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고슬라비아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이처럼 민족주의 정서로 급격히 전화하고 있는 가운데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에 벌어진 이른바 ‘언어 전쟁’은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세르비아측의 선공으로 시작된 언어 전쟁은 사실 1954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해 12월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수도 노비사드에서 세르비아 어와 크로아티아 어의 공통 사전을 편찬하기 위한 언어학회가 열렸다. 두 언어는 말은 같지만, 표기 문자는 세르비아측이 키릴 문자를 크로아티아측이 로마 문자를 각각 쓰고 있었기 때문에, 어떤 방식으로든 통일 사전을 만들 필요성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 회의의 주도권은 물론 세르비아 문화 협회인 마티차 스르프스카(Matica Srpska)가 잡았다. 언어학회는 최종 합의에 이르러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그리고 마케도니아 어가 모두 포함된 통일 사전을 편찬하고 통일 철자법도 함께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이 사전 편찬 작업은 12년간의 작업 끝에 1967년 첫 두 권이 먼저 출판됐다. 그런데 이 사전 발간은 양측의 언어 전쟁에 불을 붙이는 역할을 했다. 이 사전은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어 사전 곳곳에 세르비아 우월주의가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어 크로아티아 인이 강력히 반발했기 때문이다.
이 사전을 보면 크로아티아에서 가장 보편적으로 쓰여지는 크로아티아 표준 어휘가 빠져 버렸고, 그 대신 지방 사투리나 같은 뜻의 세르비아 어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크로아티아의 언어학자 밀로스 모스코블레비치 박사가 지적한 몇 가지 사례만을 보자. 새 사전에는 크로아티아를 의미하는 호르바트(Hrvat)라는 단어는 삭제되었다. 그 대신 세르비아를 의미하는 스르빈(Sebin)의 경우는 각종 형용사까지 나열해, 이를 테면 ‘진정한 세르비아 인과 같이 행동하는’이라는 뜻의 형용사 ‘Srbovati'도 당당히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크로아티아측 입장에서는 이 사전 자체가 크로아티아 어를 말살시키려는 세르비아 인의 음모로밖에 생가할 수가 없었다. 크로아티아측은 즉각 이에 대응하고 나섰다. 크로아티아 언어학자들은 1967년 3월 17일 발행된 크로아티아 신문 <텔리그람>에 다음과 같은 선언문을 게재했다.
1. 세르비아 어와 크로아티아 어는 별개의 것이며 세르비아측은 이점을 인정하라.
2. 연방 정부는 연방 헌법 131조의 규정대로 현재 사용되는 크로아티아 문자를 앞으로도 계속 사용할 수 있도록 보장하라.
3. 크로아티아 언어학자들은 세르비아 어의 크로아티아 어 침투를 방지하고 순수한 크로아티아 어를 유지하기 위해 크로아티아 표기법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순수 크로아티아 어 사전을 편찬한다.
4. 크로아티아 문화 협회(마티차 호르바츠카)는 세르비아 측과 공동으로 참여해 왔던 사전 편찬 작업에 더 이상 협조하지 않는다.
한편 그들은 신문을 통해 크로아티아 국민들에게 크게 호소했고, 크로아티아 최고의 작가 중 한 사람인 미로슬라프 크를레지 등 130명의 지식인들이 자그레브에 모여 크로아티아 정부 및 연방 정부에 보내는 청원서를 채택하였다. 그 내용은 말은 같지만 문자가 다른 세르비아 어와 크로아티아 어를 별개의 독립된 언어로 공식 인정해 줄 것을 청원했다.
세르비아 측의 반격 또한 만만치 않았다. 세르비아의 저명한 언어학자였던 미르코 차나도비치(Mirko Canadovic)는 베오그라드에서 발행되는 <폴리티카(Politika)>에 기고한 글에서 세르비아 어, 크로아티아 어, 몬테네그로 어, 심지어 보스니아의 이슬람 교도들이 사용하는 언어까지 모두 단일 언어 체계에 속하며, 다만 지방의 특성에 따라 일부 체계가 변형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또다른 언어학적인 차원에서 검증해 보더라도 세르비아 어와 크로아티아 어는 ‘명백히 같은 언어’라고 주장했다.
