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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시>, 2009년 창간호.
<재외동포 시인을 찾아서― 신작시>
흔적 지우기 외 1편
한혜영
동짓날 밤하늘만큼이나 캄캄했던
팥죽소래기 흔들던 기억이 문득 나네요.
새알심 빼먹은 흔적 지우려고
어둠에 웅크리고 앉아 팥죽소래기
가만가만 흔들어댔던 어린 시절이.
사랑이 들었다 나간 마음도 그럴 테지요.
그 흔적 없애보려고
마음의 가장자리를 잡고 가만가만
흔들어대는 사람
이 밤에도 여럿 있을 것입니다.
살아서 맞는 이별이 이럴진대
생목숨 쏙쏙 뽑아갔던 흔적이야
오죽이나 또렷하고 기가 막힐 것인지요.
흙 퍼 올린 자리가 우물이 되거나
연못이 되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습니다.
조약돌 뽑혀나간 해변으로
파도가 부지런히 다녀가는 이유
바람조차 예사로
불지 않는다는 것도 이제야 깨달아요.
어느 굵은 마디를 가진 손가락이
지구의 가장자리를 잡고
가만가만 흔들어대는 것이겠지요.
간밤에 빠져나간
목숨들의 흔적들을 지우려고
오늘도
오늘 모가치의 바람이 어김없이 불고 있네요.
올랜도 간다
대구탕, 순두부 한 그릇 만나러 고향집 간다
시간 반도 넘게 운전을 해서 올랜도 간다
고맙다고, 대구탕 순두부가 고맙다고
같이 밥 먹어줘서 고맙다고
벌건 얼굴로 꾸벅꾸벅 맞절하러 올랜도 간다
이것이 생(生)이지 펄펄 끓는
뚝배기에 숟가락 담가 보려고 올랜도 간다
비라도 내리는 날은
좀 더 멀리까지 나가도 보고 싶지만
그것이 눈발이라면
영영 달아나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을 테지만
플로리다서 눈발이라니?
당치도 않은 말 때문에
귀갓길 아직도 지우지 못하는
우리는 생리를 치르듯
한 달에 한 번
꼬박꼬박 올랜도 갔다가 집으로 온다
■ 한혜영
1994년 『현대시학』 및 1996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뱀 잡는 여자』, 장편소설 『된장 끓이는 여자』, 장편동화 『팽이꽃』 등이 있다. 현재 미국 플로리다에 거주하고 있다.
종이접시와 포크 외 1편
임혜신
근처에 어슬렁거리지 마시오- 경고가 걸린
3층 건물 옥외 층계에 종이접시와 포크가 놓여 있네
아직 청소부가 오지 않은 이른 새벽이면
담배꽁초나 술병 혹은
찢어진 담요 조각이 흩어져 있기도 하던 곳
건물에 바싹 몸을 붙인 자의 취기와 허기와
분노가 두려웠던 그 자리에 놓인
젖은 종이접시와 스테인리스 포크
반쯤은 얼룩지고
반쯤은 햇살에 빛나고 있네
가만히 내려다보니
따스한 입술이 핥고 간 자리가 보이네
숭숭한 짐승의 털과 굽은 손자국
심장을 지나 배꼽을 지나 발목까지
남김없이 먹어 치운 야생의 식욕
가진 재산 모두 콘크리트 층계 위에 펼쳐놓고
침팬지에게도 한 술 떠먹이고
두더지에게도 한 술 떠먹이고
거리의 여인과
주인 잃은 개에게도 한 술 떠먹이던
임자 없는 쾌락,
들려오네, 달빛 좋던 간밤의 사이렌 소리
몸 하나로만 질주하던 부랑자들
둥근 혀끝에 쏟아지던 별똥별의 환락
아낌없이 버려두고 어디로 가셨는가
아침 햇살에 반쯤 빛나고 있는
저 낯익은 먹이와의 사랑
미미의 환상적 주말
햇빛 나른한 오후
달콤한 낮잠을 자다가
시끄러워라, 벌떡 일어나 밖을 내다보니
왼쪽 집 미미가 음악을 쾅쾅 틀어놓고
차를 닦고 있습니다
돈도 없고 시간도 없어서
어디로 떠날 수 없는 미미가 또,
부글부글 거품을 품으며 노래를 부르고 있습니다 튼튼하고 싱싱한 불의 손 불의 머리카락 헤비메달 리듬 쿵쿵쿵 온 동네 심장을 깨우는 한낮의 불협화음,
호스를 옆구리에 끼고 폭포처럼 물을 품는 미미 눈앞이 캄캄해지도록 쏟아지는 빛의 폭풍 속 라디오는 천둥처럼 입을 열어 노래합니다 문지르라 문지르라 쓱쓱 문지르라 별 하나, 별 둘, 바퀴 하나, 바퀴 둘, 문지르라 문지르라, 쓱쓱,
즐겁고 동그란 모음들 모두 모여 악악악, 집채를 흔드는 소리 화성을 지나 토성을 지나 은하수 지나 안드로메다 지나 푸른 말갈기를 휘날리며 검은 천공의 목청을 들락거리는
30마일 반경 밖으로 가본 지 오래인 여자의
벌 나비 날아드는 그 어느 화사한 꽃의 오렌지빛 심부같이
왁자지껄 행복한 일요일 하오
이 무슨 잠꼬대인가
나도 따라 소리칩니다.
