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고)
만남의 추억
김 채 석(대준)
만남. 우리가 동안의 세월을 살아오면서 돌이켜보면 끓임 없이 걷고 또 걸어서 어제에서 오늘로 그리고 내일로의 삶의 끈이 이어가고 이어지듯이, 그 속에서 동어 반복하듯 수많은 만남을 통해 이야기하고 웃고 때론 슬퍼하며 사는 것이 우리네 인생의 귀결이지 않나 싶다.
어느 해인가 가을, 노랗고 아름다운 국화 화분을 선물 받은 적이 있다. 그 선물을 해 주신 어른은 우리 동네에 있는 중학교에서 어린 국화를 화분에 이식해서 각각이 모양도 달리하는 수종의 예쁜 국화를 가꾸시는데, 가을이 되면 학교 전체가 흰빛 노란색 물결로 넘실거린다. 이에 감응한 주민이 마을 축제를 열곤 한다.
아무튼, 선물 덕분에 나와 만나게 된 국화꽃은 한껏 질리도록 멋스럽더니 그것도 잠시, 까만 진드기들이 꽃잎에 생겨나면서부터 색도 변하고 말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국화꽃과의 만남도 끝이 났다. 그리고 이듬해 봄, 흙만 담긴 화분에서 푸른 새싹이 하나 올라왔다. 국화는 아니었다. 잡풀인가 싶었지만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생명을 지니고 있는 한 그 가치를 존중해주기로 했다.
그 풀은 하루하루가 다르게 잘 자랐다. 넝쿨 식물이었다. 넝쿨이 감고 올라갈 지지대를 세웠는데 사나흘 만에 그것도 부족했다. 그래서 나머지 부분은 끈을 매달아 천정에 고정했다. 도대체 무슨 식물인지도 모르는데 얼마나 자라려나 싶기도 했고, 녀석의 정체가 자못 궁금했다. 급기야 녀석의 줄기는 수직으로 천정에 도달하더니 수평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또 천정을 가로지르는 끈을 연결해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를 본 사람이 녀석의 이름이 후추나무라고 했다. 그럼 우리가 먹는 그 후춧가루의 후추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파종도 하지 않았는데 초대받지 않는 손님처럼 찾아온 만남은 몇 해째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천정을 가로지르며 작고 앙증맞은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작은 콩만 한 꽃들은 끝이 붉으래. 홍조를 띠는 가운데 가을쯤에 열매로 거듭났다.
이 때문에 수확한 열매를 모아두었다가 봄이 오는 무렵에 파종하면 어김없이 새싹을 드러냈다. 지금은 주변의 사람들이 구경을 오기도 하고 씨앗을 얻어가기도 한다. 그리고 이러한 만남도 하나의 인연이라면 인연이다. 이 인연에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지대를 세워주고, 틈틈이 물을 주고, 바라보는 것이 고작이다. 하지만 후추나무나 나 자신이나 자연의 일부인 점에서 같다. 그래서 사는 동안 녀석과 만남을 이어가기 위해 오늘도 내 마음을 더하고 있다.
그렇다. 만남이란 나의 만남이나 누구나의 만남이나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다. 그러니 만남을 위해서는 복지부동이 아니라! 끊임없이 문밖으로 행군하듯 나가야 한다. 그래야만 강을 만나고 산을 만나고, 그 속에서 아름다움과도 만날 수 있다.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복수초를 필두로 진달래를 비롯하여 꽃마리나 엉겅퀴, 큰까치수영, 동자꽃, 물봉선, 고마리, 양지꽃, 말나리 등 수많은 자연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자연과의 만남은 우리 땅 어느 곳에서나 생명의 에너지를 지구에 담고 살아가는 삶의 환희를 맛볼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내가 찾아가야만 만날 수 있는 자연의 환경도 있지만, 찾아와 주지 않으면 만날 수 없는 것은 위리 안치된 영어의 몸이거나 군인들처럼 영내라는 한정된 울타리 벗어날 수 없을 때 찾아와야만 만날 수 있는 곳이 면회실 또는 접견실이다. 지금은 우리나라 최고 지도자의 형님도 영어의 몸이라 접견실에서나 만날 수 있다.
