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나님의 폭력성
2023년 10월 29일 본문 말씀: 디도서 2:11-12
(2: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2: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구원이란 치료가 아닙니다. 치료가 정상인이 되어 전에 살던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하지만 구원이란 이 세상을 떠나는 현상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눈에 보이는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자신의 전부를 부정하는 일이 됩니다. 그동안 태어나면서 겪었던 모든 것들이 이 세상 삶에 최적화된 상태로 변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참으로 무리하고 무모한 일처럼 느껴집니다. 안되는 일 정도가 아니라 아예 논제거리의 대상조차 되지 못할 주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에서 맹수보다 더한 것과 싸웠다고 말합니다. 에베소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사도 바울은 왜 이 세상에 존재해야 될 인물입니까?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시니 심지어 사람들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나고 악귀도 나가더라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하며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하는지라”(행 19:11-16)
사도는 말합니다. 전 세계가 악마 휘하에 사로잡혀 있다고 말입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엡 2:1-3)
이점은 구약에서 일관되게 주님께서 실시하신 세상 판단에 따른 겁니다. 구약에서는 하나님께서 애굽이라는 나라에서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을 따로 분리시켰습니다. 이 분리과정에서 엄청난 폭력성이 일어났고 그 뒤에서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감히 상싱치도 못할 일이 일어납니다. 우선 유월절 그날 밤에는 어린양의 피가 없는 집안은 사정없이 하나님에 의해서 죽임을 당합니다.
그리고 남자만 60만이나 되는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 나라는 지역을 벗어나면서 그들은 몽땅 홍해 바다에 수장되는 경우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럴 때, 이스라엘 전체가 들고 나서서 모세를 엄청 비난했습니다. 그들은 죽기 싫었던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하나님에게 죽임을 당하는 그 폭력성에 가담되지 아니하면 이 세상에서의 탈출은 불가능합니다.
즉 하나님의 구원은 ‘있음’을 ‘없음’으로 바뀌시는 겁니다. 인간은 자신을 아까워할 하등의 정당성이 성립되지 아니합니다. 그것은 본인이 ‘있다’는 말은 ‘악마와 더불어 있다’를 뜻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시고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마 16:22-24)
즉 성도라는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은 없애시는 일과 병행해서 구원될 자를 이 세상에서 탈출시킨다는 겁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예수님께서 다음과 같이 없음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요 8:10-
11)
소위 세상에서는 사람들은 자신의 ‘있음’부터 시작해서 자기 방식으로 구원코자 합니다. 하지만 이 세상 한복판에서 이미 하나님의 폭력성이 나타나 버렸습니다. 최초의 하나님 폭력의 희생자는 예수님이십니다. 이 폭력의 결과가 예수님의 부활하심입니다. 예수님은 첫 번째 부활의 열매이십니다.
사도 바울이 세상과 싸울 수 있는 것은 그가 이미 부활의 자리, 곧 성령 안에 있기에 주님이 어떤 식으로 세상에서 부활의 세계로 옮겨 올 수 있는지를 압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폭력을 하나님 자신이 얻어맞게 되는 그 현장입니다. 그 외에 다른 방식으로 천국에 들어갈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약 때, 이스라엘로 하여금 자신에게 묻어온 애굽을 떼내는 방식은 ‘일용할 양식’만 제공하는 방법이었습니다. 하루치의 양식만 주신다는 것은 인간의 생존과 건강은 오직 하루치 뿐입니다. 이는 곧 오늘부로 어제까지 이어진 나의 생애는 죽었음을 드러내라는 겁니다. 그리고 내일을 생각할 만한 권한이 오늘 자신에게 있지 않다는 겁니다.
그 이유는 일용할 양식을 통해서 내일까지 내가 꼭 있어야 할 정당성이 주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구약에서의 만나는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지만 신약에서의 만나는 예수님의 죽으심 그 자체입니다. 그렇게 되면 성도의 하루하루는 주님의 하루하루가 됩니다. 왜 하나님께서 자기 사람을 반복해서 죽이는 식으로 부활의 세계를 살게 하는 걸까요?
그것은 구약 요나서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요나서 2장에서 요나 선지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도망치다가 잡혀서 바다 물에 빠지게 됩니다. 즉 요나는 이미 그것으로 죽은 자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죽은 요나를 다시 살리사 큰 고기를 준비해 주셨습니다. 죽었다가 사흘만이 부활(소생)한 겁니다.
그랬던 요나가 니느웨성에 베푸는 자비를 보고서는 자신이 알던 그 하나님의 모습이 아님을 알고 대단히 삐쳐버립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선지자 요나를 통해서 이스라엘이 원래 어떤 데서 빠져나온 나라인 것을 생각해야 합니다. 애굽이라는 세상에서 빠져나와서 생성된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그 ‘세상’이라는 곳이 얼마나 악한 것임을 선지자로 하여금 체험시키고자 하시는 겁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자비롭고 인자하고 은혜로운 분’이라고 하면서 그 하나님과 자신을 ‘상관없는’ 사이라고 단정짓고 요나는 죽으려고 합니다. 하지만 요나 옆에 박넝쿨이 있었습니다.
없었는데 새로 생겨난 박넝쿨, 그 넝쿨이 다시 시들시들 갑자가 죽어버립니다. 즉 하나님의 분노에 대한 하나님의 조치는 그 분노로 야기되는 폭력을 하나님 스스로 떠안아 버리시는 겁니다. “즉 너는 나를 죽이고 나는 그런 너를 위해 죽음을 당하고” 이것이 바로 경건입니다. 매일 자신을 죽고 다시 사는 일입니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
기도합시다.
『하나님 아버지, 원래부터 없는 존재임을 날마다 새기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우리교회
23-10-29 18:32
10강-디도서 2장 11-12절(하나님의 폭력성)231029-이 근호 목사
하나님 말씀은 디도서 2장 11-12절입니다.