거― 어기, 오른쪽 집 아저씨,
저 꼴이 그렇게도 보기 싫으시다면
솜뭉치로 눈과 귀를 잠시 막아주시거나
딴 동네로 이사를 가버리시라구요오―.
■ 임혜신
충북대 국문과 및 플로리다 주립대 공대 졸업. 1995년 『워싱턴문학』 및 1997년 『미주 한국일보』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 『환각의 숲』, 시론집 『오늘의 미국 현대시』가 있다. 현재 미국 플로리다에 거주하고 있다.
웃음의 달인 외 1편
신지혜
웃음을 제대로 배운 적 있는가
웃음의 달인은 함부로 웃지 않는다
다양한 웃음의 목록들,
하지만 달인의 웃음은
뒤로 목을 젖히고
활짝 핀 나팔꽃 꽃 모양이어야 한다
웃음은 지상에서 가장 향기로운 꽃이기 때문이다
목젖 환히 꽃술처럼 드러내고
소리 또한 거짓 없이 맑고 티 없어야 한다
고정된 웃음에는 웃음의 미학이 없다
비애와 비웃음의 찌꺼기가 스며 있는 것은
양질의 웃음이라 할 수 없다
웃음의 도를 알아야 비로소
제대로 휴식을 안다고 논할 수 있다
웃음의 진원지에서 웃음의 파문이 번진다
온몸이 물풀처럼 흔들린다
웃음 뒤에는 늘 진동과 여진이 남는다
큰 웃음의 해일은 태풍처럼 강력하여
오래 묵은 절망마저 굴복시킨다
웃어야 할 때는 거침없이 그 비움의 몫 다하여
아무것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먼지 한 톨마저도 털어 버리듯이,
한 번 웃음에 두 번 다시 뒤돌아보는 일 없이,
호방하게 터트려 버린다
마치 그 웃음이 당신의 생에 단 한 번인 듯
당신이 웃었던 웃음들의 마지막 완결인 듯이
지구별 어드벤처
청소년 정신건강센터 자원봉사 상담시간,
목소리 주인공은 올해 17살이라 했다
죽고 싶어요
사람이 왜 여기에 태어나 이처럼 고통스럽게 살다가
마침내 죽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나는 어린 붓다에게 말했다
누가 널 보내서 네가 온 게 아니지
너 자신이 스스로 왔지
네가 오니까 비로소 캄캄한 우주가 열렸지
네가 아니면 저 태양도 달도 떠오를 수 없지
이 지구여행은 너의 고귀한 어드벤처지
와서,
너 자신과 면벽하는 것이지
네가 누구냐고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묻고 사귀는 거지
너의 참 뿌리가 무엇인지 아는 거지
네가 바로 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거지
수억겁 살았던 무수한 너 자신들의
총체적 종합 결산이 바로 지금의 너이지
그러니까 너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야 하지
가장 만나봐야 할 사람도 너이며
최종 목적지도 너 자신인 거지
우연히 갱단에 가입하여 코카인과 마리화나를
상습적으로 흡입하였으며
늘 자신감도 없고 죽고 싶다 했다
주변에 속 이야기 나눌 가족이나 친구도 없다 했다
어린 붓다가 다섯 시간 동안 전화를 끊지 않았다
자신을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겠다 울먹였다
나는 큰 소리로 덧붙였다
고맙다. 이 지구별에 네가 와 주어서 참말 고맙다!
■ 신지혜
2000년 『미주 중앙일보』 및 2002년『현대시학』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 『밑줄』이 있다. 현재 『시와 뉴욕』 편집위원, 뉴욕예술인협회 회장이다.
<대담>
맹문재 : 한혜영, 임혜신, 신지혜 선생님 안녕하세요. 『시와시』 창간호에 세 분 선생님과 대담을 나눌 수 있어 반갑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합니다. 이번 대담은 『시와시』가 적극적으로 재외동포 시인들을 발굴하는 차원에서 기획되었는데, 그 첫 번째입니다. 앞으로 많은 관심을 가져주시고 또 도와주세요. 요즘 한국의 날씨는 여름 끝자락이어서 낮에는 꽤 덥지만 아침저녁으로는 선선하네요. 플로리다에 거주하시는 한혜영 선생님, 그리고 뉴욕에 거주하시는 신지혜 선생님, 미국의 날씨는 어떤지요?
한혜영 : 먼저 『시와시』창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처럼 귀한 지면을 미주지역의 시인들에게 주신 것에 대하여 감사하고요. 작품을 써도 발표할 지면이 제대로 없어 많이 위축되어 있는 것이 이곳 시인들의 실정인데, 이보다 감사한 일은 없지요. 『시와시』는 필시 잘될 거예요. 지금 이곳의 날씨는 한국으로 치자면 초가을 정도 됩니다. 플로리다는 10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는 온화한 날씨가 계속된다고 보면 되지요.
신지혜 : 지면으로나마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매우 반갑습니다. 뉴욕 날씨는 대체적으로 한국의 기온과 비슷합니다. 하지만 환경 재앙이라고 말할 수 있는 지구 온난화 현상으로 인하여 이곳도 예외가 아닌 것 같습니다. 올해는 덥지 않은 저온의 날씨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맹문재 : 그렇군요. 지구의 환경에 모두들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이야기의 방향을 돌려보지요. 얼마 전 양용은 선수가 미국프로골프 챔피언십에서 우승해서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습니다. 또 며칠 전에는 아이큐 176으로 MIT에 입학한 레이첼에 대한 기사도 크게 실렸습니다. 이외에도 동포들에 관한 뉴스를 자주 듣게 되는데, 무척 열심히 살고 있다는 인상을 갖습니다. 동포들의 삶을 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시인들의 경우 어떻게 활동하고 있는지 좀 들려주실 수 있는지요.
