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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는 말 에베소서5:1-4
얼마전 우리 교단 장로회연합회임원수련회 강사로 갔다가 사회적으로 휼륭하신 여러 장로님들과 함께 식사와 차를 나누면서 귀한 간증을 들으면서 감사할 조건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여러 장로님들과 한 식탁에서 식사하는데 한 장로님이 식사하는 것을 보니까 식사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노동하는 듯이 식사를 하는거에요. 저는 속으로 “남자가 식사하는게 뭐 저라나!”했어요. 식사를 마치고 차를 나누면서 그 장로님께 여쭈어 보았지요. “장로님! 아까 식사하실 때 보니깐 식사를 너무 힘들게 하식던에요?”하니까 장로님 하시는 말씀이 “예! 제가 밥한 번 신나게 마음껏 먹는 게 평생의 소원이랍니다.”하시더니 잠시후 “제가 위를 거의다 잘라냈습니다.”그 순간 저는 조금 전 식사를 마음껏 신나게 먹을 수 있었으니 얼마나 감사한가!“하는 마음과 장로님께서 저의 식사하는 것을 얼마나 부러워하셨을까!를 생각하니 또한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더니 옆에서 듣고계시던 한 장로님께서 “목사님! 감사할 것이 그뿐이 아니예요”하시더니 말문을 여시더군요."목사님! 저는 이런 기도를 했던 적이 있었어요 하나님! 저 죽기 전에 소변이라도 한 번 시원하게 보게해달라고요! 지금도 하루에 두번씩이나 신장투석을 해야하니까요!" 신장과 방광의 질병으로 소변한 번 시원하게 보기를 소원하시는 장로님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들으면서 제 입술에서는 "아버지! 날마다 언제라도 시원하게 소변볼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가 저절로 터져나오더군요. 그렇게해서 간증의 스토리는 계속되었습니다. 또 다른 장로님 한 분은 "목사님! 감사할 거리 하나를 얘기할까요""좋지요! 장로님!"그랬더니 " 목사님! 저는 직장암으로 장을 잘라냈지요. 그후로 변을 보는게 그렇게 힘이들고 대변 한 번 시원하게 보는게 소원이랍니다. 그래도 감사하지요. 죽지않고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요..." 그래 저는 다시 한번 큰소리로 "하나님 아버지! 몽땅 감사해요!! 언제라도 시원하게 대변도 잘 볼 수 있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보기에는 건강해 보여도 육체의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고 살아가면서도 감사할 줄 아는 장로님들의 모습에서 저는 귀한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감사가 축복이구나!” 그렇습니다. 우리는 너무나도 엄청난 감사할 환경과 조건을 갖고 있으면서도 감사할 줄 모르고 살아온 감사불감증환자였어요. 내게 있는 많은 것으로는 오히려 감사를 잊어버리고 내게 없는 것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하지는 않았었나요? 이제 우리의 말을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해야겠어요!!! 우리의 체질을 감사체질로 바꾸어야겠습니다. 노래는 불러질때 노래가 되고 종은 울려질때 종이 되고 축복은 감사할때 축복이 된다는 것을 우리는 삶에서 체험하며 살아가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아닙니까?
어떤 부인이 목사님을 찾아와 상담을 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사사건건 책망하고 자신을 못마땅하게 여겨 살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은 “가서 기도하십시요. 하나님이 해결해 주실 것입니다” 타일러 보냈습니다. 얼마 후 이 부인이 다시 찾아 왔습니다. “목사님 말씀대로 기도했더니 시어머니와의 사이가 더 악화되었습니다.” “어떻게 기도했습니까?” “그 못된 시어머니 마음을 고쳐달라고 기도했지요.” “아닙니다. 그건 기도가 아니라 정죄하는 겁니다. 감사하십시요. 축복하십시요. 고칠 것이 있으면 나를 고쳐 달라”고 기도하십시요. 그후 어떻게 되었을까요? 좋아졌지요.
