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선을 타고 흐르는 아저씨의 목소리는 그야말로 신바람이었다. 이미 ‘특이한 청바지 디자이너’로 방송을 탄 적이 있는 녹록한 장사꾼답게 전화상으로도 아저씨는 분위기를 주도하고 압도해나갔다. 선입관이란 무서운 것이다. 목소리만으로 약간의 쇼맨쉽을 느낀 나는 한동안 아저씨를 만나러 대구 가는 길을 주저했었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 마냥 전국에서 비가 쏟아지던 날, 그때도 대구는 살인적인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밤이 되어도 한낮의 태양을 품었던 아스팔트는 후끈후끈 열을 내고 있었고, 나는 그 위에서 여전한 두려움으로 아저씨를 기다렸다. 마음속에 남아 있던 선입관은 그리 오래가진 않았다. 저 멀리 빛바랜 개량한복을 입고, 정겨운 목소리로 ‘사과나무?’라고 말하는 그를 보는 순간 왠지 모르게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아저씨는 개량한복이 폭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바쁜 일정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우리가 만난 시간은 밤 열시. 에어컨이 빵빵하게 나온다는 그의 집에서 인터뷰를 하기로 했는데, 아저씨는 굳이 차를 돌려 가게로 향했다. 피곤한 몸이지만 조금 더 좋은 사진을 찍어야 하지 않겠냐는 배려였다. 작은 시장 안에 위치한 아저씨의 가게는 가지각색의 청바지가 진열되어 있었다. 계단 옆으로 작은 작업실이 딸려 있고, 중앙 홀에는 전자오르간과 반주기, 그리고 드럼이 놓여진 무대가 설치되어 있었다. 닫았던 가게 문을 열고, 사이키 조명을 켰다. 관객은 둘 뿐인데, 아저씨는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선글래스를 척, 하고 꼈다. 무대 위로 올라가서 전자 건반을 누르며 윤도현의 ‘너를 보내고’를 2절까지 내리 연속으로 불렀다. 마치 콘서트에 온 것 마냥 나는 소리를 지르며 열광했다. 앵콜곡으로는 드럼을 맛깔스럽게 연주하며 부른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이미 이곳 저곳에서 방송을 탄 경험이 있는, 대구에서는 팬 관리까지 하고 있다는 신바람 난 아저씨는 무대 위에서 공연을 하며 청바지를 팔고 있다.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청바지. 그날그날 얻은 영감으로 청바지에 그림을 그려 제 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 청바지에 그려진 것은 어느 예술가의 그림 못지않다. 하지만 그는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다. 그의 최종학력은 초등학교 졸업. 여러 방송 스케줄로 바쁜 삶을 살고 있으면서도 밤늦게라도 사과나무의 인터뷰를 하고 싶었던 것은, 방송사에서는 원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이 곳에서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라고. 자리를 옮겨 아저씨의 집으로 향했다. 시간을 지켜 먹어야 하는 약이 있기 때문이다. 독한 페인트와 물감을 내내 접하고 있어야 하는 아저씨는 이미 오래전에 병원에서 그림 그리기를 멈추라는 당부를 받았다. 그런데도 멈출 수 없는 일. 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아저씨는 옛날이야기를 하듯 하나하나 풀어나갔다.
