門, 天王門을 빠져 나와 乘車, 마곡사 입구 장승 공원에 잠시 내려 여러 장승상을 둘러보았다.
장승에는 절 입구에 세워 절을 지키는 護法像의 구실을 하는 것과 큰길가에 세워 이정표 구실을 하는 것이 있는데 이곳에는 관광객 유치를 위해 천태만상의 장승을 집성시켜 놓은 곳이다. 본래의 기능과는 거리가 먼 상업성만 앞세운 것이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4] 산행 마무리
장승 공원 관람을 끝으로 오늘 산행을 마무리 했다. 가장 단거리, 가장 짧은 시간에 금북정맥 5구간 산행을 하고서 덤으로 마곡사 태화산을 더 보탠 산행으로 결국 걸을 것 다 걷고 채울 시간 다 채운 산행이다. 생각해보면 이런 복합 산행도 색다른 묘미가 있는 듯하다.
2007. 4. 13
▲▲▲ 참고 자료 ▲▲▲
<참고자료 1> 양곡리
◐ 양곡리 : 양지마른 곳에 위치한 곳이라 하여 <양지>이라 불렀는데 1914년 행정구역개혁때 양곡리, 상세곡리, 하섹구리, 양지리를 병합하여 <양지>와 <양곡>의 이름을 따서 양곡리라 하였다.
◐ 세곡 : <양지말>북동쪽 가는 골짜기에 있는 마을이다. 골짜기가 가늘고 그 곳에 마을이 있다 하여 <세곡> <세동> <가느실>이라 부른다 한다. 또한 <세곡>아래 마을 <하세곡>, 세곡 위 마을을 <위세곡>이라 부른다.
◐ 주막뜸 : 양곡리에 있는 마을이다. 양곡리 길가에 있는 마을로 주막이 있어서 <주막뜸>이라 불렀다 한다.
◐ 양지 : 양곡리에 있는 마을이다. 양곡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인데, 양지바른 곳에 있다 하여 <양지말>이라 부른다 한다. 또한 양지말 위쪽에 있는 마을을 <위양지말>이라 부르는데 <양장리>가 아니라 양지리 위쪽에 있다 하여 <위양지말>이라 부른다 한다.
◐ 압곡(鴨谷) : <양지촌>서남쪽 골자기에 있는 마을이다. 큰 바위가 있고 골짜기 마을로서 큰 바위가 있다 하여 <암실> <압실> <암곡>이라 부른다 한다.
◐ 봉두미 : 양곡리 <가느실>아래에 있는 마을이다. <봉두산>아래에 위치하는데 마을 뒷산의 모양이 봉의 머리 모양이기때문에 <봉두미>라 부른다 한다.
<참고자료 2> 車領고개와 雙領山
(차령고개에 있는 표지판 내용으로 공사 관계로 망실됨)
이곳 공주시 정안면 인풍리에 위치한 차령(車嶺, 해발 200m)고개는 백두대간 13정맥중 하나인 금북정맥(錦北正脈) 중간위치에 자리잡고 있고 차령 이남은 충청지방의 동남부에 해당하며 차령이북은 충청서북부지방으로 과거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호남지방 사람들이 개경과 한양에 이르는 관문역할을 한 유서 깊은 고개이고, 쌍령산을 주봉으로 하여 정상에는 봉수(봉화대)와 인근에 십리바위가 자리잡고 있다.
십리바위는 일명 남근석으로 길이가 십리 이상 될 정도로 큰 바위였으나 풍화작용과 벼락을 맞아서 지금은 작아졌고(가로 약 5m, 세로 약 8m. 둘레 약 10m) 바위에는 장수발자국이 남아 있다고 전하여 지고 있다.
쌍령산(해발 345m) 봉수(雙嶺山 烽燧)는 조선시대 초기에 설치된 봉수대로 둘레가 60m, 면적은 264㎡이고, 남쪽 공주의 고등(정안면 북계리와 의당면 두만리 경계에 위치한 산) 봉수에서 연락을 받아 천안의 대학산 봉수로 전달하던 곳이다. 일명 팔풍정으로 일컬어지는 이 봉수대에 오르면 공주와 천안시까지 60리길의 아름다운 전경이 펼쳐진다. 2001. 7. 25. 공주시장
등산코스 : 차령휴게소→헬기장→ 쌍령산→봉화대→휴게소(왕복 3km : 1시간 10분 소요)>
2001. 7. 25, 공주시장
<참고자료 3> 쌍령산(雙領山)〔산〕
ㆍ 지 명 쌍령산(雙領山)〔산〕
ㆍ 내 용
[위치]공주시 정안면 인풍리와 천안시 광덕면 원덕리 무학리에 걸처있는 산.