디도서 2:11-12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여기에 구원이라는 말이 나오죠. 그 구원이 구출인데 어디서 구출하느냐? 여기 12절에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그러니까 이 세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 구출되는 것, 그것을 성경에서 구원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얼마나 친절한지, 이 세상이 뭐냐, 그리고 거기서 빠져나올 때 어떤 현상을 보여주며 빠져나오는가? 12절에 나오는 말씀처럼, 그게 왜 인간의 행함으로 되지 않고 은혜로 되느냐? 그 점에 대해 구약성경에서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약성경 출애굽기 20장 2절에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고 되어 있어요. 여기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어디서 나왔느냐 하면, 이스라엘은 원래 애굽 땅에서 같이 살던 히브리인들이었는데 그때는 이스라엘이 없었어요. 하나님께서 구원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위해 애굽 땅에서 이 땅에 없던 나라 이스라엘을 끄집어내셨습니다.
이스라엘 끄집어낼 때, 그것도 밤에 이끌어냈죠, 이끌어내면서 그들을 홍해에 데려갔습니다. 홍해는 바다죠. 바다인데 남성만 60만 명이 넘는 그 사람들을 어디에 수장시켰냐면, 홍해 바다에 다 집어넣었습니다. 홍해 바다 들어가기 직전에 히브리인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알았지요. 이것은 우리가 예상했던 구원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그래서 모세보고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우리를 죽이려고 하는구나.” 딩동, 정답이에요. 이게 정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통해서 물속에서 다 죽이려고 하신 거예요. 이게 구약에서 말하는 구원입니다. 구원방식이에요. 그들이 물속에 들어가는 것을 극구 거부하고 모세 죽이려고 달려들었을 때 비로소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에 대해 아는 바가 전혀 없다는 게 확 티가 나버린 거예요.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니까 그 전에 그날 밤에 나올 때 유월절 어린 양이 죽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과 분리된 그 의미도, 그 뜻도 전혀 몰랐다는 게 되는 겁니다.
출애굽기 12장 12, 13절에 보면 “내가 그 밤에 애굽 땅에 두루 다니며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여기서 ‘내가’ 할 때 나는 여호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애굽 땅에 나타나서, 천사들이죠, “…애굽 나라 가운데 처음 난 것을 다 치고 애굽의 모든 신에게 벌을 내리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애굽 땅을 칠 때에 그 피가 너희의 거하는 집에 있어서 너희를 위하여 표적이 될찌라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가리니 재앙이 너희에게 내려 멸하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의 피가 자기를 건졌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러나 이 양의 피가 신약에 오면 누구 피냐 하면, 하나님 자신의 죽음이에요. 쉽게 말해서 ‘내 죽음의 같이 참여하지 않으면 너는 구원 없다.’ 이 뜻입니다. 예수님이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니까요. ‘내 죽음에 참여하지 않으면 너는 구원이 없어. 너는 내 앞에서 살고자 하는 이상 구원은 없어.’ 그런 뜻이에요.
이게 하나님이 구원을 하실 때 하나님의 폭력성입니다. 잔혹한 폭력성이죠. 이 하나님의 폭력성을 제일 먼저 당한 분, 희생된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었고 그 예수님에 의해서 나타난 게 뭐냐? 예수님이 첫 번째 희생자고 동시에 부활의 첫 열매가 돼요. 부활이 된다는 말은 주님의 폭력성에 희생자가 될 경우에만 부활에 이를 수가 있는 겁니다. 그 방식이 바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 세상으로부터의 탈출, 구원입니다.
그러니 자기 혼자 도 닦는 것 이것은 구원에 아무 보탬도 안 될뿐더러 그것은 구원도 아니죠. 자기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어떻게 그게 구원이겠습니까? 모든 살아있는 것들에 대한 폭력성, 하나님께서 그 폭력성을 신약에서도 보여주는데 마태복음 8장에 그 폭력성이 작렬한 자리가 나와 있습니다. 11, 12절에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여기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데” 그다음에 강제성이 동원됩니다. “쫓겨나”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다. 나가!” 하고 쫓겨나는 거예요. 그러면 쫓겨나는 유대인들의 의식, 그 사고방식은 전혀 구원에 적합하지 않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유대인들이 율법 가지고 뭘 했는가? 경건에 경건을 더했습니다.
그들이 경건하기 위해서 얼마나 애썼는지는 예수님도 인정했어요. 마태복음 5장에 보면 20절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과 바리새인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라고 했어요. 최고의 경건을 추구하고 그걸 실천에 옮기고자 했던 자들이 바로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8장에 보면 그들은 사정없이 쫓겨납니다. 그 폭력의 현장, 천국의 문을 네가 가로막지 말라는 거예요. 폭력이 일어나는 현장, 바로 그곳이 천국의 입구입니다. 혹독한 폭력의 희생자가 되신 예수님의 그 십자가 죽은 자리 그 자리가 바로 천국이에요. 천국은 부활에 이르는 곳입니다.
그런데 마태복음 5장 20절에 있는 말씀처럼 이미 인간이 해낼 수 있는 모든 의로움과 경건은 가장 우수한 레벨까지 올라왔다고 자부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이 버티고 있는 거예요. 그들이 천국에 이르지 못한다면 아무도 천국 갈 수 없습니다. 경건해서는 갈 수가 없어요.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바로 그 바리새인, 사두개인들이 그들의 경건에 무슨 하자가 있고 문제가 있었나 하는 거예요. 그들은 율법을 봤어요. 율법을 보고 이해하려고 했습니다. 사도바울도 이야기했고 예수님도 이야기 한 바에 의하면, 인간들의 세계의 문제가 뭐냐? 그들이 언어를 사용하는데 서로 알아듣는 언어를 사용했다는 게 문제가 되는 거예요. 반면에 예수님이 하는 이야기는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언어였습니다.