초등학교도 입학하기 전인 어린 시절, 지독히 가난했던 그때의 기억은 좌판을 깔아 장터에서 물건을 팔던 어머니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 나가면 어린 동생과 함께 집 안에서 하루종일 배를 곯아야했던 일 뿐이다. 문지방이라도 긁어서 입에 넣고 싶어했던 배고픔과 가끔씩 이유 없는 어머니의 매질을 견디지 못해서 그게 나쁜 것인지도 모르고 집을 나갔었다. 어린 동생은 그저 형을 쭐래쭐래 따라다니며 도둑질도 하고, 앵벌이도 하고, 싸움도 일삼게 되었다. 소년원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서열이 확실한 그곳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은 싸워 이기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동생 때문에라도 그는 더 많이 싸워야 하고, 더 많이 이겨야 했다. 소년원을 나오면 주먹이 세다는 소문은 벌써 퍼져 ‘조직’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저씨가 실제 이름인 ‘곽충완’을 쓰게 된 건 최근의 일이란다. 그 전엔 ‘백구’로 불렸었다. 아주 어릴 적 별명이기도 했고, 소년원에서, 그리고 소위 ‘조직생활’을 할 때에도 그는 백구로 불렸다. 1990년대 초, 결정적인 사건이 터졌다. 대구 승마장 사건이라고도 불리는 꽤 큰 조직들 간의 자리싸움이었다. 아저씨는 이 사건으로 5년이라는 시간을 교도소에서 보내게 되었다. 비좁은 곳에서 수감생활을 하며 그제서야 아저씨는 자신의 삶을 뒤돌아봤다. 그 역시 철없는 시절 떠밀리듯 살아왔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채 자신과 똑같은 길을 걸어버린 동생이 가슴에 사무쳤다. 긴 시간을 참회하며 새로운 인생을 생각했다. 수감생활 중에 자신의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그림에 대한 재능을 발견했다. 손재주가 있다는 것을 알고 그는 그 소질을 개발하려 애를 썼다. 제한되어 있는 곳이라 자료들은 얻을 수 없었지만, 어쩌다 책이라도 생기면 열심히 읽었다. 수감생활을 마치고 그는 갱생보호소의 도움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길에서 청바지를 팔 때부터 그의 장사수완은 남달랐다. 물건을 떼러 서울 동대문 등지를 돌 때, 큰 쇼핑몰에는 항상 현관에 무대가 설치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공연을 보러 많은 사람들이 건물로 몰려든다는 것을 알고, 가게가 생겼을 때 무대부터 설치했다. 시간을 정해놓고 무대 위에서 키보드와 드럼을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지금도 청바지 구입보다 그의 노래를 들으러 오는 단골도 꽤 있단다. 청바지 가게를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싼 돈을 들여 아내에게 선물한 청치마에 얼룩이 진 것을 봤다. 밥상머리에서 화를 벌컥 내다가 아, 하며 무릎을 쳤다. 청바지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겠구나. 그래서 그때부터 그려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망친 청바지도 수십, 수백 벌이었다. 비록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그이지만 끝없는 실험을 통해 드디어 그는 소문자자한 청바지 디자이너가 되었다. 그의 재능을 이어받은 딸은 미술을 전공하는 예술고등학교 1학년이다. 가끔씩 어깨너머로 몰래 딸의 그림을 훔쳐보노라면 소름이 끼칠 때가 있단다. 기본 교육을 받지 못한 채 그림을 그린 아저씨는 딸을 보면 공부 욕심이 생긴단다. 다시는 떨어지지 말자, 해서 대구 한 동네에 다닥다닥 붙어사는 아저씨네 가족은 자식이 또 자식을 낳아 지금은 그 동네에만 서른여섯 명의 식구가 살고 있다. 돌아서면 생일이고, 돌아서면 졸업이고, 입학이고, 매일매일이 행사의 연속이라 정신이 없다면서도 가족들의 이야기를 할 때는 입가에 함박웃음이 한가득이다. 함께 돼지고기라도 구울라치면 최소 30kg 정도는 사야 된단다. 혹시라도 한집에서만 고기 굽는 냄새가 난다거나, 어제는 없었던 만두봉지가 쓰레기봉투에서 나오면 애정이 식었다면서 삐친 척을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요즘 그는 방송일로 두 배는 바빠졌다. 지방방송에 한번 출연한 뒤로 끊임없는 섭외전화가 오고 있단다. 피곤한 몸이지만, 그가 단 하나도 거절함없이 섭외에 응하는 이유가 있다. 아저씨는 아직 마음을 돌이키지 못하고 어두운 세계에 몸담고 있는 동생에 대한 죄책감을 안고 사는 듯 했다. 지독히 가난했던 시절, 형의 행동을 따라하기만 했던 철없는 동생이 여전히 그 길을 가고 있다는 말을 하며 아저씨는 콧날이 시큰해졌다. 혹시라도 이렇게 여러 사람에게 많은 말을 하다보면, 동생에게 눈을 돌리지 않을까, 동생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생기지는 않을까 하는 마음. 피곤해서 녹초가 되는 날일지라도 지푸라기를 잡고 싶은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고 했다.
아저씨와의 인터뷰는 새벽 2시에 끝났다. 늦은 시간 헤어지며 아저씨는 청바지를 재활용해 직접 만든 예쁜 가방을 선물로 주셨다. 한때는 주먹 꽤나 쓰던 조직의 우두머리였지만, 지금은 시장의 욕쟁이 할머니들에게 구수하고 정감있는 욕을 듣고, 머리를 콩 박히는 귀여운 아저씨가 되었다.예전에는 팔과 다리, 온몸에 그림을 그렸었지만, 미미하게 남아있는 문신자국을 부끄러워하는 아저씨. 이제 그는 몸이 아닌 청바지에 멋진 그림을 그리고 있다. 새 청바지의 쪽빛처럼 아저씨의 제 2의 인생도 새파랗고 창창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