아무튼 우리는 매일 같이 감사하며 살수도 있고 불평하며 살수도 있습니다. 세상에 불평거리를 찾기로 말하면 끝이 없고 한이 없지요. 여하에 상관없이 당신은 감사하는 신앙인이 될 수도 있고 불평분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요즘 세대를 일컬어 삼무시대라! 무감동! 무관심! 무감사!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 중에 말세의 민심을 설명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2절을 봅시다.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배반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마지막 때가 되면 사람들이 감사하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사람이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릴 때 개인도 사회도 서로간에 시비와 불신, 불평과 불만만 쌓여 갈 뿐입니다.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은 에릭 프롬의 말처럼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문제?입니다.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요, 믿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어리석어서 환경이 좋아지면 감사하는 마음이 저절로 일어나리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형편과 조건이 좋아졌다고 감사하는 마음이 늘어나는 것은 아닙니다. 고통이 없는 사람, 문제가 없는 가정, 상처가 없는 사회가 역사상 어디에 있었습니까?
정채봉 시인의 말처럼 “상처없는 새가 어디 있으랴” 환경 좋은 사람이 감사하며 사는 게 아니고 믿음 좋은 사람이 감사하며 사는 것입니다.
당신의 마음속에서 감사하는 마음을 잃어버렸습니까? 그것은 당신의 환경이나 여건이 나빠서가 아닙니다. 당신이 믿음을 잃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앞에 감사할 수 있는 여건을 달라고 기도하기 전에 감사할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감사할 수 있는 인격은 성숙한 인격이요, 감사할 수 있는 마음은 지혜로운 마음입니다.
예수님의 생애에서 큰 기적의 사건을 우리는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죽은 지 사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신 것이요, 다른 하나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입니다. 무덤에서 나사로를 살리신 기적은 부활의 모형이라고 말합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열두 광주리를 남기신 기적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모형이라고 말합니다.
이 두 가지 사건 속에 흐르고 있는 비밀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감사로 기적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유월절 명절이 가까워올 때 예수님께서 수많은 무리들이 배고파하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시고 기적을 베풀어주셨는데 어린 아이 손에 있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하늘을 향해 축사하시고 앉은 무리에게 나누어줄 때 오천 명이 먹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부스러기가 열두 광주리였습니다.
축사라는 단어 속에는 감사의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생애 전체를 예표하는 감사였습니다. 예수를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한다면 삶을 천국으로 만드는 사람은 감사하는 사람입니다. 감사할 때 삶 전체가 복이 됩니다.
감사는 은혜의 고백입니다. 그래서 은혜라는 말과 감사라는 말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는 사람이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사람은 언제나 그 마음이 감사로 채워져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들어 죽어 무덤 속에 들어간 지 나흘이나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무덤의 돌을 옮기라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전도유망한 제 친구하나가 있었습니다.
그는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행정고시를 패스하고 장차 관직에서 귀하게 쓰임받을 인물로 평가될만큼 인정받는 친구였어요. 그가 정부를 경제기구를 대표해 미국에 출장을 갔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너무 지나친 업무로 쓰러졌고 병원으로 후송되었으나 세상을 떠나버렸습니다. 그러니 30대후반에 젊은 나이에 부인이 얼마나 놀랄일이 겠어요.
신앙좋은 친구들이 그렇게도 예수믿으라고 권하고 했어도 예수믿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간 친구! 그 영혼이 얼마나 불쌍한 일입니까!!!
미국에서 그의 시신이 김포공항에 도착하는 날!
저도 나갔습니다. 친구의 부인은 탑승자의 트랙에서 내려오는데요.
그 친구의 유해는 내려오지를 않는거예요. 어떻게 된건가 하고 궁금해하는데요.
비행기 뒤문이 열리면서 화물칸에서 내려오더라구요.
죽으면 화물이 되는구나! 알았어요.
호흡이 있는 동안에 여러분이 살아있음에 감사한 마음과 감사한 말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살아생전에 예수믿고 영생구원 받았음에 더욱 감사가 넘쳐나시기를 축원합니다.
하박국 선지는 이렇게 고백하지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합 3:17-18). 하박국 선지가 기뻐하는 것은 구원의 하나님을 인해서 기뻐하는 것이지 무엇인가 얻었다고 기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한 감사가 아니겠어요?
