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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옥천군향우회 원문보기 글쓴이: 곽봉호
▲ 김봉난 포항아지매 |
"예수 같은 가시나가 시골로 시집 왔다고 동네 사람들이 마 카데. 시동상 따라 하이힐 신고 왔는데 아저씨는 엄청 무십고 또 군인 병장해야 된다고 한 반년은 혼자 살았띠나? 그때부터 암싸밖에 일 해가 인자는 땅도 좀 있고 자석들도 다 자리 잡았고... 원하는 거 없다."
40년을 넘게 푸렁골에 뿌리 내리고 산 그녀지만 말투는 쉽게 변하지 않는 모양이다. 포항 남부국민학교를 졸업하고 포항동지여자중학교와 포항동지여자상업고등학교를 나온 그녀의 최종 학력은 수도사범대학교(현 세종대) 국문과 중퇴다. 그녀는 오는 6월2일 장한어버이 국무총리 표창을 받는다. (참고: '예수'는 여우, '가시나'는 여자, '마 카데'는 막 그러더라, '살았띠나'는 살았다는 거 아니니, '암싸밖에'는 부지런히 정도로 해석하면 된다)
◆이유 없는 반항 '백지동맹'의 추억
그녀는 가난한 5남매의 막내 딸이었다. 첫 돌이 되기 전에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남은 자식들을 키우기 위해 쌀장사를 시작했다. 그 때 그 시절 가난한 집 여자 아이가 살아갈 운명은 대개 정해져 있었다. 일을 하거나 시집을 가거나. 하지만 그녀는 '하필' 똑똑했다. 등록금 낼 돈은 없었지만 장학금 탈 실력은 있었다. 그래서 중학교 3년 고등학교 3년을 내리 장학금 받으며 반장으로 다녔다. (재미있는 사실은 그녀의 1년 후배가 이명박 대통령이라는 점이다)
"내가 키는 쪼맨했어도 목소리가 짜랑짜랑했어. 교단에 서서 구령을 딱 붙이면 전교생이 착착 말을 들어 묵었지. 그때가 참 재밌었는데. 베텔규스 아~들(아이들)하고 백지동맹도 하고 ..."
베텔규스는 그녀가 주축이 돼 만든 학생 동아리다. 공부도 잘 하고 놀기도 잘 노는 학생들만 가입을 허락(?)하는 요샛말로 소위 '엘리트' 동아리다. 베텔규스 멤버들이 주축이 돼 사건을 하나 일으켰다. 이른바, '백지동맹' 사건. 영어 시험 시간에 모든 학생이 똘똘 뭉쳐 백지 답안지를 낸 것.
"아, 그 나이 때 이유가 있나? 그냥 반항한거지. 백지동맹하고 불려가서 무지 맞았어. 내가 반장이었잖아. 대표로 맞은 거지." 풋풋한 고등학생 때 추억을 떠올리는 그녀의 모습이 방긋 웃는 햇살 같다.
◆형수를 꼬인 시동생
이야기는 짧디 짧은 대학 시절로 옮아갔다. 그녀는 이번에도 역시 장학금을 받으며 수도사범대 국문과에 입학하지만 생활비가 없어 1년도 채 되지 않아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그녀가 자신의 지난 세월 중에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우리 둘째 오빠가 미 8군 사령부 수송부 책임자로 있었어. 오빠만 한국에 계속 있었어도 아마 대학교 댕기게 해줬을텐데."
그녀와 4살 터울이라는 둘째 오빠는 그녀가 대학 입학을 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미국 세인트 루이스로 건너 갔다. 든든한 배경이 사라지면서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고향으로 내려가야 했다. 그 때, 시동생 강청석씨를 만났다. 경부선 기차를 타고 포항으로 내려오는 길에 당시 고등학생이던 강씨를 만났다. 까까머리 학생은 '누나'하면서 붙임성 있게 따라다녔고 막내인 그녀는 남동생이 하나 있었으면 하고 바랐다. 그렇게 의남매 사이로 4년을 지내던 어느 날 강씨가 '우리 형님이랑 결혼하시라'고 말했다. 시동생이 형수를 꼬인 것이다. 포항으로 갈 발길은 그렇게 동이면 청마리 푸렁골로 방향을 틀었다.
