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귀는 일어서기 위해 무릎을 꿇는다
동대문 포목 상가
늘 졸음에 빠져 있는 눈두덩이 무거운 짐승
평생 새벽을 열고 원단을 지고 나르던 나귀
알루미늄 지게를 벗어 놓고
잠시 쉬고 있다
상가 사이 좁은 샛길을 오가던 작은 체구에
굳은살이 덮인 어깨끈 자국
지개는 한 번도 무릎을 꿇어본 적 없지만
무게를 어깨에 걸 때마다
무릎을 꿇고
한쪽 무릎을 펴고서야 일어난다
대로를 걷는 것보다
좁은 통로를
지그재그로 빠르게 걷는 것이 익숙한
말과 노새 사이에서 태어난 그를
누구는 기형이라 했다
무게를 받들다 굽어가는 등
구름과 꽃과 기하학적 무늬가 둘둘 말린
낙원을 지고 나르는 일
한 번 더 꿇었다 일어서면
다리보다 먼저 펴지던 수천 장 봄날
빈 지게가 더 무거운 나귀는
힘차게 일어나기 위해
또 한 번 무릎을 꿇는다
ㅡ정연희 시집《나무가 전하는 바람의 말》
2023.10.(주)여우난골 간행
정연희 시인의 시는 대체로 일상적이고 평범한 토양에서 반짝이는 詩心으로
한 펀의 이야기를 끌어내기에 호감이 간다. 2017 년 전북신문 신춘문예에
<귀촌>으로 혜성처럼 나타나 문단에 알려졌다.
ㅡ구름과 꽃과 기하학적 무늬가 둘둘 말린 낙원/
'낙원'이 함의하고 있는 무게가 결코 가볍지 않다.
그것이 곧 '포목'이니 원단이 무엇으로 변화될까?
귀한 집의 커텐부터 귀부인의 화려한 겉옷이며 각종 귀한 재료로 쓰일 것이다.
정연희 시인은 늘 이런식이다.
눈에 보이는 것을 거둘 것과 버릴 것으로 구별해 내는 능력이 있으니 부럽다.
지천에 깔린 詩語 중에서 콕 찝어 집어올려서 빤짝이는 보석으로 만들 수 있는 신기가 있으니 말이다.
한층 더 훨훨 날 수 있기를 바라며 드리는 응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