임혜신 : 우리나라 사람들은 재능이 많고 또 목표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기 때문에 여러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스포츠나 음악이나 미술과 달리 문학은, 특히 시는 언어라는 매체의 한계성 때문에 한국인으로서 미국에서 두각을 나타내기는 참으로 힘든 일이라 할 수 있어요. 언어권을 옮길 경우에 누구에게나 생기는 벽이죠. 미국에서 활동하는 잘 알려진 한국계 시인으로는 캐시 홍, 김명미, 수지 곽, 샌드라 림 등 이민 2세들인데 하와이, 캘리포니아, 뉴욕을 중심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말하자면 한국계 미국 시인인 셈이죠. 이들과 달리 한국어로 시를 쓰는 1세대 시인들은 주로 한국 문학단체를 통해 활동하고 있고, 한국어로 쓰인 시의 영역과 앤솔로지 형태의 영시 출판에 점점 관심과 열정을 높여가고 있습니다. 루마니아 태생 독일 작가인 헤르타 뮐러가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올해 특히 이민문학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유배 혹은 이민 문학은 두 개의 언어와 그 안에 농축된 둘 혹은 다중의 문화를 표현해낼 수 있다는 데서 여러 가지 제약에도 불구하고 풍요로울 수 있다는 장점도 있습니다. 디아스포라문학은 작가 내면세계에 자리 잡은 모국의 정서를 타문화 속으로 표출해냄으로써 말하자면 의도하지 않은 문화사절 노릇을 할 수도 있지요. 한국어로 쓰인 시의 가장 큰 문제는 좋은 번역이 필요하다는 것이죠. 시의 번역은 힘든 작업입니다. 번역이 불가능한 경우도 참 많습니다. 그렇다고 번역하기 좋은 시를 쓰자고 할 수는 없는 일이죠. 좋은 시인만큼 좋은 번역가, 문학적 소양과 언어 능력을 가진 진지한 번역가가 미주 한국문학뿐 아니라 본국의 문학을 위해서도 절실하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맹문재 : 한국문학의 번역 문제를 다시금 인식시키는 말씀이네요. 이야기의 방향을 다시 돌려보지요. 고국에서는 노무현, 김대중 전 대통령 두 분이 서거하는 슬픈 일이 일어났습니다. 동포들도 이 사실을 잘 알고 있겠지요. 어떠한 반응들을 보였는지 궁금하네요.
신지혜 : 그렇습니다. 한 해에 두 분이 서거하시다니 말입니다. 특히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는 동포 및 전 세계인에게 충격을 안겨준 일이었습니다. 전원생활로 돌아가 한 서민의 소박한 꿈을 일구고자 한, 그저 보통사람의 작은 소망이 무참히 짓밟힌 안타까운 일은 모두에게 경천동지할 일이었어요. 역사가 명명백백 판가름해주리라 생각합니다. 역사의 거울이 잠시 안개에 가려진다고 하여 그저 덮여버리지는 않으리라 봅니다. 많은 한인들이 이곳에서도 분향소를 설치하고 삼삼오오 조문의 띠를 이었지요. 모두들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달며 애도의 물결을 이루었습니다. 참 안타까운 일인 것 같습니다.
맹문재 : 다시 생각해도 참으로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제부터는 선생님들과 개별적으로 이야기를 나누어보려고 합니다. 먼저 한혜영 선생님과 해보지요. 저와 선생님과는 첫 시집 『태평양을 다리는 세탁소』(천년의시작, 2002)와 두 번째 시집 『뱀 잡는 여자』(서정시학, 2006)를 비롯해 저의 대담집 『행복한 시인 읽기』(서정시학, 2009)에 함께한 인연이 있을 정도로 가까운 사이이지요. 선생님의 『뱀 잡는 여자』에 실려 있는 가족 이야기며, 나이 듦에 대한 인식이며, 이국에서의 삶의 모습이며, 여성성을 추구한 시들이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그만큼 작품들이 구체성을 가져 힘이 있는 것이지요. 「뱀 잡는 여자」나 「두런대며 여름은 지나가고」는 많이 알려져 있으므로, 이번에는 「똥끝」을 소개해보겠습니다. 요즈음에는 어떠한 데 관심을 가지고 시를 쓰고 있는지요.
임종이 가까워지면 제일 먼저 활짝 열리는 것이
항문이라 하네 열고 채우기를 반복했던
둥근 괄약근의 열쇠를 찾을 수 없는
세상 바깥으로, 아주 던져버리는 일이라 하네
어머니의 똥끝은 왜 그리 자주 탔는지
다급한 일 겨우겨우 해결을 보고 나면
어느 틈에 불씨 되살아나 바짝바짝 타들어갔던
‘당신의 항문을 폐쇄합니다’
의사는 매정하게도 각께를 땅땅! 쳐버렸다네
캄캄한 절망 곳곳을 다 뒤져가며 암(癌), 암, 암
전부 캐내고 말 거라고, 날카로운 불면 끝으로
후벼 파낸 것들을 들고 달려갔지만 턱 하니
가로막는 각께 앞에서 울부짖다가 도리 없이
급하게 벽을 뚫어서 만든 인공 문으로
울컥울컥, 그 서러운 것들을 내놓았다네
둥근 손잡이도 자존심도 없이 활짝 열려 있던
무시로 죽음이 들락거렸던 비닐 항문
그 중심에 기정사실로 꽂혀 있던
저승의 빨대는 참말이지 입심 한번 무서웠네
누구나 산다는 것은 똥끝 태우는 일의 연속이겠지만
어쩌다 똥끝을 다 태워먹고 자신의 몸속에 갇혀
전전긍긍하며 절규했던, 아아 내 어머니!