어떤 신자가 밤거리를 지나다 보니까 남루한 옷차림을 한 아이가 빵 가게 밖에서 창문 너머로 빵을 들여다 보며 침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이 소년이 배가 고픈가 보다. 빵이 먹고 싶은가 보다‘ 아이의 손을 붙들고 빵 가게로 들어가서 맛있어 보이는 빵을 이것 저것 골라주었습니다. 볼이 미어터지도록 빵을 먹는 걸 보니까 얼마나 그 빵이 맛있어 보이는지, ?이 아이에게 더 많은 걸 사줘야 겠다. 케잌도 사줘야 겠다’ 싶었습니다. 손을 내밀면서 “얘야 나도 그 빵 좀 먹어볼까?? 그랬더니 가슴을 움켜쥐면서 ”싫어요?도망을 가더라는 것이지요.
지금 누리는 이 은혜가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배고프던 과거에 자기가 얼마나 비천하고 보잘 것 없는 죄인이었는가를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감사할 수가 없습니다. 더 주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손을 뿌리치고 “싫어요” 하고 돌아서는 철부지들이 이 땅에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우리가 오늘 맥추감사주일을 지킬 수 있는 것은 커다란 영적인 축복이요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맥추감사절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것이 저주요 깨닫고 살아가는 것이 축복입니다. 감사는 하나님의 은혜를 아는 신앙의 표현이며 신앙의 아름다운 열매입니다.
애완용 동물 가운데는 강아지가 있고 고양이가 있습니다. 고양이보다는 사람들이 강아지를 즐겨하는 것 같습니다. 고양이보다는 강아지가 사람을 따르는 것 같습니다. 고양이와 강아지는 기억장치가 이상하게 되어 있어서 특별한 차이점이 있다고 합니다. 강아지란 녀석은 주인이 열 가지를 잘못하고 한 가지만 잘해주면 그 한 가지 잘해주는 것 때문에 주인을 졸졸 따르고 고맙게 생각한답니다. 고양이란 놈은 열 번 잘해주다가도 한번 잘못해 주면 잘해준 것 싹 잊어버리고 잘못한 것 때문에 토라져서 주인을 따르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앙생활하는 사람들도 보면 강아지형이 있고 고양이형이 있습니다. 교회생활도 강아지형이 있고 고양이형이 있습니다. 고양이형의 신앙은 하나님이 열 가지 축복을 받다가도 한 가지 조그마한 어려운 일이나 고난이 오면 그것 때문에 불평합니다. 원망합니다. 절망합니다. 좌절합니다. 가정생활도 마찬가지고 교회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강아지형의 신앙에는 열 가지 어려움이 있다가 한 가지라도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시고 회복시켜주시면, 그 좋은 일! 하나를 가지고 그것 때문에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찬송합니다.
인간이 비참하게 되는 것은 은혜를 잊어버리는 때입니다. 인간이 인격적으로 추해지는 것은 은혜를 은혜로 보답하지 못하는 때입니다.
민수기11장4절 이하를 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에서 구출해서 죽음의 홍해를 건너게 하시고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호하시며 매일 새벽마다 만나를 내려주셨지요. 목마르면 반석에서 물을 주셨지요. 고기달라하면 메추라기를 주셨지요. 이스라엘백성들을 훼방하는 이방민족들도 물리쳐주셨지요.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의 수많은 은혜를 기억하지 않고 없는 것 때문에 불평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요. 이스라엘 백성전체가 처음부터 다 불평하는 것은 아니었어요.
민수기11장 4절을 찾아보겠어요.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무리가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무슨 말이예요? 몇몇사람의 부정적이고 원망하며 불평하는 사람들로 인하여 모든 백성들이 부정적이고 원망하고 불평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그만큼 한두사람의 원망과 부정적인 생각과 말! 불평하는 말들은 그 영향력이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울며”라는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전에도 울었다는 의미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오기까지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긍휼을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이있어요? 그런데 이들은 지나간 과거를 돌아보면서 또 우는 것입니다.신세를 한탄하고 원망하고 불평하는 것입니다.