세상에서 이렇게 말이 통하는 이유가 뭐냐? 자신의 잘못된 것, 나쁜 거, 옳지 않은 것, 그리고 늘 불완전하고 모자란 것, 비정상적인 것을 서로의 언어를 통해 자기가 자기를 치료하려고 애를 썼던 거예요. 그럼 치료라는 게 뭐냐? 이게 오늘 설교에서 첫 번째 중요한 것입니다. 치료가 뭐냐? 다시 본래의 세상 사람으로 되돌아가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 이게 치료입니다. 내가 살던 세상의 사람으로 그냥 머물고자 하는 노력, 필사의 노력, 이게 치료에요.
그럼 그 치료의 반대말은? 구원이죠. 네가 살던, 너를 너답게 했던 그 세상으로부터 강제 조치로 떼어놓는 겁니다. 빼내는 겁니다. 그러면 인간의 육신은 어떻게 되느냐? 인간의 육신은 하나죠. 인간의 육신은 하나인데 서로 잡아당겨요. 기존의 우리 육신의 본성은 그냥 이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자, 하고 붙들고 있어요. ‘그냥 이 세상에서 경건하게 살자. 그게 너였잖아, 너! 네가 처음에 태어나서 지금까지 살아온 너였잖아. 왜 네가 너를 포기해? 그냥 살아, 이 세상에서.’ 붙잡는 겁니다.
아~, 그 붙잡는 힘이 얼마나 셌는지 로마서 7장 23절에는 이렇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사로잡아 온다는 표현을 했어요. 사로잡아 온다. 발목을 꽉 쥐고 놓지를 않는 거예요.
‘그냥 상식적으로 살아라, 상식적으로. 우리 알아듣는 이야기 하며 살자, 제발. 교회 와서 바르게 살면 천국 보내준다는 그런 알아듣는 이야기 하고 살아. 네가 열심히 노력하면 지금보다 더 우수한 사람이 될 수 있어. 더 바른 사람, 인정받는 사람 될 수 있어. 하나님께 인정받고 교인들에게 인정받고 우리 그렇게 살아. 다른 것 생각하지 말고. 왜 상식을 네가 거부해?’ 하고 붙잡는 거예요. ‘너는 귀한 존재야. 너를 놓으면 안 돼.’ 하고 붙잡는 거예요.
이게 바로 우리 속에 있는 육신의 죄가 우리를 강제로 다시 세상을 떠나지 말라고 잡아당깁니다. 네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이해했던, 네가 알고 있는 모든 것들은 다 애굽 같은 세상에서 듣고 배운 거라는 말이죠. 그럼 이 세상은 네가 살기에 가장 적합하고 친밀한 거예요. 부담이 없어요. 여태껏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여태껏. 무탈한 거죠. 아무 탈이 없죠.
그런데 성경은 무엇을 또 잡아당기는가? 디모데후서 2장 26절에 보니까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여기 또 ‘사로잡힌 바’ 되었다고 하죠. 한 쪽은 사로잡고서 “가지마, 가지마.” 하고 붙들고 있고, 저쪽에서 하나님은 “너는 내게 사로 잡힌바 되었다.” 하고 붙들고 있고, 중간에서 아주 끊어질 판이에요. 쭉쭉 늘어나서 끊어질 판이에요. 서로 잡아 당기고 있어요.
그런데 여기 디모데후서 2장 26절에 보니 ‘마귀의 올무’라고 되어 있어요. 사도 바울이라는 인물이 왜 존재하는지, 안 믿는 사람이 보면 참, 사도 바울이 답답해요. 말 되는 이야기를 하게 되면 사도 바울에게 동의를 할 수 있는데 어떻게 세상 사람들이 동의 못 하는 이야기만 왜 골라서 하느냐 이 말이죠.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고린도전서 15장 19절에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라고 한 거예요. 지금 사도 바울이 엄청난 이야기를 하는데, 부활의 세계가 있다는 거예요, 부활의 세계가. 여러분 이게 말이 됩니까? 이게 말이 안 되기 때문에 조선일보, 동아일보, KBS, MBC에 안 나오는 거예요.
이스라엘 전쟁 이야기는 나오지만 부활 이야기는 안 나오는 겁니다. 애당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에요. 인간의 초등학문 다 동원해도 그들은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것을 증명하지 못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32절에서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이것은 이런 겁니다. “내가 맹수랑 싸웠으면 이렇게 안 싸운다. 내가 맹수와 싸우는 거였으면 이렇게 치열하게 싸우지 않았어. 맹수보다 더 쎈 것과 싸우고 있다.”는 거예요. 그럼 맹수보다 더 센 것이 어디 있을까요? 사도행전 19장에 에베소에서 있었던 이야기거든요.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라는 그 에베소 이야기를 다시 꺼내야 됩니다.
에베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가? 사도행전 19장 13-15절에 “이에 돌아다니며 마술하는 어떤 유대인들이 시험적으로 악귀 들린 자들에게 대하여 주 예수의 이름을 불러 말하되 내가 바울의 전파하는 예수를 빙자하여 너희를 명하노라 하더라.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도 이 일을 행하더니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여기 바울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예수님이니까 의당 들어가는 것인데 여기에 감히, 감히 바울이라는 하나의 개인이 들어갑니다. 누가 이야기했는가? 악귀가 이야기해요. “악귀가 대답하여 가로되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
사도 바울의 존재 이유가 뭡니까? 사람 붙들고 싸웁니까, 악귀, 마귀 붙들고 싸우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까? 마귀 붙들고 싸우는 거예요. 구약에서는 그냥 애굽 땅에서 벗어나 약속의 땅에 기어들어 가면 됐죠. 그러나 신약에 오게 되면 그렇게 기어들어 간 이스라엘 다 망했다는 것이 구약이잖아요.