똥끝이 땅끝과 같다는 말임을 그때 나는 깨달았네
(―「똥끝」 전문)
한혜영 : 생활이 여전해서 그런지, 제 시 역시 어떤 변화라든지 전환의 계기를 맞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최근 들어 조금씩 다른 곳으로 관심이 가고 있습니다. 생태계 문제라든지, 이민자들의 애환문제에 보다 들여다봐야 한다는 책임감을 비로소 느끼고 있습니다. 특히 이민자들의 문제에 대해 그동안 직무유기를 한 것만 같은 괴로움이 들어요. 그런 반성 때문에 근래 들어 책임의식을 강하게 느끼는데, 정작 접근하려면 실어증에 걸린 것처럼 가슴만 먹먹해요. 제가 이민생활의 어려움을 절실하게 겪어보지 못한 것에서 오는 것일 수 있겠지요. 그리고 또 다른 이유를 들자면 갱년기의 터널에 아직까지 갇혀 있다고 할 수 있겠고요.
맹문재 : 다음으로 임혜신 선생님과 얘기를 나누어보지요. 아직 뵙지는 못했지만, 지난번에 간행한 『오늘의 미국 현대시』(바보새, 2005)를 잘 읽었다는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실비아 플라스나 알렌 긴즈버그 같은 시인의 해석도 재미있었지만, 저는 차알스 브꼬브스키 같은 노동자 시인의 소개에 더욱 관심을 가졌습니다. 미국의 대표적인 현대 시인들의 작품을 번역하고 또 소개해주는 일이 결코 만만하지 않을 텐데 애를 많이 쓰셨습니다. 이와 같은 일을 하게 된 동기를 좀 들려주실까요?
임혜신 : 몇 해 전 월간 『현대시』로부터 미국의 현대시를 소개하는 칼럼을 맡아달라는 청탁을 받았습니다. 한국을 떠난 후 오래 평문은 물론 수필조차 거의 써 본 일이 없어 처음에는 망설였습니다. 자신이 없었으니까요. 또 저는 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미국 시의 문학성을 논하기가 쉽지 않았지요. 그래서 아주 단순하게 ‘내 영혼에 투영되는 미국 시와 시인의 생을 이야기하자’는 생각을 했어요. 2년 동안 연재했는데 주로 현재 활동하고 있는 시인들, 그리고 서로 경향과 나이, 배경이 조금씩 다른 시인들을 골라서 소개했습니다. 시인으로서의 명망보다는 문학적 인간사에 초점이 갔던 것 갔습니다. 이 외에도 좋은 시인, 좋은 시는 너무나 많을 것입니다. 미국인들도 “좋은 시는 읽히지 않고 사라진다”고, 좋은 시가 빛을 보지 못하는 것을 염려하고 있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 드러나는 아름다움이 있고 숨어 있는 아름다움이 있듯이 문학작품도 그러할 것입니다. 결국 기회와 발굴의 문제이겠지요.
맹문재 : 『오늘의 미국 현대시』에는 스물다섯 명의 시인들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이외에도 소개할 만한 시인들이 더 있겠지요. 어떤 시인들이 있을까요? 신지혜 선생님의 말씀도 들어보고 싶네요.
임혜신 : 소개하고 싶은 시인이 많습니다. 『오늘의 미국 현대시』를 쓰면서 저는 오히려 너무 잘 알려진 시인은 소개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클린턴 대통령 취임식에서 시를 읽은 마야 앤젤루, 유명한 흑인 시인 휴 랭스턴 등도 그런 이유로 소개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 존 애쉬베리, 찰스 라잇, 스테판 던, 리 영리, 그리고 브렌다 샤우겐시 등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는 젊은 시인들을 아무 제한 없이 자유롭게 소개하고 싶습니다. 정기적으로는 하지 못하고 청탁이 오는 대로 쓰고 있는데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이 작업을 계속하고자 합니다.
신지혜 : 미국 시인 몇 분을 추천 드린다면, 아무래도 2000년 퓰리처상 수상 시인인 윌리암스(Charles Kenneth Williams)와 2002년 퓰리처상 수상 시인인 데니스(Carl Dennis), 그리고 여류 시인인 스톤(Ruth Stone)과 그레그(Linda Gregg)를 들 수 있겠네요. 이 시인들의 작품은 깊은 사유에서 우러난 인간적인 면모가 두드러집니다. 특히 윌리암스와 데니스 시인은 단순히 사물의 존재를 묘파한 것에 그치지 않고 대륙적인 사유와 상상력으로 확장시킨 점이 돋보여 대단히 인상적입니다. 스톤은 지구를 작은 항아리로 비유한 시인으로 조선시대의 진묵대사와 같은 호방함을 연상케 합니다. 초기에는 미국이라는 다양한 스펙트럼 안에서 서구문화의 다의성을 지닌 새로운 문화적 양식들이 서로 충돌하기도 하였지만, 이제는 문화적 정신분열(Cultural Schizophrenia)의 소용돌이에서 벗어나, 시대의 완충적 역할을 하는 작품들이 많아졌다고 봅니다. 즉 자연 철학적이라든가, 인생을 탐미하고 조용히 관조하는 명상적 사유라든가, 휴머니티를 갈망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많이 담아내고 있습니다. 부조리한 현실세계를 화해의 몸짓으로, 자아의 정신가치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지요.