나 역시 찾아와 주어야만 만날 수 있는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은 내 젊음의 사진첩 같은 인생의 피크타임 군대. 사나이의 인생에서 말은 거창하게 사나이가 이까짓 것쯤이야 하고 말하지만, 속내는 피할 수만 있다면 피하고 싶은 정신박약자 같은 무늬만 사나이란 이름의 썩은 족속들이나, 말로는 도시의 부자이며 인텔리인 척하지만, 실제론 빈약한 부자들의 자녀, 올바른 정치를 한다고는 하나 결국은 위정자들의 자녀, 무슨 이유로든 병역을 면제받았는지는 모르지만, 드림팀에서 열심히 뛰고 있는 연예인 등 어떻게든 군 시절을 피해 가거나 건너뛰려는 작자들이 수없이 많이 있다.
나는 초등학교를 7살에 입학했다. 친구들의 나이는 모두가 한 살이나 두 살이 많았다. 이 때문에 또래 중에서 입대도 제일 늦었다. 친구들이 모두 떠나버린 도시는 나 혼자 남은 외로운 섬과 같았다. 또 다른 세상에서 사는 친구들의 안부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실은 앞으로 내가 살아야 할 세상이기도 했다. 그래서 수많은 친구 중에 눈만 뜨면 진종일 그림자처럼 함께하던 건화에게 면회를 갔다.
그때 건화는 남한산성 아래 특전사령부에서 공수기본교육을 받고 있었다. 그 멋있던 친구의 몰골은 피골이 상접할 정도로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웃음을 잃어버린 얼굴은 헐숙하다 못해 초췌했고 입고 있던 군복도 후줄근했다. 군화도 황토가 묻은 체로였다. 무어라 위로의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로부터 1년 반쯤 후 입대한 나는 친구 건화가 훈련받던 그 자리에 역시나 초췌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병역소집영장을 받은 나는 연무대 수용연대에서 일반 하사로 차출되었다. 황산벌 계백 장군 얼이 스민 여산의 부사관학교에서 그토록 길고도 지루할 정도로 반복되는 훈련을 마친 후, 우리 기수의 300여 명 중에 다섯 명이 특전사 선발요원이란 이름으로 차출이 되었다. 나도 그중에 한 사람이었다. 저승으로 초대받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건화가 머물고 간 자리에 내가 서 있었던 것이다. 차출에서 차출은 순탄치 않은 군 생활을 예고했다. 참으로 기가 막혔다.
다시 훈련은 시작되었다. 악으로 깡으로 극한 훈련에 임했다. 공수훈련은 PT 체조로 시작해서 폭풍 구보, 기체 문 이탈, 접지 등 모든 훈련이 진종일 달리고 달리고의 연속이었다. 휴식시간에도 선체로 움직일 수도 없었다. 인간으로서의 한계와 고도의 인내를 요구했다. 내가 건화를 만나기 위해 면회를 갔을 때 차마 말로는 할 수 없었던 속내를 충분히 공감하고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미사리 상공에서 내 몸을 몇 차례 내던지고선 무사히 가슴에 은빛 날개를 달 수 있었다.