▲ 인터뷰를 하러온 기자에게 대접한다며 손수 커피를 타주는 김봉난 아지매 |
◆'니 배운 만큼은 자식들한테 가리키라'
그녀 나이 스물다섯에 전기도 들어오지 않는 푸렁골로 시집을 왔다. 남편 강진석씨는 당시 말년 병장 휴가를 나와 있었다. 결혼식 하고 제대하기까지 6개월 간 그녀는 홀로 시부모님을 모시며 살았다. (남편 강씨는 몇 년 전 먼저 이 세상 소풍을 마치고 푸른 곳으로 마실을 떠났다.) 그때부터 억척스럽게 살았다. 콩이며 고추며 묘목이며 돈이 되는 것은 모두 심었고 소도 스무마리 정도 먹였다. 슬하에 5남매를 뒀고 어느 농사보다 자식 농사에 매진하고 싶었다. 특히, 가난 때문에 배움을 접어야 했던 그녀 자신의 아픈 삶을 자식들에게 되물림 해주고 싶지 않았다. 시어머니가 용기를 주었다.
"시집 온 첫 날 시어무니가 이런 말을 하시더라고. '딴 건 몰라도 니 배운 만큼은 자식들한테 가리키라'. 그래서 자식들 공부하는 데 필요한 거는 뭐든지 다 사줬지. 컴퓨터 처음 나왔을 때도 300만원 주고 사주고” 그 덕에 오남매 중에 넷이 대학을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다. 넷이라고?
“내가 그 생각만 하면 우리 장녀한테 너무 미안해. 외손주들이 '다른 삼촌들하고 고모는 다 대학 나왔는데 왜 우리 엄마만 대학 안 보냈냐'고 물어보는데 너무너무 미안하더라고...”
사연은 이렇다. 옥천여고를 나온 장녀 강미애(42)씨는 스스로 대학 시험을 포기했다. 대학 연합고사가 있던 날 동네 주민이 식당에서 아르바이트 하는 강씨를 발견했다. 강씨는 동생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자신은 대학을 가지 않기로 결심하고 엄마 몰래 일을 시작했다.
◆그녀의 퇴근 시간은 저녁 8시20분
어쨌거나 그녀의 최종 학력은 '국문과'다. 당연히, 문학소녀의 꿈을 키웠고 그 꿈은 오늘날까지 전혀 빛을 잃지 않았다. 오히려, 세월의 신산함을 더해 예전보다 더 고운 모습으로 또렷해졌다. 그녀는 오래전부터 소설 한 편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진작에 제목도 정했다. '내 남편은 농부'
“우리 아저씨가 자석들한테도 잘해주고 나한테도 잘했지만 또 무섭기도 했어. 내가 바깥으로 돌아댕기는 거를 별로 안 좋아했어. 푸렁골에 40년을 살았어도 솔직히, 다른 마을에 가 본 적이 별로 없어요.”
▲ 푸렁골 포항 아지매 김봉난씨가 자신의 습작노트를 보여주었다. 공책과 연습장, 원고지, 달력 뒷장 등 그녀의 40여년 세월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었다. |
스물다섯에 시집 온 젊은 새댁. 얼마나 가고 싶은 곳이 많고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남편마저 세상을 떠난 지금, 푸렁골을 혼자 지키는 그녀의 먹먹한 마음은 따뜻한 소설을 그리고 있다. 40여년 세월 동안 묵히고 묵힌 이야기들이 어떻게 풀어질지 궁금하다. 죽기 전 꼭 소설을 탈고하겠다는 그녀는 지금 열심히 습작 중이다. 주로 TV 드라마를 보고 비평을 쓰는 방식이다. 그래서 농사꾼인 그녀의 퇴근 시간은 늦어도 저녁 8시20분이다. 일일 연속극을 보기 위해서다.
“대조영 할 때는 한 편도 안 빼고 다 봤어. 독후감 써서 케베스에 보낼라고 했는데 (공모전)소식이 없네. 그래서 새로 시작한 대왕세종을 또 열심히 보고 있는데 아 글쎄, 이 놈이 케베스 원에서 투로 가버리지 뭐야. 우리 집은 투가 안 나오거든.”