맹문재 : 잘 들었습니다. 선생님들께서 소개한 시인들의 작품을 어서 보고 싶네요. 임 선생님께서는 『오늘의 미국 현대시』 외에도 시집 『환각의 숲』(한국문연, 2001)을 간행했습니다. 이 시집에서 추구하고자 한 면이 있을 텐데 좀 들려주시지요.
임혜신 : 저는 문단과의 교류가 거의 없이 글쓰기를 하고 있는 셈인데, 『환각의 숲』을 쓸 때는 더 혼자였습니다. 외딴 섬에서 쓴 시들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저만의 방에서 쓴 시들이지요. 혼자 쓴다는 것에는 단점도 있지만 장점도 있는 것 같아요. 빠른 피드백이 없는 느린 글쓰기는 실컷 고뇌할 시간을 주는 장점이 있는 것이지요. 요즘 같은 시대에 좀 뒤떨어진 생각이겠으나 제 성격은 느린 것에 맞는 것 같습니다. 『환각의 숲』을 통해 제가 굳이 전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면, 불모의 땅에서도 피어나는 생명의 신비로움이었습니다. 모두가 동질화되어가는 현대사회, 휩쓸려가는 인파 속에서 알게 모르게 잊혀지고 무시되고 마는 사람들의 삶에 의미를 붙이고 싶었던 것입니다. 가만히 응시하면 개개인의 방은 모두 깊고 감각적이고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느끼는 순간 행복해집니다. 저의 고독한 외딴 섬에서 자라난 생명의, 어쩌면 터무니없이 환각일, 그 신비와 행복을 세상과 나누고 싶었던 것입니다.
맹문재 : 이 시집에서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작품은 무엇인지 궁금하네요. 한 편을 선정해서 소개해주시고 간단한 해설도 부탁드립니다.
임혜신 : 시집의 첫 번째로 실린 「하얀 난」이라는 시입니다. 작품의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편애하였다, 나는 들꽃을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에
덤불덤불 피어 있는 패랭이 제비꽃 싸리꽃을
여느 욕망에도 매달리지 않을 듯이 작고
터져버린 번뇌처럼 가벼운 야생의 꽃을
그리하여 그들이 있을 법한
거친 들길을 헤매었다
짐승처럼
바람처럼
그것이 욕망이며
그것이 번뇌임을 알지 못한 채,
꿈꾸었다
깊은 강을 사이에 두고 흐르는
수십 년 어둡고 좁은 골짜기에서
그 향기를,
그 빛깔을,
그러나 어느 날 나를 깨운 것은
커피테이블 위의 분(盆),
분 속의 하얀 난이었다
한 줌의 먼지와 몇 가지 화학약품으로
입술과 어깨와 턱을 빚어 올린
냉혈의 꽃
그가 한 번
첫겨울의 빗발처럼 단 한 번
아주 깊고 차갑게 나를 꿰뚫어보던
이후로 나는 들꽃을 찾지 않는다
아니, 꽃을 찾지 않는다
하얀 나의 창에 꽂혀
그렇게 나의 편애는 끝이 났다
남은 것은 이제
세상 온갖 괴로움을 꽃이라 부르는 일이다
생명의 한가운데 피어나는 번뇌의
싸늘한 살과 뼈를 꽃이라 부르는 일
저 외로운 욕망의 삽질들을 다, 꽃이라
부르는 일……
(―「하얀 난」 전문)
이 시는 시집의 해설을 써주신 정효구 선생께서 잘 설명해주셨지요. 저는 이 시가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향해 내미는 제 영혼의 낮은 손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들은 나름대로 모두 진실이란 것, 순수라는 것을 찾아 헤매는 것 같습니다. 찾아 헤맨다는 것, 사랑한다는 것, 그것을 저는 편애라 불렀습니다. 진실하지 못한 것, 순수하지 못한 것에 저항하는 이런 편애는 그러나 그 자체로 한계가 있는 것이지요. 편애는 배타와 자만의 또 다른 이름이기도 하니까요. 사람이 어찌 편애를 그만둘 수 있을 것이며 편애 아닌 사랑이 이 세상에 있기나 하겠는지요. 하지만 우리는 때로 속성으로부터의 아름다운 탈출을 꿈꾸지요. 자기 아닌 것들에게, 자신이 사랑하지 못했던 것들에게 조금이라도 손을 내밀 수 있다면 보다 열린 편애를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자연 앞에, 이 광활한 우주 앞에, 우리는 참으로 평등하지 않겠는지요. 가끔 저는 반 농담 삼아 이런 생각은 영혼의 사회주의라고 말하곤 하지요. 그런 면에서 저는 영혼의 사회주의자입니다. 동등하게 영혼과 사랑을 나누어 가진 세상을 꿈꾸는 자 말입니다. 편애를 넘어서고자 하는 편애는 실용적으로 쓸모 있고 미학적으로도 아름답습니다. 사실 들꽃과 분 속의 난,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가난한 자와 부자, 영혼이 정결한 자와 욕망에 들끓는 자, 주는 자와 뺏는 자, 저에게 천사였던 자와 악마였던 자, 그 중에 누가 꽃이 아니고 누가 꽃이란 말입니까. 가장 낮은 자가 마지막 아름다움을 차지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또한 저는 버리지 못합니다.