그러면 땅에 사는 이것조차도 온전한 구원이 아니었고 하나의 그림자, 모형에 불과하다는 거예요. 땅에서 태어나 땅에서 사는 게 이게 문제가 있다는 거예요. 무엇 때문에? 악귀가, 마귀가 그것을 노리고 그동안 이게 인생사는 거라고 속여 왔다는 이야기를 지금 사도 바울이 하고 있는 겁니다.
‘맹수하고 싸웠으면 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악귀하고 싸운다.’ 악귀가 뭐라고 이야기하는데요? 악귀가 뭐라고 주장합니까? 사람이 죽었다가 부활하는 일은 없다고 악귀가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세상의 모든 학문들 보세요. “그 말 맞잖아? 사람이 죽었는데 어떻게 살아나?” 그걸 증명한 물리학, 철학 없어요. 정신분석학 그런 거 없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부활한다는 것을 보장해 주는 어떤 논리적 근거도 제시한 적이 없어요.
우리는 부활 논쟁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냥 물가 오르는 걸 심각하게 생각하지, 물가 오르는 것. 우린 도대체 누구와 싸우는 거예요, 결국은? 마귀가 마련한 장에서 안 죽으려고 싸우죠, 안 죽으려고. 오늘 본문에서, ‘세상에서 구원받는다’ 할 때 우리는 그 세상이 무엇인지를 몰라요. 사도 바울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근거해서 세상을 이렇게 규정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 2절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너희가 악마의 종이 되어서 부활이라는 것을 생각지 아니하고, 십자가 생각하지 않고 나름 지금 성공한 인생이라고 우기는 식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거예요.
사도 바울이 이런 이야기 할 때 드디어 세상이 정체를 노출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세상이 출현하지 않아요. 그 현장에 나오지 않아요. 복음을 전할 때만 세상이 드디어 눈 똑바로 뜨고 막 달려들어요. 대들죠. 고린도전서 15장 35절에서 “누가 묻기를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느냐 하리니”
이 말은 “어떻게 죽은 자가 사느냐, 이 바울아! 아, 미치겠다, 정말 답답해서. 어떻게 사람이 죽었는데 다시 살 수가 있냐. 죽었다가 살아난 걸 내 눈에 보여주면 내가 믿어줄게. 그런 사람 없잖아.”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예수님은 눈에 안 보이잖아요. 없잖아요.
사도의 복음은 바로 이래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질 못하는 거예요. 왜냐면 시작을 ‘없음’부터 시작해요, 없음부터. 사도 바울이 없음부터 시작하기 이전에 이미 예수님께서도 없음부터 시작한 거예요.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에게 이렇게 이야기 물었습니다. 8장 10절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라고 물어요.
‘없음’을 이야기해요. “너를 고소한 자가 있어, 없어? 너를 죄 있다고 정죄한 자가 있어, 없어?” 이걸 물어요. 그런데 그때 그 아줌마가 정답을 이야기합니다. “없나이다.” 없나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있다고 하는 것을 거짓말로 노출 시키고, “이 땅에 ‘있다’는 그 거짓말을 믿지 말고, 내가 너를 ‘없다’로부터 새로 출발시켜줄게.” 없나이다.
요한복음 6장 53절에도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없느니라, 없느니라, ‘없다’고 하는 거예요. “하늘에서 보기에 너희들은 지금 생명도 없으면서 있다고 여기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보다 더 큰 사기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면 세상은 뭐냐? 하나님 보기에 없는데, 없어요, 우리 자신에게는 생명이 없는데 마치 있는 것처럼 있다고 위장해주는 장소가 바로 세상이라는 겁니다. 그곳에서 탈출해야 하는 게 구원이라는 거예요.
제가 어떤 유-튜브에 나오는 용어를 한 번 채집해 봤습니다. ‘건축 물건, 임의경매, 감정가, 입찰보증금, 3회 유찰, 토지경계, 사용승인 2010년, 지붕은 경량 철골, 판넬 구조, 물건 종류 주택, 입찰내용 유찰, 수원지방법원 여주 1계…’ 그다음에 ‘대항력 있는 임차인 감정평가단, 컨테이너 건물, 건축물 방향 동방향, 방 2개, 화장실 2개, 창고 1개’
이런 용어들 어디서 나옵니까? 경매할 때 나오는 거예요. 경매에 참여하는 그 사람이 지금 구원을 원합니까, 값싼 세상 것을 원합니까? 용어들, 언어 자체가 조금만 공부하면 알아듣는 용어에요. 임의경매, 감정가, 이거 처음엔 모르지만 조금만 공부하면 다 아는 거예요. 3회 유찰, 2억짜리가 6천 5백 된 것, 그 의미가 무슨 뜻인지 아는 거예요. 알아듣는 이야기에요. 보긴 보아도 깨닫지 못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알아듣는 이야기에요. 거기에 우리는 친숙해져 있습니다. 왜? 우리는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내가 더 살아야 하니까.
마태복음 16장에서 예수님께서 직격탄으로 인간 자체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십니다. “베드로가 예수를 붙들고 간하여 가로되 주여 그리 마옵소서. 이 일이 결코 주에게 미치지 아니하리이다.” 할 때 23절에 “예수께서 돌이키시며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사단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 도다, 하시고”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 속하고 사람의 일은 사탄에 속했다는 것을 분명히 언급합니다. 그래서 그 뒤에 나오는 말씀 “아무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코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 이렇게 되어 있어요. 다시 말해서 자기 부인이 안 된 상태에서는 경건이고 구원이고 없다는 뜻이에요. 그러면 내가 부인된다는 말은 뭐냐? ‘난 나쁘다. 난 나쁜 사람이야. 죄지었습니다.’ 이게 아니고 ‘나는 소속이 마귀 소속입니다.’라고 인정하는 거예요.