폴리티카 신문
세르비아 문화 협회의 이 같은 반응이 속속 자그레브로 전해지자 크로아티아 문화 협회는 성명을 발표하여 1954년 노비사드에서 양측이 체결한 협정안을 무효화시키는 한편, 세르비아 문화 협회가 크로아티아 어를 조직적으로 폐기시키려 한다고 격렬히 비난하였다. 크로아티아 문화 협회는 후속 작업으로 크로아티아 표준 철자법을 편찬해 출간하는 동시에 크로아티아 어 표준 사전도 펴냈다.
이 같은 분위기는 란코비치의 몰락으로 어느 정도 침체된 분위기에 빠져 있던 세르비아 인에게 즉각 반격의 실마리를 제공해 주었다. 세르비아 인은 크로아티아에 70만 명의 세르비아 인이 살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이들도 크로아티아 측이 요구한 권리와 상응한 권리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크로아티아 내에서 세르비아 어도 동등한 권리를 누려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이 문제는 연방 의회에서 거론돼 격렬한 논쟁을 벌였다.
유고 연방의 무절제한 민족주의를 논의할 때 빠질 수 없는 것이 항공사 설립 문제이다. 이른바 ‘비행기 전쟁’으로 일컬어지는 무절제한 신규 항공사 설립은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민족 감정이 어느 수준에 도달했는지 단적으로 보여준다.
본래 1961년까지는 유고 항공(JAT)만이 유일한 항공사였다. 그러나 이해에 처음으로 슬로베니아에서 AA(Adrian Airways) 항공사가 창설되어 유일 항공 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AA 항공의 역할은 여름 성수기에 아드리아 해로 오는 서방 관광객을 실어 나르기 위한 비정기 전세기 회사의 성격을 표방했고 유고 항공측과는 보완 관계를 정립하고 있었다. 이후 1964년 베오그라드의 무역 회사인 보알(BOAL) 사가 이 항공사를 사들여 IAA 항공으로 개칭했다. 당시 IAA항공은 7대의 DC-9 기종을 보유했다.
유고 항공의 비행기
이때 분위기는 AA 항공이나 이를 계승한 IAA 항공측이 슬로베니아의 민족 이익을 대변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유고 항공측을 도와 준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세르비아 측에서는 아무런 문제 제기가 없었다. 그런데 이 항공사의 설립을 계기로 꼬리를 물고 늘어진 것은 바로 크로아티아였다.
크로아티아의 주장은 이렇다. ‘유고 항공은 많은 외화를 벌어들이고 있다. 그런데 그 외화의 대부분이 세르비아로 흘러 들어가고 그나마 이 돈은 세르비아 공화국의 수입에서 제외되어 사실상 연방 정부에 납부해야 하는 세르비아측 분담금이 줄어들었다. 결국 유고 항공은 연방의 항공이 아니라 세르비아 항공사다. 유고슬라비아 연방 내의 자치 공화국인 크로아티아는 당연히 공화국 소속의 항공사를 신설할 권리가 있다.’
사실 크로아티아 정부의 입장에서 이 같은 문제를 제기했지만 크로아티아 내부에서도 이 문제에 대한 입장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자그레브의 보수파들이나 세르비아측은 단적인 예로 스칸디나비아 항공(SAS)을 들었다. 각국이 독자적인 항공사를 보유하는 데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따르는 점을 감안해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등 3국이 자본을 합쳐 회사를 설립해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지 않느냐는 주장이었다.
스칸디나비아 항공
이 주장이 워낙 설득력이 있기 때문에 크로아티아 항공 설립을 추진하던 세력은 다소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2년이 지난 1963년에 크로아티아는 결국 팬 아드리아(PA) 항공사를 설립했다. PA 항공은 처음에는 6명의 승객과 450㎏의 수하물을 운반할 수 있는 체코제 모라바 L-200S 기종의 경비행기로 시작했다. 항공사 설립은 사실상 모험이었다. PA 항공은 예상대로 처음부터 적자였고 많은 사람들은 항공사가 언제 망할지에만 관심을 쏟을 정도였다. 기종이 너무 낙후되었다고 판단한 PA 항공 경영진은 우선 중고 DC-9를 3대 구입했다. 1966년에는 아예 체코제 모라바를 매각하고 4대의 신형 아에로 코맨더 500-US 기로 대체하는 한편 이와는 별도로 독일의 루프트한자와 스위스의 스위스 에어 사로부터 모두 4대의 중고 비행기를 구입했다.