맹문재 : 잘 들었습니다. 다음으로는 신지혜 선생님과 말씀을 나누어보겠습니다. 신 선생님과도 아직 뵙지는 못했지만, 시집을 통해서는 이미 알고 있는 사이이지요. 선생님의 시집 『밑줄』(천년의시작, 2007) 역시 감사하게 읽었습니다. 동양사상이 진하면서도 현재 거주하고 있는 미국 문화들을 제재로 삼는 면에 관심이 갔습니다. 이 시집에서 추구하려고 한 면을 듣고 싶네요.
신지혜 : 저는 어릴 때부터 기독교와 불교 등 여러 종교를 접하는 집안에서 자랐습니다. 근원적 진리나 신의 관점에서 보면 우리 모두 다 지구별 식구, 은하계 가족, 무변광대한 우주의 우주인들이 아닐 수가 없지요. 또한 동물, 식물, 어류, 조류, 미생물 할 것 없이 모두가 공생, 공체, 공심으로 동시간대 위에서 함께 어우러져서 돌아가는 존재들이지요. 즉 서로 빽빽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사사무애(事事無碍)적 다툼일 뿐이지요. 이것엔 가시적인 것이나 비가시적인 것이나, 자연과 비자연, 동서양, 종교, 피부색, 생김생김, 천하고 귀한 것, 이것과 저것이 다 무엇에 따로 걸림이 없습니다. 이렇게 한시도 쉬지 않고 회전하는 실상의 세계에선 어느 것 하나 신 앞에 평등하지 않은 것이 없으며 고귀하지 않은 존재가 없습니다. 제 시집『밑줄』에는 현실, 종교, 자연, 우주, 모든 것에 어떤 구속이나 편파적인 차별의 경계도 없습니다. 모든 현상들을 어디에도 묶지 않고 그저 생명과 자연, 동서양의 사상적 공존, 그리고 우주적 원리를 자유로운 사유로 묘파하고자 한 시집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맹문재 : 신 선생님께도 이 시집에 수록한 작품 중에서 한 편을 소개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아울러 간단한 해설도 부탁드려요.
신지혜 : 시집의 표제작인 「밑줄」을 소개해보고 싶네요. 전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바지랑대 높이
굵은 밑줄 한 줄 그렸습니다
얹힌 게 아무것도 없는 밑줄이 제 혼자 춤춥니다
이따금씩 휘휘 구름의 말씀뿐인데,
우르르 천둥 번개 호통뿐인데,
웬걸?
소중한 말씀들은 다 어딜 가고
밑줄만 달랑 남아
본시부터 비어 있는 말씀이 진짜라는 말씀,
조용하고 엄숙한 말씀은
흔적을 남기지 않는 것인지요
잘 삭힌 고요,
空의 말씀이 형용할 수 없이 깊어,
밑줄 가늘게 한 번 더 파르르 빛납니다
(―「밑줄」 전문)
진리 본연의 모습은 진공묘유한 공(空)의 세계죠. 그리고 사사로이 이 공에 천 개를 넣거나 한 개를 넣거나 그 모양 그대로 오직 여여할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또 일체 생명을 내고 들이는 창조력을 가진 진여의 세계입니다. 우리 앞에 제 아무리 이것과 저것이 어떻다고 주장하거나, 우리 앞에서 소란한 것들도 한낱 오고 가는 부유한 것일 뿐, 모든 생명체가 태어나고 죽는 것들도 이 우주적 체계 안에서는 언제 오고 갔다 할 수도 없이 찰나 찰나에 어우러져서 돌아가고 있기에 공하다고 할 수 있지요.
경전에서처럼 모든 것은 창조주 앞에 헛되고 헛된 것이며, 또한 헛되지 않은 제법의 실상이기도 하지요. 사실 현상세계를 가득 메운 텅 빈 원자들이 끼리끼리의 진동과 파장대로 뭉쳐, 이 얼굴로 혹은 저 얼굴로 우주 삼라만상을 빚어내고 드러낸 세계일 따름입니다. 천 송이 꽃이 핀들, 천 마디 천 가지 미사여구의 말씀인들, 역시 그것들의 근원적 진리인 본처의 말씀은 아니지요. 그러므로 이 시의 “空의 말씀”은 본시부터 비었다 가득 차 있다 할 것도 없는 세계를, 즉 생명을 창조하고 멸하는 진리의 근원 세계를 의미하고 있어요.
맹문재 : 세 분의 작품 세계를 잘 들었습니다. 그러면 이야기의 방향을 다시 돌려볼까요. 세 분 선생님은 언제, 어떤 계기로 이민을 가셨는지요?
한혜영 : 저는 1989년 『아동문학연구』라는 잡지에 동시조가 당선되고, 그 이듬해인 1990년에 미국으로 왔어요. 결혼을 해서 오게 되었는데, 미국으로 와서는 직업을 가진 적 없이 주부로 들어앉아 글을 쓰면서 지금까지 지내고 있습니다. 다른 것에 시간을 빼앗기지 않고 글만 쓸 수 있었다는 점에선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지만, 어찌 보면 너무 고립된 생활을 하지 않았나 싶어요. 지금은 인터넷이 발달해서 사정이 많이 달라졌지만, 1990년대만 해도 많이 답답한 생활이었지요. 제게 문학이라는 것이 없었다면 아마도 이민생활을 견디기 어렵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해봅니다.