그렇다면 구원하는 과정에서, 그 절차에서 필수 코스가 뭐냐? 내가 마귀를 본 거예요. 내가 내 속에서 마귀를 보면 그게 구원의 개시인 거예요. 아까 경매, 그것은 투박하고 노골적이죠. 고상하게 이 세상에 대해 표현을 한 번 해보겠습니다. [ 자본과 이데올로기 ] 토마 피케티 저, 안준범 역, 문학동네(파주: 2020). 제가 십자가 마을에 그 서평을 올려놨습니다. 여기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어요. 지금껏 인류의 역사는 어떤 역사인가?
【삶의 불만과 제기되는 질문은 인간의 소유성에서부터 개시된다. 소유성을 통해서 비로소 사회 불평등이 보이는 것이다. 고대사회에서는 이 불평등에서 야기되는 사회적 불만을 …】 제거해서 정신적인 안정감을 제공하는 것이 이 세상의 사회체제라고 보는 거예요.
고대와 중세에서는 【기능별 세 계급으로 사회에 층을 정해놓는 것이다. 종교적 사제계급과 군사 귀족 계급과 노동하는 평민계급으로 분리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지배 계층인 군인집단은 정당한 폭력(정당한 폭력입니다)의 장을 형성하여 사사로운 폭력을 규제하고 사람과 재화(재물)의 안전을 확고히 해준다. 따라서 제일 아래에 속한 계층에 속하는 주민들의 눈에는 삼기능 질서가 정당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었으리라는 점은 전혀 놀랍지 않다. 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안전을 가져다준 권력을 상대로, 그다음에 무슨 일이 뒤따를지라도 모든 걸 잃을 각오를 하면서 왜 위험을 감수하지 않겠는가? 이러한 고대사회의 구조는 오늘날에 와서 현대의 선거판에서 제시되는 엘리트 후보와 엘리트 후보사이의 경쟁과 대립판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핵심은 이것이다. 인간에게 있어 소유근성만큼은 그 어떤 사회구조 안에서도 보장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 몸만 지켜질 수 있다면 그 어떤 정치제도든 사회제도든 군소리하지 않겠습니다. 나리!”가 되는 것이다.】 이런 묵계로 서로 합하게 된다는 뜻이지요.
그러면 인간들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계속 보면 【유럽 중세의 영주는 전사계급 또는 사제계급 출신이다. 이들이 국지적인 수준에서 준 국가로 형성된 집단을 다스릴 수 있다. 치안권과 재판권 이외에 전통적인 삼원사회에서 가장 중요한 관리 형식은 특히 결혼과 출생 사망의 통제와 등기 관리다. 이것은 공동체의 존속과 규제를 위한 기본 기능으로 종교 제례 및 인척관계와 가족생활 내에 부가된 형식과 관련된 규칙(특히 섹슈얼리티, 가부장권력, 여성의 역할, 아동교육과 관련되는 모든 것)과 밀접하게 연결된다.】
여기 보면 내 몸을 살리기 위한 최소한의 그것들, 그중 하나는 아동교육과 관련된 것도 있어요. 아동교육입니다. 아동교육, 내 자식 잘되는 것, 여성의 권리보장, 친인척과의 교류, 서로 만나는 것이 허용되어야 하고, 거기에서 점차 더 나아갑니다.
【또한, 거래 및 계약 등록에 대해 언급되어야 한다. 이 기능은 경제활동과 소유관계를 규제하기 위한 중심 역할을 하며 귀족이거나 사제인 영주가 행사할 수 있는 기능으로 일반적으로는 지방의 재판권 행사와 민사, 무역, 상속 분쟁 해결과 연관된다. 또 다른 집단적 기능과 공공업무 역시 전통적인 삼원사회에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데 이를테면 교육과 의료 그리고 몇몇 집단 기간시설(방앗간, 다리, 도로, 우물) 같은 것들이다.】
바로 이런 것들을 보장해 줄 때 우리는 그 국가에 대해서 아무소리 안하고 동의할 용의가 되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세상입니다. 보세요. 얼마나 자연스럽습니까? 무슨 탈출을 해요? 왜 여기서 탈출을 하는데요? 여기서 왜 우리가 구원을 받아야 돼요? 여기서 그냥 살면 되지. 그 당시 중세 시대가 다 교회 시대에요. 교회가 십일조 받은 걸로 뭘 했느냐? 그들의 복지를 증진했어요. 그러니 더더욱 세상을 탈출할 하등의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 이제 세상이 번창 하면서 어떤 현상이 일어나느냐? 국가가 알아서 자본을 축적해 다른 나라보다 더 잘사는 나라가 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이고 더 발전했는데 국가 자본주의 시대가 19세기에 끝나고 20세기에 들어와서 사적 소유 자본주의가 번창하기 시작합니다.
그때부터 세습 중산층이 등장해요. 쉽게 말해서 좋은 것, 맛있는 거, 귀한 거, 편한 것, 고급 말, 고급 차, 귀족만 즐기지 말고 나도 좀 돈 모아서 즐겨보자, 이게 오늘날의 시대에요. ‘나도 나 자신의 소유를 향유 할 수 있는 권리가 있고 그것을 국가가 법적으로 보장해 준다면 그 국가에 대해 아무 반감 없이 동의할 의향이 있다.’ 이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탈출? 왜 탈출을 하는데? 아침마다 새벽배송 오는데 왜 거기서 탈출을 해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인간밖에 없어요. 사기 치는 인간과 사기당하는 인간, 딱 두 종류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이 사적인 내 소유, 내 돈이 있어야 되고 행복한 일은 뭐냐? 돈 버는 일. 불행한 일은 돈 까먹는 일인 거예요.
이 말은요, 자기 소유의 의해서 각자 산다는 말은, 자기 부인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 부인이 안 되면 경건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경건은 구원되는 과정을 경건이라고 해요. 이 세상이 발목 잡고 붙드는 것, 세상이 사로잡는 것에서 발 빼게 하는 게 경건이에요. 그런데 이 땅에 사람으로 살면서 착하게 살면 나중에 죽고 나서 접수할 때 수능 점수, 내신 점수 좋게 쳐 주겠지, 이렇게 막고 있는 게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사두개인들, 천국에서 쫓겨 가는 거예요.