DC-9
PA항공은 기종 현대화 작업을 어느 정도 마친 뒤 이탈리아의 트리에스테와 자그레브를 잇는 국제선 취항을 하기 시작했다. PA 항공이 굳이 이 노선을 선택한 것은 우선 트리에스테 공항이 국제 공항의 지위를 얻기 위해 무던히 애쓰고 있었기 때문에 신설 항공사가 들어가도 별다른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유고 항공측도 굳이 적자를 무릅쓰면서 트리에스테에 취항할 이유도 없기 때문에 이를 방해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PA측은 처음부터 이 노선을 무료로 운항하는 ‘괴이한’ 일을 벌이기 시작했다. PA 경영진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트리에스테-자그레브 노선을 유로로 취항해 봐야 거의 손님이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 노선을 무료로 운항해 많은 서유럽 인들을 일단 자그레브로 수송한 뒤 이들이 아드리아 해 쪽으로 운항하는 PA 항공기를 이용할 시점에서 돈을 벌어 보자는 전략이었다.
애초부터 이 전략은 맞아떨어지지 않았다. 항공기를 무료로 운항해 봤지만 도대체 손님이 없었다. 그나마 있다면 대부분이 트리에스테 공항 직원이나 친인척, 그리고 자그레브 공항 혹은 PA 항공사측 직원들이나 그 친척들이었다.
PA 항공측을 더욱 곤경에 빠뜨린 것은 유고 항공측이 전세기만을 운용하는 자회사 에어 유고슬라비아를 설립했고, 뒤이어 베오그라드의 무역 회사인 제너럴 엑스포트(General Export) 사도 전세기 전용 아비오게넥스(Avioenex)를 설립했다. 이들 회사는 PA측의 일부 직원을 스카웃하기도 했는데, 크로아티아 측은 이러한 항고상 설립이 세르비아의 ‘팽창주의 전략’이라고 비난하였다.
적자를 견디다 못한 PA 항공사는 끝내 1978년 파산하고 말았다. 그런데 몇 달 뒤 새로운 크로아티아 항공사가 생겨났다. 이 항공사는 이름을 트랜스 아드리아(TA)라고 명명했는데 주요 후원자는 크로아티아 정부와 자그레브 시청이었다. TA 항공은 항공기를 비롯한 장비 일체와 전 직원이 PA 항공 출신이었다. 게다가 설립 자본이라는 것도 PA 항공사 파산 위원회가 평가한 약 3천만 디나르의 자산을 차관 형식으로 TA 항공에 공여함으로써 이름만 바뀌었을 뿐 내용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TA 항공이 설립되었다는 것은 크로아티아 측이 결코 세르비아와의 대결에서 패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TA 항공은 경제적으로 파산 상태였지만 단지 정치적 이유, 즉 TA 항공이 크로아티아 항공이라는 점 때문에 그 명목은 유지되어 나갔다.
크로아티아의 항공사 신설은 보스니아 측을 크게 고무시켰다. 이슬람 교도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는 보스니아에서 중동의 아랍 국가와의 항공 노선 연결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다. 보스니아 정부 입장에서는 단지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보스니아의 많은 이슬람 교도들이 일찍부터 중동으로 진출해 사실상 보스니아의 경제를 받쳐 주는 활력소가 되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항공사 설립에 관심을 보이고 있던 터였다. 유고 항공은 1970년대 말부터 경제적인 이유를 들어 항공기 편수를 대폭 줄여 보스니아 측의 항공사 설립 욕구를 더욱 자극했다.
보스니아 정부는 1975년 항공사 설립을 위한 타당성 조사를 허가했으며, 3년간의 조사 끝에 1978년 3월 항공사 설립 사무국을 조직했다. 이 임무는 보스니아 회사인 유니투어리스트가 맡았다.
이듬해 보스니아 정부는 유니투어리스트 사 산하에 항공사를 세우기로 공식 결정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측의 반응은 지극히 냉소적이었다. 보스니아 측은 1980년 4월 보스니아 운수 위원회 위원장 이제트 브르코비치(Izet Brkovic) 명의로 2년 뒤인 1982년 5월 에어 보스니아의 첫 비행기가 취항할 것이라고 전격적으로 발표했지만 결국 이 계획은 발표로만 끝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