신지혜 : 1998년 남편이 해운회사의 뉴욕지사 지사장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습니다. 처음엔 3년간 있다가 귀국하려고 계획했었는데, 뉴욕 지사가 독립회사로 되면서 남편이 회사를 인수해 경영하는 바람에 이곳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언 10여 년이 넘는 세월이 초속으로 지나가 버렸군요.
맹문재 : 그렇군요. 그러면 현재의 생활은 어떤지 궁금하네요.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아니면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요?
한혜영 : 저는 미국으로 온 뒤 지금까지 가정주부이자 전업 작가로 살아왔습니다. 시를 써서 수입을 얻기는 힘들지만, 장편동화는 어느 정도의 수입이 있으니까 전업 작가라고 해도 될 듯싶네요. 활동이라고 한다면 미주 엘에이에서 발행하는 『미주 한국일보』의 ‘이 아침의 시’라는 코너에 단평을 일주일에 두 번씩 싣고 있어요. 벌써 만 3년이 되었네요. 그밖에는 한 달에 한 번, 시를 배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모임에 나가서 지도를 해주는 것이 유일한 외출입니다.
임혜신 : 앞의 질문에 대한 답변도 함께 드리지요. 제가 미국에 온 지 어느덧 26년이 되었습니다. 힘들었던 날들이 있었지만 두 개의 고향을 갖는다는 것이 나쁜 것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26년이라는 시간 중의 반은 제 스스로에게 부여한 제2의 유년이기도 했습니다. 손과 발이 재산의 전부였고 그만큼 자유로웠습니다.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헤맬 광야가 있었고, 헤맬 수 있었던 젊은 날이 있었다는 것은 행운일 겁니다. 지금은 조그만 회계사무소의 대표로 일하고 있는데, 시간이 넉넉하지 못해 시간을 아껴 글을 쓰고 번역도 하고 그러며 살고 있습니다. 돌아보면 고향을 떠난 이후 지금까지 문학과 관계없는 일만 하며 살아온 것 같습니다. 문학과 무관한 일들이 오히려 상호관계를 건강하게 맺는 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해보는데 글쎄요, 머지않아 한 가지를 택해야 할 때가 올 것 같습니다.
신지혜 : 현재 남편이 경영하는 회사 일을 틈틈이 돕기도 합니다. 그 외엔 문화예술 활동을 하고 있어요. 뉴욕의 예술인 협회를 몇 년 전 창립했어요. 15개의 예술 분과에 뉴욕 거주의 다국적 예술인들로 현재 1,300여명의 회원이 있습니다. 그 외에 『뉴욕 중앙일보』『보스톤 코리아신문』『뉴욕일보』 등의 한인 신문에 좋은 시 칼럼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맹문재 : 말씀을 들으니 모두들 활발하게 활동하고 계시네요. 앞으로 더욱 큰 활약을 해주시길 기대하겠습니다. 다음으로 주미 시인들의 창작활동은 어떠한지 궁금하네요. 시인의 수는 어느 정도이고 어떤 활동을 하고 있으며 주목할 만한 시인이 있으면 소개를 부탁드릴까요?
한혜영 : 미주에도 문학단체가 몇 개 있습니다. 가장 오래되었고 중심이 된다고 할 수 있는 단체는 엘에이에 있는 ‘미주문인협회’이고요. 이밖에 ‘재미시협’이 있고, 뉴욕과 시카고, 워싱턴 등 몇 개의 대도시를 중심으로 문인협회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미주 전체의 시인들 숫자는 대략 180명 정도 되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주목할 만한 시인 가운데 비교적 등단 연도가 오래된 분들로는 마종기, 김정기, 배미순, 곽상희 등의 선생님들이 계시고요. 1990년대 이후에 등단한 시인들로는 이 자리에서 함께 대담하고 있는 신지혜, 임혜신 시인을 비롯하여 조옥동, 한길수, 조성자, 장태숙, 서량, 안경라, 구자애 등을 들 수 있겠네요.
맹문재 : 그렇군요. 그렇다면 한국 시인들이 영어 시집도 출판하는지요. 그 상황에 대해 들어볼 수 있을까요?
신지혜 : 우리나라 시인이 미주에서 영어 시집을 많이 출간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현재 ‘대산문화재단’에서도 영시집 발간을 지원하고 있지요. 그러나 제가 미국 대형 서점에서 우리나라 시인의 영시집을 직접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아시아 시인들의 시집 코너에도 눈에 띄지 않는 것은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짚고 가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출판사 선정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문제라고도 여겨집니다. 반드시 대형 출판사를 선호하지 않을지라도 적어도 사람들의 발길이 가장 분주한 반즈앤노블(Barnes & Noble) 서점에서 독자들이 우리의 좋은 영시집들을 손쉽게 접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실제 어떤 시인은 자축에 그치는 경우를 보기도 하는데, 그 점이 매우 안타깝습니다. 우리의 우수한 동양문화와 진경이 담긴, 좋은 시집들을 보다 널리 다국적 독자들이 함께 읽을 수 있도록 판로 개척과 유통 문제에 좀 더 신경을 써야 할 것입니다. 영시집 출판 과정에 대해 문의를 많이 받곤 하는데, 이곳에선 크게 나누어 ‘자비출판’과 ‘출판사의 심사’에 의해 인세를 받고 출판하는 두 과정이 있습니다. 최근의 서점에서는 1인의 단행본 시집보다 시 모음집 형태의 하드커버 시집들이 대체적으로 독자들에게 선호되는 추세인 듯합니다. 현재는 금융위기로 거의 모든 분야에서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이지만 앞으로 경기가 회복된다면 출판가나 독자들도 다시금 활발해질 것으로 낙관하고 있습니다.