이 모습은 이스라엘 백성들만 아니고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많은 은혜는 생각하지 않고 한두가지 어려움이 오면 불평하고 원망할때가 많습니다. 이 원망과 불평은 불행과 실패를 만들어가는 사슬입니다. 우리의 원망과 불평을 내 입술에서 몰아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대로 돌이켜 감사하는 말로 바꾸어야 할 것입니다.
불평과 원망은 쓰레기와 같습니다. 쓰레기가 쌓인 곳에는 온갖 더러운 파리떼와 벌레들이 날아들고 모여듭니다. 그러나 감사는 향기로운 꽃과 같습니다. 꽃이 피는 곳에는 나비가 날아들지요. 벌이 날아듭니다. 여러분! 원망하고 불평하는 사람들과 가까이 하지 마세요. 자신도 물들게 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사람곁으로 가세요. 여러분이 감사하는 사람들이 되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의 원망과 불평은 가히 기네스북감입니다.
하나님께서 먹을 것을 달라고 원망하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새벽마다 만나를 주셨지요.
출애굽기 16:31을 보면,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갓씨같고도 희고 맛은 꿀섞인 과자 같았더라” 얼마나 맛이 있었으면 꿀섞인 과자라고 표현했겠어요. 그런데도 그들은 감사하지를 않았어요.
민수기 11:7,8을 보면 이들의 마음은 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만나는 갓씨와 같고 모양은 진주와 같은 것이라 백성이 두루 다니며 그것을 거두어 맷돌에 갈기도 하며 절구에 찧기도 하고 가마에 삶기도 하여 과자를 만들었으니 그 맛이 기름섞은 과자 맛 같았더라”
민수기21:5에 가면 “백성이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하여 올려서 이 광야에세 죽게 하는고 이곳에는 식물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박한 식물을 싫어하노라 하매”
처음에는 만나를 꿀섞인 과자라고 하다가 기름섞인 과자로! 나중에는 박한 식물! 돌맹이같은 것이라 원망하고 불평하는 이스라엘백성들의 모습!
결국 하나님은 더 이상 참지 않으시고 원망과 불평으로 일관하는 이들에게 불뱀으로 심판하셨습니다.
여러분! 원망과 불평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죄인가를 우리는 깊이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원망과 불평하는 말들이 그냥 말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불평하고 원망하는대로 그 자신에게 이루진다는 것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출애굽기16:7-8을 보면, 찾아 읽겠습니다.
“아침에는 너희가 여호와의 영광을 보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가 자기를 향하여 원망함을 들으셨음이라 우리가 누구관대 너희가 우리를 대하여 원망하느냐 모세가 또 가로되 여호와께서 저녁에는 너희에게 고기를 주어 먹이시고 아침에는 떡으로 배불리시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자기를 향하여 너희의 원망하는 그 말을 들으셨음이니라 우리가 누구냐 너희의 원망은 우리를 향하여 함이 아니요 여호와를 향하여 함이로다”
모세와 아론에 대한 원망은 곧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었습니다.
우리가 삶속에서 부모를 원망하고, 형제를 원망하고, 이웃을 원망하고, 지도자를 원망하고 환경을 원망하곤 합니다. 이는 곧 하나님에 대한 원망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과거에 대한 원망과 불평으로부터 돌아서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대로,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말을 바꾸어야 합니다.
저! 19세기의 부흥전도자인 디엘부디가 목회하는 시카고교회에 큰불이 났습니다. 그것도 모르고 디엘무디는 전도활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에 성도들이 무디목사님에게 달려와서 “목사님! 큰일 났어요! 교회가 불타고 있어요! 큰일났어요”그 말을 듣고 있던 무디목사님은 “여보게! 걱정말게! 아버지께서 더좋은 교회당을 세워주실려고 하시는구만!”“하나님 아버지! 더 좋은 예배당을 주시려하시니 감사합니다!!!”
디엘무디는 역시 감사의 대가였습니다.