[유래]산 높이는 360m 되는 산인데 높은 고개가 쌍으로 되어 있고 조선시대 때 공주 이남
에 있는 여러 고을의 조세와 진상물품이 모두 이 고개를 통하여 서울과 아산의 貢 稅浦로 운반되었다. 조선시대 때 烽燧臺가 있어서 남쪽으로는 공주시 고등산 봉수와 북쪽으로는 천안시 대학산 봉수에 응하였던 곳이다.
조선시대 문종 때 의적 안수가 이 곳을 지나는 조세와 봉물을 빼앗아 가난한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며 백성들의 호응을 크게 받았으나 끝내는 유의신에게 잡혀 죽으며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 한마디 남긴 말은 "벼슬아치가 딱한게 아니라 벼슬아치에 따르는 그 벼슬아치가 딱
하다."라는 苦言은 그를 의적이라고 호칭하게 하는 좋은 苦言이다. 조선시대 때는 한양에 오르는 큰 길이었고 敬天의 상여가 지날 때 양반의 교자도 멈추고 상여에게 예를 올려야 했던 고개가 쌍령고개다.
광덕의 호도나무의 地質을 만들어 주기도 하고 중들이 이곳에서만 호랑이를 두려워했다 하는데 이곳엔 중만 해치는 호랑이가 있었다 한다. 가파른 쌍 고개가 있다 해서 쌍령산이라 부른다.
<출처 : 관광공주, 역사문화 탐방>
<참고자료 4> 태화산
공주에서도 태화산을 가자하면 태화산이 어디에 있는지 조차 모를 정도로 산보다는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마곡사로 이름이 나 있다. 마곡사를 둘러싸고 빼옥히 들어찬 송림은 하늘을 가리고 그밑으로 흐르는 계곡물은 맑디맑은 청수를 마곡사 한 복판으로 흘러내려간다.
이 절의 기둥들은 둘레가 2m가 넘는 싸리나무로 되어 있는데 모두 반들반들하다. 그 이유는 사람이 죽어 염라대왕 앞으로 가면 이 기둥을 안아 봤느냐고 물어보는데 그런 일이 없다면 지옥으로 보내고, 안아본 사람은 극락 세계로 보낸다는 전설이 있어 이곳을 찾는 모든 사람들은 몇번이고 이 기둥을 안아 보았기 때문이다.
적송의 사이를 따라 마곡사를 둘러싸고 있는 태화산의 능선에 개설된 등산로의 길이는 무려 5km에 달하며 약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마곡사 대웅전앞 은적암 입구를 기점으로 하여 해발 423m의 활인봉, 417m의 나발봉을 따라 마곡사 경내를 기고 한바퀴 도는 이 등산로는 경사가 완만하여 어린이와 노인등 노약자가 등산하기에도 적당하다.
활인봉에는 죽어가는 사람도 살린다는 생명수 샘터가 위치해 있으며 사람에게 기와 건강을 유지시켜 주는 송림욕 중에서도 가장 으뜸이 된다는 적송림은 등산객들에게 건강나무로서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참고자료 5> 마곡사
공주시 사곡면 운암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공주의 서북방 약 24km거리에 해당한다. 이곳은 태화산의 지맥에 의해 둘러 쌓인 곳으로 예실의 수덕사와 더불어 충남지역 사찰의 본사로서 지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이 마곡사의 일지는 계곡이 깊기 때문에 택리지, 정감록등의 지리서나 비기에서도 병란(兵亂)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로 꼽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절의 이름은 신라 보철화상(普徹和尙)이 설법(說法) 전도할 때 모인 신도가 삼밭(麻田)의 삼[麻]대 같다고 하여 마곡사(麻谷寺)라 이름 지은 것이라 한다.
마곡사가 충남에서는 훌륭한 절집들은 한꺼번에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으로 우리나라 사찰의 28본산의 하나이며 충남의 모든 사찰을 관할하는 큰 절이다.
