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정보
쓸모있는 역사
 
 
 
카페 게시글
서양고대사교육론 서양고대사 강의 로마공화정의 몰락(1,2조)
08김연정 추천 0 조회 145 09.11.09 20:34 댓글 8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첨부된 파일
댓글
  • 09.11.11 18:45

    첫댓글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이 그라쿠스형제의 개혁에 대한 평가였다. 사실 책에서도 그라쿠스형제를 '빈민의 이익을 옹호하면서 타락한 지배 귀족층에 대항하여 투쟁한 진지한 개혁가'라는 측면을 더욱 부각하지만, '정치권력을 갈망한 선동가'라는 견해도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그동안에 알고있던 지식도 단순히 어떤 역사가의 견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책에는 이 부분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지 않아서 나름대로 그 근거를 추측해보았다. 그 이유는 그라쿠스형제가 개혁을 무리하게 단행하는 점이라 생각된다. 즉 티베리우스는 농지법을 실행하면서 원로원의 권위를 무시하였다. 원로원에 자문을 구하는 관례를 무시하였고,

  • 09.11.11 18:45

    대외정책과 재정에 대한 원로원의 통제권에 타격을 가하였다. 한편 가이우스는 개혁을 실시하면서 부유한 기사신분을 포섭한다. 당시 기사신분은 배타적인 원로원 의원들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가이우스를 지지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점들이 그라쿠스형제를 일종의 선동가로 보는 이유로 생각된다. 개혁의 내용은 빈민층을 위한 것이지만, 개혁을 실시하는 방법에는 원로원과 대립하였고, 자신들의 지지기반을 확보하기 위하여 노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책에서도 언급되었듯이, 개혁의 의도자체는 빈민들을 위한 것이라 평가한다. 결국 그라쿠스형제를 선동가라 파악한다고 하더라도, 개혁의 의의는 긍정적으로 보인다.

  • 09.11.18 12:53

    로마 공화정 시기에는 부유한 평민이 귀족이 거부한 고위관직과 원로원 진출에 열망하였지만 진출이 어려웠다. 단지b.c.444~b.c.367년에 콘술과 동일한 권한을 지니 칸슐러 트리뷴에 진출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도 귀족에 비하면 상당부분 제한적인 권한을 가졌던 것이다. 평민이 귀족과 비슷한 권한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후에 호민관 리키니우스(BC 4세기)와 섹스티우스의 제안에 따라 BC 367년에 통과된 리키니우스법과 기원전 287년 로마의 독재관이었던 호르텐시우스가 제정한 법 호르텐시우스법으로 인해 귀족과 평민이 모두 참여하는 민회가 아니라, 평민들만 참여하는 평민회에서 의결된 사항도 국법으로 효력을 지니게 하여 평민회의

  • 09.11.18 12:52

    독자적인 입법권을 보장하였다.

  • 09.12.10 17:15

    로마의 발전은 귀족의 점진적인 양보였으나 어느순간 평민의 힘이 줄어들게 되고 종교적세계관의 분열로 인하여 더욱 해체가 심하된거 같다.그락쿠스 형제의 토지개혁실패는 로마의 부패의 정도를 말해준다

  • 09.12.18 14:53

    혼자 생각하건대, 공화정 시기에는 로마의 발명품인 법률과 시민들의 신분투쟁이 가장 중요시 보아야 할 부분인 듯 하다. 특히 성산사건은 시민들의 신분투쟁의 시발점이 되었던 듯 싶다. 이로 인해 12표법- 리키니우스법- 호르텐시우스법까지, 단계적으로 민회의 효력(쿠리아-켄투리아-'트리부스')이 법제적으로 정립될 수 있었던 듯 싶다.

  • 09.12.18 14:57

    로마의 법률은 (지나친 서구적인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관습법-시민법-만민법-자연법으로 크게 발전될 수 있었다.
    로마 자연법 사상의 태동과 시민권에 있어서의 개방성이야말로 로마의 제국화를 가속시켜준 역할을 한게 아닐까. 시민의 신분투쟁 및 동맹시의 반란은 역사적으로 시민들의 권익을 스스로 찾고자 한 방법이었다.

  • 09.12.18 20:17

    공화정이전의 로마는 아직은 제정일치의 사회였다. 짧은 로마의 귀족정은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가는 과도기적 정체였다. 로마의 상류층은 그 특유의 타협적 성향으로 말미암아 사태를 극단적 상황으로 몰고가지 않고 적절한 선에서 양보를 거듭함으로써 공화정을 수립하게 되었다. 이러한 귀족의 지혜로 말미암아 견고한 공화정이 성립되고 이는 시민군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대외 팽창 정책의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동맹시 반란을 시작으로 로마 시민권은 확대되고 시민군이라는 자부심도 옅어져갔다. 또한 대외정책의 변화로 정복 전쟁이 중단되자, 전쟁특수가 사라지고 사회혼란이 가중되면서 로마의 공화정은 몰락에 이르게 되었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