1914년 겨울, 미국 뉴저지 주 웨스트오랜지 시에 있는 에디슨의 연구소에서 갑자기 불길이 치솟았습니다. 200만달러의 실험장비와 평생 연구한 귀중한 자료들이 한순간에 젯더미로 변했습니다. 200만달러는 지금도 큰 돈이지만 그 당시에는 엄청난 돈의 가치입니다.
이튿날 아침 젯더미로 변한 연구소를 바라보면서 67세의 노인 에디슨은 말했습니다.
“우리의 모든 잘못된 것은 다 불타버렸다. 새롭게 시작한 수 있게 되었으니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역시 위대한 사람은 위대한 감사의 말을 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세계적 거부였던 록펠러도 그의 자서전에서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부자가 될 수 없다” 감사의 말을 하는 사람이 부자입니다. 부요하고 행복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여러분!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면서 오늘을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맥추감사절의 절기를 통하여 지나간 날들을 돌아보면서 감사할 수 있는 감사의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어렵고 곤고하고 가난했던 때를 생각하고 감사하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건강하냐. 병들어 신음하던 때를 생각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밥술이라도 먹고 사느냐. 가난하게 살던 때를 생각하고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지금 너희 나라가 평화스럽고 자유스러우냐. 총알이 빗발처럼 날아오던 그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던 이 민족의 처절했던 운명을 생각하고 온 민족이여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감사하는 자에게 행복한 삶을 주시기 때문에 감사절은 축복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종은 울릴때 종이되며 노래는 불려질 때 노래가 되고 축복은 감사할 때 축복이 된다. 감사라는 말은 은혜와축복을 의미하는 헬라어 카리스라는 말과 동일한 어원입니다. 은혜와 감사와 축복은 한 가족입니다.
이 감사절은 우리에게 즐거움을 주기 위한 날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감사의 마음으로 가득할 수 있기를 부탁합니다.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결코 환경이나 외적인데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속에 즐거움이 있어야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의 인생이 즐거운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일본의 유명한 신학자 우찌무라 간조는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간을 저주하신다면 그것은 질병이나 실패나 배신이나 죽음으로 저주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이 믿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아니하는 불신앙인으로 감사함을 잃어버리는 메마른 심령으로 저주하게 될 것이다.?
지금 누리고 받은 축복에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은 그 축복을 계속하여 받게 됩니다. 감사를 잊으면 주신 축복을 헛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축복은 받으며 축복을 계속 누리는 살아가기 위해서는 감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감사는 축복받는 연습이고 불평은 망하는 연습이라고도 말합니다.
지금 내 마음속에 한없는 감사가 용솟음치고 있습니까? 구원받은 것이 참 감사하다. 행복한 교회에서 신앙생활하는 것이 참 감사하다. 우리 가족들은 서로 사랑하면서 살아간다. 참 감사하다. 하나님께서 건강한 기업을 주셨고 든든한 직장을 주셔서 감사하다. 나는 신앙의 바른 비전을 가지고 살아간다. 하나님 지금도 나를 인도하시고 동행하신다. 참 감사하다. 감사가 내 가슴속에 자리잡고 용솟음치고 있습니까? 축복받을 징조라고 하는 것입니다.
날구원하신 주감사! 모든 것 주심감사! 지난 추억인해감사! 주내곁에계시네!
향기로운봄철에 감사! 외로운가을날 감사! 사라진눈물로감사! 나의 영혼감사해!
우리 다같이 불러봐요.
응답하신기도감사 거절하신것감사! 해처럼 높으신은혜 모든 것채우시네
아픔과 기쁨도 감사 절망중 위로감사! 측량못할 은혜 감사 크신 사랑 감사해!
길가에 장미꽃 감사 장미꽃 가시감사! 따스한 따스한 가정! 희망주신 것 감사!
기쁨과 슬픔도 감사! 하는 평안을 감사! 내일의 희망을 감사! 영원토록 감사해!
“하나님은 감사를 잊은 자를 찢으시겠다”고 시편50편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면 찬송함으로 그 궁정에 올라간다고 시인은 고백니다.
스펄전은 또 말했습니다.