그러나 또 훈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훈련은 가슴에 은빛 날개가 아닌 검은 베레모에 특전 휘장을 달 수 있는 특수전이라는 훈련으로 대충 게릴라 활동과 같은 것이다. 엄격히 비정규전이나 대비정규전에 관한 훈련이다. 생존이나 도피 및 탈출 등 힘들지 않은 훈련이 어디 있겠는가. 마는, 이 훈련은 공수교육에 비하면 이론이 많아 참으로 양반이었다. 이때 건화는 청와대 내각을 경호하는 특전사 예하 경호 대대에 근무하고 있었다. 하루는 교육을 마치고 오와 열을 맞춰 막사로 이동하던 중 정문으로부터 일반 위장 색의 군용트럭이 아닌 북방 색에 별이 하나 그려진 트럭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때 직감했다. 그 차량이 경호 대대 차량이라는 것을, 그래서 이동 간에 곁눈으로 그 차량을 주시했다. 혹여 건화라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건화는 트럭의 맨 뒤에 앉자 내가 있는지 살피고 있었고, 서로의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병력의 대열을 이탈하면서 “건화야!”, 건화는 달리는 트럭에서 뛰어내리며 “채석아!”를 외쳤다. 달리는 차량은 정지했고 행진하던 병력도 모두 멈춰버린 상태로 드넓은 연병장 가운데 사나이와 사나이가 한참이나 포옹하는 장면을 모두 바라만 보고 있었다. 각본 없는 스토리였고 계획에 없던 만남이었다.
이렇게 군대에서 친구와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만남을 간직한 나는 우리 집의 큰 아이가 군에 입대하던 날, 아이 혼자 논산훈련소로 보내고 여느 때처럼 산에 오르다가 동안 만나지 못했던 꽃, 물봉선을 만났다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큰 아이가 보았다면 철부지 아빠라고 단언하겠지만, 아들은 아들대로 병영이라는 새로운 만남의 토대 위해서 적응해야 하고, 아빠는 아빠대로 풀꽃을 만나 즐거워하고 기뻐하고의 희로애락도 나 스스로 만들어 가듯이 그 만남의 가치도 각자의 정신의 그릇이나 양심의 그릇에 따라 다를 것이다.
이러한 만남은 길을 가면서 수많은 사람과 스치는 것도 만남이고, 서로가 만나기로 약속 된 만남, 그냥 쓸데없는 만남, 우연한 만남, 우연을 가장한 만남, 잘 못 된 만남, 만나지 말았어야 할 만남 등 인간사 살아가는 세상에서 사소한 만남이라도 한 사람의 인생에 매우 중요할 수도 있다. 그래서 언제나 사람들을 만날 때면 아무리 친분이 있는 사람이라도 말이나 행동을 주의하고 상생의 만남. 즉, 상대방이 편안해 하도록 노력하는 것이 만남의 근본이며 인연의 바탕일 거라는 생각을 가을이라는 계절과 만나기에 앞서서 해 본다.
"그리고 미사리 상공에서 내 몸을 몇 차례 내던지고선 무사히 가슴에 은빛 날개를 달 수 있었다." 본문과 관련 사진
첫댓글 사진관에 들어서면 제일먼저 반겨주는 후추나무 저도 분양받아 작년에 심어보았는데 왠걸 12월에서 꽃이 피다 추위에 견디지 못하고 동사해 버렸네요 만물은 자신에 맞은 주인이 있는가 봅니다. 부처님도 인연이 없는 중생은 제도하지 못한다 했습니다.
올해도 후추나무는 씩씩하게 자라고 있네요. 비록 식물이지만 그 만남을 이어가도록 물도 주고 열심히 가꾸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정호씨와의 만남 제 인연복중에 참 큰 인연복입니다. 감사합니다.
아름다운 만남이군요~
그렇습니다. 식물과의 만남도 그렇고 친구와의 만남도 그렇고 현재진행중인 계절을 만난 우리 구포교당 가족들의 만남 등 모두가 아름다운 인연입니다.
인연설, 부모와 나, 당신과 나, 물질과 나, 만년 화두입니다.
그래도 당신이 생각하는 만남의 근본을 중히 알겠습니다. 합장
도안씨와 부회장님 사이의 구포 교당이 없었다면 저와도 만나지 못했을 것을......,
이거 무슨 대중가요 같지요.
아무튼 큰 인연으로 생각합니다. 정호씨와의 인연으로 연결됬고 그 결과 부산의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를 유지하며 참 행복합니다. 그 근원이 바로 구포교당 그리고 부회장님이였음을 잘 알고 있습니다. 마음속으로 언제나 감사한 마음 변함없이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인연 참 좋은 인연,
감사합니다.