맹문재 : 잘 알았습니다. 저도 영시집을 준비하고 있는데 언제 자문과 도움을 부탁드려야겠네요. 미국에서 창작활동을 하는 데는 여러 가지로 어려운 점이 있을 텐데 어떤 면인지 궁금하네요.
신지혜 : 타국에서 모국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외롭고 고독한 일임에 틀림없습니다. 무엇보다 치열하게 자신과의 투쟁을 해야 하니까요. 무엇이든, 어떤 분야이든 세상에서 시간과 노력의 투자 없이 되는 일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 저의 소견입니다. 한국에서보다도 더 많은 독서, 더 많은 시간 투자를 해야만 하는 각고가 뒤따릅니다. 몇 배 이상의 노력이 요구되는 것이지요. 저는 매주 한국에서 발간된 신간 서적들을 인터넷으로 살펴서 한인 서점에 주문합니다. 책들이 5일 정도 걸려 도착하지요. 때때로 회의가 없는 것이 아니지만, 묵묵히 무소의 뿔처럼 혼자 위로하고 혼자 격려하며 수행자처럼 뚜벅뚜벅 걸어가고 있습니다.
맹문재 : 현재 미국 시단의 흐름 혹은 문화 현상 중에서 고국의 시인들이나 독자들에게 소개해줄 만한 것이 있는지요. 임 선생님께서 이 분야에 관심이 많으실 것 같은데요.
임혜신 : 요즘은 시의 하이브리드 시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20세기에 팽만했던 체험시, 고발시들이 낭만과 초월적 비전, 실용성과 접합되면서 새로운 시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다고 여겨집니다. 새로운 차가움, 혹은 새로운 뜨거움이 요즘 문학의 명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 세기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월남전, 중동전, 대공황을 겪은 역사의 격동기였지요. 그만큼 극단의 체험이 많아 작품의 주제로 보편성을 띠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여전히 지난 세기의 문제가 남아 있지만 그 문제들을 계속해서 거론하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머물기보다 넘어가기를 원하고 있는 거지요. 포스트모더니즘은 그렇게 깊어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고발보다 성숙을 원하고 있는 것이지요. 이제 시인이나 작가들도 글을 쓸 수 있는 체력을 유지하기 위해 조깅하고 술 끊고 담배 끊고 요가도 합니다. 물론 다른 쪽에서는 여전히 아나키즘적 자유와 고발을 더욱 날카롭게 추구해나갈 것이겠지요.
맹문재 : 앞으로 어떤 활동계획을 가지고 있는지요? 시집 출간이나 다른 분야의 계획이 궁금하네요.
신지혜 : 현재 두 번째 시집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올해 말이나 내년 중에는 출간되지 않을까 예상합니다. 영시집도 출간 준비를 하고 있는 중입니다. 무엇보다 홀로 와신상담하며 늘 치열하게 삽니다. 이 삼라만상이, 모든 유정(有情)과 무정(無情)이 제각기 나름대로 치열하지 않은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무엇보다 제 자신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일이 가장 치열합니다. 제게 시는 광대무변한 우주의 체(體)이자, 곧 혼(魂)이기도 합니다. 시를 쓴다는 것은, 세계에 대한 묘관찰지(妙觀察智)로 사물과 현상을 명징하게 조응하고 성찰하게끔 하는 수련과 깨달음의 계기를 주지 않나 생각합니다. 물론 시가 시의 장르에만 국한된다면 그것이야말로 감옥이겠죠. 어떤 분야든 서로가 상즉 상입(相卽 相入)하고 중중무진(重重無盡)하는 공존의 세계가 아닐는지요. 초대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시와시』의 창간에 축하를 드리며, 이 시대의 시문학에 신선한 활력을 주고 큰 곳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임혜신 : 첫 시집을 낸 지 근 10년이 되었어요. 요즘 그동안 써온 지지부진한 작품들을 정리하는 작업을 하면서 더불어 시문학 전반에 대한 그간의 제 생각들도 곰곰이 짚어보고 있습니다.
한혜영 : 저는 내년 봄학기를 겨냥해서 동시집 출간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문단에 첫발을 디딘 것이 1989년 동시조 부문이었으니까, 아동문학을 시작한 지 20년 만에 나오는 동시집이네요. 동시조와 동시를 겸한 첫 동시집이 되는 셈이어서 제게는 나름대로 의미가 있습니다. 이밖에 앞으로의 목표라면 지긋지긋한 플로리다를 하루 빨리 탈출하는 것이고요. (웃음) 본래 계획했던 대로 본국과 미국을 오가며 살 수 있는 날이 속히 오기를 바랄 뿐입니다.
맹문재 : 미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시는 세 분의 귀중한 말씀을 들으니 여러 가지로 깨달은 바가 많네요. 좋은 말씀들 감사드립니다. 내내 건강하시고 좋은 작품 많이 쓰세요. 고국에 오시게 되면 꼭 뵐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 맹문재
대담집 『행복한 시인 읽기』, 시집 『먼 길을 움직인다』『물고기에게 배우다』『책이 무거운 이유』, 시론집 『한국 민중시 문학사』『시학의 변주』등이 있다. 현재 안양대 국문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