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타루, 영화 ‘러브 레터’의 배경이 된 도시라니 사뭇 기대가 된다. 순하고 맑은 분위기, 고운 한지 같은 슬픔 자체만으로도 오래 기억될 영화였기에 눈 쌓인 겨울도 아니고 봄빛 난만한 사월도 아니지만 마음이 살짝 부풀어 올랐다. 나는 그 영화에서 눈 쌓인 곳에서 '오겡끼 데스까' 하던 장면보다 도서실 커튼이 바람에 나부끼던 장면을 더 좋아한다. 창문으로 비껴들어오는 그 햇빛은 흰색에 가까운 연분홍 벚꽃잎을 통과한 듯 투명하고 맑았다. 이 세상에서 그렇게 예쁜 햇빛과 바람과 커튼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지금은 7월 23일 날씨는 생각보다 조금 덥고 그 어디에서도 연분홍 햇빛과 결 고운 바람을 만날 수 없지만, 오래된 석조 건물과 그 건물 벽을 타고 올라가는 초록색 담쟁이 덩굴이 운치를 더해 주는 운하가 있었다. 이제 운하를 오가는 배는 없지만 그렇게 오래 된 창고들을 현대적인 상점으로 탈바꿈시킨 사람들의 창조적 상상력이 신선하다. 옛 운하는 현대적으로 되살아나서 사람들을 불러 모은다. 창고 건물을 개조한 식당에서 일본여행의 첫 식사를 하였다. 으음~ 먹을 만하군. 아니, 이 정도면 맛있는데 대체로 음식이 조금 짜다. 오타루 운하는 서울의 청계천과 그 기능이나 느낌이 비슷하다. 청계천이 지금은 날것, 새것의 신경증이 좀 있지만-모든 새것에서는 그런 불편한, 어쩐지 조금은 흠집 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던가.-- 앞으로 새것의 마뜩찮은 감정 위로 시간의 노을이 물들어가면서 그 진가를 발휘할 것이 분명하다. 내 보기엔 오타루 운하보다는 청계천이 더 괜찮은 여행 상품으로 여겨졌다. 아무튼 약간 흐린 날씨, 오후 3시에 운하를 끼고 오래된 돌길을 걸으며 사진을 찍는 일은 즐거웠다.
여행인솔자는 이리 말했다. 다음 거리는 몽환과 낭만의 거리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을 가지려면 돈이 필요하답니다. 맞다. 현대의 낭만은 어쩌면 상품이 주는 매혹일지도 모른다. 서인영이란 가수가 입에 달고 사는 ‘신상’에 대한 열애가 가능할 때 느끼는 일회성 만족감일지도 모른다.
아기자기하지만 결코 난삽하지 않은, 잘 다듬어진 거리였다. 그 거리엔 오르골 상점과 유리 공예점이 있었고 사이사이 작은 상점들이 즐비했다. 몇몇 건물들은 오래된 미국 영화에 자주 등장하는 건축양식이어서 좀 생경하기도 하였으나 이 건물들이 북해도 개척사를 웅변한다. 오르골 가게 안에 들어서니 은은하면서도 경쾌한 음악이 귓볼을 어루만지며 발등까지 흘러들었다. 음악에 젖은 발은 저절로 미끄러져 왈츠를 추고 있었다. 그래서 한 곳에 머무르지 못하고 자꾸 빙빙 돌며 온갖 모양의 오르골에 푹 빠졌다.
유리공예점 상품들은 좀 시시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것도 좀 싸구려 냄새가 나는 것들이었다. 일본 이 곳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미감이 없다. 그러나 일행과 떨어져 혼자 어느 갤러리에 들러서 본 작품들은 숨 막히게 아름다웠다.
빵가게에도 들르고 초콜릿가게도 들렀다. 나이테가 보이는 나무 기둥 모양의 빵은 그 모양부터가 예사롭지 않아서 보고 또 보고 또 봤다. 맛이 궁금했지만 사지는 않았다. 저녁 무렵이어서인지 쇼핑객들이 붐볐다. 여기저기 인력거꾼들이 호객 행위를 했다. 한번 타고 싶었으나 아무도 호응을 안 해서 그냥 사진만 찍었다.
소프트아이스크림은 단박에 나를 사로잡았다. 평소에 소프트아이스크림을 먹지 않는데 그 아이스크림은 정말 맛있었다. 고소하면서도 달고 달면서도 느끼하지 않고 담백했다.
호텔로 오는 길에 그 거리를 다시 떠올렸다. 오르골, 유리장식, 초콜릿, 케이크, 소프트아이스크림, 정말 그 거리는 일상의 땀냄새를 살짝 비켜선 곳이었다. 몽환적이라기보다 동화적이었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것에 푹 빠지는 아이 같은 순진무구함을 되살려내는 것 같았다. 살면서 가끔은 이리 아이같이 단맛에 빠져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 인생의 단맛이 아이스크림과 초콜릿 같은 혀끝의 맛만은 아니잖은가. 아이스크림과 초콜릿은 생활의 단맛을 찾아가라고 부추겨 보는 일종의 미끼 상품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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죠잔케이 지역은 온천지역이란다. 내가 머문 객실은 다다미방이었다. 나는 그 풀냄새가 싫었다. 촉감도 별로였다. 대나무 돗자리였으면 훨씬 좋을 것 같다. 저녁은 호텔 뷔페식이었다. 일본 반찬류는 좀 짰지만 나머지는 모두 입에 착 달라붙게 맛있다. 오징어회는 어찌나 부드럽고 고소한지 그게 오징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쇠고기스테이크는 우리 한우와 비슷했다. 야들야들하고 고소하고 감칠맛이 났다. 정말 배가 부르게 먹고 일행들과 동네 산책을 했다. 동네는 아주 작았다. 동네 초입 족욕장에 둘러 앉아 온천물에 발을 담그니 하루의 피로가 가신다. 동네마다 이런 족욕장이 있다고 한다. 물은 아주 뜨거웠다.
호텔로 돌아와 유카타로 갈아입고 온천욕장으로 갔다. 한국식 목욕탕과 다르다고 누누이 강조하던 인솔자가 설명한 대로 따라했다. 노천탕이라지만 천장이 있어서 그런지 탁 트인 자유로움은 느낄 수 없었지만 나른한 피로가 쾌감처럼 스며들었다.
10시쯤 일행이 모두 한 곳에 모여서 술잔을 나눴다. 아까 편의점에서 사온 아사히 맥주와 삿포르 맥주가 돌았다. 연이어 누군가가 양주를 꺼낼 때 나는 먼저 일어나 방으로 돌아왔다. 밤늦도록 수다를 나눌 분위기는 아니었다. 텔레비전을 켰다.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드라마였지만, 잠시니까 그냥 느낌으로 볼 만했다.
오늘 가장 인상에 남는 것은 거리를 오가던 수많은 작은 차들이었다. 하나같이 먼지도 흠집도 없이 깨끗했다.
첫댓글 2기까지 잘읽고 갑니다. 몇해 전 유카타를 입고 엉거주춤 포즈를 취해봤던 기억이..
온천 호텔에서는 그 옷이 참 편하더군요. 호텔 내에서는 어딘지 자유롭게 입고 다닐 수 있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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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타루 동네가 예쁘다 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