절에는 전해오는 이 얘기로는 이 절은 신라 선덕여왕 12년(642년)에 자장율사(慈藏律師)가 창건하여 고려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수하고 그후 범일, 도선, 각순대사가 중수한 내용이 전한다. 조선시대에는 세조가 행행하여 "영실전"(靈山殿)이란 3자를 특별히 하사하였다는 내용이 전하기도 한다. 이 사찰은 임진, 병자의 양란을 피할 수 있었기 때문에 목조건축물이 풍부하다.
마곡사의 연혁 및 건물의 역사를 밝혀 주는 태화산마곡사사적입안과 겸사입안원문의 내용이 전하고 있기도 한다. 그러나 그 처음 연원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 것인지는 확인되고 있지 않지만 전하는 연대에 문제가 있는 것은 어쩔 수 없다.
마곡사의 가람배치는 경내를 가로 지르는 계곡을 경계로 하여 양분되고 있다. 계곡사이에 흐르는 천류를 경계로 남측에는 사찰의 입구에 해당하는 천왕문, 해탈문이 있고, 계곡냇물의 다리를 건너 5층석탑, 대응전이 자리하는데 석탑의 좌·우로 종무소, 요사체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한편 입구에는 천왕문 해탈문이 서쪽에는 영산전을 비롯한 명부전 국사당이 있다. 한편 마곡사는 경내의 諸建物이외에 많은 부속암자가 사찰의 주변에 산재하고 있다.
마곡사의 경내에는 대웅전격(大雄殿格)인 대웅보전(大雄寶殿)과 대광보전(大光寶殿)이 있는데 대광보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단층 다포팔작집으로 건축의 화려함에 치중한 건물이다. 전내에는 주존물인 비로자나불(昆盧那佛)이 지원민의 변형으로 왼쪽엄지가 오른손안에 놓이고 오른손 검지손가락이 왼손 검지를 감싼채 대광보전의 정면이 아닌 동쪽방향으로 향하고 있으며 후불화(後佛畵)로는 영산회상도가 갖추어져 있다. 대웅보전은 현재 보수중이어서 내부의 자세한 형상은 알 수가 없으나 산경사면에 1.5m높이의 기단을 조성하고 정면5칸 측면 4칸인 다포팔작의 중층건물이다.
한편 대광보전의 우측에는 응진전이 있는데 중앙에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석가모니불이 안치되어 있고 좌측에는 선정인을 한 가약과 우측에는 현존불을 협시하고 있는데 이 응진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이 다포팔작집이다. 더불어 대광보전의 기단아래에는 쾌불지주석이 2개 있는데 1m높이에 폭 62m로 중앙에 지름 20cm의 지주공이 뚫려 있으며 이 지주석의 전면즉 대광보전의 앞에 다보탑이라 불리는 5층석탑이 위치하고 있다. 입구주변의 유적중 중심을 이루는 것은 영산전인데 이 건물은 조선전기의 건축물로 영산전의 현판에는 세조대왕 어필이라고 세필로 종서하고 있다.
이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맞배집으로 익공양식이 가미된 주심포계통이다. 전내에는 석가모니불을 본존불로 하고 좌우에 본존보다 작은 석존뷸울 모시고 있다.
국사당(國師當)에는 자강율사, 보조국사, 범일국사, 도전국사의 영정이 모셔져 있는데 우측의 벽면에는 태화산 산신이 모셔져 있는바 이 영정들은 최근에 이루어진 것이라 한다.
기타 건축물로서는 천왕문과 해탈문 그리고 여성루가 있는데 문에는 사천왕상 및 금강역사상이 배치되어 있고 여성루는 강당에 해당하는 건물이다. 마곡사에는 이들 건축물이외에도 종과 불화가 있는데 이중 불화는 이곳에 있지 않은 것으로 전한다.
○ 천왕문 [문화재자료 제62호]
입구에서 해탈문을 거쳐 두 번통과하는 문이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해탈문과 같은 규모이나 해탈문이 팔작집인데 비하여 맞배집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중앙 칸에는 동서남북의 불법을 수호하는 호법신인, 사천왕상을 안치 하였다. 건립 연대는 미상이나 내부에 걸린 연액에는 1910년에 중수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 오층석탑 [보물 제799호]
이 오층서탑의 최정상부에는 라부식 보탑과 유사한 청동제의 장식물로된 상륜부가 있어 특이한 형태를 보이는 탑이다. 2층탑신부 4면에는 4방불인 아촉불·보상불·아미타불·묘성불이 조각되어 있다. 원나라 영향을 받은 고려 말의 작품으로 임진왜란때 무너져 그 속의 귀중품은 이미 없어졌다.