그녀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뭔가가 빼곡히 쓰인 원고지 더미를 보여줬다. 겉장에는 케베스 대조영이라고 적혀 있었다. 또 다른 공책도 보여줬다. '농사체험수기'라는 제목도 보이고 '내 남편은' 이라는 제목의 소설 초안도 보인다. 시집 올 때부터 2004년 전기가 들어오기 전까지 매일 호롱불 밑에서 깨알같이 쓴 습작들이다.
김봉난씨와 함께 살고 있는 개 |
▲ 푸렁골 김봉난씨 집 |
◆군수님 한 번 초대 해야겠어.
소설 쓰기 외에 그녀의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전기'다. 우리고장의 대표적 오지마을로 꼽히는 청마리 마티에서도 한 시간 이상 고개를 넘어야 하는 푸렁골. 40여 년 전에 7가구가 살았던 푸렁골에 지금은 그녀 혼자다. 7가구가 살던 시절에도 들어오지 않던 전기는 지난 2004년에서야 들어왔다. 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전력량이 터무니없이 적어 텔레비전과 세탁기를 동시에 돌릴 수 없을 정도다. 드라마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그녀로서는 차라리 세탁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
“전기가 들어왔으면 좋겠어. 내가 사십년 넘게 살았어도 군에서 해주는 게 없어. 전기만이라도 좀 해주지. 언제 군수님을 한 번 집으로 초대해야겠어” 그녀가 웃는다.
소설 쓰기 외에 그녀의 마지막 소원이 있다면 '전기'다. 우리고장의 대표적 오지마을로 꼽히는 청마리 마티에서도 한 시간 이상 고개를 넘어야 하는 푸렁골. 40여 년 전에 7가구가 살았던 푸렁골에 지금은 그녀 혼자다. 7가구가 살던 시절에도 들어오지 않던 전기는 지난 2004년에서야 들어왔다. 하지만, 사용할 수 있는 전력량이 터무니없이 적어 텔레비전과 세탁기를 동시에 돌릴 수 없을 정도다. 드라마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그녀로서는 차라리 세탁기를 포기할 수 밖에 없다. “전기가 들어왔으면 좋겠어. 내가 사십년 넘게 살았어도 군에서 해주는 게 없어. 전기만이라도 좀 해주지. 언제 군수님을 한 번 집으로 초대해야겠어” 그녀가 웃는다.
1991년 3월30일 새벽 5시경에 |
몇 달 전부터 나의 남편은 3월28일부터 30일까지 부부 동반하여 설악간 구경을 간다고 나에게 말을 했다. 내가 결혼 하기전부터 원하던 설악산이었다. 나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의 장남이 결혼하여 신혼여행도 설악산으로 갔다 왔고 아들, 딸 5남매가 고등학교 수학여행도 살악산으로 가서 다 2박3일을 머물러 있다 온 곳이기데 설악산 구경은 꼭 가 보고 싶었다.
나는 남편과 결혼한 기념일도 며칠 남지 않아서 나의 조그마한 카메라가 있기에 28주년 결혼 기념일 겸 카메라를 가지고 가서 사진 촬영을 해가지고 와서 앨범에 멋있게 붙여 놓으리라는 것을 마음 먹었지만 모든 것은 수포로 돌아갔다.
…
나는 새벽 4시에 일어나 밥을 하여 혼자 설악산 구경을 가는 남편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지만 남편 앞에선 눈물을 흘리지 않았습니다. 나는 남편이 간다 하면서 구두를 신고 집을 나갔을 때 혼자 방에서 한 없이 울었습니다. 내가 집을 보고 집에서 일을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이번에 설악산 구경을 가지 않으면 평생 못 간다는 것을 생각하니... 혼자 라디오를 듣다가 전화가 걸려왔다.
나의 남편과 같이 구경을 가시는 가덕 이장님이었다. 출발했어요. 나는 대답했습니다. 혼자 갔습니다. 나는 집을 보아야 합니다. 혼자 집에서 라디오를 틀어놓고 부지런히 일을 하자니 눈물이 나서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던 걸요. 나는 이 외로운 심정을 글로 써 가지고 방송국에 보내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