“당신의 작은 믿음은 당신의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할 것이다. 그러나 큰 믿음은 천국을 송두리째 당신에게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것은 바로 감사하는 것이다”
우리 교회에도 종수 이름을 가진 청년이 있지요. 저는 종수를 볼때마다 불평하고 힘들다가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죽는 줄로만 알았던 종수가 살아서 지금 우리와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지 않아요!!!
종수라는 가난한 집 한 아이가 있었습니다.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에 입학을 하게 되었습니다. 평생소원이 ?내가 의사가 되어서 돈을 벌면 가난한 내 어머니 속옷 한 벌 사 드려서 춥지않게 해 드려야지. 어머니랑 마주앉아서 돼지고기 실컷 한번 먹어보는 것‘ 이었습니다.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서울대 병원에 인턴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첫 월급을 받았습니다. 그것을 받아들고 정육점 앞을 지나는데 고기 사서 어머니랑 구워먹어야지. 아니야 한푼도 쓰지 않고 어머니 손에 쥐어드릴 거야. 그 어머니 손 붙들고 백화점에 가서 속옷 한 벌 사드려서 따뜻하게 해 드리고 어머니가 사서 구워주는 불고기 먹을 거야.
그리고 어머니에게 봉투 들고 달려갔습니다. 어머니 첫 월급 받았습니다. 어머니 손에 들려 드렸습니다. “어머니 나와 함께 불고기 먹으러 가요. 어머니 속옷 한 벌 사드리고 싶어요. 백화점에 가요.? ”종수야 기왕 믿을 바에 잘 믿자. 지금까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았으니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로 살 거야. 타협하지 말고 깨끗하게 살자. 이건 네가 처음 받은 월급이지, 첫 열매야. 이것 우리 것 아니다. 하나님의 것이다. 하나님께 바치자.? “어머니 십일조만 드리고 우리 불고기 먹어요.? ”아니다. 이것 첫 열매다. 우리 것 아니다. 종수야. 깨끗하게 살자.? 주일날 어머니 손 붙들고 가서 첫 열매를 주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보름쯤 지났을까요? 학장님께서 불렀습니다. 의사고시 전국대회에서 1등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상금을 주는데 하나님 앞에 바쳤던 월급의 2배를 주는 겁니다. 하나님 앞에 감사했지요. 송두리째 하나님 앞에 드렸더니 나를 1등으로 합격할 뿐만 아니고 상금을 주시는 구나. 너무너무 기뻐서 이제는 이걸 가지고 불고기 사들여야지, 어머니 속옷 사들여야지, 어머니에게 달려갔습니다. “어머니 제가 전국 의사고시에서 1등을 했대요. 어머니 이제 저와 함께 돼지불고기 실컷 배가 부르게 먹어봐요.?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면서 봉투를 받아들었습니다. ”종수야 너 상금 타 본적 있니?? “네 처음인데요.? ”첫 상금이니까 첫 열매이구나. 이거 하나님 앞에 바치자. 그리고 주일까지 기다리다간 너 시험 들고 나 시험 들겠다. 내일 새벽에 일어나자.? 새벽에 일찍 일어나 어머니와 손 붙들고 재단에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가 유명한 한국교회 커다란 영향을 남긴 원종수 권사입니다. 미국 의학계를 깜짝 놀라게 만들었던 원종수 권사 아닙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맥추감사주일을 지내고 있습니다. 구원의 감격을 잃어버리고 살아 오신 분 계십니까? 감사하는 말로 돌아설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전히 여러분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는 불평과 원망도 감사하는 말을 고백하기 시작하면 원망과 불평도 떠나갈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에 한없는 감사와 기쁨이 살아나는 복된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이 교회 행복한 교회 일원이 되어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며 행복하게 신앙생활 할 수 있음에 하나님 앞에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금까지 지내온 것! 주의 크신 은혜였습니다. 에벤에셀 하나님께서 이곳까지 인도하셨습니다. 장래에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도 우릴 거절하지 아니하시고 버리지 아니하시고 영원한 당신의 왕국으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실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확신하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는 감사와 기쁨과 찬양과 영광이 회복되어지는 복된 날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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