○ 해탈문 [문화재자료 제 66호]
마곡사의 정문으로 이문을 통과하면 속세에서 벗어나 법계에 들게 되고 해탈하고야 말겠다는 마음을 갖게 된다고 하여 해탈문이라 한다. 건물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집으로 정면의 중앙 칸을 개방하여 통로로 사용하고 양쪽 협칸에는 흙으로 구워만든 금강 역사상 2구씩을 안치 하였다.
○ 김구선생의 은거지
이곳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이며 우리민족 독립운동의 지도자인 백범 김구(1836-1949)선생이 1896년 명성황후 민씨시해에 대한 분노로 안악군 치하포에서 일본군 특무장교를 처단 후 은거하여 도를 닦던 곳이다. 조국 광복 후 선생이 이곳을 찾아 대웅전 주련에 却來觀座間猶如夢中事(돌아와 세상을 보니 흡사 꿈속의 일 같구나)를 보시고 더욱 감개무량하여 그 때를 회상하며 향나무 한 그루를 심어 놓았다.
○ 대광보전 [보물 제7802호]
대광보전은 비로자나불을 모신 곳이다. 비로자나르는 광명이 어디에나 두루 비친다는 뜻을 지며 이불상이 봉안된 불전을 대광명전 또는 대적광전 등으로도 부른다. 현재의 건물은 조선 순조13년(1813)에 다시지은 덧으로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이다. 기둥위 추녀 밑으로는 처마의 하중을 받고 또 장식도 겸해 짜맞춘 포가 많이 배치된다. 포형식은 팔작지붕이다. 내부에는 불단을 서쪽에 배치시켜 비로자나불을 동향으로 모셔져있다. 불상 위의 섬세한 조작 단집과 기둥위의 용머리 조각, 천장의 연화봉과 문학문 단청등 장식적 특성을 잘 살린 조선후기 건축의 걸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 대웅보전 [보물 제801호]
대웅전은 석가부처님을 봉안한 곳이다. "법화경"에 석가 부처님을 큰 영웅 즉 대웅이라 한 것에서 유래한 석가 부처님이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현재 전각안에는 석가·약사·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이 봉안되어 있다. 건물은 정면 5칸, 측면 4칸의 중층 팔작집이다. 기단은 막돌 허튼층 쌓기이며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웠다. 기둥위 처마 밑으로는 처마 하중을 받으며 장식도 겸해 누무쪽을 짜맞춘 포를 여러 개 설치한 다포식으로 조선후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웅보전의 현판은 신라의 명필 김생의 글씨라고 전해 온다. 임진 왜란 때 병화로 소실된 것을 조선효종 2년 (1651)에 각순대사와 당시의 공주목사가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응진전 [문화재자료 제65호]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을 모신 전각을 응진전이라고 한다. 이건물은 조선 철종3년(1852)에 중수하였다. 낮은 자연석 기단 위에 자연석 주초를 사용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로 추녀 밑에는 처마의 하중을 받고 장식도 겸해 나무쪽을 짜맞춘 도구를 여러개 배치한 다포계의 팔작집이다. 이건물은 석가모니를 주불로 봉안하고 좌우 불단에는 석가의 제자인 나한상을 봉안하였다.
○ 영산전(靈山殿)[보물 제 800호]
일명 천불전(千佛殿)으로 불러 오기도 하는 이 영산전은 조선 효종 2년(1651) 각순대사(覺淳大師)가 중수한 바 있는 전각으로 마곡사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이다.
<출처> 공주 이야기(kongjuw2.kongju-e.ac.kr/~kongju/iyagi_43.htm )
첫댓글 ㅋㅋ. 진짜 고약한 할머니셨습니다. 맛있는 메밀전, 빈대전, 그집 아주머니들의 친절이 아니었으면 상처안고 충청도를 떠났을것 같습니다. 다음번에는 새벽에 그 할머니 깨워서 그곳에 주차해도 되는지 묻어본 후 하도록 하지요. 말을 하고 들어오면 춤을 추고 놀아도 된다던 말 기억납니다.ㅎㅎ. 산행기 즐거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