세상이 사로잡고 있는 이상 어떤 경우도 이 세상에서 탈출 못 합니다. 할 수가 없어요. 내가 원하지 않아요. 내가 구원을 원하지 않고요, 이 땅의 사람으로 잘 살고 싶은 거예요. 돈 버는 재미보다 더 좋은 재미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없습니다. 여러분들이 어느 정도로 세상에 깊숙이 자리 잡았는가? 어떤 사람이 자기가 싫어하는 음식을 추려봤어요. 개고기, 제주도 고기 국수, 부산의 돼지국밥, 순대, 맥반석 삶은 달걀, 이렇게 추려봤습니다. 누가 싫어하냐면 제가 싫어해요. 이걸 가지고 세상 적이라고 합니다.
이런 음식들을 왜 싫어하느냐? 내가 싫어하는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이 세상에 살기 적합한 사람으로 남고 싶은 거예요. 죽고 싶지 않은 거예요. 그러면 탈출하는 방식은 뭐냐? 주님의 폭력에 노출되는 겁니다. 주님께서는 사탄에 속한 인간을 말로 달래서 구원할 수 없다는 걸 너무 잘 아셔요. 그래서 어떻게 하느냐? 죽여버립니다. 죽여서 구원하는 거예요. 살아 있으면 말이 많아서, 죽여버립니다.
죽여버리는 방법은 시간을 잘라버리는 거예요. 하루 치 건강만 줘요, 하루 치 건강. 하루 치의 양식만 줘요, 하루 치 양식. 내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경건 없다, 그것은 구원하는 자세가 아니에요. 시간을 잘라 버려요. 하루 치를 주었다는 것은, 오늘 하루를 살면서 어제부로 나는 죽은 존재라는 것을 확인하라는 거예요. 어제부로 죽은 존재예요.
그러면 오늘은 뭐냐? 어제로 죽어야 하는데 오늘 살아 있다는 것은 죽은 자를 하루 치만 살린다는 것을 알라고 주께서 하루를 허락하신 거예요. 만나가 뭐냐 하면, 이게 하루 치에요, 하루 치. 요한복음 6장 49-51절 에 보면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로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먹고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나의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로라 하시니라.”
이 말은 “너희가 자꾸 모세의 만나를 고대하는데 내가 준 것은 모세의 만나가 아니다. 하늘에서 온 생명의 떡이다.”라고 했어요. 자, 이 생명의 떡은 어디서 오느냐? 모세에게서 오는 것은 만나이지만, 맛있는 과자이지만 예수님에게서 오는 만나는 예수님의 살과 피, 예수님의 죽음에 기초한 것을 만나로 만들어서 우리에게 하루를 허락해버려요. 그러면 우리가 있는 이 하루가 뭐냐? 부활의 날이죠, 부활의 날, 부활의 날이에요. 세상 끝날까지 너와 함께 있다고 했잖아요. 세상 끝 날이, 오늘 이날이 나의 날이 아니고 주의 날입니다.
따라서 흙으로 가야 할 우리를 일찌감치 흙이 아니라 ‘예수 안’으로 집어넣는 거예요. 이게 부활이에요. 예수님은 십자가 거치고 부활에 이르렀잖아요. 오늘날 성도에게는 부활 먼저 시켜주고 십자가가 뭐였던가를 보게 하는 방법을 사용하십니다. 순서를 거꾸로 바꾸는 거예요. 그 바꾸는 장면이 이미 구약에도 나와 있습니다.
요나서 2장에 보면 요나가 까불다가, 도망치다가 잡혔죠. 요나가 바닷물에 빠집니다. 없음입니다. 바닷물에 빠져 물고기 밥이 됐기 때문에 요나는 없습니다. 요나가 없는데 요나가 눈을 떠보니 살았어요. 냄새는 지독하지만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겁니다.
거기서 기도를 하는데 그 기도 내용이 쭉 나와 있어요. 요나 2장 1, 2절에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그 하나님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내가 받는 고난을 인하여 여호와께 불러 아뢰었삽더니 주께서 내게 대답하셨고 내가 스올의 뱃속에서 부르짖었삽더니 주께서 나의 음성을 들으셨나이다.”
‘스올’이란 죽음이지요. ‘내가 죽음 속에서 주께 부르짖나이다’라고 하면서 4-6절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주의 목전에서 쫓겨났을찌라도 다시 주의 성전을 바라보겠다 하였나이다 물이 나를 둘렀으되 영혼까지 하였사오며 깊음이 나를 에웠고 바다풀이 내 머리를 쌌나이다 내가 산의 뿌리까지 내려갔사오며” 이렇게 뿌리까지 내려갔다고 이야기하고 그다음에 “땅이 그 빗장으로 나를 오래도록 막았사오나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내 생명을 구덩이에서 건지셨나이다.”
죽은 데서 부활을 시켜 준 거예요. 누구를? 요나를요. 누가요? 하나님께서. 죽었다가 살아난 거예요. 그러면 죽었다가 살아났으니 그다음에 여러분 예상에 의하면, 인간들 예상에 의하면 ‘이제 정신 차리고 하나님 말씀을 잘 따랐을 것이고 하나님께 군소리하지 않고 고분고분했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지요. 아주 혼쭐났으니까요.
인간은 고쳐 쓰는 게 아닙니다. 인간이 혼났다고 사람 바뀌는 게 아닙니다. 주께서 요나를 죽은데서 살린 이유가 있어요. 그 이유가 4장에 나옵니다. 요나 4장 1절에 “요나가 심히 싫어하고 노하여 여호와께 기도하여 가로되 여호와여 내가 고국에 있을 때에 이러하겠다고 말씀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므로 내가 빨리 다시스로 도망하였사오니 주께서는 …”
그다음 말이 아주 간교하지요.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 그래놓고 이건 ‘나 죽을래요’ 그런 뜻이에요.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가 크신 하나님을 내가 자~~~알, 이거 길게 끌어야 돼요, 자~~~~~~~~~~~알 알았습니다.” 꼬고 또 꼬고 또 비꼬는 거예요. ‘나 죽을래요. 나 죽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죽겠다는 말은, 당신하고 나하고 결별이라는 뜻이에요. 결별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바다에서 끄집어낸 것은 출애굽, 애굽에서 이스라엘을 끄집어낼 때 애굽이라는 나라, 이 세상이라는 것이 뭔지를 모르는 거예요. 그냥 살다가 분리되어서 나온 줄로 알고 있어요.
주께서 홍해바다 그 물속에 집어넣는 폭력성, 왜 그렇게 폭력적이고, 유월절에 히브리인 빼놓고 전부 다 어린양의 피 없이는 다 죽여버리는 그 폭력성이 왜 정당한 폭력성인지, 연약한 인간을 상대로 그 잔혹한 폭력성이 꼭 행사되어야 되는지를 전혀 알지를 못해요.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것이 어떤 곳인가? 마귀가 작동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를 이스라엘 선지자가 새삼스럽게 알게 하기 위해서 선지자 본 몸에다가 악마성을 집어넣은 거예요. 악마성이 나오면서 뭐라고 하느냐 하면, “하나님은 자비로우시고, 의로우시고,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원하는 자를 건지시고……, 내가 잘 알고 있지요? 내가 거기에 대해서 모르는 것 아니지요? 정답이지요? 정답 맞지요? 우리 갈라섭시다. 우리 갈라섭시다. 당신과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이미 구약 때 악마의 말을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선지자의 입을 통해서 토해지도록 하는 거예요. 예수님께서 귀신 쫓아낼 때 사람들은 가만있는데 떠나가는 귀신이 이야기합니다. “당신 맞지? 당신 하나님 아들 맞지? 메시아 맞지?” 주님께서 “너 입 안 다물어? 그 입 안 다물어? 너는 구원의 백성이 아니야. 입 다물어.” 나무랐지요.
악마가 주님을 너무 잘 알아요. 요나 입에서, 소위 구원받았다는 이스라엘 선지자 입에서 다시 처음으로 우리가 어디서부터 건짐 받았는가? 어떤 세계인가? 단순히 내가 흙이 되는 세냐? 아니. 내가 생각하는 사망, 그것보다 더 근원적인 사망이 있었어요. 내가 생각하는 저주, 내가 망해버리는 저주, 아니 그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 배후에 더 무거운 저주가 있어요. 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저주가 있었던 거예요.
수위가 높은 사망의 무서움이 있었던 겁니다. 악마가 벌 받는 저주, 죽음, 그 세계, 그 세계에 대해서 하나님은 요나선지자를 통해서 표현하도록 한 겁니다. “저 죽을래요.” 그래서 요나 4장 3절에 “여호와여 원컨대 이제 내 생명을 취하소서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음이니이다.” 하고 죽기를 바라지요.
그런데 날씨가 너무 뜨거웠어요. 6절에 보면 “하나님 여호와께서 박 넝쿨을 준비하사 요나 위에 가리우게 하셨으니 이는 그 머리를 위하여 그늘이 지게 하며.” 갑자기 요나는 시원해 진 거예요. 기분이 좋았지요. 이왕 죽는 것 기분 좋게 죽자, 했는데 박넝쿨이, 분명히 하나님에 의해서 준비된 박넝쿨이 하나님에 의해서 시들시들 썩어 죽게 됩니다.
그 죽는 박넝쿨, 그게 바로 요나 옆에 붙어 있는 예수님이에요. 하나님하고 결별하고, 하나님을 욕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당신하고 나하고 더 이상 별 볼 일 없다고 했던 그 모습, 그 런 모습의 요나를 어디까지 가져가느냐 하면, 인간이 아는 것보다 더 숨어있는 것, 인간이 미처 모르는 그 자리까지 요나가 선지자니까 데려갑니다. 데려가서 그 요나로 하여금 시원하게 해주고, 은혜를 주시고 그 은혜 줬던 박넝쿨이 시들하게 죽어버릴 때 비로소 요나는 내 의사 없이 누군가 나에게 뭔가 하셨다는 것을 느끼게 만들지요.
나는 하나님 앞에 욕을 했는데 그 욕 했던 그분이 나를 처벌하지 않고 내 옆에 와서 박넝쿨이 되어서 나를 잠시 ……, 그 때는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그저 시원했지요. 은혜을 받았으니까. 시원했는데 그 시원한 박넝쿨이 시들시들 죽어가면서 이게 바로 네가 모르는 은혜의 수준이에요, 은혜의 수준.
부활을 시킨 것은 십자가를 알기 위해서 부활시킨 거예요. 에베소서 2장 다시 보겠습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이 말 할 때 우리는 뭐 과거에 죄지은 것 이런 것 생각하는데 그거 허물 아니에요. 그 죄 아니에요. 그건 죄에 들어가지도 않아요. 우리는 죄를 모릅니다. 다만 내가 살기를 원했지요. 내가 그냥 살아 있으니 살고 이 세상이 좋아서 그냥 사는 거예요. 이게 뭐가 잘못인데?
우리는 이 세상 살면서 원하는 것은 딱 하나밖에 없어요. 내 노동의 정당한 보상만은 허락해 달라는 말이지요. 내 노동의 정당한 보상. 그것 누가 정하지요? 내 노동의 정당한 보상을 내가 정합니까, 사회가 정합니까? 사회가 정합니다. 50만 원만 받아도 베트남 사회에서는 정당한 보상이에요. 우리나라에서 50만 원 받으면 그것은 노동청에 고발감이지요.
북한에서는 30만 원만 받아도 그것은 정당한 보상 정도가 아니고 위대한 지도자의 은혜에요. 노동의 정당한 보상 그것 얻어서 뭐할 건데? 세상에 그냥 살려고 하잖아요. 그래서 어떤 사람이 2백만 원 줘야 되는데 20만 원 떼였다고 이 불의함, 이 불공정한 사회! 그게 허물입니까? 그게 죄입니까? 그건 노조지요. 여기서 말하는 허물과 죄는요, 우리가 몰라요.
그다음에 에베소서 2장 2, 3절에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지금 사도는 마귀하고 싸웁니다. 감안해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 사도는 부활이 없다는 쪽과 싸우고 있어요. 십자가 믿으면 부활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부활된 자, 다시 말해서 성령 받은 자, 부활 되고 난 뒤에 십자가를 다시 조명해야 그것이 바로 예수의 증인 되는 거예요. 요나처럼. 요나가 바다에서 살아났잖아요. 부활되었지요? 그것도 예수님처럼 사흘만에.
그런데 그가 맞닥뜨리는 체험은 뭐냐? 십자가체험이었습니다. “내가 주님을 죽였습니다, 내가!”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은 “그만 찔러라. 날 그만 찔러.” 왜? 감사가 없잖아요. 십자가에 대한 감사가 없잖아요. 그게 바로 창으로 찌르는 거예요. 맨날 불공정한 사회, 맨날 이 사기꾼. 여자이면서도 남자인 척 하고, 펜싱 국가대표 속이고, 좋은 아파트에 살고, 주변 이웃들한테 다 사기 치고.
속은 입장에서 그 사람이 미운 이유는 돈 없는 것에 속았다는 우리 나름의 기준이 있기 때문에 그래요. 돈 없는 것에 속았다는 거예요. 자기가 예수님을 찌른 것은 전혀 문제 삼지 않고 나는 남 안 속였으니까 정당하다는 겁니다. 여러분, 언제 감사했습니까? 감사 메말랐지요. 그것은 피의 폭력성, 주님이 첫 번째 당한, 아버지로부터 당한 그 폭력을 정면으로 마주하지 않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에요.
잘 먹고 잘사는 사람만 쳐다보고 이야기하고 어떻게 좀 빼먹을 것 없나 싶어서 도움을 구하지요. 십자가와 정면으로 부딪히지 않기 때문에 그래요. 부활 된 자는 이렇게 합니다. 나는 이미 죽었다고 이야기할 수 있어요. 어디서? 세상에서. 사도바울은 자기 안의 악마를 보았습니다. 악마가 자기를 사로잡아 온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지옥 갔습니까? 아니지요. 반대로 이야기해야 돼요. 이런 경험없는 사람이 지옥 간다. 나는 내 속의 악마의 말을 들으며 살았음을 인정 못 하는 자가 지옥갑니다. 이 세상이 얼마나 위험한 세상인데요. 노아 홍수 때 이 세상은 다 물로 잠겼다는 것을 뻔히 성경을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나올 때 이스라엘로 하여금 물속에서 인간은 다 죽었다는 것을 경험하게 하기 위해서 바닷속에 집어넣은 거예요.
이스라엘은 그게 무슨 뜻인지도 몰라요. 주께서 하루분의 양식, 하루분의 건강을 주심으로써 주께서는 ‘없다’를 계속 반복하는 일과를 보내게 해요. “하나님 과거에 제가 이런 잘못을…” “없다니까! 과거 없다니까!” “하나님, 제가 은혜받았습니다.” “과거 없다니까! 내가 잘랐어. 내가 잘랐다고! 네가 지금 말할 수 있는 힘은 내가 준 하루 치 만나 때문에 네가 그 말을 하는 거야. 어제부로 너는 없는 거야. 내일은 없는 거야. 오늘치 예수 안에 있는 예수님의 부활 된 너만 있는 거야.”
이 싸움을 한 거예요.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나는 날마다 죽노라.”(31) 했어요. 여러분이 요한복음 8장에서 간음한 아줌마가 이야기한 것을 다시 한번 늘 생각해야 돼요. 10절에 예수님이 여자보고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11절에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곧 “네 과거 없어.” 있는 것은 내가 너를 용서한 증인으로서 단 하루만 있는 거예요. 내일 더 세상에서 살 생각하지 마세요. 오늘 만나, 오늘 양식 주면 내일 또 줄 수도 있어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는 하루의 삶은 우리를 늘 청소하라고 주시는 거예요. 청소요.
우리교회 내과 의사 선생님이 하신 이야기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그 병원에서 위내시경 하는데 그 집사님이 이런 이야기를 했어요. 수면 내시경 안 하고 생으로 국소 마취만 하고 생으로 했다고요. 이거 굉장히 구역질 나고 아플 겁니다. 그런데 제가 의과대학 다닐 때 교수가 직접 체험케 했습니다. 내시경 할 때 환자들이 얼마나 아픈지.
그 이야기,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이미 구원받았는데 이 땅에 더 살 필요 없어요. 그런데 이 땅에 왜 사느냐? 이 세상 삶이 얼마나 사기고 엉터리고 악마적이고 이게 주께서 준비해 놓은 엄청난 저주, 폭력성, 하나님의 그 잔인한 폭력성, 그것이 얼마나 잔혹한 폭력성인지 깨닫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이 땅에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게 너무 감사해요. 왜? 죄인 중에 괴수가 사도 바울이거든요. 사도 바울 지옥 갔습니까? 아닙니다. 진짜 경건한 사람은 사도 바울이에요. 왜? 그는 하루 치만 살기 때문에. 예수 안에서 이미 살아버렸기 때문에, 그리스도와 함께 살기 때문에 자기는 십자가만 자랑하는 것, 이것보다 더 큰 경건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없습니다. “없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